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미르에게 죽음을, 아미에겐 속죄를- 2
조회 : 706 추천 : 0 글자수 : 7,792 자 2024-05-23
해치가에는 또 하나의 연통조가 날아들어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본가에서는 벌써 연통도 여러 개가 도착해 있었고, 해치가의 책사, 백산은 그 내용들을 종합하는 중이었다.
여섯 개의 연합부족 부족장들도 이 소식에 회의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원탁을 사이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봉화가 아직 꺼지지 않은 걸 보면 사태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50대 후반의 여성인 연족장은 근심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계속 타오르고 있으니, 상황이 아직 진행 중이란 뜻 아니겠습니까?"
30대로 보이는 여성인 난족장이 연족장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단이 급파되었다 하니, 지금쯤이면 기루나 그루에 당도했을 겁니다. 곧 사태의 진상이 밝혀지겠지요.”
60대의 남성인 무족장이 말을 받았다. 그는 무족의 근거지인 오른땅의 난리에 몹시 절망스러운 얼굴이었다.
“근데 이번 무사단을 이끈 통솔자가 미리내 아가씨랍니다. 괜찮겠습니까?”
40대의 여성인 인족장이 무족장의 말을 받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괜찮겠냐니? 영특하신 아가씨께서 그것도 못해내실까 봐 그러는 거요?”
40대 초반의 남성인 마족장이 발끈했다.
“맞습니다. 게다가 무사단의 단장, 부단장 모두 부재중이라는데, 미리내 아가씨께서 이끄시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50대의 사족이 마족장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한데, 이런 위급한 순간에 내세우는 게 맞을까요?”
“저도 찜찜합니다. 아가씨는 평소에도 건강이 안 좋아 거의 바깥출입도 삼가시는 분 아닙니까? 그런 분이 그 먼 여정을 견디실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연족장의 우려에 난족장이 힘을 보탰다.
“그래서 의원과 시종까지 동행을 했다지 않습니까? 위급한 상황에 몸소 나서는 헌신에 칭송은 못 할망정, 무슨 기우들입니까?”
회의장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연족장, 인족장, 난족장은 미리내의 역량에 대한 의구심을 내비쳤지만, 무족장, 사족장, 마족장은 그녀를 신뢰하는 입장인 모양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해치가의 가주 미치루가 회의장에 들어섰다.
“아니, 이게 무슨 난리랍니까?”
“이유는 밝혀진 것이 있습니까?”
미치루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루와 저루에 사고가 생긴 듯합니다.”
“이루까지요?”
“대체 무슨 일이 난 것입니까?
“그게... 이무기라고 추정되는 괴물과 산송장들에 습격받았다 합니다."
미치루의 말에 회의장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이무기요? 제가 알고 있는 그 이무기가 맞습니까? 그 커다란 뱀, 뭐인가 하는 거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그 이무기가 출몰하였다는 연통이 왔습니다.”
“아이고 세상에나...”
“근데, 산송장이라니요. 그건 또 뭔 소리입니까?”
“그게 사람들이 산송장처럼 변하여, 살아있는 사람들을 마구 공격하였다 합니다.”
부족장들은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아니, 이런 중대한 일에 미리내 아가씨에게 무사단을 이끌라 하신 겁니까?”
연족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부단장이 합류했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미리내는 부상병들을 데리고 복귀할 것입니다.”
“부상병이오? 벌써 괴물들과 조우를 한 것입니까?”
미치루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기루에서 황금돼지라는 괴물이 무사단원들을 습격하였답니다.”
“기루에서요? 기루에도 괴물이 나타난 것입니까?”
“아니 어찌 이런 일들이 연달아 일어난답니까?”
“그럼, 빨리 무사단을 추가로 보내야지 않겠습니까? 아니, 대체 단장이라는 사람은 어딜 간 것입니까?”
“가주님이 단장을 통제하지 못하니 이런 사단이 나는 것 아닙니까?”
“그게 가주님 탓입니까? 무사단을 건드릴 수 없게 만든 용천가 탓이지.”
“여하튼, 하루빨리 추가 병력을 보내야지 않겠습니까? 백산이나 백운 중 한 사람이라도 추가 병력을 데리고 가라 하십시오.”
“그나저나 그루는 안전할까요?”
부족장들은 연이어 의문과 불안감을 쏟아냈다.
그때 무족장이 원탁을 탕치며 소리를 높였다.
