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가려진 실체, 그 너머에는- 2
조회 : 776 추천 : 0 글자수 : 7,637 자 2024-05-19
높은 산 정상 위에 우뚝 선 봉수대에서는 하얀 연기와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봉수대 주변으로는 굵은 통나무들이 층층이 쌓여 있고, 마른 나뭇가지들과 짚단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두 명의 장정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그들은 손에 칼과 창을 든 채, 주변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멀리서 불어오는 밤바람에도 그들의 어깨는 움찔하며, 시선은 사방을 훑고 있었다. 좀 전에 이상한 괴성을 들은 터라,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역력했다.
“저기 누가 온다.”
“휴~ 이제야 교대하러 오는 모양이네. 살았다. 어? 근디, 왜 혼자여?”
멀리서 다가오는 인영을 발견한 그들은 곧바로 몸을 긴장시켰다.
“어이, 거기 왜 혼자 오는 거야?”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인영의 모습이 점점 또렷해지자, 장정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 간신히 발걸음을 떼고 있는 미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뭐, 뭐야...?”
“뭐... 뭣 좀 물읍시다.... 대체... 무슨 일로 봉화가 오른 것입니까? 윽...”
간신히 입을 연 미르였지만, 그의 상처는 끔찍할 정도로 심각해 보였고, 숨쉬기조차 힘겨워 보였다.
“아니, 대체 그 몰골은 뭐요?”
“혹시, 산적이라도 만난 거요?”
“그게 아니라... 윽...”
미르는 정신이 혼미해진 듯 비틀거리더니,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장정들은 당황했다.
“이거 어떡하지? 상처들이 심한 것 같은데?”
“어떡하긴, 빨리 치료해야지.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겨? 어서 마을로 데려가자고!”
“그럼, 여기는?”
“어, 마침 저기 오네. 빨랑 와. 여기 사람이 다쳤어.”
때마침 교대하러 올라온 다른 청년들이 놀라 허겁지겁 달려왔다.
##
아미는 잠을 자지도 않은 채, 길거리에 서 있었다. 조금은 초조한 모습이었다. 청의동자도 옆에서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바람이 허겁지겁 젊은 여인 한 명을 데리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보따리가 들려져 있었다.
“의원님은 몸이 안 좋으셔서, 대신 손녀분을 데리고 왔습니다. 실력은 의원님 못지않다고 합니다.”
“예. 밤늦게 오시라 하여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환자분은 어디에 있나요?”
젊은 여인이 물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부탁한 것들은 다 챙기셨겠지요?”
“네. 상처를 봉합할 것과 환부에 바를 것, 뼈에 댈 부목 다 챙겼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해독제들도 챙겨 왔습니다. 근데, 이게 정말 다 필요하신 겁니까? 환자도 도착하지 않았는데, 어찌 환자의 상태를 아시고 계시는 건가요?”
젊은 여인은 직업정신이 투철한 듯했다. 그녀의 모습에 아미는 안도하는 듯했다.
아미는 의도치 않게 거짓말을 했다.
“미리 연락을 받았습니다. 상태가 위중하다 들었습니다.”
그때, 하늘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여기, 녹차와 홍차 재료 가져왔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젊은 여인은 한밤중에 난리법석을 떠는 아미의 일행을 의심의 눈길로 쳐다보았다.
“시내야!”
소리에 놀라 쳐다본 여인의 눈에는 급히 들것에 누군가를 싣고 급히 달려오는 장정들이었다.
“헉헉... 아, 마침 잘됐다. 힘이 다 빠져서 의원님 댁까지 어찌 가나 했는데, 마침 네가 여기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헉헉...이 사람 좀 봐줘. 어디서 많이 다쳤어.”
들것에는 피투성이인 남자가 누워있었다. 미르였다. 바람과 하늘은 그 모습을 보자,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이리로 오십시오. 안에 눕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아미가 따라오라고 하자, 장정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시내라는 여인이 고갯짓을 하자, 그들은 서둘러 미르가 누운 들것을 들고 따라갔다. 시내는 바람과 하늘을 흘깃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진짜였네. 진짜, 앞을 내다보나 봐.”
