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찾은 평화
조회 : 288 추천 : 0 글자수 : 5,212 자 2024-07-18
바루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황궁 멀리서 아이스 드래곤을 없애버리고 몰래 숨어들어온 켈렌을 복도에서 마주친 것이었다.
켈렌은 황급히 얼음 안개 속으로 숨었지만, 같은 대마법사에게 통할 잔재주는 아니었다.
바루펠이 마력을 뿜어내 안개를 걷어내자 켈렌은 뻘쭘한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음."
바루펠은 껄껄 웃으며 켈렌을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휴전 협정을 맺고 돌아오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켈렌의 예민한 후각이 발동되었다.
수십 가지 요리가 준비된 전당에 들어서자, 화려한 조명과 찬란히 꾸며진 장식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켈렌을 맞이했다.
박수와 환호로 가득 찬 전당은 좀처럼 조용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켈렌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루펠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즐기라는 듯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일부러 빨리 오라고 편지를 보냈어. 오늘은 기쁜 날이니까."
"다른 병사나 수행원들은?"
"그들은 모레까지 휴가를 보내고, 특별히 포상을 내려야지. 흥, 아랫사람들 챙기는 습관은 여전하군 그래."
전당 한가운데 켈렌이 들어오자,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었다.
박수와 환호가 슬슬 멎어드는 순간에,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회를 즐겼다.
켈렌은 한쪽 구석에 따로 마련된 큰 식탁에 음식을 긁어모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마왕 토벌대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켈렌은 더한 유명인사가 되었다.
바루펠과 켈렌에게 항의했던 귀족들도 어느샌가 태도를 바꿔 친근한 척 다가왔다.
켈렌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모든 이들에게 차갑지만 정중한 태도를 일관했다.
귀족을 포함해 연회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나자, 켈렌의 주위는 그나마 한적해졌다.
켈렌이 음식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의사를 드러내서 이 정도로 끝난 것이리라.
"우리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켈렌은 바삭하게 구운 돼지고기 살점을 뜯으며 단호하게 꺼지라고 말하려다가,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쿠라스!"
붉은 수염의 드워프가 제국 양식의 제복을 입은 채 서 있는 것을 보자, 켈렌이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두 사내는 힘있게 악수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다.
"그동안 어디에 계셨습니까?"
"자네가 아츠라카에 갔던 동안에 말인가?"
"오! 그것을 어떻게...!?"
"바루펠이 말한 것도 있고... 우리끼리는 추측이 가능하잖나."
쿠라스가 '우리'라고 말한 이들은 역시 그때의 동료들이었다.
부르본, 릴리트, 리겔라, 헬빈.
반가운 얼굴들을 보자 귀족들을 상대하던 무뚝뚝한 켈렌은 사라졌다.
켈렌이 활짝 웃으며 그들에게 식탁에 앉기를 권유하자, 연회를 즐기던 사람들은 그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냉담하던 켈렌이 그토록 반기는 사람들이 누군지 구경하려는 심산이었다.
"카르샤는 어디 갔나요?"
"그러고보니 스텔라도 안 보이는군."
"그 야만전사들도 안 온 건가? 그럴 법도 하긴 하다만..."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동료들을 아쉬워하던 중, 연회장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몇 명이 더 나타났다.
"크핫핫핫!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타나는 법이지!"
테카와 호루캄이 꽉 끼는 제국 양식의 제복을 입고 나타났다.
그들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야성적인 모습에 연회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켈렌! 오랜만이군!"
"쿠라스! 역시 먼저 와 있었구만!"
반가운 재회와 더불어 그들은 곧 연회장의 음식을 긁어모았다.
주방의 요리사들이 바빠질 것에 유감을 표하며, 바루펠이 그들을 맞이했다.
안부를 묻고, 소소한 잡담을 나누던 그때, 연회장 문이 한 번 더 열렸다.
몹시 기품있는 복장과 분위기, 공간을 훑는 매서운 시선.
상당히 날렵한 느낌의 서부 귀족이었다.
그러나 켈렌은 익숙한 마력을 느꼈다.
유달리 검은 피부,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칼.
마력의 느낌도 '암흑'에 가까웠다.