"지금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거나 불신하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로 뭉쳐 위기에 대처해야 할 때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엄중함이 담겨 있었다. 이 땅의 토박이자, 우직함의 대명사인 무족장은 해치가의 가주, 미치루에게 늘 힘이 되어주었다. 자신 부족들의 근거지가 쑥밭이 되었는데도, 난리법석을 떠는 다른 부족장들과는 달리 침착성을 보였다.
“맞습니다. 무족장님 말씀대로 이런 돌발적인 사태에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사 백운 선생이 남은 무사단 전 병력을 이끌고 기루로 향하였습니다. 하여 지금 이곳 마루에는 치안을 담당할 무사단원이 없습니다. 각 부족장께서는 부족원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주시고, 아울러 결속을 다지는 데에 집중해 주십시오. 강이 부단장이 이끄는 무사단의 활약상을 기대하며, 우리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치루의 말에 부족장들은 잠시 숙연해졌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의구심과 불안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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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일어나? 깨어난 거 다 알고 있거든?”
산속의 아담한 초가집, 방안에서는 팔장을 낀 미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누워있는 청의동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불 위에 누워있는 청의동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다시 목검을 찔러 넣어줘야 일어나려나?”
청의동자가 눈을 번쩍 뜨고, 미르를 노려보았다.
“대체 정체가 뭐예요? 형아, 사람 맞아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리고.”
“형아, 혼종이었어요? 뭐? 도깨비?”
“헛소리 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 나랑 같이 갈 데가 있어.”
청의동자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뭐야, 서둘러 갈 데가 있다니까?”
“못가요. 이 상태로는.”
“못 가긴 왜 못가? 상처 하나 없이 다 나았으면서.”
“옷이 없으니까요!”
맞다. 청의동자의 옷은 도목검이 만든 불길로 모두 다 타버렸다.
순간 미르에게 짜증이 몰려왔다.
##
헉~
기루마을 촌장의 광에 갇혀 있던 아미가 잠에서 깨어났다. 이번에도 그녀의 뺨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미는 서둘러 가슴 품에 있는 작은 가죽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머리에 꽂혀있던 비녀를 뽑았다. 입술에 비녀 끝을 대더니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건 필기구로 쓸 수 있도록 비녀 끝엔 흑심이 박혀있었다.
끼익~
광문이 열렸다. 서둘러 수첩을 뒤로 감췄다.
미리내였다. 아미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미리내의 손에는 그녀의 봇짐이 들려져 있었다.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군요.”
미리내가 아미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는 분이 이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고,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것이니까요.”
한동안 둘은 서로 말없이 바라보았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아미였다.
“지금 순순히 털어놓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본가로 압송된 이후에는 어떤 고초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미리내의 의미심장한 말에, 아미가 다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당신의 오라비를 독살하려 했던 이유 말입니까?”
“아니, 그건 오라비의 말대로 농담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그렇게 애틋하게 바라볼 바보 천치는 아니니까요.”
애틋하게 바라볼 바보 천치? 아미의 맥박이 빨라졌다.
“청의동자라는 그 아이. 지금 어딨습니까?”
“그걸 왜 광에 갇혀있는 제게 물으십니까?”
“행방이 묘연해져서 그렇습니다. 주막에도 없다고 했습니다. 대신 이걸 찾았지요. 본인 거 맞습니까?”
“...”
미리내가 봇짐을 쏟았다. 독이 든 작은 호리병과 작은 가죽 수첩들과 파란색의 옷가지들이었다.
“본인 옷가지 대신, 그 아이의 옷가지만 있더군요. 그리고 이 호리병.”
아미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가 들어있나 했더니, 진짜 독이더군요. 저랑 동행했던 의원께서 확인해 주었으니, 설마 발뺌하지는 않겠지요?”
난처해진 아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오라비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뭡니까? 게다가 요상한 내용이 적혀있는 수첩은...”“맞습니다. 제가 당신의 오라비, 미르님을 독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당신도 바라던 일 아닙니까?”
미리내의 눈이 커졌다.
그때, 무사단 부단장 강이 급히 달려왔다.
“아가씨, 급한 일입니다.”
그리고 미리내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미리내의 눈은 더 커졌다.
“이무기가 나타나요?”
아미는 표정 변화 없이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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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렇게 입고 어딜 간다고 그래요?”