“그러게 말입니다. 근데, 어쩌다 저리된 건지...”
하늘이 아는 것이 없냐는 듯 청의동자를 바라보자, 청의동자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마셔.”
사기그릇에 담긴 진한 흙빛의 약탕 물에 소녀의 얼굴이 비쳤다.
침대맡에 기대어 앉은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억시니, 아야가 그릇을 들고 서 있었다.
“팔 아파. 어서 마시라고.”
“네가 뭔데 마시라 마라야?”
쨍그랑~~
기껏 약을 만들었더니, 이리 내팽개친다고?
아야는 어이가 없었다. 저절로 손이 올라갔다. 그러나 소녀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그만 까불어라.”
아야가 할 말을 대신 소녀가 하고 있었다. 기가 차고 코가 막힐 일이었다.
“내 이름이 뭐야?”
“아야.”
“그건 니 이름이고, 내 이름 말이야. 이 멍충아.”
아야가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널 처음 보는데, 네 이름을 어떻게 알아?”
“그래? 그럼 여긴 누구 집이야?”
“누구 집이긴, 내 집이지.”
“그럼, 내 집은 어딨어?”
아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빨리 대답 안 해? 입을 찢어줘야 대답할래?”
곱상한 얼굴과 달리, 소녀의 성격은 보통이 아닌 듯했다. 아야는 집에 괜히 들였다고 생각했다.
“야~ 죽고 싶어?”
아야는 무시하고, 바닥에 깨진 사기그릇을 챙겼다.
소녀는 대노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아야가 재빨리 몸을 굴렸다. 그러나 소녀가 허공에다 손을 연속적으로 뻗고 있을 뿐 별일은 없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야, 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어?”
이건 또 뭔 헛소리인지...도저히 참을 수 없는 듯 아야는 챙기던 사기그릇을 내려놓더니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뭐야, 멈춰.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너 진짜 죽는다.”
아야는 비릿하게 웃었다.
##
“으...”
미르는 옅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고, 시내는 미르의 벌어진 상처를 꿰매고 있었다.
미르의 팔과 다리엔 부목이 대어져 있었고, 이미 봉합한 곳엔 약초가 덧대어 있었다.
옆에 있던 아미가 시내의 얼굴에 난 땀을 천으로 닦아주자, 그녀는 물끄러미 아미를 쳐다보았다.
“독에 중독된 것 같은데, 무슨 독인지도 아십니까?”
“흔치 않은 독입니다.”
“무슨 독입니까?”
“혹시 묘두사라고 아십니까?”
“묘두사라면, 머리는 고양이고 몸은 뱀이라는 요물 아닙니까?”
아미가 놀란 듯 시내를 바라보았고, 시내도 아미를 응시했다.
“저의 할아버지가 들려주셨던 옛이야기에 나오는...”
“아... 그렇군요. 전 또...”
시내는 다시 상처를 꿰매며 물었다.
“무슨 독이냐 물었는데, 뜬금없이 묘두사를 언급하시다니, 정말 이상하신 분이군요. 어서 말해보세요. 어떤 독인지도 모른 채 해독제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기본 상식 아닙니까? 상처에 대한 치료가 끝나면, 바로 독에 대해 치료를 하려 합니다.”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결코 설렁 넘어가지 않을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 테니,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다시 시내가 아미를 쳐다보았다.
“예. 노력해 보지요. 말씀하세요. 무슨 독에 중독된 것입니까?”
“묘두사의 독입니다.”
놀랐지만, 시내는 담담해지려 노력하는 듯 보였다.
“... 그래서 뱀독에 대한 해독제를 쓰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고양이... 농담을 하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안타깝지만, 전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네요.”
“이분은 독에 대한 선천적인 면역성을 가지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독에 중독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고양인지, 뱀인지 모를 묘두사의 독 때문이겠지요. 저의 짧은 식견으로는 뱀뿔풀과 강황, 마늘을 혼합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 정도면, 이분이 스스로 이겨낼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역시 이쪽에 상당한 식견을 가지신 분이군요. 본인이 직접 치료를 하시지, 왜 저를 부르신 것입니까?”
