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미르에게 죽음을, 아미에겐 속죄를- 4
조회 : 873 추천 : 0 글자수 : 7,757 자 2024-05-25
밤이 찾아온 시내의 초가집.
으~
방안에서는 하늘이, 바람이 약탕 물 마시는 걸 도와주고 있었다.
“고맙다. 근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찌 우리가 살아있냐고?”
정신을 차린 바람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난 건지, 무척이나 궁금한 얼굴이었다.
“그거야, 형님과 제가 죽을 때가 아니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헛소리 말고, 어서 말해 보라니까.”
“그 꼬마 말입니다.”
“어. 꼬마.”
“아주 엄청 크고, 무시무시한 괴물이었습니다.”
“뭐? 진짜? 어,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어떻게 성인인 내가 그 몸을 들을 수 없냐고. 그 무시무시한 눈빛은 뭐고. 아, 그래서?”
“근데, 그래도 그 황금돼지는 못 당해 냅디다.”
“뭐? 못 당해내? 그럼, 우린 어떻게 살아난 거야?”
“이젠 정말 우린 끝이다 싶었는데, 딱 나타난 거지요.”
“누가?”
바람은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몰입되어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미워한 사람.”
“누구? 해치가 망나니?”
하늘이 무릎을 '탁' 쳤다.
“네. 그분이 딱하고 나타났는데, 그냥 인정사정없이 황금돼지의 사지를 찢어대는데... 어휴... 내가 진짜 오줌을 지릴 뻔 했지, 뭡니까?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오금이 떨립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그래? 내가 알기론 무술에 무자도 모르는 사람인데?”
“그러니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닙니까? 더 놀라운 건 뭔지 아십니까?”
“뭔데? 자꾸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쭉 한 번에 말하라니까.”
하늘은 조급해하는 바람을 보니, 그가 살아있음이 실감 났다.
“좋습니다. 한번 에 쭉 갈 테니 중간에 끼어들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그 애꾸눈이 실명한 게 아니었단 말입니다. 연녹색. 그 눈빛을 가리기 위해 일부러 애꾸눈 행세를 했던 것이라 이 말입니다. 그냥 눈빛에서 빛이 나올 것처럼 반짝이는데, 진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손만 뻗으면 황금 돼지 다리가 찢어지고, 팔이 떨어져 나가고. 아 맞다. 장풍. 연녹색의 바람이 그 돼지 새끼의 몸을 감싸더니, 팍~~ 그냥 목을 떼어내 버리지, 뭡니까? 와 정말 그때 얼마나 통쾌하던지. 근데 이 돼지 새끼가 끝까지 발악을 하지 뭡니까? 그래서 도련님이 우리가 숨어 있던 큰 바위. 기억하시죠? 그 큰 바위를 공중에 떠올리게 만들더니, 그냥 돼지새끼 머리 위에 쾅!! 그냥 편육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늘의 말이 끝냈지만, 바람은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너 나 기절했다고 아무 말이나, 막 지어내는 거 아냐?”
“허~ 기껏 얘기해줬더니, 뭐라는 겁니까? 날이 저물었으니, 이제 곧 오시겠네요. 오시면 직접 물어보십시오. 내 말이 막 지어낸 것인지.”
바람이 그 말에 화들짝 놀랐다.
“누가 와? 망나니가?”
“그래 내가 왔다.”
바람과 하늘이 소리에 놀라서 쳐다보니, 미르와 청의동자가 방문을 열고 서 있었다.
미르는 무척이나 기분이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바람은 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
저녁 식사를 마친 기루 마을 촌장이 트림하며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재빨리 광으로 달려갔다.
다시 한번 재빨리 주위를 살핀 촌장이 다급히 광 안쪽에다 속삭였다.
“나 촌장이오. 저기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말해 줄 수 있겠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미의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물어보시겠다는 것입니까?”
촌장은 대답을 들어서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혹시 나에 관한 꿈은 꾼 것이 없소?”
아미의 대답이 없었다.
“아니, 내가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낭자가 꿈에서 앞날을 본다 하지 않았소? 혹여, 내 앞날과 관련된 꿈같은 건 없었을까 궁금해서 말이오.”