툇마루 기둥을 붙잡고 청의동자가 울상인 얼굴로 버티고 있었다. 그는 분홍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아이 옷이 없는데, 그러면 어떡해?”
미르가 청의동자를 달래보았지만, 청의동자는 완강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재밌다는 듯 하늘이 웃고 있었다.
“아니 잘 어울리는데 왜 그래?”
“내가 왜 청의동자인데요? 파란 옷을 입으니까, 청의동자라고요. 이렇게 입으면 홍의동녀가 된단 말이에요.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긴 하네요. 남자아이를 여자아이로 만들어버렸으니...”
탕약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던 시내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미르는 단호했다.
“그러니까, 옷을 사러 가자니까. 마을 포목점에서 새 옷 지으면 될 거 아냐. 고집 그만 부리고, 어서 가자니까? 시간 없다고!”
그때 마을 장정하나가 초가집으로 달려왔다.
“후. 여기 있었구먼. 시내, 너 여기 있을 거면, 여기 있을 거라고 미리 귀띔해 주던가? 너 찾으려고 온 동네들 다 뒤졌잖냐.”
“왜 그러세요?”
“아니 지금 일손이 달린다고 난리 아니냐. 할아버지가 너 빨리 찾아오란다.”
“오라버니들은요?”
“있으나 마나 한 오라비들 때문에 너희 할아버지가 쓰러지기 직전이라고. 뭐해, 어서 가자니까?”
시내가 난처해하자, 하늘이 의자바퀴를 움직이더니 시내의 손에 든 탕약을 뺏었다.
“다녀오십시오. 탕약도 많이 지어 놨으니, 제가 시간 봐가면서 챙기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시내는 서둘러 마차에 올랐고, 마을 장정도 재빨리 올라탔다.
말을 출발시키려다, 문뜩 미르를 포목점까지 태워줘야겠다는 생각이 난 시내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미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청의동자, 아니 홍의동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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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루마을 공터에는 무사단원들이 정렬해 있었다. 백여 명이었던 처음과 달리 지금은 절반 조금 넘는 인원이었다. 그들은 황금돼지의 여파에서 헤어나지 못한 듯, 다들 휑한 모습이었다.
부단장 강이 소리쳤다.
“지금 저루와 이루에서 괴물과 산송장들이 출몰했다는 소식이다.”
그 말에 무사단원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술렁거렸다.
“모두 조용! 다행히 본가에서 지금 이쪽으로 추가 병력이 오고 있단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강의 말에도 그들의 불안한 기색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하려면 적어도 하루는 더 소요될 것이다. 지금은 한시도 쉴 수 없는 위급사태이다. 하여, 우리는 먼저 그루 쪽으로 출발할 것이니 다들 채비하여라.”
다시 단원들은 소요하였고, 급기야 부장이 나서서 따졌다.
“부단장. 당신은 그 괴물을 못 봐서 그러는 모양인데, 괴물들은 우리가 간다고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오. 아무리 우리가 용병이라 하지만, 뻔히 죽을 걸 알고 간다는 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뭐? 부단장?”
강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 이리 나와.”
“쳇. 나오란다고 못 나갈까 봐? 아니 지가 부단장이면 부단장이지, 우리 목숨을 무슨 파리 목숨처럼...”
투덜거리며 앞으로 나오던 부장의 심장에 칼이 꽂혔다.
단원들은 예상치 못했던 전개에 다들 경악했다. 쓰러진 부장은 잠시 껄떡거리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다. 부장의 가슴에 꽂혔던 칼을 뽑으며 강이 소리쳤다.
“전장에서 명령 불복종과 하극상은 바로 즉결 처형이라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겠지? 앞으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면, 바로 그 자리에서 처형할 것이니 다들 명심해라. 해치가에서 지금껏 너희들의 온갖 만행을 보고도 눈감아 줬던 것은 이럴 때 목숨 값하라는 이유였다. 괜히 억울하다, 너무 한다, 그런 헛소리는 집어치워. 무사단은 치안을 담당하는 해치가의 유일한 무력 집단이고, 그래서 용병인 너희들은 누구보다 비싼 노임을 받아 왔다. 그런데 몸을 사려? 지금이라도 무사단의 옷을 벗고 싶은 자가 있다면 손을 들어. 당장 빼 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너희들이 받은 녹봉과 몰래 받은 각종 뇌물까지 모두 탈탈 털어 받아낼 것이고, 돈 없다고 배 쨀 생각을 한다면 목숨으로 그 값을 치르게 할 것이다. 어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거면, 사나이처럼 죽고 싶지 않나?”