“날이 밝으면 제가 무지 바쁜 하루가 될 것이기에, 이분을 돌봐드릴 수가 없습니다.”
시내가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혹시 제 말이 헛소리로 들리십니까?”
“아니요. 어이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허튼소리를 할 분 같지 않아서 그러하고, 생전 듣지도 못한 묘두사의 독도 그러하며, 독에 선천적인 면역성을 가진 사람이 독에 중독되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버젓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그러해서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이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낭자, 아니 의원님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부디 생뚱맞은 제 말에 대한 의심을 잠시 거두시고, 저를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눈이 커진 시내를 아미는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잿더미와 폐허 속에서 시뻘건 핏자국이 눈에 띄었다. 한때 평화로웠던 저루마을은 이제 죽음과 절망의 도가니가 되어버렸다.
거리 곳곳에는 산송장의 습격에 쓰러진 시체들이 즐비했다. 산송장에 물린 대부분은 산송장으로 변했지만, 모두가 산송장으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끝내 산송장이 되지 못한 채 숨져있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즉사한 것으로 보이는 시체들도 적지 않았다. 불길에 휩싸여 숨진 자들도 눈에 띄었다. 자식을 지키다 쓰러진 부모의 주검, 배우자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보이는 시신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노인들과 어린아이 중 상당수는 산송장이 되지 못하고 그냥 죽어간 것 같았다.
급기야 불길이나 추락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이는 산송장들도 눈에 띄었다. 불타는 건물에 깔려 숨진 산송장들, 난간이 무너진 절벽에서 추락한 산송장들의 잔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이렇게 저루마을에는 산송장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시체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 죽음의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이 모든 것이 산송장의 습격으로 인한 재앙임은 분명해 보였다.
저루마을 토굴 안에는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이 물리지 않은 장정들과 마을 촌장도 입구 쪽을 경계하며 웅크리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공포와 슬픔, 그리고 자신들 역시 산송장이 되거나, 시체 더미에 합류할지 모른다는 절망감에 눈동자를 떨고 있었다. 그들에게 저루 마을의 비극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악몽으로 남을 터였다. 밖에는 여전히 서성거리고 있는 산송장들의 괴음이 들리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한 대유, 촌장님?”
“구조대가 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지. 박물상단의 단주랑 몇몇이 마을을 빠져나간 것 같으니, 그들이 그루마을에 우리의 소식을 전하기를 기대해 봐야지.”
“그나저나, 아드님이 저렇게 되어서 어쩐 대유?”
그 말에 비통해진 촌장은 붉어진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어떡하긴 어떡해. 마을을 지키려다 저리되었으니, 장하다 여겨야지. 우리 아들만 그런 게 아니잖아. 만약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희생된 모든 이들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 그들의 명복을 빌어줘야지.”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은 소리 없이 오열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 배우자를 잃은 아내와 남편, 부모를 잃은 아이들...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하지만 밖에서 들리는 산송장들의 발소리에, 그들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아야만 했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어차피 우린 다 죽을 거야... 저 괴물들한테 잡아먹히겠지...”
누군가의 절망에 찬 속삭임이 공기를 갈랐다. 고통에 찬 신음을 토굴 안 가득 채웠다. 아무도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살아남은 것이 기쁘기는커녕, 그저 죽음을 앞당겼을 뿐이라는 생각이 그들을 짓눌렀다.
촌장은 이를 악물었다. 서둘러 피난을 가야 했던 건데... 자신이 이 모든 참사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절망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살아남아야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먼저 간 아들의 명복을 빌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포기하면 안 돼... 그리고 조용히 해. 우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절대 안 돼.”
촌장이 떨리는 손으로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하지만 흐느낌을 참기엔 슬픔이 너무나도 컸다. 곧 토굴 안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흐느끼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울음을 삼키며, 공포와 절망에 휩싸인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한 줄기 빛도 들지 않는 토굴 안, 그들의 앞날은 캄캄할 뿐이었다.
