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지는 마
부탁할게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슬퍼도
제발 그러지 마
이유는 없지만
내 소원이니까
제발
잠시 내 얘길 좀 들어봐줘
난 세상을 바꿀 수 없어
무엇도 해낼 수 없어
널 괴롭히는 어둠에
맞설 용기조차 없지만
♪
새벽 두시 창밖에 미친 듯이 쏟아 내려지는 빗 소리와 함께 규리의 휴대폰에서 노래가 반복 재생되며 흘러나온다...
(지잉 지잉 지잉)
휴대폰 진동소리가 요란하게 한참 울리다 멈췄다 또 진동이 울린다.
(구병준) 부재중 12통...
방바닥에는 피가 잔뜩 묻어있는 커터 칼과 수많은 빈 약통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손목의 칼로 베인 상처들로 피바다가 되어 있는 침대 위엔 규리가 의식을 잃은 체 누워있었다.
20분쯤 시간이 흘렀으려나..
구조 대원들과 경찰들이 문밖에서 다급하게 규리를 부르며 문을 두드린다.
(쾅쾅 쾅!)
"한규리씨 집에 계시나요? 경찰입니다."
(쾅쾅 쾅쾅!)
"신고받고 출동했습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한규리 씨 괜찮으신가요?"
출동한 구조 대원과 경찰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친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응답조차 없었다..
"긴급상황으로 판단되어 문을 강제 개방하고 진입하겠습니다."
(쿵...)
경찰의 다급한 마지막 경고 후에 큰 소리와 함께 문 고리가 부서져 바닥에 떨어진다.
문이 열리자마자 침대에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있는 규리를 발견하자 대기하던 구조 대원들이 황급히 달려들어와 플래시를 키고 동공을 확인하고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시작한다.......
(삐-삐-삐-삐-)
중환자실 침대 옆 병상 모니터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꿈벅.. 꿈벅..)
정신 차리고 눈을 뜨자마자 희미하게 낯선 중환자실의 천장과 저녁 12시 45분을 가리키며 깜빡거리는 전자시계가 보였다.
팔과 다리가 너무 뻐근해서 움직이려고 하자 온몸이 병원 침대에 밧줄로 묶어져 있는 상태였으며 소변줄과 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으... 온몸이 아프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
"하.... 이번에도 또 실패구나... 지긋지긋하다... 진짜 죽고 싶다...."
(눈물이 뚝하고 얼굴을 타고 내려와 베개가 젖는다)
규리는 눈물을 흘리며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고개만 돌리며 희미하게 중환자실 옆 유리 창문을 넘어 보이는 연세가 많으신 할아버지가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넋을 잃고 누워계시는 모습과 기다리다 지쳐 침대에 기대어 자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규리)
"엄마....엄마.....!"
"저 여기 어떻게 온 거예요?"
(엄마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 힘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너 또 일을 저질렀구나... 병준이가 신고해서 너 겨우 실려 온 거야.. 정말 넌 왜 이렇게 사람을 걱정하게 하고 질리게 하는 거니? 의사 선생님 불러올 테니 기다려."
잠시 후 담당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의사) "환자분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규리) "규리....한규리입니다.."
(의사) "생년월일은 어떻게 되시나요?"
(규리) "1998년 10월 02월입니다."
(의사) "네 맞습니다. 드디어 의식을 되찾으셨군요. 이틀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계셔서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지금은 먼저 안정을 취하시고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규리)"네.. 감사합니다.. 근데 혹시 제 팔 다리는 왜 묶여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온몸이 너무 아프고 뻐근합니다..."
(의사)"네 당연히 그러실 겁니다.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셔서 기억이 안 나시겠지만 주삿바늘 강제로 뽑으시고 간호사들이 여러 명이 붙어도 가만히 있지 않으시고 저항하셔서 환자분의 안전 차원에서 팔 다리는 보호자 동의 후 묶어 두었습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
(규리)"혹시 묶긴 제 팔 다리 좀 풀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너무 불편하고 아픕니다.."
(의사)"나중에 보시면 온몸에 멍투성이 일 겁니다.. 구급차에 실려 올 때부터 가만히 있지 않으시고 힘으로 저항을 하셔서 구조 대원분들과 간호사분들이 강제로 침대 위에 환자분 겨우 눕히고 조치를 취했습니다."
(규리)"기억은 안 나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의사)" 팔과 다리는 풀어달라고 간호사한테 전달해뒀습니다. 일단 시간이 늦었으니 안정을 취하시고 내일 다시 뵙는 걸로 합시다."
(규리)"네.. 감사합니다.."
의사선생님이 나가신 후 간호사가 들어와 팔 다리와 허리에 묶인 줄을 풀어주신 후 엄마가 지친 모습으로 다시 들어오셨다.