단원들은 똥 씹은 얼굴만 할 뿐, 다들 입을 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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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루마을 포목점 앞, 시내의 마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어? 저 사람이 어떻게 저기에 있어?”
장정이 가리킨 곳에는 미르와 청의동자가 보였다.
“맞지, 저 사람, 아까 산속 초가집에 있던 사람, 아니야?”
“아니에요. 잘못 보신 거예요.”
“그래? 맞는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여자아이 옷이 비슷해서 헷갈리시는 거예요. 그리고 말이 되지 않잖아요. 어떻게 말을 탄 우리보다 빨리 올 수가 있어요?”
“하긴... 내가 뭘 잘못 먹었나? 하하하.”
시내는 어설프게라도 넘어가서 다행이다 싶었다. 사람들의 특별한 존재에 대한 거부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내의 마차는 포목점 앞을 지나갔다.
“뭐요? 하루나요? 저기 급해서 그런데, 지금 당장 지어줄 수는 없습니까? 이놈이 옷을 안 지어주면 꼼짝을 안 한다고 해서 그렇습니다.”
“그것도 엄청 빨리 짓는 거예요. 흠... 정 급하시면, 여기서 천만 사고 저기 이상한 데로 가보세요. 거기선 바로 지어줄 거예요.”
포목점 주인이 가리킨 곳은 허름한 옷 수선 가게였다.
“저기요? 근데, 왜 이상한 데라고 하는 겁니까?”
“당연히 이상하죠. 아니 어떻게 옷을 그렇게 후딱 지을 수가 있어요? 대체 말이 돼야지 원. 우리가 원래 옷을 짓는 집인데, 저 집에 꼬마가 온 후론, 이렇게 포목이나 팔아야 하는 신세가 됐지, 뭡니까?”
그 말에 미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아까부터 청의동자가 그 이상한 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때, 그 이상한 집의 문이 열리더니, 붉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자 꼬마가 나왔다. 미르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어라, 진짜 홍의동녀가 나타났네?”
미르가 웃으며, 청의동자를 바라보았다. 청의동자는 그녀와 계속 눈싸움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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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르 오라버니를 죽이려 했느냐?”
광에서는 여전히 미리내가 아미를 심문하고 있었다. 미리내는 더 이상 아미에게 존대하지 않았고, 태도 또한 죄인을 대하는 듯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이겠지요.”
“그러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대체 뭐냐니까!”
미리내가 아미를 노려보았다.
“그럼, 먼저 대답해 보시지요. 아가씨께서는 왜 오라비를 죽이려 하셨습니까?”
“이 미친. 내가 언제 미르오라비를 죽이려 했단 말이냐?”
“제가 보았습니다.”
“뭐?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것이냐? 하지도 않은 짓을 네가 어떻게 봐?”
그 말을 밖에서 엿듣고 있었던 기루마을 촌장이 화들짝 놀랐다.
“전 꿈을 꿉니다.”
“그래, 꿈을 많이도 꾸었더구나. 저기 적혀 있는 것들이 다 너의 꿈이지?”
아미는 뒤에 숨겨두었던 가죽 수첩을 내밀었다. 하지만 포승줄에 매여있던 탓에 손은 그녀의 무릎밖에 닿지를 않았다.
“지금 뭐 하자는 것이냐?”
“읽어보십시오. 제가 방금 꾸었던 꿈을 적은 것입니다.”
미리내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더니, 아미의 손에 쥔 가죽수첩을 휙 낚아챘다.
그리고 찬찬히 읽어보는데...
‘그녀가 잠들어 있는 그의 침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얀 분칠을 한 자가 준 칼을 그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눈으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당황스러워 재빨리 방밖으로 나갔다. 그는 손을 뻗으려 했으나, 차마 그럴 순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나지막이 말했다. 미리내야, 왜 그랬니. 그리고 그는 숨을 거뒀다.’
미리내는 황당한 눈으로 아미를 쳐다보았다.
“이게 대체 뭐란 말이냐? 네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개꿈을 꾸었다고, 어찌 내가 오라비를 죽였다고 주장하는 것이야. 너 미쳤어?”
“제가 꾼 수많은 개꿈들이 다 현실이 되었으니 문제이지 않겠습니까? 저는! 꿈에서 미래를 보는 저주받은 운명을 가진 자입니다.”
