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폭풍
조회 : 490 추천 : 0 글자수 : 5,479 자 2024-08-03
켈렌은 황궁에 불려갔다.
바루펠은 켈렌을 믿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정확한 설명을 듣고 싶어했다.
정확히는 켈렌에게 알맞은 징벌을 내리고 싶어했지만, 그런 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카웨다르푸스를 죽인 혐의로 청문회에 참석했습니다."
바루펠이 피곤한 표정으로 켈렌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한 칸 아래에는 고위 관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 사고를 쳤느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켈렌은 어깨를 들썩였다.
결백을 주장하는 몸짓이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경건한 황궁의 법도 아래,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켈렌은 장단을 맞췄다.
전후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러니 저러니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바루펠이 최종 결정권자이니 사형은 시키지 않을 것이고, 설령 처형된다 해도 무력으로 뚫으면 될 터.
감옥에 갇히게 되어도 분신을 만들어놓고 빠져나갈 것이었다.
애초에 전후사정을 듣게 되면 그들도 모두 납득할 테니, 걱정은커녕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평화조약을 무시하고 카웨다르푸스를 죽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이 평화를 깰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시오."
"카웨다르푸스는 처음부터 평화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가 평화를 원하는 척 했던 건 내가 있어서였기 때문이고."
고위 관료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무렴, 그들도 마왕을 토벌하기 위한 켈렌의 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은 곧 그들이 켈렌의 강함을 알고 있었고, 그게 평화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도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를 먼저 제거하려고 했던 겁니다. 정신세계에 마력을 아주 조금씩 불어넣어서."
켈렌은 기분 나쁘게 남아있는 카웨다르푸스의 마력을 증거로 제출했다.
그는 죽었지만, 혹시 이런 일이 있을까봐 켈렌이 증거로써 남겨둔 것이다.
"그의 마력이 맞습니다."
증거를 확인한 고위 관료가 황제에게 보고했지만, 바루펠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카웨다르푸스가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마계 고위 귀족들에게서도 그가 전쟁을 주도했다는 정보를 얻었고, 개연성도 충분했다.
단지 죽일 명분이 없어서 살려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무죄."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황제가 대뜸 무죄 선언을 내렸다.
고위 관료들은 기겁했지만, 황제는 엄숙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눈치 없고, 판단력 흐리고, 감정에 휘둘리는 고위 관료는 없었다.
그들도 결국 켈렌이 무죄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법도 아래 무릎 꿇린 마법사를 보면서 우월감에 젖고 싶었던 모양이지.
켈렌은 그럴 것이라 짐작하고 아쉬움을 표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증거와 정황이 모두 무죄를 의미했고, 이에 황제가 시간 낭비 없이 빠르게 판결을 내렸으니 깔끔한 엔딩.
"상쾌하구나."
청문회가 새벽에 시작된 탓에, 켈렌은 산뜻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봐야 서재에 틀어박혀 마법 연구나 할 하루였지만.
아니면 아내들과 데이트라도 하거나.
켈렌은 오랫동안 하지 못한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마법 연구였다.
싫은 척 하지만 아내들은 항상 켈렌에게 붙어있으려 하니 한시도 혼자 있은 적이 없었다.
"그러고보면 놈이 대단하긴 하군."
켈렌뿐만 아니라 세 아내들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마력을 흘려넣었으니.
그 정도 능력은 되어야 전쟁을 주도할 배짱이 생기긴 할 터였다.
"흠."
켈렌은 재빨리 저택으로 돌아왔다.
걱정이 됐는지 아내들이 마중을 나왔지만, 켈렌은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혼자 있게 해달라고 했다.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니라며 사라지는 두 아내.
켈렌은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카르샤를 다그치고 서재로 올라갔다.
청문회를 하던 중에 떠올린 기막히는 아이디어를 재고해야 했다.
"회로를... 마르코너 식으로 연결해서... 마력을 꺾으면..."
완성한 마법은 마치 푸르고 투명한 철사를 구부려서 눈꽃 모양으로 만든 듯한 모양이었다.
머금은 마력을 다 쓸 때까지 주위 물체를 얼려버리는 마법.
비슷한 마법은 많았지만, 적의를 가진, 혹은 적의가 담긴 물체를 얼려버린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켈렌은 기뻐하거나 설레지 않았다.
오히려 완성된 마법을 보며, 켈렌은 회한과 자조가 섞인 웃음을 지었다.
예전이었다면.
마탑을 빠져나왔을 시점이라면.
동료들을 모으던 시점이라면.