"토르!"
켈렌이 외쳐 부르자 그 서부풍의 고귀한 귀족은 고개를 슬쩍 돌려 켈렌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마력의 기류는, 연회장의 일반인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기묘했다.
어색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긴 침묵이 이어지고, 먼저 움직인 것은 그 귀족이었다.
그는 켈렌에게 뚜벅뚜벅 다가와 먼저 악수를 청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변했구나."
갑자기 싸해지는 분위기에 연회를 즐기던 사람들은 불안감을 느꼈다.
어디선가 냉기가 느껴지고,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무질서하게 보였다.
서로 마력을 맞부딪히던 둘을 중재한 건 토르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카르샤였다.
그 누구도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마치 그곳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서 있었다.
하지만 선명한 살기를 내뿜으며, 켈렌과 토르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연회장에서 이런 무례는 용납될 수 없지?"
토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고, 켈렌은 활짝 웃으며 카르샤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는 켈렌의 등 뒤로 움직여 켈렌의 목에 단검을 겨눴다.
바루펠이 순발력을 발휘해 그들을 가리지 않았다면, 연회장 분위기는 겉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루펠은 사고를 칠 만한 인물들을 너무 조심성 없이 초대한 것에 대해 연회에 참석한 모두에게 사과하느라 바빴다.
물론 그들은 이해해주었다.
이런 자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고,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니.
켈렌과 토르는 그렇게 과격하게 첫 인사를 건넨 것과 달리, 자리에 앉아서는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블루베리 잼 푸딩을 맛보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지극히 평범한 대화였다.
"사람은 되도록 먹지 말라니까."
"몹시 악한 자이긴 했습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렇겠지."
그들 일행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그때,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았다.
연회장 문 바깥에서 아주 강렬하고도 선명한 마력이 느껴졌다.
감각이 예리한 몇몇 사람들도 위화감을 느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스텔라였다.
그녀의 마력만큼이나 빛나는 모습으로, 좌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주홍빛과 황금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태양처럼 따뜻하고 화사한 마력을 내뿜으며 연회장의 침묵을 즐겼다.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고, 누구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악단의 연주자들이 정신을 부여잡고 다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그제야 시간이 다시 흘렀다.
스텔라는 가장 먼저 바루펠에게 다가가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그러는 와중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스텔라에게 머물러 있었다.
"저 소녀는 누구죠?"
"몹시 아름다운데!"
"친해지고 싶어요, 아버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대화의 대부분이 그녀에 관한 주제가 되었다.
여성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거나,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하거나, 조금의 질투심을 품었다.
남성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거나,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하거나, 조금의 흑심을 품었다.
황제와의 대화를 방해할 수는 없으니, 그것이 끝나면 자신이 한번 다가가보겠다는 마음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움찔거리는 사람들을 제치고, 켈렌이 먼저 나섰다.
"오랜만이야."
스텔라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켈렌을 돌아보더니, 그에게 냅다 안겼다.
그 순간 어디선가 살기가 폭발하듯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켈렌은 뒤를 돌아보았지만, 멋쩍은 듯 웃는 쿠라스와 무표정한 얼굴의 카르샤, 낄낄거리는 토르만이 있었다.
"잘 지냈어?"
켈렌은 눈치도 없이 스텔라의 안부를 물었고, 이번엔 아예 자신을 노린 살기를 맞았다.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마력을 뿜어내 살기를 차단하고, 켈렌은 스텔라와의 대화를 즐겼다.
물론 별 생각은 없었다.
카르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고, 스텔라와의 재회가 반갑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 없는 행동이 무슨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는 전혀 알지 못한 채...
*****
연회장의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고, 사람들이 흥에 겨워 그 순간을 즐길 때, 바루펠이 나섰다.
정확히는 이럴 때 한 마디 하라는 동료들에게 떠밀린 것이지만...
황제로서 한 마디 해야할 때이기도 했다.
"우리는 마계와의 치열한 전쟁으로 크게 상처입었습니다..."
바루펠은 군중을 주목시키고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언변이 뛰어난 그답게 사람들은 연설에 빠져들었다.
물론 사실과 다른 부분도 꽤 있었지만, 누가 신경쓰랴.