“뭐?”
미리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본가에서는 벌써 연통도 여러 개가 도착해 있었고, 해치가의 책사, 백산은 그 내용들을 종합하는 중이었다.
여섯 개의 연합부족 부족장들도 이 소식에 회의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원탁을 사이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봉화가 아직 꺼지지 않은 걸 보면 사태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50대 후반의 여성인 연족장은 근심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계속 타오르고 있으니, 상황이 아직 진행 중이란 뜻 아니겠습니까?"
30대로 보이는 여성인 난족장이 연족장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단이 급파되었다 하니, 지금쯤이면 기루나 그루에 당도했을 겁니다. 곧 사태의 진상이 밝혀지겠지요.”
60대의 남성인 무족장이 말을 받았다. 그는 무족의 근거지인 오른땅의 난리에 몹시 절망스러운 얼굴이었다.
“근데 이번 무사단을 이끈 통솔자가 미리내 아가씨랍니다. 괜찮겠습니까?”
40대의 여성인 인족장이 무족장의 말을 받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괜찮겠냐니? 영특하신 아가씨께서 그것도 못해내실까 봐 그러는 거요?”
40대 초반의 남성인 마족장이 발끈했다.
“맞습니다. 게다가 무사단의 단장, 부단장 모두 부재중이라는데, 미리내 아가씨께서 이끄시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50대의 사족이 마족장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한데, 이런 위급한 순간에 내세우는 게 맞을까요?”
“저도 찜찜합니다. 아가씨는 평소에도 건강이 안 좋아 거의 바깥출입도 삼가시는 분 아닙니까? 그런 분이 그 먼 여정을 견디실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연족장의 우려에 난족장이 힘을 보탰다.
“그래서 의원과 시종까지 동행을 했다지 않습니까? 위급한 상황에 몸소 나서는 헌신에 칭송은 못 할망정, 무슨 기우들입니까?”
회의장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연족장, 인족장, 난족장은 미리내의 역량에 대한 의구심을 내비쳤지만, 무족장, 사족장, 마족장은 그녀를 신뢰하는 입장인 모양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해치가의 가주 미치루가 회의장에 들어섰다.
“아니, 이게 무슨 난리랍니까?”
“이유는 밝혀진 것이 있습니까?”
미치루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루와 저루에 사고가 생긴 듯합니다.”
“이루까지요?”
“대체 무슨 일이 난 것입니까?
“그게... 이무기라고 추정되는 괴물과 산송장들에 습격받았다 합니다."
미치루의 말에 회의장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이무기요? 제가 알고 있는 그 이무기가 맞습니까? 그 커다란 뱀, 뭐인가 하는 거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그 이무기가 출몰하였다는 연통이 왔습니다.”
“아이고 세상에나...”
“근데, 산송장이라니요. 그건 또 뭔 소리입니까?”
“그게 사람들이 산송장처럼 변하여, 살아있는 사람들을 마구 공격하였다 합니다.”
부족장들은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아니, 이런 중대한 일에 미리내 아가씨에게 무사단을 이끌라 하신 겁니까?”
연족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부단장이 합류했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미리내는 부상병들을 데리고 복귀할 것입니다.”
“부상병이오? 벌써 괴물들과 조우를 한 것입니까?”
미치루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기루에서 황금돼지라는 괴물이 무사단원들을 습격하였답니다.”
“기루에서요? 기루에도 괴물이 나타난 것입니까?”
“아니 어찌 이런 일들이 연달아 일어난답니까?”
“그럼, 빨리 무사단을 추가로 보내야지 않겠습니까? 아니, 대체 단장이라는 사람은 어딜 간 것입니까?”
“가주님이 단장을 통제하지 못하니 이런 사단이 나는 것 아닙니까?”
“그게 가주님 탓입니까? 무사단을 건드릴 수 없게 만든 용천가 탓이지.”
“여하튼, 하루빨리 추가 병력을 보내야지 않겠습니까? 백산이나 백운 중 한 사람이라도 추가 병력을 데리고 가라 하십시오.”
“그나저나 그루는 안전할까요?”
부족장들은 연이어 의문과 불안감을 쏟아냈다.
그때 무족장이 원탁을 탕치며 소리를 높였다.