“없습니다.”
촌장은 아미의 대답에 실망스러운 표정이었다.
“아, 그렇소? 쩝. 혹시 점 같은 것은 안 보시오? 뭐, 재물 운이나 출세 운 같은 거 말이오.”
그러나 더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안 보는구나. 알았소. 그럼 쉬시오.”
언짢아진 기루 촌장은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그때, 미리내의 음성이 들렸다.
“거기서 뭐 하십니까?”
미리내가 굳은 표정으로 촌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촌장이 안면을 바꿨다.
“아니, 여긴 제 집이고, 집주인인 제가 집안을 살피는 데, 뭐 문제가 있으십니까?”
“제가 광에는 얼씬하지 말라 당부했을 텐데요.”
“아니, 그러다 탈이라도 나면 어찌합니까? 아무리 사람을 가둬 심문한다 해도, 먹일 건 먹여가면서 해야지요. 자꾸 신경 쓰이지 않습니까? 집주인으로서 집 안에서 사고
나면 안 되기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펴보려 했습니다.”
“하루 굶는다고 죽는 이는 없습니다.”
“그걸 어찌 장담하십니까? 앞날을 내다보시는 것도 아니면서.”
웬일인지 촌장의 태도는 상당히 급변해 있었다.
미리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랑 지금 해보자는 것입니까?”
“아니, 일개 촌장이 어찌 장차 해치가의 주인이 되실 아가씨와 해볼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전 아가씨께서 광에 가둔 저 여인을 어찌하실 지가 궁금할 뿐입니다. 아무래도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자인 듯한데, 그냥 가둬두기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촌장의 말에 미리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대단한 능력이오?”
“네. 저 여인이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특별한 재주를 가진 자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과정이야 어떻든 그 황금돼지라는 괴물을 처치할 수 있었던 것도 저 여인이 앞을 내다본 덕분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제 말은, 저 여인의 재주를 잘 활용하면 득을 볼 수 있지 않냐는 것입니다.”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저 여인은 제 오라비를 독살하려 했던 범죄자이고, 자백까지 했습니다. 하여, 본가로 압송하여 그에 합당한 죄를 물을 것입니다.”
“범죄자라... 저 여인의 꿈에 아가씨도 오라버니를 죽이려 했다고 하던데... 어이쿠, 이런 천기누설을... 죄송합니다.”
촌장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야무지게 미리내를 향하고 있었다.
미리내가 다가갔다.
“한 번만 더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간, 촌장은커녕, 제명에 못 죽는 줄 아십시오. 내가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미리내는 휙 돌아 처소를 향했고, 촌장은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후후... 진짜 뭔가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군. 오라비를 죽이려는 자가 뭐가 현명한 주군이 될 것이라는 건지. 쯧쯧. 족장님이 속고 계셨구먼. 자, 이제 어쩐다? 정 이렇게 나온다면, 어디 깽판이나 쳐 볼까? 이 마을엔 안 그래 보여도 제법 많은 간자가 숨어 있지. 그들에게 한번 슬쩍 풀어 볼까나... 아가씨, 당신은 오늘 나를 잘못 건드렸어.”
그러고는 아미가 갇혀 있는 광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교활해보였다.
##
평온한 밤.
하지만, 기루마을 의원댁은 아비규환이었다. 황금돼지의 습격으로 부상당한 무사단원들로 인해 의원댁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시내는 정신없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피로 뒤범벅이 된 단원들의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환자들을 돌보는 손길을 멈출 수 없었다. 방마다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조금만 참으세요. 상처를 꿰매고 약을 발라드리겠습니다.”
팔이 잘린 단원은 깊은 상처로 고통스러워하며 이를 악물고 있었고, 또 다른 다리를 읽은 단원은 이미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시내는 모두를 꼼꼼히 살피며, 그들에게 필요한 치료를 해주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다른 사내의원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시내가 본 환자들에 상태만 살필 뿐, 스스로 일을 찾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일은 전부 시내차지인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매의 눈으로 쳐다보는 노인은 그녀의 할아버지였다. 그는 거동이 불편한 듯, 그저 앉아서 시내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물... 물...”
