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가려진 실체, 그 너머에는- 3
조회 : 653 추천 : 0 글자수 : 7,480 자 2024-05-19
아미는 미리내의 실물을 보자, 조각상이 살아난 것 같았다. 미리내는 고전적인 동양 미인의 면모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초승달 같은 눈매에 맑고 총명한 눈동자, 도자기처럼 매끄럽고 환한 피부, 그리고 비단결 같은 윤기를 자랑하는 검은 머릿결. 코는 오뚝하고 적당히 높아 귀족적인 기품을 더했고, 입술은 복숭아 꽃잎처럼 붉고 오므라들어 있어, 작지만, 도톰한 윤곽을 자랑하는 듯했다. 다만 지금의 그녀는 피로에 찌들어 보였다. 봉화의 근원지를 밝혀야 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무사들을 이끌며 긴 여정을 시작한 그녀였기에,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무사들의 불손한 태도로 인해 미리내의 미간에는 옅은 심려의 빛이 어려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말하는 아미에게 의문을 품는 듯했다.
“누구십니까?”
“저는 아미라고 합니다.”
미리내의 눈에 비친 아미는 긴 생머리가 밤하늘 같은 검은빛이었지만, 볕에 비치면 적동색으로 깊이 있게 빛났다. 그녀의 이국적인 베이지 톤 피부는 마치 꿀을 바른 것처럼 부드럽고 촉촉해 보였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 끝에는 호수같이 맑고 깊은 눈동자가 있었고, 붉고 도톰한 입술과 오뚝한 콧날은 동서양의 미를 합쳐 놓은 듯,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했다. 이국적인 미모임에도 검은 동양의 머릿결과 눈매 덕에, 아미는 친근하면서도 신비로운 인상을 풍겼다. 특유의 우아한 자태와 차분한 미소는 그녀에게서 나오는 특별한 기운을 한층 배가시켰다. 미리내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이 여자가 범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저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급히 도움을 청하려고 왔습니다.”
도움이라는 말에 미리내는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미 여러 가지 문제로 머리가 아픈데, 아미의 말이 또 다른 문제를 가져오는 듯해 급격히 체력이 바닥나는 기분이었다.
“이 마을 촌장께서 그대의 사연을 들어주시지 않으셨나요?”
“아니요.”
“혹시, 촌장이 관여된 일이어서 그런 건가요?”
“아닙니다.”
미리내는 짧은 대답으로 계속 말을 이어가게 만드는 정체 모를 여인에게 짜증이 났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시종이 끼어들었다.
“저기요, 듣자 하니 참 경우가 없으신 분이네요. 일에는 다 절차가 있는 법이에요. 곤란한 상황이 생겼으면 먼저 마을 촌장부터 찾아가세요. 그게 순서예요. 이렇게 불쑥 나타나서 떼를 쓰면 일이 빨리 해결될 줄 알았다면, 그건 큰 오산이에요. 그리고 아가씨께서는 지금 무리한 여정으로 인해 매우 피곤하셔서 일일이 민원을 들어줄 상태가 아니십니다. 공무 방해로 벌을 받고 싶지 않다면, 어서 물러가세요.”
“촌장님은 제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찾아가 보지도 않고 무슨 그런 말부터 해요?”
“저는 이미 알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시종은 기가 찼고, 듣고 있던 의원도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눈에는 아미가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은 시종이 서둘러 미리내를 모시고 자리를 뜨려 했으나, 아미가 다시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장차 가문을 이끄실 분께서, 이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참상을 외면하실 것입니까?”
그 말에 놀란 미리내가 아미를 쳐다보는데, 기루 마을 촌장이 무사단 부장과 함께 황급히 달려왔다. 그는 숨을 고르며 미리내에게 인사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아가씨. 저는 이 마을의 촌장, 갈지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무족장님께서 아가씨께서 이쪽에서 잠시 머무를 수도 있으니, 깍듯이 모시라고 연통을 주셨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누추하지만, 제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떠나실 동안 편히 지내십시오.”