"...평화를 맞이합시다."
박수갈채가 터져나오는 연회장을 슬며시 빠져나온 켈렌은 테라스 한쪽 구석에서 술을 홀짝이는 카르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독사가 쉿쉿거리며 경고하듯 살기를 뿜었지만, 오히려 켈렌은 마력을 거두고 순수히 나아갔다.
기본적으로 몸을 강화하는 마력까지도 거둔 채, 검을 휘두르면 그대로 죽어버릴 상태였다.
카르샤는 살기를 거두지는 않았지만, 검을 뽑지는 않았다.
"잘 지냈어?"
"......"
"왜 말이 없어."
"...이제 와서 뭐야?"
"네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따로 듣고 싶었으니까."
카르샤는 움찔하더니, 단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괴상한 말을 뱉었다면 찔렀겠지만, 눈앞의 마법사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나도 알아."
"죽어버려."
"네가 그런 얘기하면 더 상처야."
"가식 떨지마. 저 애도 사랑하잖아."
켈렌은 부정하지 않았다.
사회적 관습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니.
일부일처제 따위가 뭐란 말인가.
"내가 너만 봐줬으면 하는 거야?"
갑자기 오글거리는 대사가 튀어나오자, 카르샤가 입술을 짓씹었다.
거친 환경에서 자란 그녀에게 내성은 없었다.
"찌르지 마. 죽진 않아도 아프다고."
"죽어 그냥, 죽으라고."
"난 둘 다 사랑해. 둘 다 온전히 사랑해줄 자신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고."
"...죽여버릴거야."
카르샤는 켈렌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켈렌은 예상치 못한 형태의 공격에 마력을 끌어올렸지만, 그녀의 기술을 방어하기엔 이미 늦었다.
마치 물속으로 빠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켈렌은 그림자 아래로 스며들었다.
정신을 차리자 켈렌은 침대에 누워있었고, 카르샤는 그 위에 올라타 있었다.
달빛을 받아 어른거리는 실루엣과, 그럼에도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안광.
켈렌은 죽음을 직감했다.
아, 곱게는 안 끝나겠구나.
황궁 멀리서 아이스 드래곤을 없애버리고 몰래 숨어들어온 켈렌을 복도에서 마주친 것이었다.
켈렌은 황급히 얼음 안개 속으로 숨었지만, 같은 대마법사에게 통할 잔재주는 아니었다.
바루펠이 마력을 뿜어내 안개를 걷어내자 켈렌은 뻘쭘한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음."
바루펠은 껄껄 웃으며 켈렌을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휴전 협정을 맺고 돌아오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켈렌의 예민한 후각이 발동되었다.
수십 가지 요리가 준비된 전당에 들어서자, 화려한 조명과 찬란히 꾸며진 장식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켈렌을 맞이했다.
박수와 환호로 가득 찬 전당은 좀처럼 조용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켈렌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루펠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즐기라는 듯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일부러 빨리 오라고 편지를 보냈어. 오늘은 기쁜 날이니까."
"다른 병사나 수행원들은?"
"그들은 모레까지 휴가를 보내고, 특별히 포상을 내려야지. 흥, 아랫사람들 챙기는 습관은 여전하군 그래."
전당 한가운데 켈렌이 들어오자,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었다.
박수와 환호가 슬슬 멎어드는 순간에,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회를 즐겼다.
켈렌은 한쪽 구석에 따로 마련된 큰 식탁에 음식을 긁어모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마왕 토벌대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켈렌은 더한 유명인사가 되었다.
바루펠과 켈렌에게 항의했던 귀족들도 어느샌가 태도를 바꿔 친근한 척 다가왔다.
켈렌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모든 이들에게 차갑지만 정중한 태도를 일관했다.
귀족을 포함해 연회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나자, 켈렌의 주위는 그나마 한적해졌다.
켈렌이 음식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의사를 드러내서 이 정도로 끝난 것이리라.
"우리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켈렌은 바삭하게 구운 돼지고기 살점을 뜯으며 단호하게 꺼지라고 말하려다가,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쿠라스!"