마왕 토벌을 하기 전이라면.
이 마법을 완성한 것만으로도 기뻐서 날뛰거나, 잠도 못 이룰 정도로 설렜을 텐데.
"하하..."
지금은 마법을 쓰는 것보다, 그저 마력을 움직여서 똑같은 현상을 일으키는 게 더 쉽고 빨랐다.
'권능'을 얻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
"정령화...인가."
얼음마법, 아니, 얼음에 완전한 통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젠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일까.
켈렌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훌륭한 의태였다.
인간의 몸과 똑같이 생긴...
마력이 실린 얼음 덩어리였다.
카웨다르푸스의 계략으로 바닥까지 떨어진 정신상태가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고 있음을 느꼈다.
꽤나 깊이 잠식된 것을 보면, 마력의 영향이 큰 신체가 된 것이겠지.
정령화가 꽤 진행된 것이다.
"어쩐담."
별로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인간의 신체를 가진 한 정령화가 완전히 이뤄지는 건 불가능하고, 설령 완전한 정령이 되었다고 한들 신체는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종족이 '인간'에서 '정령'으로 바뀌게 되는 것밖에는 그 무엇도 바뀌는 것이 없다.
게다가 빙설신룡이 자신의 아내이니, 문제는 더더욱 없었다.
켈렌은 정령으로 변하는 데에 크게 거부감도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허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과거의 소망을 너무나 쉽게 이뤄버린 탓에 그 반동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피어라."
켈렌은 마법으로 얼음꽃을 자라나게 했다.
마력 회로를 타고 흐른 마력이 마법의 형태로 변해 바닥에서 꽃처럼 자라났다.
"피어라."
이번에는 그저 의지만을 사용해보았다.
순식간에 바닥이 얼음꽃으로 뒤덮이는 것을 본 켈렌이 헛웃음을 지었다.
'과거의 나는 이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했을까.'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강대한 힘을 지녔는지 실감하지 못한 채 기만질의 끝을 보여주던 켈렌은, 조심스레 다가와 문을 두드리는 프리나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왜 그래?"
"기분이 많이 안 좋은가 해서..."
"아니야, 이제 괜찮아졌어."
빙설신룡, 프리나는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켈렌을 감싸안았다.
뭐라도 걸리는 게 있다면 말해달라는 그녀를 토닥이며 켈렌은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모두 토해냈다.
정령화가 이뤄지고 있고, 자신이 과거에 바랐던 것들이 이제는 너무나 쉽게 이뤄지는 힘을 얻었고, 그게 허탈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악당 같네."
"...뭐?"
"대륙을 정복하는 게 목표인 악당들 말이야. <신대륙 포틀래니아> 같은 책에 나오는."
"아."
즐겨 읽었던 소설 제목을 듣자 켈렌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대륙 정복 후에는 뭐가 남는데? 그게 삶의 목표일 뿐이라면 그걸 이뤘을 때 뭘 할 건데?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사는 거야?"
켈렌은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생각하지도 않은 문제였으니까.
어릴 땐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들어서 미래를 꿈꿀 수 없었다.
마법을 배울 때는 그저 평생을 마법 연구에 바칠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권능을 얻은 지금은 그 무엇도 성에 차지 않았다.
평범한, 안정적인 삶은 켈렌에게 너무나 큰 무료함과 공허함을 가져다 주었다.
"여행이라도 갈까?"
"여행..."
켈렌은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대륙을 돌아다니며 동료를 모으고, 마계를 정벌하고, 아츠라카를 찾아 헤맸던 그 추억을.
"짐부터 쌀까."
프리나는 싱긋 웃더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켈렌은 얼음 덩어리를 솟구치게 해서 그 위에 걸터앉고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꿈꾸던 행복한 삶은 이런 것이었다.
아무도 켈렌을 위해하지 않는 평화 속에서 여행과 여가를 즐기며 편안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
분명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어째선지 켈렌은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
"즐거움이 부족한 건가."
켈렌은 머릿속으로 여행을 갈만한 곳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이 그에게 즐거움을 주길 바라며.
*****
"에스칼리나?!"
아내들의 환호성에 켈렌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고르고 골라 결정한 보람이 있었다.
바닷가의 작은 마을로, 휴양과 더불어 요양을 하기엔 최적의 장소.
규모는 작지만 활발하고 정겨운 마을이란 소문이 있었다.
"고마워, 프리나."
신난 빙설신룡이 하루 빨리 가서 즐기고 싶다며 용의 모습으로 모두를 태웠다.
