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환란의 시작 - 1
조회 : 1,096 추천 : 1 글자수 : 7,203 자 2023-10-17
한때 요물들이 실존했다는 전설이 있는 세상. 그러나 용이 사라진 지 오백 년, 다른 요물들의 모습도 점차 잊혀 갔다. 그 시절, 대륙에는 거대한 세력들이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다.
동쪽 대륙 끝에 위치한 '하나 반도'. 이곳에는 용천가(龍天家), 호지가(虎地家), 해치가(獬豸家)라는 세 가문이 각자의 세력을 이끌며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영토가 맞닿은 '바신' 지역 한복판에는 마마산이라 불리는 기이한 형상의 돌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신성시되는 이곳의 정상에는 신력 있는 점을 치는 하얀 분칠의 제사들, 일명 고드라마들이 살고 있었다.
쿠웅, 끼이익~
마마산 정상, 낡은 거중기가 위태롭게 움직이며 조그만 승강기를 간신히 끌어 올리고 있었다. 이 승강기가 마마산 정상으로 오르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아래에서 지켜보던 수행원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승강기에 놀란 얼굴이었다.
쿵~
정상에 다다른 승강기, 그 문이 열리자마자 사색이 된 채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이가 있었다. 덩치 큰 체구에 호피 가죽옷을 걸친 중년의 사내였다.
“망할 놈의 물건, 또 죽는 줄 알았잖아!”
예상과 달리 산 정상은 황량하지 않았다. 험준한 바위산임에도 불구하고, 꼭대기는 마치 누군가 지형을 잘라낸 듯 평평했다. 부드러운 잔디가 초록빛 양탄자처럼 깔려있었고,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이 정갈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잔디밭 사이를 대리석으로 포장된 길이 나뭇가지처럼 뻗어있었고, 그 중심에는 푸른 크리스털로 이루어진 제단이 장엄하게 서 있었다. 마치 거대한 나무의 줄기를 연상시켰다.
길가에는 기괴하고 독특한 형상의 조각상들이 즐비했고, 제단 양옆으로는 정체 모를 꽃들이 든 화려한 제단이 늘어서 있었다. 그 광경은 이곳이 범상치 않은 장소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털북숭이 사내는 어느새 한 조각상 앞에 다가와 있었다. 뱀의 몸통에 고양이의 얼굴을 한 모습이었다.
“이게 뭐여! 이 꼴같잖은 물건은?”
“묘두사...”
돌연 사내의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순식간에 몸을 돌린 호라치의 손엔 작은 손도끼가 들려 있었고, 그 칼날은 하얀 분칠을 하고 빳빳이 선 젊은 제사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의 키는 상당히 컸다. 호라치의 도끼가 그의 가슴 언저리밖에 닿질 못할 정도로.
“...라고 합니다. 호라치님. 새들의 왕이라 불리는 자이지요.”
위태로운 순간에도 젊은 제사는 놀라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호라치는 눈에 살기를 거두진 않았지만, 손도끼는 거두어들였다. 그는 전투에 이골이 난 무인답게 누가 소리 없이 접근하는 것을 질색했다.
“제발 뒤에서 나타나지 말랬지요! 하마터면 그대 목이 날아갈 뻔했어요!”
“애당초 지니지 않으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요. 그건 잠시 맡아 두겠습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젊은 제사가 두 손을 내밀자, 호라치는 투덜거리며 손도끼를 건넸다. 이어 그는 주변의 다른 조각상들을 둘러보았다.
곰의 몸통에 물소의 눈, 코끼리의 코와 꼬리, 호랑이의 발톱을 가진 기괴한 모습의 불가사리 동상이 있었고, 황금빛 털의 돼지 형상을 한 금돼지 동상도 보였다. 짚으로 만든 우비를 뒤집어쓴 그슨새라는 요괴 상도 있었다.
눈길을 끄는 동상 중 하나는 윗입술이 하늘에, 아랫입술이 땅에 닿을 정도로 큰 입을 가진 거구귀 동상이었다. 덩치가 크고 늠름한 모습의 도깨비 상들도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었다.