##
날이 밝았다.
해치가 기루마을엔 이른 아침부터 무척 소란스러웠다.
마을로 들어서는 백여 명이나 되는 무사단을 처음 보는 마을 사람들은 신기한 듯, 모두 나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해치가의 깃발을 기수 뒤에는 미리내가 탄 마차가 따르고 있었다.
선두를 섰던 무사단 부장이 손을 들자, 행렬이 멈춰 섰다.
“미리내님, 여기서 낮까지 쉬면서 정비를 해야겠습니다.”
“왜요? 다음 마을이 그루라는 마을이라던데, 정비는 거기서 하지요? 한시가 급합니다.”
“다음이 그루인 것은 맞지만, 여기서 꼬박 하루를 더 달려야 합니다. 말들이 하루 종일 달리기만 했습니다. 말뿐만 아니라, 단원들도 아직 한 끼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조금만 더 가서 쉬죠. 괜히 마을 사람들이 불안해할 수도 있으니.”
미리내와 부장의 말을 듣고 있던 무사단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씨발, 뭐야? 그럼, 우린 어디서 밥 먹고. 말들은 어디서 여물 먹여?”
“처음 나와 봐서 몰라서 그러는 거잖아.”
“모르면 나서지나 말아야지. 통솔은 아무나 해?”
“아, 괜히 기어 나와서는 여럿 피곤하게 하네.”
“어쩐지 어젯밤 꿈이 뒤숭숭하더라니, 퉤.”
해치가 가주의 딸이며, 가문의 후계자인 미리내가 들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임에도, 그들은 거침없이 불평을 쏟아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해치가하면 가장 먼저 떠오는 것이 법과 무사단일 만큼, 실세 중의 실세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해치가의 태생에서 기인했다.
초창기 해치가는 하나 반도의 터줏대감이었던 용천가문의 위성 가문이었다. 이렇다 할 상대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다른 세력과 땅을 맞대기 싫어했던 용천가문은 새로운 가문을 만들어 그들과 경계선을 두길 원했다. 제일 말 잘 들을 것 같은 유순한 해치족을 내세워, 그들이 그 주위 부족을 통합하여 해치가문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했다. 하지만, 해치가문은 절대 군대를 가질 수 없었다. 나중에라도 세력이 커져서 자신들의 위협이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유일하게 치안의 기능을 하는 무사단만이 허락되었다. 무사단장은 용천가의 추천을 받아야만 했다. 용천가에서 추천된 무사단장들은 하나같이 부패했고, 그러한 무사단장의 용인 아래, 여러 가지 만행들이 저질러졌다. 무사단원은 용천가의 법이 아니라, 독단적인 무사단 법의 적용을 받는 기이한 형태 때문이었다.
그러한 무사단이다 보니, 일개 단원이 차기 해치가주인 미리내 앞에서도 저런 망발을 천연스럽게 내뱉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미리내의 얼굴은 무척 상기되어있었다.
“이렇게 가다간, 말들이 곧 쓰러질 텐데, 그러면 뛰어서 가셔야 합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 전 통솔자이신 미리내님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만.”
“그렇게 하시지요? 아가씨도 지금 쉬지 않으시면 분명 몸에 탈이 오실 것입니다.”
옆에 있던 의원이 걱정스러워하자, 미리내는 할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점심까지 먹고 출발하는 것으로 하지요. 대신 절대 마을 사람들의 누가 안 되게 행동할 것을 단원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십시오.”
“네.”
하지만 미리내의 당부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점심 먹고 출발한다. 해산~~”
“야호~~”
함성과 함께 이리저리 흩어지는 탓에 마을 사람들이 놀라 기겁했지만, 무사단원들은 제 하고 싶은 데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마을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미리내의 심기가 몹시 불편한 듯 입술을 깨물었고, 함께 간 그녀의 몸종과 의원도 몹시 걱정스러워 보였다.
“이제 오셨습니까?”
마치 그녀를 기다린 듯한 목소리에 미리내가 쳐다보았다.