말을 타고 가도 사흘이 걸리는 곳이지만, 용의 속도는 말 따위와 비교조차 불가능했다.
반나절 만에 목적지에 다다른 프리나는 변신을 풀었다.
하지만 세 아내는 크게 실망했다.
분명 눈앞에는 정겹고 활발한, 휴양지다운 시골 마을의 정경이 펼쳐져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뭔가.
완전히 망해버린 마을.
거미줄과 이끼가 덮인 폐가만 가득했다.
그들은 처음엔 켈렌이 저들을 속이고 괴상한 곳으로 데려온 줄 알았다.
하지만 에스칼리나 마을로 들어서자 표정이 변했다.
마을 여기저기서 악취와 함께 끔찍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시체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고, 집과 건물들은 멀쩡한 것을 찾기 어려웠다.
"공격받았군."
가장 먼저 충격에서 빠져나온 켈렌이 중얼거렸다.
카르샤 또한 빨리 정신을 회복하고, 시체와 건물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스텔라와 프리나는 주변에 퍼진 악한 마력을 느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려 했다.
그때, 프리나가 비명을 지르며 땅에 엎어졌다.
켈렌은 황급히 마력을 방사해 방어막을 형성하고, 동시에 주위에 무슨 위험 요소가 있는지 파악하려 했다.
그때, 켈렌은 지하에 몹시 끔찍한 마력 원천이 잠들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마력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파악하려 드는 마력을 역으로 타고 올라와 충격을 가하는 원념에 가까웠다.
"토르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혼돈의 잔재와 비슷하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마치 끔찍한 일을 당해 죽어가며 세상을 향해 깊고도 깊은 원한을 쏟아내는 것 같은...
"프리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미안하지만 여행은 다음에 가자."
켈렌은 스텔라에게 프리나를 맡겼다.
다정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굳은 탓에 쉽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욱 치밀하고 사악한 계획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저 마을 지하에 이런 존재가 있다고 해서 일어날 일은 아닌 것이다.
"쯧."
프리나가 배제된 게 적의 계획이든 우연이든, 이쪽에는 좋지 않은 상황이다.
"불쾌한 마력이군."
프리나가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카르샤와 켈렌을 노려오는 음습한 마력.
하지만 켈렌은 그런 와중에도 왠지 모를 충족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의 삶에 부족했던 것을 찾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바루펠은 켈렌을 믿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정확한 설명을 듣고 싶어했다.
정확히는 켈렌에게 알맞은 징벌을 내리고 싶어했지만, 그런 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카웨다르푸스를 죽인 혐의로 청문회에 참석했습니다."
바루펠이 피곤한 표정으로 켈렌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한 칸 아래에는 고위 관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 사고를 쳤느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켈렌은 어깨를 들썩였다.
결백을 주장하는 몸짓이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경건한 황궁의 법도 아래,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켈렌은 장단을 맞췄다.
전후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러니 저러니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바루펠이 최종 결정권자이니 사형은 시키지 않을 것이고, 설령 처형된다 해도 무력으로 뚫으면 될 터.
감옥에 갇히게 되어도 분신을 만들어놓고 빠져나갈 것이었다.
애초에 전후사정을 듣게 되면 그들도 모두 납득할 테니, 걱정은커녕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평화조약을 무시하고 카웨다르푸스를 죽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이 평화를 깰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시오."
"카웨다르푸스는 처음부터 평화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가 평화를 원하는 척 했던 건 내가 있어서였기 때문이고."
고위 관료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무렴, 그들도 마왕을 토벌하기 위한 켈렌의 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은 곧 그들이 켈렌의 강함을 알고 있었고, 그게 평화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도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를 먼저 제거하려고 했던 겁니다. 정신세계에 마력을 아주 조금씩 불어넣어서."
켈렌은 기분 나쁘게 남아있는 카웨다르푸스의 마력을 증거로 제출했다.
그는 죽었지만, 혹시 이런 일이 있을까봐 켈렌이 증거로써 남겨둔 것이다.
"그의 마력이 맞습니다."
증거를 확인한 고위 관료가 황제에게 보고했지만, 바루펠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카웨다르푸스가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마계 고위 귀족들에게서도 그가 전쟁을 주도했다는 정보를 얻었고, 개연성도 충분했다.
단지 죽일 명분이 없어서 살려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무죄."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황제가 대뜸 무죄 선언을 내렸다.
고위 관료들은 기겁했지만, 황제는 엄숙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눈치 없고, 판단력 흐리고, 감정에 휘둘리는 고위 관료는 없었다.