온몸에 붕대를 감은 한 단원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내는 재빨리 물을 떠다 단원의 입가에 댔다. 단원은 물을 조금 삼키더니 이내 몸이 축 늘어졌다. 시내는 어깨가 쳐지며, 고개를 숙였다. 죽은 단원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리고 서둘러 다른 환자에게 발길을 옮겼다.
“저년은 정말 독종이야. 어떻게 쉬지를 않아?”
그녀를 쳐다보던 한 의원이 혀를 찼다.
“핏줄이 어디 가겠어요? 그 어미에 그 딸이라잖수. 통증을 못 느끼니, 피곤도 못 느끼나 봅니다.”
또 한명의 의원이 시기하듯 빈정거렸다. 그들은 시내의 이복오라비였다.
“이 마을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데, 분명 연관이 있을 거야? 안 그러냐?”
“그러게 말입니다. 지 애미 마냥 부정 탄 게 확실합니다. 에이.”
시내의 귀에 그들의 대화가 들렸지만, 그녀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미리내를 따라온 의원이었다. 그는 미리내의 명령으로 단원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던 중이었다.
“손녀분이 참으로 손이 빠르고 정확한 것 같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시내의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엄격한 사람 같았다.
“얼핏 들었지만, 통증을 못 느낀다고 하던데 그런 사람이 어찌 저리 환자를 잘 보는 건지... 참으로 신기합니다.”
“못 느끼지만, 그래서 남의 아픔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게 바로 이 아이가 가진 재주지요.”
할아버지의 말에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남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 말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달라요. 몸은 고통을 모를지언정, 마음으로는 환자들의 아픔을 알아내지요.”
“그래서 저렇게 환자들을 잘 돌보는 건가요?”
“마음으로 환자들의 아픔을 안다고 해서, 그리 되겠습니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의원은 의아했다.
“기억력이 뛰어납니다. 환자들의 표정과 반응들을 정확히 기억하지요. 그래서 환자가 고통을 느끼는 표정만 봐도 상처가 어느 정도의 상태인지 알 수가 있고, 시술할 때의 반응들을 보고 치료의 강도를 조절한답니다. 간혹 기절한 환자들을 대할 때는 곤혹스러워하지만, 그건 고통을 아는 우리도 매한 가지 아니겠습니까?”
“타인의 고통을 이해가 할 수 없으니, 아예 환자들의 표정과 반응들을 모두 외워버린다?”
의원은 그녀의 방식이 참으로 신기했다.
시내는 여전히 부지런히 움직이며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지쳐 보이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눈동자에는 환자들을 살려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의원 댁의 불빛은 꺼질 줄을 몰랐다.
##
“네? 그루로 가신다고요?”
하늘이 놀란 얼굴로 미르를 쳐다보았다.
“그래. 그리고 가기 전에 너희들에게 미안했다는 말 전하고 싶다.”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엔 바람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너희들이 나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봤다면서? 잘나가던 단원에서 산지기로 전락했다는 거 몰랐어. 왜 하필 내가 일을 저지를 때마다 거기에 있었는지, 이게 무슨 악연인진 모르겠다만, 그래도 나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하니 지금이라도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다.”
희한하게도 그 짧은 사과에 바람과 하늘이 3년 동안 쌓아왔던 그를 향한 미움이 눈 녹듯 사라지는 듯했다.
“아니, 그게 그 황금돼진가 뭔가라는 놈 때문에 생긴 일이니 미안하실 거까지야... 어찌 보면 도련님도 피해자 아니십니까?”
바람의 입에서 도련님이란 말이 나온 걸 보면...
“그럼, 도련님께서 죽이신 나머지 두 명도 괴물인 거겠죠?”
“당연한 거 아니냐? 하하.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참 욕 많이 했는데. 하하하.”
“아니. 그들은 사람이었어.”
미르의 예상치 못한 답변에 바람과 하늘이 입이 벌어졌다. 그들은 다시 긴장했다.
“아니, 왜...”