그녀에게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를 하는 자는 아미였다.
아미는 그녀가 미르가 만든 조각상의 여인과 너무도 닮았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봉수대 주변으로는 굵은 통나무들이 층층이 쌓여 있고, 마른 나뭇가지들과 짚단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두 명의 장정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그들은 손에 칼과 창을 든 채, 주변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멀리서 불어오는 밤바람에도 그들의 어깨는 움찔하며, 시선은 사방을 훑고 있었다. 좀 전에 이상한 괴성을 들은 터라,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역력했다.
“저기 누가 온다.”
“휴~ 이제야 교대하러 오는 모양이네. 살았다. 어? 근디, 왜 혼자여?”
멀리서 다가오는 인영을 발견한 그들은 곧바로 몸을 긴장시켰다.
“어이, 거기 왜 혼자 오는 거야?”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인영의 모습이 점점 또렷해지자, 장정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 간신히 발걸음을 떼고 있는 미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뭐, 뭐야...?”
“뭐... 뭣 좀 물읍시다.... 대체... 무슨 일로 봉화가 오른 것입니까? 윽...”
간신히 입을 연 미르였지만, 그의 상처는 끔찍할 정도로 심각해 보였고, 숨쉬기조차 힘겨워 보였다.
“아니, 대체 그 몰골은 뭐요?”
“혹시, 산적이라도 만난 거요?”
“그게 아니라... 윽...”
미르는 정신이 혼미해진 듯 비틀거리더니,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장정들은 당황했다.
“이거 어떡하지? 상처들이 심한 것 같은데?”
“어떡하긴, 빨리 치료해야지.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겨? 어서 마을로 데려가자고!”
“그럼, 여기는?”
“어, 마침 저기 오네. 빨랑 와. 여기 사람이 다쳤어.”
때마침 교대하러 올라온 다른 청년들이 놀라 허겁지겁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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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는 잠을 자지도 않은 채, 길거리에 서 있었다. 조금은 초조한 모습이었다. 청의동자도 옆에서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바람이 허겁지겁 젊은 여인 한 명을 데리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보따리가 들려져 있었다.
“의원님은 몸이 안 좋으셔서, 대신 손녀분을 데리고 왔습니다. 실력은 의원님 못지않다고 합니다.”
“예. 밤늦게 오시라 하여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환자분은 어디에 있나요?”
젊은 여인이 물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부탁한 것들은 다 챙기셨겠지요?”
“네. 상처를 봉합할 것과 환부에 바를 것, 뼈에 댈 부목 다 챙겼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해독제들도 챙겨 왔습니다. 근데, 이게 정말 다 필요하신 겁니까? 환자도 도착하지 않았는데, 어찌 환자의 상태를 아시고 계시는 건가요?”
젊은 여인은 직업정신이 투철한 듯했다. 그녀의 모습에 아미는 안도하는 듯했다.
아미는 의도치 않게 거짓말을 했다.
“미리 연락을 받았습니다. 상태가 위중하다 들었습니다.”
그때, 하늘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여기, 녹차와 홍차 재료 가져왔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젊은 여인은 한밤중에 난리법석을 떠는 아미의 일행을 의심의 눈길로 쳐다보았다.
“시내야!”
소리에 놀라 쳐다본 여인의 눈에는 급히 들것에 누군가를 싣고 급히 달려오는 장정들이었다.
“헉헉... 아, 마침 잘됐다. 힘이 다 빠져서 의원님 댁까지 어찌 가나 했는데, 마침 네가 여기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헉헉...이 사람 좀 봐줘. 어디서 많이 다쳤어.”
들것에는 피투성이인 남자가 누워있었다. 미르였다. 바람과 하늘은 그 모습을 보자,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이리로 오십시오. 안에 눕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아미가 따라오라고 하자, 장정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시내라는 여인이 고갯짓을 하자, 그들은 서둘러 미르가 누운 들것을 들고 따라갔다. 시내는 바람과 하늘을 흘깃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진짜였네. 진짜, 앞을 내다보나 봐.”