"지금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거나 불신하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로 뭉쳐 위기에 대처해야 할 때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엄중함이 담겨 있었다. 이 땅의 토박이자, 우직함의 대명사인 무족장은 해치가의 가주, 미치루에게 늘 힘이 되어주었다. 자신 부족들의 근거지가 쑥밭이 되었는데도, 난리법석을 떠는 다른 부족장들과는 달리 침착성을 보였다.
“맞습니다. 무족장님 말씀대로 이런 돌발적인 사태에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사 백운 선생이 남은 무사단 전 병력을 이끌고 기루로 향하였습니다. 하여 지금 이곳 마루에는 치안을 담당할 무사단원이 없습니다. 각 부족장께서는 부족원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주시고, 아울러 결속을 다지는 데에 집중해 주십시오. 강이 부단장이 이끄는 무사단의 활약상을 기대하며, 우리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치루의 말에 부족장들은 잠시 숙연해졌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의구심과 불안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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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일어나? 깨어난 거 다 알고 있거든?”
산속의 아담한 초가집, 방안에서는 팔장을 낀 미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누워있는 청의동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불 위에 누워있는 청의동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다시 목검을 찔러 넣어줘야 일어나려나?”
청의동자가 눈을 번쩍 뜨고, 미르를 노려보았다.
“대체 정체가 뭐예요? 형아, 사람 맞아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리고.”
“형아, 혼종이었어요? 뭐? 도깨비?”
“헛소리 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 나랑 같이 갈 데가 있어.”
청의동자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뭐야, 서둘러 갈 데가 있다니까?”
“못가요. 이 상태로는.”
“못 가긴 왜 못가? 상처 하나 없이 다 나았으면서.”
“옷이 없으니까요!”
맞다. 청의동자의 옷은 도목검이 만든 불길로 모두 다 타버렸다.
순간 미르에게 짜증이 몰려왔다.
##
헉~
기루마을 촌장의 광에 갇혀 있던 아미가 잠에서 깨어났다. 이번에도 그녀의 뺨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미는 서둘러 가슴 품에 있는 작은 가죽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머리에 꽂혀있던 비녀를 뽑았다. 입술에 비녀 끝을 대더니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건 필기구로 쓸 수 있도록 비녀 끝엔 흑심이 박혀있었다.
끼익~
광문이 열렸다. 서둘러 수첩을 뒤로 감췄다.
미리내였다. 아미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미리내의 손에는 그녀의 봇짐이 들려져 있었다.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군요.”
미리내가 아미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는 분이 이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고,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것이니까요.”
한동안 둘은 서로 말없이 바라보았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아미였다.
“지금 순순히 털어놓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본가로 압송된 이후에는 어떤 고초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미리내의 의미심장한 말에, 아미가 다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당신의 오라비를 독살하려 했던 이유 말입니까?”
“아니, 그건 오라비의 말대로 농담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그렇게 애틋하게 바라볼 바보 천치는 아니니까요.”
애틋하게 바라볼 바보 천치? 아미의 맥박이 빨라졌다.
“청의동자라는 그 아이. 지금 어딨습니까?”
“그걸 왜 광에 갇혀있는 제게 물으십니까?”
“행방이 묘연해져서 그렇습니다. 주막에도 없다고 했습니다. 대신 이걸 찾았지요. 본인 거 맞습니까?”
“...”
미리내가 봇짐을 쏟았다. 독이 든 작은 호리병과 작은 가죽 수첩들과 파란색의 옷가지들이었다.
“본인 옷가지 대신, 그 아이의 옷가지만 있더군요. 그리고 이 호리병.”
아미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가 들어있나 했더니, 진짜 독이더군요. 저랑 동행했던 의원께서 확인해 주었으니, 설마 발뺌하지는 않겠지요?”
난처해진 아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오라비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뭡니까? 게다가 요상한 내용이 적혀있는 수첩은...”“맞습니다. 제가 당신의 오라비, 미르님을 독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당신도 바라던 일 아닙니까?”
미리내의 눈이 커졌다.
그때, 무사단 부단장 강이 급히 달려왔다.
“아가씨, 급한 일입니다.”
그리고 미리내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미리내의 눈은 더 커졌다.
“이무기가 나타나요?”
아미는 표정 변화 없이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
“아니, 이렇게 입고 어딜 간다고 그래요?”
툇마루 기둥을 붙잡고 청의동자가 울상인 얼굴로 버티고 있었다. 그는 분홍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아이 옷이 없는데, 그러면 어떡해?”