미르는 3년 전의 저자거리의 사건을 그들에게 설명해주었다.
그가 저자거리의 연쇄실종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본가에서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던 여니라는 어린 시종이 어느 날 사라지고 난 직후였다. 무사단의 수사에 진척이 없자, 별달리 할 일이 없었던 그는 소일거리로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여기까지는 바람과 하늘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미르의 말은 과히 충격적이었다. 어느 날, 비명소리를 들은 미르가 달려간 곳에는 황금돼지가 여인을 강간하면서, 동시에 그녀를 산채로 뜯어먹고 있었다. 여인은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입을 막은 탓에 비명소리도 새어나가지 못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그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터라, 그저 목청껏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황금돼지는 놀라서 먹다 남은 여인의 몸뚱아리를 들고 사라져버렸지만, 거기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가죽신발. 특유의 문장이 박힌 그 신발은 저자거리에서 유명한 신발장수가 만든 것이었다. 신발을 들고 무사단을 찾아갔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사라진 여성들 모두 그 가게를 애용했던 단골이었다. 하지만, 용의자는 70이 넘은 앉은뱅이. 하지만, 미르는 그가 황금돼지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에겐 감춰진 특별한 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판결을 담당하는 해치가의 책사들에게 하소연해보았지만, 정황상 의심이 갈뿐, 그것만으로는 그가 범인이라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했다. 결국 신발장수는 무죄를 판결 받았고,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 추궁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요물의 특성상,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을 무척 싫어하기 때문에, 대낮 저자거리가 그를 해치울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장소였다.
미르의 설명에 바람과 하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그, 그럼... 왜 사람들은..."
바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황금돼지 그 자만 죽이면 다시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또 그 비슷한 사건들이 발생되었지.”
“네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애꿎은 자만 죽었다고 했었는데...”
“근데, 달랐어. 그 수법이.”
“네? 어떻게요?”
“황금돼지는 흔적을 남기지 않아. 살은 물론 뼈까지 다 먹어치우니까. 물론 피도 한 방울 안 남기지. 근데 이 놈들은 자신의 발자국은 물론, 피해자의 뼈와 피까지 다량으로 남겼지. 물론 부실한 수사 때문에 그 발자국도 제대로 파악을 못했지만. 그 둘은 식인과 사체윤간을 즐기는 변태성애자였어. 뜻이 맞았는지 함께 움직였더군. 서로가 서로의 먹잇감을 골라줬어.”
“요물이었다면 모를까, 사람이었는데 왜 무사단에 알리지 않으셨던 겁니까?”
“단원이라면서 몰라서 물어?”
“네? 그게 무슨...”
“한 놈은 마족장의 친구. 한 놈은 사족장의 조카. 그들이 너희들이나 단장에게 뇌물을 바치면 수사는 흐지부지될 것이고, 수사를 제대로 했어도 족장들이 가주나 책사를 찾아가면 벌은 경감되겠지. 해치가가 그렇잖아. 법과 정의를 앞세운다지만, 현실은 늘 강자의 편에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라는 거. 용천가만 바라본다고, 용천바라기라하잖아. 지금은 호지바라기지, 아마? 한 번 일을 저질러 봐서 그런가, 결심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더군. 어차피 그놈들은 해치가 법상 사형에 마땅한 죄를 지었기에, 그냥 내가 판결과 처벌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인정도 받지 못하는 해치가의 장자, 그거라도 해야 그나마 도리를 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된 거야.”
바람과 하늘은 숙연해졌다.
“이래서 내가 낯선 요물보다 낯익은 사람이 더 무섭다고 했던 건데, 어떻게 인간들이 그런 짓을... 으...”
"도련님...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억울해 하며, 비난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바람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어린 사과가 담겨 있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몰랐으면 당연히 억울할 만 하지. 괜찮아.”
그때, 밖에서 청의동자가 미르를 다급히 불렀다.
“미르 형아, 좀 나와 보세요!”
아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닌지 미르가 급히 나가보는데, 거기엔 홍의동녀가 울며 서 있었고, 청의동자가 그녀를 다독이고 있었다. 미르는 순간 직감했다.