채워질 듯 남은 빈 단상들을 보니 앞으로 더 많은 요괴의 모습이 이곳을 수놓을 것만 같았다.
“흥, 날개도 없으면서 무슨 새들의 왕? 대체 여긴 왜 이래?”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호라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젊은 고드라마가 나지막이 묘두사 상을 향해 중얼거렸다.
“너무 서운해 마세요. 저자도 머지않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게 될 터이니.”
##
어딘지 모를 깊은 산속.
바람에 흔들리는 길고 좁은 외나무다리를 한 남장 여인이 봇짐을 등에 메고 조심스레 건너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낡고 허름한 다리 아래로는 쳐다보기에도 아찔한 깊은 계곡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남장 여인은 겁에 질린 얼굴이었지만 이를 악문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갑작스러운 강풍이 불어닥쳤고 외나무다리가 마치 폭풍 속 배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중심을 잡기 위해 두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마치 외나무다리 위에서 커다란 새가 된 것처럼, 그녀의 몸은 바람에 맞서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두발이 다리의 썩은 상판 사이로 빠져버렸다. 등에 멘 봇짐이 상판에 걸려 간신히 추락을 면한 그녀의 상체는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지만, 디딜 곳이 사라진 두 다리가 공중으로 내던져졌다.
“정신 차려, 아미야. 넌 할 수 있어. 조금만 더 힘내자!”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녀는 이를 악물고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사정없이 부는 거센 바람에 아미의 힘은 점점 빠져나갔고, 그녀의 몸은 조금씩 틈새 아래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지직~
이전과는 다른 다리의 흔들림에 아미는 온 힘을 다해 버티었지만 이미 어깨 밑으로는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누나!”
바로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든 아미의 눈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예닐곱 살 난 청의동자가 보였다.
“안 돼! 오지 마!”
아미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지만, 동생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청의동자가 다리로 뛰어오르자 쾅쾅거리는 다리의 요동이 더욱 심해졌고, 순식간에 다리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다리와 함께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
마마산 정상의 제단 안은 또 다른 광경이었다. 한마디로 썰렁했다.
드넓은 대리석 바닥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원형 탁자에는 '하나 반도'를 대표하는 세 가문의 가주들이 앉아 있었다. 호지가의 호라치, 해치의 미치루, 용천가의 여천우가 그들이었다. 미치루는 하얀 도포를 입은 점잖게 생긴 50대 후반의 중년 남자였고, 여천우는 화려한 복장만큼 기품이 있어 보이는 미모의 중년 여인이었다.
호라치의 인상은 심각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 않은 듯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는 잔에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거칠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소탕이 끝났으면 바로 북쪽 방벽을 쌓기로 약조했었소. 그런데 갑자기 보류라니, 지금 우릴 우롱하는 것입니까?”
그의 격양된 목소리가 제단에 울려 퍼졌다. 반도의 남쪽과 서쪽을 아우르는 기름진 땅을 가진, 이 땅의 터줏대감, 용천가 앞에서도 호라치는 거침이 없었다.
여천우는 미동도 없이 그저 차를 홀짝였다. 대신 난처한 얼굴의 미치루가 입을 열었다.
“호라치님께서 잘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만... 용천가에는 오랜 전통이 있어서 간택이 결정되기 전까진 그 누구도 영지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간택 날짜는 마마산 제사들의 점괘에 따르는데, 언제 나올지 그 예측이 어려웠던 것이오. 부디 이해해 주시기를...아니면, 좀 더 용천가가 납득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이해를 구해보심이...”
곤혹스러워하는 미치루의 모습이 호라치는 우스웠다.
‘또, 지랄병 나셨네. 쥐뿔도 없는 해치가가 또 중재하려 드는군.’