“그보다 저 여인의 말을 같이 들어보시겠습니까? 아미라고 했지요? 어디 다시 한번 말해보세요. 방금 이 마을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습니까?”
촌장은 미리내의 말에 황당한 표정으로 아미를 쳐다보았다.
아미는 단호하게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촌장님은 물론 마을 사람들은 그 진실을 모르고 있지만.”
##
기루마을의 외곽,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한 노인이 가죽 신발을 짓고 있었다.
대청마루에 앉은 노인은 얼굴에 그을린 주름이 깊게 파여 있었고, 어두운 그늘이 자리한 저녁의 초가집 속에서 그의 모습은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 그의 다리는 일그러져 있었고, 뼈와 근육이 거의 드러나 있었는데, 그것은 찢어진 살 조각 같았다. 가죽 신발을 짓는 손은 힘없이 떨리며 실을 꿰는데, 그 손길에는 죽음의 냄새가 감돌았다.
“봤어? 봤지?”
초가집 울타리에서 몰래 노인을 훔쳐보고 있던 바람이 하늘에게 속삭였다.
“네. 진짜 생긴 게 딱 그 노인데요, 형님?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게. 어떻게 삼 년이 지났는데도, 그 모습 그대로냐?”
“아니, 갓난애도 아니고, 삼 년 지났다고 노인의 모습이 얼마나 변한다고 그러십니까?”
“말이 그렇다고! 이 자식은 이런 상황에도 꼭 따져요.”
바람이 삐친 듯, 하늘을 노려보았다.
“어이, 이 봐들. 거기서 뭘 그리 속닥거리고 계시나?”
허걱~
바람과 하늘은 도둑질하다 들킨 듯, 몸을 납작 엎드렸다.
“불편하게 거기 엎드려있지 말고, 이리 나와 봐. 어서!”
노인의 호통에 벌떡 일어나는 바람과 하늘, 하지만 차마 노인을 쳐다볼 수는 없었다.
“오라, 댁들이었구먼. 어떻게 그동안 잘 지내셨소?”
노인의 말에 바람과 하늘은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인은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하늘은 간신히 입을 떼었다.
“우리를 아십니까?”
“우리 구면 아닌가? 한 삼 년 되었지, 아마?”
바람과 하늘의 몸이 떨려왔다.
##
기루 마을 주막 안은 무사단원들로 인해 왁자지껄했다. 주막부부는 그들의 주문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청의동자는 주막부부의 일손을 돕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피곤한 얼굴로 방에서 나오던 시내 때문이었다. 그녀는 밤새 미르의 열을 내리기 위해 찬물로 그의 몸을 닦아주었고, 그 물을 새롭게 뜨기 위해 나오던 길이었다. 그녀가 무사단원들의 시선에 노출되자, 환호성과 함께 단원들의 관심은 온통 그녀를 향했다.
“오우, 엉덩이가 탐스럽게 잘 영글었는데?”
“그러면 뭐하냐? 가슴이 민짜인데.”
단원들은 시내의 몸매를 희롱하는 말을 거침없이 던졌고, 그들의 언동은 시내에게는 짜증스럽고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특히 그중 한 명은 시내에게 불쾌한 눈길을 보내며 무례한 소리를 내뱉었다.
“이봐, 아가씨. 우리 한 번 잘까? 어때?”
그의 무례한 행동은 시내에게 고통스러움을 안겼다. 하지만, 그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주막부부는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좀 전만 해도, 주막 아낙네를 희롱하다 항의하는 주막 사내가 맞아 죽을 뻔했었다. 때마침 청의동자가 나타나자, 어린애 앞에서는 창피했던지, 자중하는 듯했다. 근데, 시내가 등장하자, 또다시 그들의 일그러진 본성이 마구 표출되는 모양이었다. 청의동자는 간신히 참고 있었다. 아미가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동자야, 이 마을에서는 실수하면 큰일 나. 특히 황금돼지를 쫓아내기 전에는 절대로!