“혹시... 할머니가 돌아가셨니?”
홍의동녀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으~
방안에서는 하늘이, 바람이 약탕 물 마시는 걸 도와주고 있었다.
“고맙다. 근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찌 우리가 살아있냐고?”
정신을 차린 바람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난 건지, 무척이나 궁금한 얼굴이었다.
“그거야, 형님과 제가 죽을 때가 아니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헛소리 말고, 어서 말해 보라니까.”
“그 꼬마 말입니다.”
“어. 꼬마.”
“아주 엄청 크고, 무시무시한 괴물이었습니다.”
“뭐? 진짜? 어,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어떻게 성인인 내가 그 몸을 들을 수 없냐고. 그 무시무시한 눈빛은 뭐고. 아, 그래서?”
“근데, 그래도 그 황금돼지는 못 당해 냅디다.”
“뭐? 못 당해내? 그럼, 우린 어떻게 살아난 거야?”
“이젠 정말 우린 끝이다 싶었는데, 딱 나타난 거지요.”
“누가?”
바람은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몰입되어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미워한 사람.”
“누구? 해치가 망나니?”
하늘이 무릎을 '탁' 쳤다.
“네. 그분이 딱하고 나타났는데, 그냥 인정사정없이 황금돼지의 사지를 찢어대는데... 어휴... 내가 진짜 오줌을 지릴 뻔 했지, 뭡니까?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오금이 떨립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그래? 내가 알기론 무술에 무자도 모르는 사람인데?”
“그러니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닙니까? 더 놀라운 건 뭔지 아십니까?”
“뭔데? 자꾸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쭉 한 번에 말하라니까.”
하늘은 조급해하는 바람을 보니, 그가 살아있음이 실감 났다.
“좋습니다. 한번 에 쭉 갈 테니 중간에 끼어들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그 애꾸눈이 실명한 게 아니었단 말입니다. 연녹색. 그 눈빛을 가리기 위해 일부러 애꾸눈 행세를 했던 것이라 이 말입니다. 그냥 눈빛에서 빛이 나올 것처럼 반짝이는데, 진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손만 뻗으면 황금 돼지 다리가 찢어지고, 팔이 떨어져 나가고. 아 맞다. 장풍. 연녹색의 바람이 그 돼지 새끼의 몸을 감싸더니, 팍~~ 그냥 목을 떼어내 버리지, 뭡니까? 와 정말 그때 얼마나 통쾌하던지. 근데 이 돼지 새끼가 끝까지 발악을 하지 뭡니까? 그래서 도련님이 우리가 숨어 있던 큰 바위. 기억하시죠? 그 큰 바위를 공중에 떠올리게 만들더니, 그냥 돼지새끼 머리 위에 쾅!! 그냥 편육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늘의 말이 끝냈지만, 바람은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너 나 기절했다고 아무 말이나, 막 지어내는 거 아냐?”
“허~ 기껏 얘기해줬더니, 뭐라는 겁니까? 날이 저물었으니, 이제 곧 오시겠네요. 오시면 직접 물어보십시오. 내 말이 막 지어낸 것인지.”
바람이 그 말에 화들짝 놀랐다.
“누가 와? 망나니가?”
“그래 내가 왔다.”
바람과 하늘이 소리에 놀라서 쳐다보니, 미르와 청의동자가 방문을 열고 서 있었다.
미르는 무척이나 기분이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바람은 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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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를 마친 기루 마을 촌장이 트림하며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재빨리 광으로 달려갔다.
다시 한번 재빨리 주위를 살핀 촌장이 다급히 광 안쪽에다 속삭였다.
“나 촌장이오. 저기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말해 줄 수 있겠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미의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물어보시겠다는 것입니까?”
촌장은 대답을 들어서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혹시 나에 관한 꿈은 꾼 것이 없소?”
아미의 대답이 없었다.
“아니, 내가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낭자가 꿈에서 앞날을 본다 하지 않았소? 혹여, 내 앞날과 관련된 꿈같은 건 없었을까 궁금해서 말이오.”
“없습니다.”