그간 두 가문에 붙어 그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해치가의 태도가 가증스러웠다. 물론, 변변찮은 병력을 지녔기에 이렇게라도 해야만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는 그들의 절실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내가 이해를 구하는 것처럼 보이오? 우릴 대륙에서 이곳까지 내몬 그 웅족(熊族)이 나라를 세웠단 말입니다. 지금 대륙의 정세가 얼마나 험악한데 무슨 전통 타령입니까? 북녘의 야욕을 모르십니까? 장벽이 없으면 우리 모두 망할 거란 말이오!”
목소리에 서린 분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제야 여천우가 입을 열었다. 특유의 여유로움은 사라지고 냉소만이 가득했다.
“장벽이 그리 급한 것인지, 아니면 겁에 질린 것인지 모르겠군요. 웅족과는 워낙 철천지원수였다니, 그리 호들갑을 떠는 것이 이해는 가지만, 언제부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걱정했답니까?”
“굴러온 돌이라...”
호라치는 이를 갈았다.
대륙에서 쫓겨나 간신히 뿌리내린 과거가 조롱거리가 된 것이다. 호라치는 늘 자신들이 하늘의 선택을 받았노라 자부하는 용천가의 선민의식이 역겨웠다.
“변두리에만 박혀 계시다 보니, 천하가 어지러운 것도 모르시는 듯합니다. 여전히 박힌 돌 타령이니.”
여천우와 호라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살기가 느껴지는 적막이 흘렀다.
“자자, 진정들 하십시오. 잠시 지체될 뿐이지 포기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해치가는 수송할 물자 준비가 되어 있사옵니다.”
미치루가 필사적으로 중재에 나섰다.
“물자요? 아, 500년 만의 용의 제사라며 조공품이 늘어 우리 몫은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래서야 어찌 믿고 맡기겠소.”
호라치의 눈빛에서 냉소가 뿜어져 나왔다.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우린 우리 갈 길을 가겠소. 하여, 이번 간택식에는 참여 못 하오. 사주단자도 보내지 않겠소.”
차갑게 말을 끝낸 호라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여천우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무리 변두리라도 변화의 조짐쯤은 눈치챌 수 있지요. 사람들의 움직임을 살피다 보면, 뜻밖의 일들을 발견하게 되는 법이거든요. 때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호라치의 걸음이 멎었다. 미치루는 깜짝 놀란 눈으로 여천우를 바라보았다.
수일 전, 달빛 아래 호라치와 미치루가 은밀히 만났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여천우가 차분히 잔을 채우며 말했다.
“이제, 이 땅에 나라를 세우고자 합니다. 어떻게? 함께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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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아래로 부서져 내린 외나무다리는 산산조각 나있었다. 어쩐 일인지, 다리와 함께 계곡으로 떨어졌던 아미는 살아있었다. 기진맥진해진 아미는 털썩 땅에 주저앉더니, 대자로 누워버렸다.
“누나 괜찮아?”
청의동자가 그녀 옆에 쪼그려 앉으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너!”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낼 힘도 없는 듯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랬더니, 왜 따라왔어?”
“지금 산지기 형아들이 누나 찾는다고 올라오고 있어. 그거 알려주려고. 화가 많이 났어. 누나 잡으면 가만 안 둔대.”
“산지기? 왜?”
“여긴 죄지은 사람들을 가두는 유배지라서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래.”
“유배지라고?”
“응. 누나가 찾는 그 형아가 죄를 지었다는데?”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가문의 장자를 이 험한 곳에 유배를 보내?”
“그건 말 안 해주던데? 근데, 유배지에 보낼 정도면 무지 나쁜 짓을 저지른 형아인 거 아냐? 정말, 괜찮겠어?”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 괜찮아.”
“응. 뿔피리는 잘 챙겼지?”
아미가 몸을 일으키더니, 목에 걸린 작은 뿔피리를 내보였다.
청의동자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날 불러. 알았지?”
“그래. 걱정하지 마.”
아미가 바라보는 곳에는 큰 바위가 있었고, 그 옆에는 기괴하게 구부러진, 오래된 소나무가 서 있었다.