(엄마)" (한숨) 넌 정말 왜 그러는 거니? 죽고 싶으면 너 혼자 조용히 죽지 왜 자꾸 주변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는 거니? 이게 도대체 몇 번째야!?? 그렇게 관심을 받고 싶어??꼴도 보기 싫다 이젠.. 지친다.. 너 때문에.."
엄마는 큰 소리로 짜증 내는 말투로 화를 내시고 휴대폰을 툭 던지고 중환자실을 나가신다.(지잉)
위로와 걱정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화살같이 가슴에 꽂히는 말만 또 들으니 규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예상했다.. 아니 익숙했다.. 어릴 적부터 유기견처럼 미움만 받던 나는 나 자신을 대하는 가족들을 보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너무 힘들고 너덜너덜 한데도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을 미워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일까.. 멍청한 건가.. 아니면 착한 걸까..'
'진짜 죽고 싶다. 왜 또 나는 살아난 거지.... 역시 난 죽을 자격도 없는 한심한 인간인 건가....?'
-
다음날 아침 의사 선생님이 다시 찾아오셨다.
(의사)"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어머님은 자리를 잠시 비켜 주실 수 있으신가요?"
(엄마)"아.. 네..그러죠.."
그러곤 터벅터벅 중환자실을 나가신다.
(지잉) 자동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난다.
(터벅터벅 규리에게 의사 선생님이 다가온다)
(의사) "환자분.. 몸 상태는 좀 어떠신가요?"
(규리) "아.. 지금 목소리도 잘 안 나오고 속이 너무 울렁거리고 토할 거 같아요 어지럽고 힘이 없어요.... 제가 왜 또 살아났는지 지긋지긋하네요.."
(힘없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의사) "수면제과 신경안정제들을 과다 복용한 상태에서 강제로 위세척을 여러 번 시도하긴 했으나 너무 늦게 발견되셔서 3분의 1 정도의 약 만 빼낼 수 있었습니다.. 속 안에 뒤집어져서 말도 아닐 겁니다. 당분간은 식사 대신 수액을 맞으시면서 안정을 되찾으셔야 됩니다. 건강도 정신도.. 곧 정신과 선생님이 들어오실 겁니다. 어려우시겠지만 마음을 천천히 열면서 상담을 해보시는 게 좋을.."
(규리) "아니요! 싫습니다. 상담받기 싫어요.."
(의사) "음.... 환자분이 상담을 망설이는 이유가 어떻게 되시나요?"
(규리) " 저의 불행하고 우울한 이야기들을 토해내며 누군가에게 더 이상 공감과 위로 따위 받고 싶지도 않고.. 싫어요 그냥.. 제가... 제 자신이.. 흑... 흑....."
(규리에 감정에 복받쳐 참던 감정들이 눈물과 함께 터져 나온다.)
(의사)"네....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긴 합니다. 그동안 홀로 얼마나 힘들게 버텨내고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삶을 포기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이기도 하고 제 눈에는 환자분이 아직 너무 예쁘고 빛이 나는 사람으로 보여서요.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규리는 예상 치 못한 낯선 사람한테 따듯한 말을 듣자 감정이 벅차올라 눈물을 계속 흘리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린다.
(의사) "이번엔 꼭 상담 꼭 받으셔야 합니다. 병원 차트를 확인해 보니 자살시도로 인해서 응급실 실려 오신 게 벌써 여러 번째 더군요.. 정신과도 오래 다니신 기록도 있으시고.. 당분간 퇴원은 현재 어려운 상태로 판단되어 강제 입원하셔야 되는 상태입니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지시면 정신병원 장기 입원도 생각하셔야 됩니다.
(규리) "정신병원에는 절대 갇히기 싫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의사) "그럼 곧 들어오실 선생님과 상담도 열심히 하시고 스스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나아지려고 많이 노력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죠?(웃음)
(규리)"훌쩍..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사)"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규리)"네..?어떤 거요..?"
(의사)"우리 한번같이 한번 웃어 볼까요?"
(규리)"웃음이 안 나는 데 어떻게 웃어요.. 싫어요.."
(의사)"흠... 계속 인생 찌푸리면 주름 생기고 못생겨진다던데...."
(규리)"에이..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ㅋㅋㅋ"
농담하시는 의사선생님이 어이없고 웃겼는지 자기도 모르게 규리의 웃음이 터져 나온다.
사실 예전의 규리는 웃음이 참 많은 아이였다.
(의사)"거 봐요.. 웃으니 이쁘구먼 뭘~ 본인은 웃을 때 얼마나 예쁜지 모르죠?ㅎㅎ내일도 모레도 저희 웃으면서 봅시다!"
(의사)"아 그리고 상담도 꼭 잘 받으시고!^^"
(규리)"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ㅎ"
(지잉) 중환자실의 자동문이 열리고
의사선생님이 걸어나가신다.
규리는 걸어나가시는 의사선생님이 신고 계시는 크록스에 달린 심슨 캐릭터를 보고 피식 웃고 다시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