내 말 알겠지?’
시내는 새 물을 뜨러 가지도 못하고, 난생처음 겪어보는 거친 사내에 희롱에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아미의 얘기에도 냉철하게 응대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 큰 저자가 왜 그래? 내숭 떨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어떠냐고, 나랑 한번 자자.”
헉~
갑자기, 단원이 목을 움켜쥐고 뒤로 물러났다. 얼굴이 금방 시퍼렇게 변했다. 기도가 막힌 모양이었다. 그 사이, 시내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 청의동자가 씨익 웃었다. 그 의 손에는 부러진 고등어가시가 들려져 있었다.
##
“뭐요? 황금 돼지? 이 여자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아가씨, 더 이상 들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여인 같습니다. 어서 제집으로 가시지요, 제가 성심성의껏 음식을 마련했습니다. 부장님도 가시지요.”
“예, 그러지요. 으휴, 얼굴은 반반하게 생겨가지고, 어찌 저리 되었는지, 참 안타깝네 그려. 쯔쯔.”
무사단 부장이 음흉한 얼굴로 아미의 몸매를 훑더니, 앞장서는 촌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미리내는 뭔가를 고심하는 듯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시종과 의원은 그녀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촌장이 답답하다는 듯, 미리내를 쳐다보더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성큼성큼 아미 앞으로 걸어갔다.
“야, 이 미친년아. 너 뭐야? 가뜩이나 봉화 때문에 상심이 크실 아가씨께 이런 불순한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가 뭐야? 너, 간자야? 어? 어서 대답하지 못해?”
기루마을 촌장은 아미를 빨리 치우지 않으면 해치가의 차기 가주, 미리내의 환심을 살 기회를 망칠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급기야는 아미에게 손찌검하려는 듯, 손을 높이 들었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촌장을 막아섰다. 바람이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넌 또 뭐야?”
“어? 너, 바람이 아냐? 네가 왜 여기 있어?”
무사단 부장은 바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바람의 무사단 동기였다.
“왜긴, 임무 때문이지.”
“뭐? 야, 넌 유배지나 지켜야지, 여기서 뭔 임무? 너 이러면 근무지 이탈인 거 몰라? 영원히 잘리고 싶어?”
부장은 실실 쪼개며 바람의 약을 올렸다. 바람은 부글거리는 듯, 인상을 쓰더니 아미를 쳐다보았다. 아미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한숨을 쉬더니 바람이 부장에게 말했다.
“그래, 잘리면 잘리는 거지. 자르라, 그래.”
“혹시, 그때 미르 오라버니와 함께 있었던 단원 맞습니까?”
미리내가 바람에게 물었다. 바람이 미리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예. 맞습니다. 아가씨.”
“근데, 여기엔 왜 계시는 것입니까? 혹시, 오라버니께서 여기에 와 계신 것입니까?”
미리내의 질문에 아미의 동공이 커졌다.
“아니, 유배지에 있어야 할 죄인이 여기에 있다니요?”
“오라버니는 이미 사면 되셨습니다. 더 이상 죄인이란 말은 입에 담지 마세요.”
미리내의 대답에 놀란 부장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닙니다. 미르 도련님께서 사면됨에 따라, 저희의 소임이 끝났다고 여겨 오랜만에 고향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한데, 여기에서 삼 년 전 저잣거리에서 죽은 신발 장수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 말에 다들 놀란 표정이었다.
“아니,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삼 년 전에 죽은 자가 여기에 살고 있다니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잘못 본 것 아닌가 해서, 다시 가서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자가 본인 입으로 맞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그때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엔 아미조차도 놀란 듯했다.
“그렇다면, 미르 오라버니는 억울한 유배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까?”
“나머지 두 명에 대해선 모르겠지만, 그 신발 장수에 관해선 억울한 벌을 받은 거라 사료됩니다.”
바람은 아미가 미리 준비시켜 준 대로 조리 있게 잘 말하고 있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여기에서도 똑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짓이라니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연쇄살인!”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평화롭기 그지없는 우리 마을에서 연쇄살인이라니?”