“다행히 쉽게 찾은 것 같네. 어서 가.”
아미가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청의동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짧은 한숨을 쉰 아미는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이 있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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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정말 조심해야 해. 여기서 들켰다간 그날로 우린 황천길이니까. 저들이 돌아갈 때까지만, 얌전히 있다가 날이 지면 나갈 거야. 모두 알아들었지.”
빽빽한 숲속 한 가운데에는 사냥족 한 무리가 불안한 얼굴로 각자 나무에 기대여 앉아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때, 화살 하나가 우두머리 같은 자의 머리 위의 나무에 꽂혔다.
사냥족의 남성들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여기는 용천가문의 영지, 그대들은 신원을 밝혀라.”
쩌렁쩌렁한 여인의 목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들켰다. 튀어!”
사냥족이 흩어지려는 그때, 다시 날라 온 화살에 사냥족 두 명이 쓰러졌다.
둘 다 눈과 심장에 맞아 즉사했다.
“꼼짝 하지 마라. 여긴 신성한 숲. 용천가 사람이 아니면, 한 발짝도 들일 수 없는 곳이다. 그대들은 지금부터 용천가의 법을 어긴 죄인들이다.”
사냥족 남성들은 모두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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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는 기괴하게 생긴 소나무에 기대어 뭔가를 보고 있었다. 조그만 작은 수첩에는 뭔가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그는 진정 살인귀의 모습이었다. 연녹색의 오른쪽 눈이 빛날수록, 수많은 사람이 쓰러져갔다. 그는 살려달라는 그들의 애원을 철저히 무시했다. 수천, 수만? 전장의 모든 사람은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 자리에 서 있던 나마저도... 모든 것이 끝나고 쓸쓸히 서 있던 그 남자는 뒤늦게 나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아미는 알 수 없는 한숨을 쉬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오랜 여정의 피로가 몰려오는 듯했다. 그때, 머리 위에서 독사 한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다다른 독사가 입을 벌리고 달려들 그때.
휙~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바람이 휙 하고 불더니, 독사가 뒤로 튕겨 나가 버렸다. 마치 누군가가 독사를 쳐낸 것만 같았다. 놀란 독사는 재빨리 숲속으로 사라졌지만, 아미는 그것도 모른 채, 얕은 잠을 청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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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천가 신성한 숲.
숲속에서 날다람쥐가 날 듯, 한 무리가 내려앉았다.
푸른 비늘 갑옷과 투구를 쓴 20대의, 키가 170은 되어 보이는 건강미인과, 그 또래처럼 보이는 네 명의 호위병인 용녀들이었다.
용녀들은 재빨리 활을 겨누었다.
사냥족의 우두머리인 자가 황급히 무기를 버리며 말했다.
“우린 호지가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부디 아량을 베푸시어 해 질 녘까지만, 여기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부디 살려주십시오. 처자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름지역에서 호지가가 토벌하던 부랑족의 잔당들이었다. 그들의 애잔한 표정에 푸른 비늘갑옷을 입은 여자의 굳은 표정은 살짝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녀는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어서 이 땅에서 물러가라.”
“숲 밖에는 호지가의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제발 선처를 부탁드리오.”
그 말에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다시 바뀌어 있었다.
“나, 여이아. 두말하기 진짜 싫어하는데.”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나가자마자, 그들의 손에 죽을 텐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해가 지면 나가지 말래도 나갈 테니, 부디 잠시만 여기 숨어있게 해줍시오.”
여이아가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사냥족의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안 들어 줄 모양입니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 아닙니까? 기껏해야 계집 다섯입니다. 우린 스무 명이 넘고. 그냥 재낍시... 헉!”
말도 끝맺지 못한 그의 이마엔 표창이 꽂혀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악에 받친 사냥족들이 달려들었다.
순간, 여이아와 용녀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표창과 화살을 연사했다.
순식간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외마디 비명도 못 지른 채, 사냥족들은 모두 주검이 되었다.
다시 사뿐히 땅에 앉은 여이아와 용녀들.