촌장은 아미의 대답에 실망스러운 표정이었다.
“아, 그렇소? 쩝. 혹시 점 같은 것은 안 보시오? 뭐, 재물 운이나 출세 운 같은 거 말이오.”
그러나 더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안 보는구나. 알았소. 그럼 쉬시오.”
언짢아진 기루 촌장은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그때, 미리내의 음성이 들렸다.
“거기서 뭐 하십니까?”
미리내가 굳은 표정으로 촌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촌장이 안면을 바꿨다.
“아니, 여긴 제 집이고, 집주인인 제가 집안을 살피는 데, 뭐 문제가 있으십니까?”
“제가 광에는 얼씬하지 말라 당부했을 텐데요.”
“아니, 그러다 탈이라도 나면 어찌합니까? 아무리 사람을 가둬 심문한다 해도, 먹일 건 먹여가면서 해야지요. 자꾸 신경 쓰이지 않습니까? 집주인으로서 집 안에서 사고
나면 안 되기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펴보려 했습니다.”
“하루 굶는다고 죽는 이는 없습니다.”
“그걸 어찌 장담하십니까? 앞날을 내다보시는 것도 아니면서.”
웬일인지 촌장의 태도는 상당히 급변해 있었다.
미리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랑 지금 해보자는 것입니까?”
“아니, 일개 촌장이 어찌 장차 해치가의 주인이 되실 아가씨와 해볼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전 아가씨께서 광에 가둔 저 여인을 어찌하실 지가 궁금할 뿐입니다. 아무래도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자인 듯한데, 그냥 가둬두기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촌장의 말에 미리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대단한 능력이오?”
“네. 저 여인이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특별한 재주를 가진 자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과정이야 어떻든 그 황금돼지라는 괴물을 처치할 수 있었던 것도 저 여인이 앞을 내다본 덕분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제 말은, 저 여인의 재주를 잘 활용하면 득을 볼 수 있지 않냐는 것입니다.”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저 여인은 제 오라비를 독살하려 했던 범죄자이고, 자백까지 했습니다. 하여, 본가로 압송하여 그에 합당한 죄를 물을 것입니다.”
“범죄자라... 저 여인의 꿈에 아가씨도 오라버니를 죽이려 했다고 하던데... 어이쿠, 이런 천기누설을... 죄송합니다.”
촌장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야무지게 미리내를 향하고 있었다.
미리내가 다가갔다.
“한 번만 더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간, 촌장은커녕, 제명에 못 죽는 줄 아십시오. 내가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미리내는 휙 돌아 처소를 향했고, 촌장은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후후... 진짜 뭔가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군. 오라비를 죽이려는 자가 뭐가 현명한 주군이 될 것이라는 건지. 쯧쯧. 족장님이 속고 계셨구먼. 자, 이제 어쩐다? 정 이렇게 나온다면, 어디 깽판이나 쳐 볼까? 이 마을엔 안 그래 보여도 제법 많은 간자가 숨어 있지. 그들에게 한번 슬쩍 풀어 볼까나... 아가씨, 당신은 오늘 나를 잘못 건드렸어.”
그러고는 아미가 갇혀 있는 광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교활해보였다.
##
평온한 밤.
하지만, 기루마을 의원댁은 아비규환이었다. 황금돼지의 습격으로 부상당한 무사단원들로 인해 의원댁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시내는 정신없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피로 뒤범벅이 된 단원들의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환자들을 돌보는 손길을 멈출 수 없었다. 방마다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조금만 참으세요. 상처를 꿰매고 약을 발라드리겠습니다.”
팔이 잘린 단원은 깊은 상처로 고통스러워하며 이를 악물고 있었고, 또 다른 다리를 읽은 단원은 이미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시내는 모두를 꼼꼼히 살피며, 그들에게 필요한 치료를 해주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다른 사내의원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시내가 본 환자들에 상태만 살필 뿐, 스스로 일을 찾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일은 전부 시내차지인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매의 눈으로 쳐다보는 노인은 그녀의 할아버지였다. 그는 거동이 불편한 듯, 그저 앉아서 시내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물... 물...”