“주막집 딸이 며칠 전에 야반도주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본 목격자가 있었는데, 바로 신발을 짓는 그 노인이었습니다. 그전에 야반도주했다고 알려진 세 명의 처자도 목격자는 그가 유일했습니다.”
또다시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지만, 미리내는 아미가 말한 황금돼지가 그 신발 장수 노인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미리내가 아미를 쳐다보았다. 아미는 차분한 표정으로 미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그래야, 정체를 들킨 그자가 이 마을을 떠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무슨 소리요? 그자가 아녀자들을 살인한 자라면 그냥 못 보내지. 붙잡아서 그에 마땅한 처벌을 받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미리내와 아미의 대화에 끼어든 촌장은 자칫 자신이 궁지에 몰릴 수 있는 상황임을 자각하게 되었고, 아까와는 다른 적극적인 태도로 마을에 대한 관리 소홀에 대한 문책을 모면할 국면전환을 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미는 도와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안 됩니다. 황금돼지는 사람들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괜히 잡으려 했다가는 인명피해만 더 늘어날 것입니다.”
“아니 무슨 말이오? 무사단도 와 있는 마당에, 살인자를 그냥 놔두잔 말이오? 부장님,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흠. 물론 그렇지요. 해치가의 치안을 맡은 무사단이 뻔히 여기 있는데, 범인을 그냥 도망가게 놔둘 수는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아가씨?”
촌장과 부장은 속셈은 달랐지만, 노인을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도망가기는 개뿔. 지금 기다리고 있다니까. 어서 자기 잡아가라고. 지금 하늘이가 거기서 같이 기다리고 있어!”
바람의 말에 마을 촌장과 무사단 부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리내는 난감한 상황에 아미를 쳐다보았다. 마치 조언을 구하는 얼굴이었다.
“퇴로가 막혀 궁지에 몰린 야수가 제일 무서운 법입니다.”
##
하늘은 툇마루에 앉아, 노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노인은 태연하게 신발을 짓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난 식성이 까다로워서 남자 고깃덩이는 안 좋아해.”
섬뜩한 그의 말에, 하늘은 오금이 떨렸다.
그때, 어디선가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 짧은 꼬리 황금돼지는~
착한 사람 인두겁 쓰고~
슬금슬금 다가와서는~
홀딱 벗겨 잡수고 간다~ ♬
지금껏 느긋한 태도를 유지하던 노인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누구야? 저딴 노래를 부르는 게. 야, 너!”
“네? 전 전혀 모릅니다. 진짜예요.”
“어서 가서 알아 와. 어서!”
노인은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리며 호통을 쳤다. 순간, 하늘은 노랫소리가 나는 쪽으로 죽어라 뛰었다. 큰 바위를 도는 순간, 누군가 그를 확 잡아챘다. 바람이었다. 바위 뒤에는 미리내와 시종, 의원, 그리고 촌장이 무장한 마을 청년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수십 명의 마을 어린이들은 아미의 지휘 아래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늘과 바람은 서로를 보며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씨익 웃었다.
한편, 하늘이 돌아오지 않자 도망간 걸 눈치챈 노인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이 재밌다는 듯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실성한 사람처럼 한참을 웃었다. 그 사이, 아이들의 노래는 사라졌다.
“뭐야? 고작 이것으로 날 쫓아내 보겠다는 거야?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황금돼지 어르신.”
노인의 앞에는 아미가 서 있었다. 아미의 자태를 보자, 노인은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둔 식도락가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제 발로 걸어오다니~ 오늘은 똥 밟은 날이 아니라, 운수 대통한 날이었구먼.”
“이제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어서 떠나시지요. 온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기 전에.”
“오매 무서워라. 기특한 년. 넌 내가 싫어하는 것을 잘도 알고 있구나. 어떻게 알았느냐? 죽기보다 싫어하는 게 인간 아이들의 조롱이라는 거. 내가 말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널 보는 순간 그깟 조롱 좀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미의 표정이 굳어졌다.