여이아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호지가만 무섭고, 우리 용천가는 우스웠던 모양이구나.”
--- 다음 편에 계속 됩니다---
동쪽 대륙 끝에 위치한 '하나 반도'. 이곳에는 용천가(龍天家), 호지가(虎地家), 해치가(獬豸家)라는 세 가문이 각자의 세력을 이끌며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영토가 맞닿은 '바신' 지역 한복판에는 마마산이라 불리는 기이한 형상의 돌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신성시되는 이곳의 정상에는 신력 있는 점을 치는 하얀 분칠의 제사들, 일명 고드라마들이 살고 있었다.
쿠웅, 끼이익~
마마산 정상, 낡은 거중기가 위태롭게 움직이며 조그만 승강기를 간신히 끌어 올리고 있었다. 이 승강기가 마마산 정상으로 오르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아래에서 지켜보던 수행원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승강기에 놀란 얼굴이었다.
쿵~
정상에 다다른 승강기, 그 문이 열리자마자 사색이 된 채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이가 있었다. 덩치 큰 체구에 호피 가죽옷을 걸친 중년의 사내였다.
“망할 놈의 물건, 또 죽는 줄 알았잖아!”
예상과 달리 산 정상은 황량하지 않았다. 험준한 바위산임에도 불구하고, 꼭대기는 마치 누군가 지형을 잘라낸 듯 평평했다. 부드러운 잔디가 초록빛 양탄자처럼 깔려있었고,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이 정갈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잔디밭 사이를 대리석으로 포장된 길이 나뭇가지처럼 뻗어있었고, 그 중심에는 푸른 크리스털로 이루어진 제단이 장엄하게 서 있었다. 마치 거대한 나무의 줄기를 연상시켰다.
길가에는 기괴하고 독특한 형상의 조각상들이 즐비했고, 제단 양옆으로는 정체 모를 꽃들이 든 화려한 제단이 늘어서 있었다. 그 광경은 이곳이 범상치 않은 장소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털북숭이 사내는 어느새 한 조각상 앞에 다가와 있었다. 뱀의 몸통에 고양이의 얼굴을 한 모습이었다.
“이게 뭐여! 이 꼴같잖은 물건은?”
“묘두사...”
돌연 사내의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순식간에 몸을 돌린 호라치의 손엔 작은 손도끼가 들려 있었고, 그 칼날은 하얀 분칠을 하고 빳빳이 선 젊은 제사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의 키는 상당히 컸다. 호라치의 도끼가 그의 가슴 언저리밖에 닿질 못할 정도로.
“...라고 합니다. 호라치님. 새들의 왕이라 불리는 자이지요.”
위태로운 순간에도 젊은 제사는 놀라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호라치는 눈에 살기를 거두진 않았지만, 손도끼는 거두어들였다. 그는 전투에 이골이 난 무인답게 누가 소리 없이 접근하는 것을 질색했다.
“제발 뒤에서 나타나지 말랬지요! 하마터면 그대 목이 날아갈 뻔했어요!”
“애당초 지니지 않으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요. 그건 잠시 맡아 두겠습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젊은 제사가 두 손을 내밀자, 호라치는 투덜거리며 손도끼를 건넸다. 이어 그는 주변의 다른 조각상들을 둘러보았다.
곰의 몸통에 물소의 눈, 코끼리의 코와 꼬리, 호랑이의 발톱을 가진 기괴한 모습의 불가사리 동상이 있었고, 황금빛 털의 돼지 형상을 한 금돼지 동상도 보였다. 짚으로 만든 우비를 뒤집어쓴 그슨새라는 요괴 상도 있었다.
눈길을 끄는 동상 중 하나는 윗입술이 하늘에, 아랫입술이 땅에 닿을 정도로 큰 입을 가진 거구귀 동상이었다. 덩치가 크고 늠름한 모습의 도깨비 상들도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었다.
채워질 듯 남은 빈 단상들을 보니 앞으로 더 많은 요괴의 모습이 이곳을 수놓을 것만 같았다.