온몸에 붕대를 감은 한 단원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내는 재빨리 물을 떠다 단원의 입가에 댔다. 단원은 물을 조금 삼키더니 이내 몸이 축 늘어졌다. 시내는 어깨가 쳐지며, 고개를 숙였다. 죽은 단원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리고 서둘러 다른 환자에게 발길을 옮겼다.
“저년은 정말 독종이야. 어떻게 쉬지를 않아?”
그녀를 쳐다보던 한 의원이 혀를 찼다.
“핏줄이 어디 가겠어요? 그 어미에 그 딸이라잖수. 통증을 못 느끼니, 피곤도 못 느끼나 봅니다.”
또 한명의 의원이 시기하듯 빈정거렸다. 그들은 시내의 이복오라비였다.
“이 마을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데, 분명 연관이 있을 거야? 안 그러냐?”
“그러게 말입니다. 지 애미 마냥 부정 탄 게 확실합니다. 에이.”
시내의 귀에 그들의 대화가 들렸지만, 그녀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미리내를 따라온 의원이었다. 그는 미리내의 명령으로 단원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던 중이었다.
“손녀분이 참으로 손이 빠르고 정확한 것 같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시내의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엄격한 사람 같았다.
“얼핏 들었지만, 통증을 못 느낀다고 하던데 그런 사람이 어찌 저리 환자를 잘 보는 건지... 참으로 신기합니다.”
“못 느끼지만, 그래서 남의 아픔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게 바로 이 아이가 가진 재주지요.”
할아버지의 말에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남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 말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달라요. 몸은 고통을 모를지언정, 마음으로는 환자들의 아픔을 알아내지요.”
“그래서 저렇게 환자들을 잘 돌보는 건가요?”
“마음으로 환자들의 아픔을 안다고 해서, 그리 되겠습니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의원은 의아했다.
“기억력이 뛰어납니다. 환자들의 표정과 반응들을 정확히 기억하지요. 그래서 환자가 고통을 느끼는 표정만 봐도 상처가 어느 정도의 상태인지 알 수가 있고, 시술할 때의 반응들을 보고 치료의 강도를 조절한답니다. 간혹 기절한 환자들을 대할 때는 곤혹스러워하지만, 그건 고통을 아는 우리도 매한 가지 아니겠습니까?”
“타인의 고통을 이해가 할 수 없으니, 아예 환자들의 표정과 반응들을 모두 외워버린다?”
의원은 그녀의 방식이 참으로 신기했다.
시내는 여전히 부지런히 움직이며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지쳐 보이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눈동자에는 환자들을 살려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의원 댁의 불빛은 꺼질 줄을 몰랐다.
##
“네? 그루로 가신다고요?”
하늘이 놀란 얼굴로 미르를 쳐다보았다.
“그래. 그리고 가기 전에 너희들에게 미안했다는 말 전하고 싶다.”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엔 바람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너희들이 나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봤다면서? 잘나가던 단원에서 산지기로 전락했다는 거 몰랐어. 왜 하필 내가 일을 저지를 때마다 거기에 있었는지, 이게 무슨 악연인진 모르겠다만, 그래도 나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하니 지금이라도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다.”
희한하게도 그 짧은 사과에 바람과 하늘이 3년 동안 쌓아왔던 그를 향한 미움이 눈 녹듯 사라지는 듯했다.
“아니, 그게 그 황금돼진가 뭔가라는 놈 때문에 생긴 일이니 미안하실 거까지야... 어찌 보면 도련님도 피해자 아니십니까?”
바람의 입에서 도련님이란 말이 나온 걸 보면...
“그럼, 도련님께서 죽이신 나머지 두 명도 괴물인 거겠죠?”
“당연한 거 아니냐? 하하.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참 욕 많이 했는데. 하하하.”
“아니. 그들은 사람이었어.”
미르의 예상치 못한 답변에 바람과 하늘이 입이 벌어졌다. 그들은 다시 긴장했다.
“아니, 왜...”
미르는 3년 전의 저자거리의 사건을 그들에게 설명해주었다.