그들도 결국 켈렌이 무죄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법도 아래 무릎 꿇린 마법사를 보면서 우월감에 젖고 싶었던 모양이지.
켈렌은 그럴 것이라 짐작하고 아쉬움을 표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증거와 정황이 모두 무죄를 의미했고, 이에 황제가 시간 낭비 없이 빠르게 판결을 내렸으니 깔끔한 엔딩.
"상쾌하구나."
청문회가 새벽에 시작된 탓에, 켈렌은 산뜻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봐야 서재에 틀어박혀 마법 연구나 할 하루였지만.
아니면 아내들과 데이트라도 하거나.
켈렌은 오랫동안 하지 못한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마법 연구였다.
싫은 척 하지만 아내들은 항상 켈렌에게 붙어있으려 하니 한시도 혼자 있은 적이 없었다.
"그러고보면 놈이 대단하긴 하군."
켈렌뿐만 아니라 세 아내들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마력을 흘려넣었으니.
그 정도 능력은 되어야 전쟁을 주도할 배짱이 생기긴 할 터였다.
"흠."
켈렌은 재빨리 저택으로 돌아왔다.
걱정이 됐는지 아내들이 마중을 나왔지만, 켈렌은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혼자 있게 해달라고 했다.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니라며 사라지는 두 아내.
켈렌은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카르샤를 다그치고 서재로 올라갔다.
청문회를 하던 중에 떠올린 기막히는 아이디어를 재고해야 했다.
"회로를... 마르코너 식으로 연결해서... 마력을 꺾으면..."
완성한 마법은 마치 푸르고 투명한 철사를 구부려서 눈꽃 모양으로 만든 듯한 모양이었다.
머금은 마력을 다 쓸 때까지 주위 물체를 얼려버리는 마법.
비슷한 마법은 많았지만, 적의를 가진, 혹은 적의가 담긴 물체를 얼려버린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켈렌은 기뻐하거나 설레지 않았다.
오히려 완성된 마법을 보며, 켈렌은 회한과 자조가 섞인 웃음을 지었다.
예전이었다면.
마탑을 빠져나왔을 시점이라면.
동료들을 모으던 시점이라면.
마왕 토벌을 하기 전이라면.
이 마법을 완성한 것만으로도 기뻐서 날뛰거나, 잠도 못 이룰 정도로 설렜을 텐데.
"하하..."
지금은 마법을 쓰는 것보다, 그저 마력을 움직여서 똑같은 현상을 일으키는 게 더 쉽고 빨랐다.
'권능'을 얻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
"정령화...인가."
얼음마법, 아니, 얼음에 완전한 통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젠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일까.
켈렌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훌륭한 의태였다.
인간의 몸과 똑같이 생긴...
마력이 실린 얼음 덩어리였다.
카웨다르푸스의 계략으로 바닥까지 떨어진 정신상태가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고 있음을 느꼈다.
꽤나 깊이 잠식된 것을 보면, 마력의 영향이 큰 신체가 된 것이겠지.
정령화가 꽤 진행된 것이다.
"어쩐담."
별로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인간의 신체를 가진 한 정령화가 완전히 이뤄지는 건 불가능하고, 설령 완전한 정령이 되었다고 한들 신체는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종족이 '인간'에서 '정령'으로 바뀌게 되는 것밖에는 그 무엇도 바뀌는 것이 없다.
게다가 빙설신룡이 자신의 아내이니, 문제는 더더욱 없었다.
켈렌은 정령으로 변하는 데에 크게 거부감도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허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과거의 소망을 너무나 쉽게 이뤄버린 탓에 그 반동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피어라."
켈렌은 마법으로 얼음꽃을 자라나게 했다.
마력 회로를 타고 흐른 마력이 마법의 형태로 변해 바닥에서 꽃처럼 자라났다.
"피어라."
이번에는 그저 의지만을 사용해보았다.
순식간에 바닥이 얼음꽃으로 뒤덮이는 것을 본 켈렌이 헛웃음을 지었다.
'과거의 나는 이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했을까.'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강대한 힘을 지녔는지 실감하지 못한 채 기만질의 끝을 보여주던 켈렌은, 조심스레 다가와 문을 두드리는 프리나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왜 그래?"
"기분이 많이 안 좋은가 해서..."
"아니야, 이제 괜찮아졌어."
빙설신룡, 프리나는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켈렌을 감싸안았다.
뭐라도 걸리는 게 있다면 말해달라는 그녀를 토닥이며 켈렌은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모두 토해냈다.