“흥, 날개도 없으면서 무슨 새들의 왕? 대체 여긴 왜 이래?”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호라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젊은 고드라마가 나지막이 묘두사 상을 향해 중얼거렸다.
“너무 서운해 마세요. 저자도 머지않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게 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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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모를 깊은 산속.
바람에 흔들리는 길고 좁은 외나무다리를 한 남장 여인이 봇짐을 등에 메고 조심스레 건너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낡고 허름한 다리 아래로는 쳐다보기에도 아찔한 깊은 계곡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남장 여인은 겁에 질린 얼굴이었지만 이를 악문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갑작스러운 강풍이 불어닥쳤고 외나무다리가 마치 폭풍 속 배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중심을 잡기 위해 두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마치 외나무다리 위에서 커다란 새가 된 것처럼, 그녀의 몸은 바람에 맞서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두발이 다리의 썩은 상판 사이로 빠져버렸다. 등에 멘 봇짐이 상판에 걸려 간신히 추락을 면한 그녀의 상체는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지만, 디딜 곳이 사라진 두 다리가 공중으로 내던져졌다.
“정신 차려, 아미야. 넌 할 수 있어. 조금만 더 힘내자!”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녀는 이를 악물고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사정없이 부는 거센 바람에 아미의 힘은 점점 빠져나갔고, 그녀의 몸은 조금씩 틈새 아래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지직~
이전과는 다른 다리의 흔들림에 아미는 온 힘을 다해 버티었지만 이미 어깨 밑으로는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누나!”
바로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든 아미의 눈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예닐곱 살 난 청의동자가 보였다.
“안 돼! 오지 마!”
아미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지만, 동생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청의동자가 다리로 뛰어오르자 쾅쾅거리는 다리의 요동이 더욱 심해졌고, 순식간에 다리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다리와 함께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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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산 정상의 제단 안은 또 다른 광경이었다. 한마디로 썰렁했다.
드넓은 대리석 바닥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원형 탁자에는 '하나 반도'를 대표하는 세 가문의 가주들이 앉아 있었다. 호지가의 호라치, 해치의 미치루, 용천가의 여천우가 그들이었다. 미치루는 하얀 도포를 입은 점잖게 생긴 50대 후반의 중년 남자였고, 여천우는 화려한 복장만큼 기품이 있어 보이는 미모의 중년 여인이었다.
호라치의 인상은 심각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 않은 듯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는 잔에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거칠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소탕이 끝났으면 바로 북쪽 방벽을 쌓기로 약조했었소. 그런데 갑자기 보류라니, 지금 우릴 우롱하는 것입니까?”
그의 격양된 목소리가 제단에 울려 퍼졌다. 반도의 남쪽과 서쪽을 아우르는 기름진 땅을 가진, 이 땅의 터줏대감, 용천가 앞에서도 호라치는 거침이 없었다.
여천우는 미동도 없이 그저 차를 홀짝였다. 대신 난처한 얼굴의 미치루가 입을 열었다.
“호라치님께서 잘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만... 용천가에는 오랜 전통이 있어서 간택이 결정되기 전까진 그 누구도 영지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간택 날짜는 마마산 제사들의 점괘에 따르는데, 언제 나올지 그 예측이 어려웠던 것이오. 부디 이해해 주시기를...아니면, 좀 더 용천가가 납득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이해를 구해보심이...”
곤혹스러워하는 미치루의 모습이 호라치는 우스웠다.
‘또, 지랄병 나셨네. 쥐뿔도 없는 해치가가 또 중재하려 드는군.’
그간 두 가문에 붙어 그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해치가의 태도가 가증스러웠다. 물론, 변변찮은 병력을 지녔기에 이렇게라도 해야만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는 그들의 절실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내가 이해를 구하는 것처럼 보이오? 우릴 대륙에서 이곳까지 내몬 그 웅족(熊族)이 나라를 세웠단 말입니다. 지금 대륙의 정세가 얼마나 험악한데 무슨 전통 타령입니까? 북녘의 야욕을 모르십니까? 장벽이 없으면 우리 모두 망할 거란 말이오!”