“후회하실 텐데요.”
“에이, 너 같은 맛있는 음식을 놔두고 떠나는 게 더 후회될 것 같은데? 척 봐도 넌 한입에 먹어버리기에는 너무도 아깝구나. 내 특별히 두고두고 맛을 봐야겠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주 잘근잘근 씹어주마. 내 눈에 띈 이상,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라. 흐흐흐.”
노인은 비릿하게 웃으며 혀를 내밀어 침이 범벅인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누구십니까?”
“저는 아미라고 합니다.”
미리내의 눈에 비친 아미는 긴 생머리가 밤하늘 같은 검은빛이었지만, 볕에 비치면 적동색으로 깊이 있게 빛났다. 그녀의 이국적인 베이지 톤 피부는 마치 꿀을 바른 것처럼 부드럽고 촉촉해 보였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 끝에는 호수같이 맑고 깊은 눈동자가 있었고, 붉고 도톰한 입술과 오뚝한 콧날은 동서양의 미를 합쳐 놓은 듯,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했다. 이국적인 미모임에도 검은 동양의 머릿결과 눈매 덕에, 아미는 친근하면서도 신비로운 인상을 풍겼다. 특유의 우아한 자태와 차분한 미소는 그녀에게서 나오는 특별한 기운을 한층 배가시켰다. 미리내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이 여자가 범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저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급히 도움을 청하려고 왔습니다.”
도움이라는 말에 미리내는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미 여러 가지 문제로 머리가 아픈데, 아미의 말이 또 다른 문제를 가져오는 듯해 급격히 체력이 바닥나는 기분이었다.
“이 마을 촌장께서 그대의 사연을 들어주시지 않으셨나요?”
“아니요.”
“혹시, 촌장이 관여된 일이어서 그런 건가요?”
“아닙니다.”
미리내는 짧은 대답으로 계속 말을 이어가게 만드는 정체 모를 여인에게 짜증이 났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시종이 끼어들었다.
“저기요, 듣자 하니 참 경우가 없으신 분이네요. 일에는 다 절차가 있는 법이에요. 곤란한 상황이 생겼으면 먼저 마을 촌장부터 찾아가세요. 그게 순서예요. 이렇게 불쑥 나타나서 떼를 쓰면 일이 빨리 해결될 줄 알았다면, 그건 큰 오산이에요. 그리고 아가씨께서는 지금 무리한 여정으로 인해 매우 피곤하셔서 일일이 민원을 들어줄 상태가 아니십니다. 공무 방해로 벌을 받고 싶지 않다면, 어서 물러가세요.”
“촌장님은 제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찾아가 보지도 않고 무슨 그런 말부터 해요?”
“저는 이미 알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시종은 기가 찼고, 듣고 있던 의원도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눈에는 아미가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은 시종이 서둘러 미리내를 모시고 자리를 뜨려 했으나, 아미가 다시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장차 가문을 이끄실 분께서, 이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참상을 외면하실 것입니까?”
그 말에 놀란 미리내가 아미를 쳐다보는데, 기루 마을 촌장이 무사단 부장과 함께 황급히 달려왔다. 그는 숨을 고르며 미리내에게 인사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아가씨. 저는 이 마을의 촌장, 갈지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무족장님께서 아가씨께서 이쪽에서 잠시 머무를 수도 있으니, 깍듯이 모시라고 연통을 주셨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누추하지만, 제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떠나실 동안 편히 지내십시오.”
“그보다 저 여인의 말을 같이 들어보시겠습니까? 아미라고 했지요? 어디 다시 한번 말해보세요. 방금 이 마을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습니까?”
촌장은 미리내의 말에 황당한 표정으로 아미를 쳐다보았다.
아미는 단호하게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촌장님은 물론 마을 사람들은 그 진실을 모르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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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루마을의 외곽,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한 노인이 가죽 신발을 짓고 있었다.
