133. [2부] 자격
조회 : 20 추천 : 0 글자수 : 4,356 자 2025-07-09
‘굳이 따져야 하나…?’
두 사람의 실랑이 속으로 율리어스는 문득 질리는 듯한 의문이 들었다.
밀레니엄의 가보란 이름이며, 자격.
한 번 정도 거론되었으면 그만인 것을 떠나서 두 사람은 계속 우려먹듯이 재차 이야기를 해대며 뭔가 기만 빨리는 싸움을 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지 관심이 없는 어른들의 유치해 보이는 이 질긴 말싸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 아이덴…티……뭐?…티!? 】
역시 그녀는 이름 자체가 생소할 만큼이나 모르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쿠…쿡쿡.”
그 모습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치욕스러웠다.
그녀는 한시바삐 라도 마석을 삼키는 게 목적이었는데 이제는 방해꾼에게서 모욕적임까지 당하고 말았다.
‘윽.’
수치심에 떨리는 몸의 진동은 자연스레 계속 그녀의 양 손목 붙들고 있는 율리어스의 두 손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적당히 좀 하시지.’
언제 이 손목을 놓을 수 있을지도 몰라서 신경이 쓰이는데 더 신경 쓰이게 만들고 있었다.
저런 분위기를 자아내서야 갈수록 제일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건 율리어스였었다.
차라리 이대로 릴리스티아만 데리고 몰래 이 방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어쩌면 그렇게 하면 두 사람은 오로지 그들의 신경전에만 빠져서 모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한편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차차. 손목이 있었지.’
아이러니하게도 순간적으로 잊어버릴 뻔했었다.
손목을 아무리 소리소문없이 놓는다 치더라도 들키지 않는다는 보장성이 없었다.
역시나 가능성이 낮아보이는 건 상상으로 그치길 마련인 듯싶었다.
아쉬움만이 여운으로 남으며 율리어스는 다시 두 사람에게 집중했다.
“이름조차 모르다니. 쿡.
참으로 딱하군.”
그의 능구렁이 말투에서 비아냥거림까지 추가 되었다.
그건 누가 들어도 욱하고 화를 토하고도 남았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던 몸을 멈추며 펄쩍 뛰었다.
‘이크….’
또 함께 딸려 간 율리어스의 손은 불편하기에 짝이 없을 정도로 눈을 찡그렸다.
【 하….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딱하지도 못해 한심하고 멍청한 인간이 여기 있었네?
이름만 알면 뭘 해 ~ ?
아이…. 그래. 아이덴티티인가 뭔가 하는 마석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정말 어리석다니까!? 】
누가 이길지 모르는 실랑이는 그렇게 계속 서로의 콧대만 높이고 있었다.
“지금 나한테 물어본 건가?”
그는 마치 질문이 잘못된 방향으로라도 온 듯한 반응을 보이며 굳이 자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반문했었다.
얼 토 당치도 않을 정도로 해괴한 질문을 받았다는 어이없는 표정을 표출하는 건 덤으로 잊지 않았다.
【 그럼. 그쪽 말고 또 누가 있는데? 】
그러자 그는 곁에서 관전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
그대로 고개를 돌려 외면해버리는 율리어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며 초점 잃은 눈동자만을 굴러대는 릴리스티아.
당연히 아이들은 두 사람 사이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가주가 개입하자, 서로의 목적이 같았던 두 사람은 아예 아이들은 배제시킨 것과 다를 바 없이 완전 그녀와 단둘만의 세계로 단절된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굳이 그 세계에 위험을 감수하고 발을 들일 필요 없다는 생각에 아이들은 자연스레 관람객의 입장이 되어버렸다.
“흐, 흐흠.”
슬쩍 무안해진 그는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어떻게든 애매모호한 분위기에서 빠져나왔다.
【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마.
말해 봐.
그래서? 그쪽은 얼마나 아는데. 응?
말해 보라고! 】
단단히 벼르고 벼른 듯한 억센 말투였다.
‘얼마나 안다라….’
바로 맞받아 치고 나갈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사실 부인의 말이 다 틀렸다고 보기엔 맞지 않았기에 바로 반론하기에 힘들었다.
‘아이덴티…. 금기의 마석. 가문의 가보…그리고?’
문득 나열해 보려니, 문맥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연거푸 머릿속에서 ‘그리고’들만 튀어나왔고 그 다음은 어떠한 지식도 나오지 않음에 그는 그때야 깨달았다.
아…. 아.
실제로 그는 그 이상으로 아이덴티티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다.
가문의 가보라는 이유로 자신이 꺼내지 못한 이상. 가문의 피를 이은 아이들에겐 반응할 것이라고 추론한 끝에 그 결과로 이어진 건 릴리스티아가 마석에 선택되었다는 것이었다.
마석이 아이들에게 이끌려 긴잠에서 눈을 뜰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 이외에 일어날 일들은 그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바였다.