목소리에 서린 분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제야 여천우가 입을 열었다. 특유의 여유로움은 사라지고 냉소만이 가득했다.
“장벽이 그리 급한 것인지, 아니면 겁에 질린 것인지 모르겠군요. 웅족과는 워낙 철천지원수였다니, 그리 호들갑을 떠는 것이 이해는 가지만, 언제부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걱정했답니까?”
“굴러온 돌이라...”
호라치는 이를 갈았다.
대륙에서 쫓겨나 간신히 뿌리내린 과거가 조롱거리가 된 것이다. 호라치는 늘 자신들이 하늘의 선택을 받았노라 자부하는 용천가의 선민의식이 역겨웠다.
“변두리에만 박혀 계시다 보니, 천하가 어지러운 것도 모르시는 듯합니다. 여전히 박힌 돌 타령이니.”
여천우와 호라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살기가 느껴지는 적막이 흘렀다.
“자자, 진정들 하십시오. 잠시 지체될 뿐이지 포기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해치가는 수송할 물자 준비가 되어 있사옵니다.”
미치루가 필사적으로 중재에 나섰다.
“물자요? 아, 500년 만의 용의 제사라며 조공품이 늘어 우리 몫은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래서야 어찌 믿고 맡기겠소.”
호라치의 눈빛에서 냉소가 뿜어져 나왔다.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우린 우리 갈 길을 가겠소. 하여, 이번 간택식에는 참여 못 하오. 사주단자도 보내지 않겠소.”
차갑게 말을 끝낸 호라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여천우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무리 변두리라도 변화의 조짐쯤은 눈치챌 수 있지요. 사람들의 움직임을 살피다 보면, 뜻밖의 일들을 발견하게 되는 법이거든요. 때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호라치의 걸음이 멎었다. 미치루는 깜짝 놀란 눈으로 여천우를 바라보았다.
수일 전, 달빛 아래 호라치와 미치루가 은밀히 만났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여천우가 차분히 잔을 채우며 말했다.
“이제, 이 땅에 나라를 세우고자 합니다. 어떻게? 함께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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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아래로 부서져 내린 외나무다리는 산산조각 나있었다. 어쩐 일인지, 다리와 함께 계곡으로 떨어졌던 아미는 살아있었다. 기진맥진해진 아미는 털썩 땅에 주저앉더니, 대자로 누워버렸다.
“누나 괜찮아?”
청의동자가 그녀 옆에 쪼그려 앉으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너!”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낼 힘도 없는 듯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랬더니, 왜 따라왔어?”
“지금 산지기 형아들이 누나 찾는다고 올라오고 있어. 그거 알려주려고. 화가 많이 났어. 누나 잡으면 가만 안 둔대.”
“산지기? 왜?”
“여긴 죄지은 사람들을 가두는 유배지라서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래.”
“유배지라고?”
“응. 누나가 찾는 그 형아가 죄를 지었다는데?”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가문의 장자를 이 험한 곳에 유배를 보내?”
“그건 말 안 해주던데? 근데, 유배지에 보낼 정도면 무지 나쁜 짓을 저지른 형아인 거 아냐? 정말, 괜찮겠어?”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 괜찮아.”
“응. 뿔피리는 잘 챙겼지?”
아미가 몸을 일으키더니, 목에 걸린 작은 뿔피리를 내보였다.
청의동자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날 불러. 알았지?”
“그래. 걱정하지 마.”
아미가 바라보는 곳에는 큰 바위가 있었고, 그 옆에는 기괴하게 구부러진, 오래된 소나무가 서 있었다.
“다행히 쉽게 찾은 것 같네. 어서 가.”
아미가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청의동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짧은 한숨을 쉰 아미는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이 있다는걸.