대청마루에 앉은 노인은 얼굴에 그을린 주름이 깊게 파여 있었고, 어두운 그늘이 자리한 저녁의 초가집 속에서 그의 모습은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 그의 다리는 일그러져 있었고, 뼈와 근육이 거의 드러나 있었는데, 그것은 찢어진 살 조각 같았다. 가죽 신발을 짓는 손은 힘없이 떨리며 실을 꿰는데, 그 손길에는 죽음의 냄새가 감돌았다.
“봤어? 봤지?”
초가집 울타리에서 몰래 노인을 훔쳐보고 있던 바람이 하늘에게 속삭였다.
“네. 진짜 생긴 게 딱 그 노인데요, 형님?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게. 어떻게 삼 년이 지났는데도, 그 모습 그대로냐?”
“아니, 갓난애도 아니고, 삼 년 지났다고 노인의 모습이 얼마나 변한다고 그러십니까?”
“말이 그렇다고! 이 자식은 이런 상황에도 꼭 따져요.”
바람이 삐친 듯, 하늘을 노려보았다.
“어이, 이 봐들. 거기서 뭘 그리 속닥거리고 계시나?”
허걱~
바람과 하늘은 도둑질하다 들킨 듯, 몸을 납작 엎드렸다.
“불편하게 거기 엎드려있지 말고, 이리 나와 봐. 어서!”
노인의 호통에 벌떡 일어나는 바람과 하늘, 하지만 차마 노인을 쳐다볼 수는 없었다.
“오라, 댁들이었구먼. 어떻게 그동안 잘 지내셨소?”
노인의 말에 바람과 하늘은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인은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하늘은 간신히 입을 떼었다.
“우리를 아십니까?”
“우리 구면 아닌가? 한 삼 년 되었지, 아마?”
바람과 하늘의 몸이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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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루 마을 주막 안은 무사단원들로 인해 왁자지껄했다. 주막부부는 그들의 주문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청의동자는 주막부부의 일손을 돕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피곤한 얼굴로 방에서 나오던 시내 때문이었다. 그녀는 밤새 미르의 열을 내리기 위해 찬물로 그의 몸을 닦아주었고, 그 물을 새롭게 뜨기 위해 나오던 길이었다. 그녀가 무사단원들의 시선에 노출되자, 환호성과 함께 단원들의 관심은 온통 그녀를 향했다.
“오우, 엉덩이가 탐스럽게 잘 영글었는데?”
“그러면 뭐하냐? 가슴이 민짜인데.”
단원들은 시내의 몸매를 희롱하는 말을 거침없이 던졌고, 그들의 언동은 시내에게는 짜증스럽고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특히 그중 한 명은 시내에게 불쾌한 눈길을 보내며 무례한 소리를 내뱉었다.
“이봐, 아가씨. 우리 한 번 잘까? 어때?”
그의 무례한 행동은 시내에게 고통스러움을 안겼다. 하지만, 그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주막부부는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좀 전만 해도, 주막 아낙네를 희롱하다 항의하는 주막 사내가 맞아 죽을 뻔했었다. 때마침 청의동자가 나타나자, 어린애 앞에서는 창피했던지, 자중하는 듯했다. 근데, 시내가 등장하자, 또다시 그들의 일그러진 본성이 마구 표출되는 모양이었다. 청의동자는 간신히 참고 있었다. 아미가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동자야, 이 마을에서는 실수하면 큰일 나. 특히 황금돼지를 쫓아내기 전에는 절대로!
내 말 알겠지?’
시내는 새 물을 뜨러 가지도 못하고, 난생처음 겪어보는 거친 사내에 희롱에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아미의 얘기에도 냉철하게 응대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 큰 저자가 왜 그래? 내숭 떨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어떠냐고, 나랑 한번 자자.”
헉~
갑자기, 단원이 목을 움켜쥐고 뒤로 물러났다. 얼굴이 금방 시퍼렇게 변했다. 기도가 막힌 모양이었다. 그 사이, 시내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 청의동자가 씨익 웃었다. 그 의 손에는 부러진 고등어가시가 들려져 있었다.