그가 저자거리의 연쇄실종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본가에서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던 여니라는 어린 시종이 어느 날 사라지고 난 직후였다. 무사단의 수사에 진척이 없자, 별달리 할 일이 없었던 그는 소일거리로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여기까지는 바람과 하늘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미르의 말은 과히 충격적이었다. 어느 날, 비명소리를 들은 미르가 달려간 곳에는 황금돼지가 여인을 강간하면서, 동시에 그녀를 산채로 뜯어먹고 있었다. 여인은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입을 막은 탓에 비명소리도 새어나가지 못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그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터라, 그저 목청껏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황금돼지는 놀라서 먹다 남은 여인의 몸뚱아리를 들고 사라져버렸지만, 거기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가죽신발. 특유의 문장이 박힌 그 신발은 저자거리에서 유명한 신발장수가 만든 것이었다. 신발을 들고 무사단을 찾아갔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사라진 여성들 모두 그 가게를 애용했던 단골이었다. 하지만, 용의자는 70이 넘은 앉은뱅이. 하지만, 미르는 그가 황금돼지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에겐 감춰진 특별한 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판결을 담당하는 해치가의 책사들에게 하소연해보았지만, 정황상 의심이 갈뿐, 그것만으로는 그가 범인이라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했다. 결국 신발장수는 무죄를 판결 받았고,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 추궁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요물의 특성상,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을 무척 싫어하기 때문에, 대낮 저자거리가 그를 해치울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장소였다.
미르의 설명에 바람과 하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그, 그럼... 왜 사람들은..."
바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황금돼지 그 자만 죽이면 다시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또 그 비슷한 사건들이 발생되었지.”
“네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애꿎은 자만 죽었다고 했었는데...”
“근데, 달랐어. 그 수법이.”
“네? 어떻게요?”
“황금돼지는 흔적을 남기지 않아. 살은 물론 뼈까지 다 먹어치우니까. 물론 피도 한 방울 안 남기지. 근데 이 놈들은 자신의 발자국은 물론, 피해자의 뼈와 피까지 다량으로 남겼지. 물론 부실한 수사 때문에 그 발자국도 제대로 파악을 못했지만. 그 둘은 식인과 사체윤간을 즐기는 변태성애자였어. 뜻이 맞았는지 함께 움직였더군. 서로가 서로의 먹잇감을 골라줬어.”
“요물이었다면 모를까, 사람이었는데 왜 무사단에 알리지 않으셨던 겁니까?”
“단원이라면서 몰라서 물어?”
“네? 그게 무슨...”
“한 놈은 마족장의 친구. 한 놈은 사족장의 조카. 그들이 너희들이나 단장에게 뇌물을 바치면 수사는 흐지부지될 것이고, 수사를 제대로 했어도 족장들이 가주나 책사를 찾아가면 벌은 경감되겠지. 해치가가 그렇잖아. 법과 정의를 앞세운다지만, 현실은 늘 강자의 편에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라는 거. 용천가만 바라본다고, 용천바라기라하잖아. 지금은 호지바라기지, 아마? 한 번 일을 저질러 봐서 그런가, 결심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더군. 어차피 그놈들은 해치가 법상 사형에 마땅한 죄를 지었기에, 그냥 내가 판결과 처벌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인정도 받지 못하는 해치가의 장자, 그거라도 해야 그나마 도리를 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된 거야.”
바람과 하늘은 숙연해졌다.
“이래서 내가 낯선 요물보다 낯익은 사람이 더 무섭다고 했던 건데, 어떻게 인간들이 그런 짓을... 으...”
"도련님...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억울해 하며, 비난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바람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어린 사과가 담겨 있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몰랐으면 당연히 억울할 만 하지. 괜찮아.”
그때, 밖에서 청의동자가 미르를 다급히 불렀다.
“미르 형아, 좀 나와 보세요!”
아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닌지 미르가 급히 나가보는데, 거기엔 홍의동녀가 울며 서 있었고, 청의동자가 그녀를 다독이고 있었다. 미르는 순간 직감했다.
“혹시... 할머니가 돌아가셨니?”
홍의동녀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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