붉은 수염의 드워프가 제국 양식의 제복을 입은 채 서 있는 것을 보자, 켈렌이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두 사내는 힘있게 악수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다.
"그동안 어디에 계셨습니까?"
"자네가 아츠라카에 갔던 동안에 말인가?"
"오! 그것을 어떻게...!?"
"바루펠이 말한 것도 있고... 우리끼리는 추측이 가능하잖나."
쿠라스가 '우리'라고 말한 이들은 역시 그때의 동료들이었다.
부르본, 릴리트, 리겔라, 헬빈.
반가운 얼굴들을 보자 귀족들을 상대하던 무뚝뚝한 켈렌은 사라졌다.
켈렌이 활짝 웃으며 그들에게 식탁에 앉기를 권유하자, 연회를 즐기던 사람들은 그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냉담하던 켈렌이 그토록 반기는 사람들이 누군지 구경하려는 심산이었다.
"카르샤는 어디 갔나요?"
"그러고보니 스텔라도 안 보이는군."
"그 야만전사들도 안 온 건가? 그럴 법도 하긴 하다만..."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동료들을 아쉬워하던 중, 연회장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몇 명이 더 나타났다.
"크핫핫핫!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타나는 법이지!"
테카와 호루캄이 꽉 끼는 제국 양식의 제복을 입고 나타났다.
그들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야성적인 모습에 연회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켈렌! 오랜만이군!"
"쿠라스! 역시 먼저 와 있었구만!"
반가운 재회와 더불어 그들은 곧 연회장의 음식을 긁어모았다.
주방의 요리사들이 바빠질 것에 유감을 표하며, 바루펠이 그들을 맞이했다.
안부를 묻고, 소소한 잡담을 나누던 그때, 연회장 문이 한 번 더 열렸다.
몹시 기품있는 복장과 분위기, 공간을 훑는 매서운 시선.
상당히 날렵한 느낌의 서부 귀족이었다.
그러나 켈렌은 익숙한 마력을 느꼈다.
유달리 검은 피부,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칼.
마력의 느낌도 '암흑'에 가까웠다.
"토르!"
켈렌이 외쳐 부르자 그 서부풍의 고귀한 귀족은 고개를 슬쩍 돌려 켈렌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마력의 기류는, 연회장의 일반인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기묘했다.
어색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긴 침묵이 이어지고, 먼저 움직인 것은 그 귀족이었다.
그는 켈렌에게 뚜벅뚜벅 다가와 먼저 악수를 청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변했구나."
갑자기 싸해지는 분위기에 연회를 즐기던 사람들은 불안감을 느꼈다.
어디선가 냉기가 느껴지고,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무질서하게 보였다.
서로 마력을 맞부딪히던 둘을 중재한 건 토르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카르샤였다.
그 누구도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마치 그곳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서 있었다.
하지만 선명한 살기를 내뿜으며, 켈렌과 토르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연회장에서 이런 무례는 용납될 수 없지?"
토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고, 켈렌은 활짝 웃으며 카르샤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는 켈렌의 등 뒤로 움직여 켈렌의 목에 단검을 겨눴다.
바루펠이 순발력을 발휘해 그들을 가리지 않았다면, 연회장 분위기는 겉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루펠은 사고를 칠 만한 인물들을 너무 조심성 없이 초대한 것에 대해 연회에 참석한 모두에게 사과하느라 바빴다.
물론 그들은 이해해주었다.
이런 자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고,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니.
켈렌과 토르는 그렇게 과격하게 첫 인사를 건넨 것과 달리, 자리에 앉아서는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블루베리 잼 푸딩을 맛보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지극히 평범한 대화였다.
"사람은 되도록 먹지 말라니까."
"몹시 악한 자이긴 했습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렇겠지."
그들 일행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그때,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았다.
연회장 문 바깥에서 아주 강렬하고도 선명한 마력이 느껴졌다.
감각이 예리한 몇몇 사람들도 위화감을 느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스텔라였다.
그녀의 마력만큼이나 빛나는 모습으로, 좌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주홍빛과 황금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태양처럼 따뜻하고 화사한 마력을 내뿜으며 연회장의 침묵을 즐겼다.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고, 누구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악단의 연주자들이 정신을 부여잡고 다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그제야 시간이 다시 흘렀다.