“그러게 말입니다. 근데, 어쩌다 저리된 건지...”
하늘이 아는 것이 없냐는 듯 청의동자를 바라보자, 청의동자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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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셔.”
사기그릇에 담긴 진한 흙빛의 약탕 물에 소녀의 얼굴이 비쳤다.
침대맡에 기대어 앉은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억시니, 아야가 그릇을 들고 서 있었다.
“팔 아파. 어서 마시라고.”
“네가 뭔데 마시라 마라야?”
쨍그랑~~
기껏 약을 만들었더니, 이리 내팽개친다고?
아야는 어이가 없었다. 저절로 손이 올라갔다. 그러나 소녀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그만 까불어라.”
아야가 할 말을 대신 소녀가 하고 있었다. 기가 차고 코가 막힐 일이었다.
“내 이름이 뭐야?”
“아야.”
“그건 니 이름이고, 내 이름 말이야. 이 멍충아.”
아야가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널 처음 보는데, 네 이름을 어떻게 알아?”
“그래? 그럼 여긴 누구 집이야?”
“누구 집이긴, 내 집이지.”
“그럼, 내 집은 어딨어?”
아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빨리 대답 안 해? 입을 찢어줘야 대답할래?”
곱상한 얼굴과 달리, 소녀의 성격은 보통이 아닌 듯했다. 아야는 집에 괜히 들였다고 생각했다.
“야~ 죽고 싶어?”
아야는 무시하고, 바닥에 깨진 사기그릇을 챙겼다.
소녀는 대노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아야가 재빨리 몸을 굴렸다. 그러나 소녀가 허공에다 손을 연속적으로 뻗고 있을 뿐 별일은 없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야, 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어?”
이건 또 뭔 헛소리인지...도저히 참을 수 없는 듯 아야는 챙기던 사기그릇을 내려놓더니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뭐야, 멈춰.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너 진짜 죽는다.”
아야는 비릿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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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미르는 옅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고, 시내는 미르의 벌어진 상처를 꿰매고 있었다.
미르의 팔과 다리엔 부목이 대어져 있었고, 이미 봉합한 곳엔 약초가 덧대어 있었다.
옆에 있던 아미가 시내의 얼굴에 난 땀을 천으로 닦아주자, 그녀는 물끄러미 아미를 쳐다보았다.
“독에 중독된 것 같은데, 무슨 독인지도 아십니까?”
“흔치 않은 독입니다.”
“무슨 독입니까?”
“혹시 묘두사라고 아십니까?”
“묘두사라면, 머리는 고양이고 몸은 뱀이라는 요물 아닙니까?”
아미가 놀란 듯 시내를 바라보았고, 시내도 아미를 응시했다.
“저의 할아버지가 들려주셨던 옛이야기에 나오는...”
“아... 그렇군요. 전 또...”
시내는 다시 상처를 꿰매며 물었다.
“무슨 독이냐 물었는데, 뜬금없이 묘두사를 언급하시다니, 정말 이상하신 분이군요. 어서 말해보세요. 어떤 독인지도 모른 채 해독제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기본 상식 아닙니까? 상처에 대한 치료가 끝나면, 바로 독에 대해 치료를 하려 합니다.”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결코 설렁 넘어가지 않을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 테니,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다시 시내가 아미를 쳐다보았다.
“예. 노력해 보지요. 말씀하세요. 무슨 독에 중독된 것입니까?”
“묘두사의 독입니다.”
놀랐지만, 시내는 담담해지려 노력하는 듯 보였다.
“... 그래서 뱀독에 대한 해독제를 쓰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고양이... 농담을 하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안타깝지만, 전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네요.”
“이분은 독에 대한 선천적인 면역성을 가지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독에 중독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고양인지, 뱀인지 모를 묘두사의 독 때문이겠지요. 저의 짧은 식견으로는 뱀뿔풀과 강황, 마늘을 혼합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 정도면, 이분이 스스로 이겨낼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역시 이쪽에 상당한 식견을 가지신 분이군요. 본인이 직접 치료를 하시지, 왜 저를 부르신 것입니까?”