‘내가 노렸던 건 아직 이뤄지지 않았지만…. 시간은 아직 있다.’
그리고 그는 마석이 계약자를 선택하는 조건도 모른 채, 아이들의 뒤를 따라 지금 여기에 있게 된 경위였다.
#.
‘흠. 특별히 이제와서 알 필요도 없을 것 같군.’
그는 이윽고 곰곰이 빠졌던 생각에서 깨어났다.
마석한테 선택받는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른 그는 다시 목적이 중요하다는 것만을 인지하며 눈을 돌렸다.
“얼마를 안다는 건 그렇게 중요한가?
모른다고 하더라고 이제부터 알아가면 그만이고.
난 아니라고 보는데, 부인?”
다시 보기 좋게 까이며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 누, 누 누가 부인이라는 거야?!
난 그쪽같이 짜증 나는 부류는 몰라. 모른다고!
내 앞에서 꺼져! 】
아주 부아가 치밀며, 역겹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애초에 딸도 알아보지 못하더니, 남편까지 못 알아보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뭐.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은 아이덴티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가치 조차…. 아니.
의미도 없겠군.
그리고 여기서 꺼져줘야 할 건 부인…. 아, 아니지.”
거부한 이상, 봐줄 요인도 그에겐 없어 보였다.
그전에도 부인을 그렇게까지 봐준 거 같지 않아 보였지만….
“바네샤 아넬리.”
【 ………! 】
그는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참 오랜만이었다.
그녀의 풀네임을 불러 본 지가 한참의 시간이 아닌 오랜 기간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병에 몸져눕기 전이 그만큼 오래전임을 말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논쟁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바네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흠칫흠칫했다.
정신적 상태는 온전치 못했지만, 딸은 알아보지 못하는 반면에, 자신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는 듯 싶었다.
“바네ᄉ….”
【 부, 부르지 마. 그딴 이름 몰라. 모른다고! 】
이름을 부를 때마다 반응을 보임에 그녀에게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건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싶었다.
탁!
‘윽.’
율리어스는 순간적으로 놀랐다.
그녀는 계속 부르는 그의 소리에 더욱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율리어스가 잡고 있던 양손을 다급히 뿌리쳤다.
그리고 그녀의 양손은 자신의 양쪽 귀를 막기에 급급했다.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오만상을 찌푸리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서 그 이름을 듣게 된 건 생각도 못 했다는 듯이 거의 질색팔색의 수준급이었다.
인정하면 편하겠지만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그녀가 그러는 사이 빈틈이 생겼다.
아이들은 두 어른의 신경전에 눈치를 보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지만, 가주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가차 없는 정신적인 공격(?)을 당한 그녀가 구석에 몰리는 사이 릴리스티아스를 강제로 억압하던 요소들이 아주 잠깐이지만 사라졌다.
그 순간이 그의 눈에 들어왔고 벗어날 수 있다면 지금 이때였다.
“티아.”
그는 그녀가 눈치를 채지 못하는 선에서 릴리스티아의 이름을 불렀다.
애초에 그와 아이들의 사이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크게 외치지 않더라도 들리는 건 충분했었다.
그런데 그 비중에도 차지할 리 없는 거리 문제와 달리 곧 그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고 말았다.
그녀가 괴로워하자 릴리스티아의 모든 시선은 오로지 그녀에게만 쏠린 채, 가주가 부르는 방향은 전혀 쳐다보고 있지 않았었다.
신경이 제대로 어머니에게 쏠려버렸던지, 가주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새로 보였다.
‘……….’
그는 답답했다.
어째 일이 잘 풀리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는 바로 접어서 놓아버릴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라.’
포기와는 아주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였다.
만약 빠른 포기의 성격이었다면, 지하실의 일도 꾸며선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한 번이 안 된다면…. 두 번. 세 번.
여러 번을 부르면 될 일,’
그는 설사 귀찮아질 정도의 일을 감내할지라도 끝까지 밀고 갈 생각이었다.
“티아. 티아.
릴리스티아!”
적당한 강도의 크기로 그는 연이어 딸의 이름을 불러대었다.
계속 부르면 들리겠지란 생각으로 밀어붙였다.
통하면 그만이었다.
‘……으, 응?’
그러는 사이 그의 외침은 다른 사람의 귀에 들리고 있었다.
‘아, 아…. 아버지?’
율리어스도 두 사람이 말싸움을 벌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양쪽을 다 주시하고 눈을 떼지 못했었다.
그런데 새어머니가 귀를 틀어막고 괴로워하자 자연스레 그쪽으로 신경이 쏠리면서 아버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로 재차 릴리스티아의 이름을 불러대는 아버지를 보며 놀라는가 싶더니 문득 번뜩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좀 늦게 깨달음 감도 있었지만. 비좁아도 틈새가 생겨났다.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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