정령화가 이뤄지고 있고, 자신이 과거에 바랐던 것들이 이제는 너무나 쉽게 이뤄지는 힘을 얻었고, 그게 허탈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악당 같네."
"...뭐?"
"대륙을 정복하는 게 목표인 악당들 말이야. <신대륙 포틀래니아> 같은 책에 나오는."
"아."
즐겨 읽었던 소설 제목을 듣자 켈렌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대륙 정복 후에는 뭐가 남는데? 그게 삶의 목표일 뿐이라면 그걸 이뤘을 때 뭘 할 건데?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사는 거야?"
켈렌은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생각하지도 않은 문제였으니까.
어릴 땐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들어서 미래를 꿈꿀 수 없었다.
마법을 배울 때는 그저 평생을 마법 연구에 바칠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권능을 얻은 지금은 그 무엇도 성에 차지 않았다.
평범한, 안정적인 삶은 켈렌에게 너무나 큰 무료함과 공허함을 가져다 주었다.
"여행이라도 갈까?"
"여행..."
켈렌은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대륙을 돌아다니며 동료를 모으고, 마계를 정벌하고, 아츠라카를 찾아 헤맸던 그 추억을.
"짐부터 쌀까."
프리나는 싱긋 웃더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켈렌은 얼음 덩어리를 솟구치게 해서 그 위에 걸터앉고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꿈꾸던 행복한 삶은 이런 것이었다.
아무도 켈렌을 위해하지 않는 평화 속에서 여행과 여가를 즐기며 편안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
분명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어째선지 켈렌은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
"즐거움이 부족한 건가."
켈렌은 머릿속으로 여행을 갈만한 곳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이 그에게 즐거움을 주길 바라며.
*****
"에스칼리나?!"
아내들의 환호성에 켈렌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고르고 골라 결정한 보람이 있었다.
바닷가의 작은 마을로, 휴양과 더불어 요양을 하기엔 최적의 장소.
규모는 작지만 활발하고 정겨운 마을이란 소문이 있었다.
"고마워, 프리나."
신난 빙설신룡이 하루 빨리 가서 즐기고 싶다며 용의 모습으로 모두를 태웠다.
말을 타고 가도 사흘이 걸리는 곳이지만, 용의 속도는 말 따위와 비교조차 불가능했다.
반나절 만에 목적지에 다다른 프리나는 변신을 풀었다.
하지만 세 아내는 크게 실망했다.
분명 눈앞에는 정겹고 활발한, 휴양지다운 시골 마을의 정경이 펼쳐져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뭔가.
완전히 망해버린 마을.
거미줄과 이끼가 덮인 폐가만 가득했다.
그들은 처음엔 켈렌이 저들을 속이고 괴상한 곳으로 데려온 줄 알았다.
하지만 에스칼리나 마을로 들어서자 표정이 변했다.
마을 여기저기서 악취와 함께 끔찍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시체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고, 집과 건물들은 멀쩡한 것을 찾기 어려웠다.
"공격받았군."
가장 먼저 충격에서 빠져나온 켈렌이 중얼거렸다.
카르샤 또한 빨리 정신을 회복하고, 시체와 건물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스텔라와 프리나는 주변에 퍼진 악한 마력을 느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려 했다.
그때, 프리나가 비명을 지르며 땅에 엎어졌다.
켈렌은 황급히 마력을 방사해 방어막을 형성하고, 동시에 주위에 무슨 위험 요소가 있는지 파악하려 했다.
그때, 켈렌은 지하에 몹시 끔찍한 마력 원천이 잠들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마력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파악하려 드는 마력을 역으로 타고 올라와 충격을 가하는 원념에 가까웠다.
"토르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혼돈의 잔재와 비슷하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마치 끔찍한 일을 당해 죽어가며 세상을 향해 깊고도 깊은 원한을 쏟아내는 것 같은...
"프리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미안하지만 여행은 다음에 가자."
켈렌은 스텔라에게 프리나를 맡겼다.
다정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굳은 탓에 쉽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욱 치밀하고 사악한 계획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저 마을 지하에 이런 존재가 있다고 해서 일어날 일은 아닌 것이다.
"쯧."
프리나가 배제된 게 적의 계획이든 우연이든, 이쪽에는 좋지 않은 상황이다.
"불쾌한 마력이군."
프리나가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카르샤와 켈렌을 노려오는 음습한 마력.
하지만 켈렌은 그런 와중에도 왠지 모를 충족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의 삶에 부족했던 것을 찾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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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얼음마법은 쓸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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