“날이 밝으면 제가 무지 바쁜 하루가 될 것이기에, 이분을 돌봐드릴 수가 없습니다.”
시내가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혹시 제 말이 헛소리로 들리십니까?”
“아니요. 어이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허튼소리를 할 분 같지 않아서 그러하고, 생전 듣지도 못한 묘두사의 독도 그러하며, 독에 선천적인 면역성을 가진 사람이 독에 중독되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버젓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그러해서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이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낭자, 아니 의원님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부디 생뚱맞은 제 말에 대한 의심을 잠시 거두시고, 저를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눈이 커진 시내를 아미는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잿더미와 폐허 속에서 시뻘건 핏자국이 눈에 띄었다. 한때 평화로웠던 저루마을은 이제 죽음과 절망의 도가니가 되어버렸다.
거리 곳곳에는 산송장의 습격에 쓰러진 시체들이 즐비했다. 산송장에 물린 대부분은 산송장으로 변했지만, 모두가 산송장으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끝내 산송장이 되지 못한 채 숨져있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즉사한 것으로 보이는 시체들도 적지 않았다. 불길에 휩싸여 숨진 자들도 눈에 띄었다. 자식을 지키다 쓰러진 부모의 주검, 배우자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보이는 시신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노인들과 어린아이 중 상당수는 산송장이 되지 못하고 그냥 죽어간 것 같았다.
급기야 불길이나 추락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이는 산송장들도 눈에 띄었다. 불타는 건물에 깔려 숨진 산송장들, 난간이 무너진 절벽에서 추락한 산송장들의 잔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이렇게 저루마을에는 산송장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시체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 죽음의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이 모든 것이 산송장의 습격으로 인한 재앙임은 분명해 보였다.
저루마을 토굴 안에는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이 물리지 않은 장정들과 마을 촌장도 입구 쪽을 경계하며 웅크리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공포와 슬픔, 그리고 자신들 역시 산송장이 되거나, 시체 더미에 합류할지 모른다는 절망감에 눈동자를 떨고 있었다. 그들에게 저루 마을의 비극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악몽으로 남을 터였다. 밖에는 여전히 서성거리고 있는 산송장들의 괴음이 들리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한 대유, 촌장님?”
“구조대가 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지. 박물상단의 단주랑 몇몇이 마을을 빠져나간 것 같으니, 그들이 그루마을에 우리의 소식을 전하기를 기대해 봐야지.”
“그나저나, 아드님이 저렇게 되어서 어쩐 대유?”
그 말에 비통해진 촌장은 붉어진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어떡하긴 어떡해. 마을을 지키려다 저리되었으니, 장하다 여겨야지. 우리 아들만 그런 게 아니잖아. 만약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희생된 모든 이들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 그들의 명복을 빌어줘야지.”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은 소리 없이 오열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 배우자를 잃은 아내와 남편, 부모를 잃은 아이들...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하지만 밖에서 들리는 산송장들의 발소리에, 그들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아야만 했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어차피 우린 다 죽을 거야... 저 괴물들한테 잡아먹히겠지...”
누군가의 절망에 찬 속삭임이 공기를 갈랐다. 고통에 찬 신음을 토굴 안 가득 채웠다. 아무도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살아남은 것이 기쁘기는커녕, 그저 죽음을 앞당겼을 뿐이라는 생각이 그들을 짓눌렀다.
촌장은 이를 악물었다. 서둘러 피난을 가야 했던 건데... 자신이 이 모든 참사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절망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살아남아야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먼저 간 아들의 명복을 빌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포기하면 안 돼... 그리고 조용히 해. 우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절대 안 돼.”
촌장이 떨리는 손으로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하지만 흐느낌을 참기엔 슬픔이 너무나도 컸다. 곧 토굴 안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흐느끼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울음을 삼키며, 공포와 절망에 휩싸인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한 줄기 빛도 들지 않는 토굴 안, 그들의 앞날은 캄캄할 뿐이었다.
##
날이 밝았다.
해치가 기루마을엔 이른 아침부터 무척 소란스러웠다.