##
“여기선 정말 조심해야 해. 여기서 들켰다간 그날로 우린 황천길이니까. 저들이 돌아갈 때까지만, 얌전히 있다가 날이 지면 나갈 거야. 모두 알아들었지.”
빽빽한 숲속 한 가운데에는 사냥족 한 무리가 불안한 얼굴로 각자 나무에 기대여 앉아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때, 화살 하나가 우두머리 같은 자의 머리 위의 나무에 꽂혔다.
사냥족의 남성들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여기는 용천가문의 영지, 그대들은 신원을 밝혀라.”
쩌렁쩌렁한 여인의 목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들켰다. 튀어!”
사냥족이 흩어지려는 그때, 다시 날라 온 화살에 사냥족 두 명이 쓰러졌다.
둘 다 눈과 심장에 맞아 즉사했다.
“꼼짝 하지 마라. 여긴 신성한 숲. 용천가 사람이 아니면, 한 발짝도 들일 수 없는 곳이다. 그대들은 지금부터 용천가의 법을 어긴 죄인들이다.”
사냥족 남성들은 모두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
아미는 기괴하게 생긴 소나무에 기대어 뭔가를 보고 있었다. 조그만 작은 수첩에는 뭔가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그는 진정 살인귀의 모습이었다. 연녹색의 오른쪽 눈이 빛날수록, 수많은 사람이 쓰러져갔다. 그는 살려달라는 그들의 애원을 철저히 무시했다. 수천, 수만? 전장의 모든 사람은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 자리에 서 있던 나마저도... 모든 것이 끝나고 쓸쓸히 서 있던 그 남자는 뒤늦게 나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아미는 알 수 없는 한숨을 쉬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오랜 여정의 피로가 몰려오는 듯했다. 그때, 머리 위에서 독사 한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다다른 독사가 입을 벌리고 달려들 그때.
휙~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바람이 휙 하고 불더니, 독사가 뒤로 튕겨 나가 버렸다. 마치 누군가가 독사를 쳐낸 것만 같았다. 놀란 독사는 재빨리 숲속으로 사라졌지만, 아미는 그것도 모른 채, 얕은 잠을 청하는 것 같았다.
##
용천가 신성한 숲.
숲속에서 날다람쥐가 날 듯, 한 무리가 내려앉았다.
푸른 비늘 갑옷과 투구를 쓴 20대의, 키가 170은 되어 보이는 건강미인과, 그 또래처럼 보이는 네 명의 호위병인 용녀들이었다.
용녀들은 재빨리 활을 겨누었다.
사냥족의 우두머리인 자가 황급히 무기를 버리며 말했다.
“우린 호지가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부디 아량을 베푸시어 해 질 녘까지만, 여기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부디 살려주십시오. 처자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름지역에서 호지가가 토벌하던 부랑족의 잔당들이었다. 그들의 애잔한 표정에 푸른 비늘갑옷을 입은 여자의 굳은 표정은 살짝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녀는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어서 이 땅에서 물러가라.”
“숲 밖에는 호지가의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제발 선처를 부탁드리오.”
그 말에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다시 바뀌어 있었다.
“나, 여이아. 두말하기 진짜 싫어하는데.”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나가자마자, 그들의 손에 죽을 텐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해가 지면 나가지 말래도 나갈 테니, 부디 잠시만 여기 숨어있게 해줍시오.”
여이아가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사냥족의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안 들어 줄 모양입니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 아닙니까? 기껏해야 계집 다섯입니다. 우린 스무 명이 넘고. 그냥 재낍시... 헉!”
말도 끝맺지 못한 그의 이마엔 표창이 꽂혀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악에 받친 사냥족들이 달려들었다.
순간, 여이아와 용녀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표창과 화살을 연사했다.
순식간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외마디 비명도 못 지른 채, 사냥족들은 모두 주검이 되었다.
다시 사뿐히 땅에 앉은 여이아와 용녀들.
여이아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호지가만 무섭고, 우리 용천가는 우스웠던 모양이구나.”
--- 다음 편에 계속 됩니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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