##
“뭐요? 황금 돼지? 이 여자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아가씨, 더 이상 들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여인 같습니다. 어서 제집으로 가시지요, 제가 성심성의껏 음식을 마련했습니다. 부장님도 가시지요.”
“예, 그러지요. 으휴, 얼굴은 반반하게 생겨가지고, 어찌 저리 되었는지, 참 안타깝네 그려. 쯔쯔.”
무사단 부장이 음흉한 얼굴로 아미의 몸매를 훑더니, 앞장서는 촌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미리내는 뭔가를 고심하는 듯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시종과 의원은 그녀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촌장이 답답하다는 듯, 미리내를 쳐다보더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성큼성큼 아미 앞으로 걸어갔다.
“야, 이 미친년아. 너 뭐야? 가뜩이나 봉화 때문에 상심이 크실 아가씨께 이런 불순한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가 뭐야? 너, 간자야? 어? 어서 대답하지 못해?”
기루마을 촌장은 아미를 빨리 치우지 않으면 해치가의 차기 가주, 미리내의 환심을 살 기회를 망칠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급기야는 아미에게 손찌검하려는 듯, 손을 높이 들었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촌장을 막아섰다. 바람이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넌 또 뭐야?”
“어? 너, 바람이 아냐? 네가 왜 여기 있어?”
무사단 부장은 바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바람의 무사단 동기였다.
“왜긴, 임무 때문이지.”
“뭐? 야, 넌 유배지나 지켜야지, 여기서 뭔 임무? 너 이러면 근무지 이탈인 거 몰라? 영원히 잘리고 싶어?”
부장은 실실 쪼개며 바람의 약을 올렸다. 바람은 부글거리는 듯, 인상을 쓰더니 아미를 쳐다보았다. 아미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한숨을 쉬더니 바람이 부장에게 말했다.
“그래, 잘리면 잘리는 거지. 자르라, 그래.”
“혹시, 그때 미르 오라버니와 함께 있었던 단원 맞습니까?”
미리내가 바람에게 물었다. 바람이 미리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예. 맞습니다. 아가씨.”
“근데, 여기엔 왜 계시는 것입니까? 혹시, 오라버니께서 여기에 와 계신 것입니까?”
미리내의 질문에 아미의 동공이 커졌다.
“아니, 유배지에 있어야 할 죄인이 여기에 있다니요?”
“오라버니는 이미 사면 되셨습니다. 더 이상 죄인이란 말은 입에 담지 마세요.”
미리내의 대답에 놀란 부장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닙니다. 미르 도련님께서 사면됨에 따라, 저희의 소임이 끝났다고 여겨 오랜만에 고향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한데, 여기에서 삼 년 전 저잣거리에서 죽은 신발 장수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 말에 다들 놀란 표정이었다.
“아니,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삼 년 전에 죽은 자가 여기에 살고 있다니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잘못 본 것 아닌가 해서, 다시 가서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자가 본인 입으로 맞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그때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엔 아미조차도 놀란 듯했다.
“그렇다면, 미르 오라버니는 억울한 유배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까?”
“나머지 두 명에 대해선 모르겠지만, 그 신발 장수에 관해선 억울한 벌을 받은 거라 사료됩니다.”
바람은 아미가 미리 준비시켜 준 대로 조리 있게 잘 말하고 있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여기에서도 똑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짓이라니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연쇄살인!”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평화롭기 그지없는 우리 마을에서 연쇄살인이라니?”
“주막집 딸이 며칠 전에 야반도주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본 목격자가 있었는데, 바로 신발을 짓는 그 노인이었습니다. 그전에 야반도주했다고 알려진 세 명의 처자도 목격자는 그가 유일했습니다.”