미르가 청의동자를 달래보았지만, 청의동자는 완강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재밌다는 듯 하늘이 웃고 있었다.
“아니 잘 어울리는데 왜 그래?”
“내가 왜 청의동자인데요? 파란 옷을 입으니까, 청의동자라고요. 이렇게 입으면 홍의동녀가 된단 말이에요.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긴 하네요. 남자아이를 여자아이로 만들어버렸으니...”
탕약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던 시내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미르는 단호했다.
“그러니까, 옷을 사러 가자니까. 마을 포목점에서 새 옷 지으면 될 거 아냐. 고집 그만 부리고, 어서 가자니까? 시간 없다고!”
그때 마을 장정하나가 초가집으로 달려왔다.
“후. 여기 있었구먼. 시내, 너 여기 있을 거면, 여기 있을 거라고 미리 귀띔해 주던가? 너 찾으려고 온 동네들 다 뒤졌잖냐.”
“왜 그러세요?”
“아니 지금 일손이 달린다고 난리 아니냐. 할아버지가 너 빨리 찾아오란다.”
“오라버니들은요?”
“있으나 마나 한 오라비들 때문에 너희 할아버지가 쓰러지기 직전이라고. 뭐해, 어서 가자니까?”
시내가 난처해하자, 하늘이 의자바퀴를 움직이더니 시내의 손에 든 탕약을 뺏었다.
“다녀오십시오. 탕약도 많이 지어 놨으니, 제가 시간 봐가면서 챙기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시내는 서둘러 마차에 올랐고, 마을 장정도 재빨리 올라탔다.
말을 출발시키려다, 문뜩 미르를 포목점까지 태워줘야겠다는 생각이 난 시내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미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청의동자, 아니 홍의동녀도.
##
기루마을 공터에는 무사단원들이 정렬해 있었다. 백여 명이었던 처음과 달리 지금은 절반 조금 넘는 인원이었다. 그들은 황금돼지의 여파에서 헤어나지 못한 듯, 다들 휑한 모습이었다.
부단장 강이 소리쳤다.
“지금 저루와 이루에서 괴물과 산송장들이 출몰했다는 소식이다.”
그 말에 무사단원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술렁거렸다.
“모두 조용! 다행히 본가에서 지금 이쪽으로 추가 병력이 오고 있단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강의 말에도 그들의 불안한 기색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하려면 적어도 하루는 더 소요될 것이다. 지금은 한시도 쉴 수 없는 위급사태이다. 하여, 우리는 먼저 그루 쪽으로 출발할 것이니 다들 채비하여라.”
다시 단원들은 소요하였고, 급기야 부장이 나서서 따졌다.
“부단장. 당신은 그 괴물을 못 봐서 그러는 모양인데, 괴물들은 우리가 간다고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오. 아무리 우리가 용병이라 하지만, 뻔히 죽을 걸 알고 간다는 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뭐? 부단장?”
강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 이리 나와.”
“쳇. 나오란다고 못 나갈까 봐? 아니 지가 부단장이면 부단장이지, 우리 목숨을 무슨 파리 목숨처럼...”
투덜거리며 앞으로 나오던 부장의 심장에 칼이 꽂혔다.
단원들은 예상치 못했던 전개에 다들 경악했다. 쓰러진 부장은 잠시 껄떡거리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다. 부장의 가슴에 꽂혔던 칼을 뽑으며 강이 소리쳤다.
“전장에서 명령 불복종과 하극상은 바로 즉결 처형이라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겠지? 앞으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면, 바로 그 자리에서 처형할 것이니 다들 명심해라. 해치가에서 지금껏 너희들의 온갖 만행을 보고도 눈감아 줬던 것은 이럴 때 목숨 값하라는 이유였다. 괜히 억울하다, 너무 한다, 그런 헛소리는 집어치워. 무사단은 치안을 담당하는 해치가의 유일한 무력 집단이고, 그래서 용병인 너희들은 누구보다 비싼 노임을 받아 왔다. 그런데 몸을 사려? 지금이라도 무사단의 옷을 벗고 싶은 자가 있다면 손을 들어. 당장 빼 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너희들이 받은 녹봉과 몰래 받은 각종 뇌물까지 모두 탈탈 털어 받아낼 것이고, 돈 없다고 배 쨀 생각을 한다면 목숨으로 그 값을 치르게 할 것이다. 어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거면, 사나이처럼 죽고 싶지 않나?”