스텔라는 가장 먼저 바루펠에게 다가가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그러는 와중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스텔라에게 머물러 있었다.
"저 소녀는 누구죠?"
"몹시 아름다운데!"
"친해지고 싶어요, 아버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대화의 대부분이 그녀에 관한 주제가 되었다.
여성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거나,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하거나, 조금의 질투심을 품었다.
남성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거나,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하거나, 조금의 흑심을 품었다.
황제와의 대화를 방해할 수는 없으니, 그것이 끝나면 자신이 한번 다가가보겠다는 마음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움찔거리는 사람들을 제치고, 켈렌이 먼저 나섰다.
"오랜만이야."
스텔라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켈렌을 돌아보더니, 그에게 냅다 안겼다.
그 순간 어디선가 살기가 폭발하듯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켈렌은 뒤를 돌아보았지만, 멋쩍은 듯 웃는 쿠라스와 무표정한 얼굴의 카르샤, 낄낄거리는 토르만이 있었다.
"잘 지냈어?"
켈렌은 눈치도 없이 스텔라의 안부를 물었고, 이번엔 아예 자신을 노린 살기를 맞았다.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마력을 뿜어내 살기를 차단하고, 켈렌은 스텔라와의 대화를 즐겼다.
물론 별 생각은 없었다.
카르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고, 스텔라와의 재회가 반갑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 없는 행동이 무슨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는 전혀 알지 못한 채...
*****
연회장의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고, 사람들이 흥에 겨워 그 순간을 즐길 때, 바루펠이 나섰다.
정확히는 이럴 때 한 마디 하라는 동료들에게 떠밀린 것이지만...
황제로서 한 마디 해야할 때이기도 했다.
"우리는 마계와의 치열한 전쟁으로 크게 상처입었습니다..."
바루펠은 군중을 주목시키고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언변이 뛰어난 그답게 사람들은 연설에 빠져들었다.
물론 사실과 다른 부분도 꽤 있었지만, 누가 신경쓰랴.
"...평화를 맞이합시다."
박수갈채가 터져나오는 연회장을 슬며시 빠져나온 켈렌은 테라스 한쪽 구석에서 술을 홀짝이는 카르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독사가 쉿쉿거리며 경고하듯 살기를 뿜었지만, 오히려 켈렌은 마력을 거두고 순수히 나아갔다.
기본적으로 몸을 강화하는 마력까지도 거둔 채, 검을 휘두르면 그대로 죽어버릴 상태였다.
카르샤는 살기를 거두지는 않았지만, 검을 뽑지는 않았다.
"잘 지냈어?"
"......"
"왜 말이 없어."
"...이제 와서 뭐야?"
"네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따로 듣고 싶었으니까."
카르샤는 움찔하더니, 단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괴상한 말을 뱉었다면 찔렀겠지만, 눈앞의 마법사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나도 알아."
"죽어버려."
"네가 그런 얘기하면 더 상처야."
"가식 떨지마. 저 애도 사랑하잖아."
켈렌은 부정하지 않았다.
사회적 관습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니.
일부일처제 따위가 뭐란 말인가.
"내가 너만 봐줬으면 하는 거야?"
갑자기 오글거리는 대사가 튀어나오자, 카르샤가 입술을 짓씹었다.
거친 환경에서 자란 그녀에게 내성은 없었다.
"찌르지 마. 죽진 않아도 아프다고."
"죽어 그냥, 죽으라고."
"난 둘 다 사랑해. 둘 다 온전히 사랑해줄 자신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고."
"...죽여버릴거야."
카르샤는 켈렌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켈렌은 예상치 못한 형태의 공격에 마력을 끌어올렸지만, 그녀의 기술을 방어하기엔 이미 늦었다.
마치 물속으로 빠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켈렌은 그림자 아래로 스며들었다.
정신을 차리자 켈렌은 침대에 누워있었고, 카르샤는 그 위에 올라타 있었다.
달빛을 받아 어른거리는 실루엣과, 그럼에도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안광.
켈렌은 죽음을 직감했다.
아, 곱게는 안 끝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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