또다시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지만, 미리내는 아미가 말한 황금돼지가 그 신발 장수 노인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미리내가 아미를 쳐다보았다. 아미는 차분한 표정으로 미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그래야, 정체를 들킨 그자가 이 마을을 떠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무슨 소리요? 그자가 아녀자들을 살인한 자라면 그냥 못 보내지. 붙잡아서 그에 마땅한 처벌을 받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미리내와 아미의 대화에 끼어든 촌장은 자칫 자신이 궁지에 몰릴 수 있는 상황임을 자각하게 되었고, 아까와는 다른 적극적인 태도로 마을에 대한 관리 소홀에 대한 문책을 모면할 국면전환을 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미는 도와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안 됩니다. 황금돼지는 사람들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괜히 잡으려 했다가는 인명피해만 더 늘어날 것입니다.”
“아니 무슨 말이오? 무사단도 와 있는 마당에, 살인자를 그냥 놔두잔 말이오? 부장님,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흠. 물론 그렇지요. 해치가의 치안을 맡은 무사단이 뻔히 여기 있는데, 범인을 그냥 도망가게 놔둘 수는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아가씨?”
촌장과 부장은 속셈은 달랐지만, 노인을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도망가기는 개뿔. 지금 기다리고 있다니까. 어서 자기 잡아가라고. 지금 하늘이가 거기서 같이 기다리고 있어!”
바람의 말에 마을 촌장과 무사단 부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리내는 난감한 상황에 아미를 쳐다보았다. 마치 조언을 구하는 얼굴이었다.
“퇴로가 막혀 궁지에 몰린 야수가 제일 무서운 법입니다.”
##
하늘은 툇마루에 앉아, 노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노인은 태연하게 신발을 짓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난 식성이 까다로워서 남자 고깃덩이는 안 좋아해.”
섬뜩한 그의 말에, 하늘은 오금이 떨렸다.
그때, 어디선가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 짧은 꼬리 황금돼지는~
착한 사람 인두겁 쓰고~
슬금슬금 다가와서는~
홀딱 벗겨 잡수고 간다~ ♬
지금껏 느긋한 태도를 유지하던 노인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누구야? 저딴 노래를 부르는 게. 야, 너!”
“네? 전 전혀 모릅니다. 진짜예요.”
“어서 가서 알아 와. 어서!”
노인은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리며 호통을 쳤다. 순간, 하늘은 노랫소리가 나는 쪽으로 죽어라 뛰었다. 큰 바위를 도는 순간, 누군가 그를 확 잡아챘다. 바람이었다. 바위 뒤에는 미리내와 시종, 의원, 그리고 촌장이 무장한 마을 청년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수십 명의 마을 어린이들은 아미의 지휘 아래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늘과 바람은 서로를 보며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씨익 웃었다.
한편, 하늘이 돌아오지 않자 도망간 걸 눈치챈 노인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이 재밌다는 듯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실성한 사람처럼 한참을 웃었다. 그 사이, 아이들의 노래는 사라졌다.
“뭐야? 고작 이것으로 날 쫓아내 보겠다는 거야?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황금돼지 어르신.”
노인의 앞에는 아미가 서 있었다. 아미의 자태를 보자, 노인은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둔 식도락가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제 발로 걸어오다니~ 오늘은 똥 밟은 날이 아니라, 운수 대통한 날이었구먼.”
“이제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어서 떠나시지요. 온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기 전에.”
“오매 무서워라. 기특한 년. 넌 내가 싫어하는 것을 잘도 알고 있구나. 어떻게 알았느냐? 죽기보다 싫어하는 게 인간 아이들의 조롱이라는 거. 내가 말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널 보는 순간 그깟 조롱 좀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미의 표정이 굳어졌다.
“후회하실 텐데요.”
“에이, 너 같은 맛있는 음식을 놔두고 떠나는 게 더 후회될 것 같은데? 척 봐도 넌 한입에 먹어버리기에는 너무도 아깝구나. 내 특별히 두고두고 맛을 봐야겠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주 잘근잘근 씹어주마. 내 눈에 띈 이상,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라. 흐흐흐.”
노인은 비릿하게 웃으며 혀를 내밀어 침이 범벅인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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