단원들은 똥 씹은 얼굴만 할 뿐, 다들 입을 열지 못했다.
##
기루마을 포목점 앞, 시내의 마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어? 저 사람이 어떻게 저기에 있어?”
장정이 가리킨 곳에는 미르와 청의동자가 보였다.
“맞지, 저 사람, 아까 산속 초가집에 있던 사람, 아니야?”
“아니에요. 잘못 보신 거예요.”
“그래? 맞는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여자아이 옷이 비슷해서 헷갈리시는 거예요. 그리고 말이 되지 않잖아요. 어떻게 말을 탄 우리보다 빨리 올 수가 있어요?”
“하긴... 내가 뭘 잘못 먹었나? 하하하.”
시내는 어설프게라도 넘어가서 다행이다 싶었다. 사람들의 특별한 존재에 대한 거부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내의 마차는 포목점 앞을 지나갔다.
“뭐요? 하루나요? 저기 급해서 그런데, 지금 당장 지어줄 수는 없습니까? 이놈이 옷을 안 지어주면 꼼짝을 안 한다고 해서 그렇습니다.”
“그것도 엄청 빨리 짓는 거예요. 흠... 정 급하시면, 여기서 천만 사고 저기 이상한 데로 가보세요. 거기선 바로 지어줄 거예요.”
포목점 주인이 가리킨 곳은 허름한 옷 수선 가게였다.
“저기요? 근데, 왜 이상한 데라고 하는 겁니까?”
“당연히 이상하죠. 아니 어떻게 옷을 그렇게 후딱 지을 수가 있어요? 대체 말이 돼야지 원. 우리가 원래 옷을 짓는 집인데, 저 집에 꼬마가 온 후론, 이렇게 포목이나 팔아야 하는 신세가 됐지, 뭡니까?”
그 말에 미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아까부터 청의동자가 그 이상한 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때, 그 이상한 집의 문이 열리더니, 붉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자 꼬마가 나왔다. 미르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어라, 진짜 홍의동녀가 나타났네?”
미르가 웃으며, 청의동자를 바라보았다. 청의동자는 그녀와 계속 눈싸움 중이었다.
##
“왜 미르 오라버니를 죽이려 했느냐?”
광에서는 여전히 미리내가 아미를 심문하고 있었다. 미리내는 더 이상 아미에게 존대하지 않았고, 태도 또한 죄인을 대하는 듯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이겠지요.”
“그러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대체 뭐냐니까!”
미리내가 아미를 노려보았다.
“그럼, 먼저 대답해 보시지요. 아가씨께서는 왜 오라비를 죽이려 하셨습니까?”
“이 미친. 내가 언제 미르오라비를 죽이려 했단 말이냐?”
“제가 보았습니다.”
“뭐?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것이냐? 하지도 않은 짓을 네가 어떻게 봐?”
그 말을 밖에서 엿듣고 있었던 기루마을 촌장이 화들짝 놀랐다.
“전 꿈을 꿉니다.”
“그래, 꿈을 많이도 꾸었더구나. 저기 적혀 있는 것들이 다 너의 꿈이지?”
아미는 뒤에 숨겨두었던 가죽 수첩을 내밀었다. 하지만 포승줄에 매여있던 탓에 손은 그녀의 무릎밖에 닿지를 않았다.
“지금 뭐 하자는 것이냐?”
“읽어보십시오. 제가 방금 꾸었던 꿈을 적은 것입니다.”
미리내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더니, 아미의 손에 쥔 가죽수첩을 휙 낚아챘다.
그리고 찬찬히 읽어보는데...
‘그녀가 잠들어 있는 그의 침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얀 분칠을 한 자가 준 칼을 그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눈으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당황스러워 재빨리 방밖으로 나갔다. 그는 손을 뻗으려 했으나, 차마 그럴 순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나지막이 말했다. 미리내야, 왜 그랬니. 그리고 그는 숨을 거뒀다.’
미리내는 황당한 눈으로 아미를 쳐다보았다.
“이게 대체 뭐란 말이냐? 네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개꿈을 꾸었다고, 어찌 내가 오라비를 죽였다고 주장하는 것이야. 너 미쳤어?”
“제가 꾼 수많은 개꿈들이 다 현실이 되었으니 문제이지 않겠습니까? 저는! 꿈에서 미래를 보는 저주받은 운명을 가진 자입니다.”
“뭐?”
미리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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