마을로 들어서는 백여 명이나 되는 무사단을 처음 보는 마을 사람들은 신기한 듯, 모두 나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해치가의 깃발을 기수 뒤에는 미리내가 탄 마차가 따르고 있었다.
선두를 섰던 무사단 부장이 손을 들자, 행렬이 멈춰 섰다.
“미리내님, 여기서 낮까지 쉬면서 정비를 해야겠습니다.”
“왜요? 다음 마을이 그루라는 마을이라던데, 정비는 거기서 하지요? 한시가 급합니다.”
“다음이 그루인 것은 맞지만, 여기서 꼬박 하루를 더 달려야 합니다. 말들이 하루 종일 달리기만 했습니다. 말뿐만 아니라, 단원들도 아직 한 끼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조금만 더 가서 쉬죠. 괜히 마을 사람들이 불안해할 수도 있으니.”
미리내와 부장의 말을 듣고 있던 무사단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씨발, 뭐야? 그럼, 우린 어디서 밥 먹고. 말들은 어디서 여물 먹여?”
“처음 나와 봐서 몰라서 그러는 거잖아.”
“모르면 나서지나 말아야지. 통솔은 아무나 해?”
“아, 괜히 기어 나와서는 여럿 피곤하게 하네.”
“어쩐지 어젯밤 꿈이 뒤숭숭하더라니, 퉤.”
해치가 가주의 딸이며, 가문의 후계자인 미리내가 들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임에도, 그들은 거침없이 불평을 쏟아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해치가하면 가장 먼저 떠오는 것이 법과 무사단일 만큼, 실세 중의 실세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해치가의 태생에서 기인했다.
초창기 해치가는 하나 반도의 터줏대감이었던 용천가문의 위성 가문이었다. 이렇다 할 상대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다른 세력과 땅을 맞대기 싫어했던 용천가문은 새로운 가문을 만들어 그들과 경계선을 두길 원했다. 제일 말 잘 들을 것 같은 유순한 해치족을 내세워, 그들이 그 주위 부족을 통합하여 해치가문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했다. 하지만, 해치가문은 절대 군대를 가질 수 없었다. 나중에라도 세력이 커져서 자신들의 위협이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유일하게 치안의 기능을 하는 무사단만이 허락되었다. 무사단장은 용천가의 추천을 받아야만 했다. 용천가에서 추천된 무사단장들은 하나같이 부패했고, 그러한 무사단장의 용인 아래, 여러 가지 만행들이 저질러졌다. 무사단원은 용천가의 법이 아니라, 독단적인 무사단 법의 적용을 받는 기이한 형태 때문이었다.
그러한 무사단이다 보니, 일개 단원이 차기 해치가주인 미리내 앞에서도 저런 망발을 천연스럽게 내뱉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미리내의 얼굴은 무척 상기되어있었다.
“이렇게 가다간, 말들이 곧 쓰러질 텐데, 그러면 뛰어서 가셔야 합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 전 통솔자이신 미리내님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만.”
“그렇게 하시지요? 아가씨도 지금 쉬지 않으시면 분명 몸에 탈이 오실 것입니다.”
옆에 있던 의원이 걱정스러워하자, 미리내는 할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점심까지 먹고 출발하는 것으로 하지요. 대신 절대 마을 사람들의 누가 안 되게 행동할 것을 단원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십시오.”
“네.”
하지만 미리내의 당부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점심 먹고 출발한다. 해산~~”
“야호~~”
함성과 함께 이리저리 흩어지는 탓에 마을 사람들이 놀라 기겁했지만, 무사단원들은 제 하고 싶은 데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마을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미리내의 심기가 몹시 불편한 듯 입술을 깨물었고, 함께 간 그녀의 몸종과 의원도 몹시 걱정스러워 보였다.
“이제 오셨습니까?”
마치 그녀를 기다린 듯한 목소리에 미리내가 쳐다보았다.
그녀에게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를 하는 자는 아미였다.
아미는 그녀가 미르가 만든 조각상의 여인과 너무도 닮았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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