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르륵
사내의 눈가에서 물결이 일었다.
이내 그 물결이 눈물로 바뀌어 속삭이듯 흘러내렸다.
그의 얼굴에는 괴로움이 물결치듯 번져갔다.
"저기··· 괜찮으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사내의 귀에 닿자, 그의 괴로움은 더욱 커졌다.
마치 그의 주변으로 세상이 어두워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간신히 검을 그녀에게 겨누었다.
떨리는 왼손으로 이마를 꽉 움켜잡았다.
"물, 물러나라······!"
당혹스러웠던 루아는 일단 그의 말을 따랐다.
그녀가 물러나자 잠시 그의 고통은 진정하는 듯했지만, 곧 다시 피어올랐다.
"끄아아악······! 제발, 제발 나를 내버려다오!"
* * *
- 화아아!
근처에서 불길이 치솟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그 소리를 듣고 놀라서 달려가 보니, 한 여자가 괴수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법은 마법의 '마'자도 모르는 나조차도 서툴러 보였다.
그런 그녀가 위험해 보이자, 나는 그녀를 도와줬다.
- 챙강! 사사사사사삭!
내 검 끝으로 괴수의 혈흔이 묻어있었고, 아주 큰 고기 조각이 되어있었다.
그녀는 고마움을 표시하며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녀를 보니 뭔가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와 같이 있을 때마다 마음이 편해졌다.
"갑자기 몸이 오싹하네요."
"감기일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쪽은 안 추워요?"
"저는 아무래도 이곳에서 살던 터라, 춥진 않습니다."
그런 대화를 하던 중 그녀가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나저나 저희 서로 통성명을 하지 않았네요!"
"그렇네요.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죠?"
"루아입니다."
나는 루아라는 이름을 듣고서는 온몸이 아려왔다.
"······뭐, 뭐? 루아요?"
"네 루아인······."
- 주르륵
루아의 이름을 듣자 눈물이 흘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닿았을 때, 무언가 깊은 곳에서 아픔이 샘솟았다.
"저기··· 괜찮으세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더 이상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왜 이런 상황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갑자기 전신이 불에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고통에 나는 겨우 이성을 잡고 그녀에게 외쳤다.
"물, 물러나라······!"
간신히 이성을 잡은 그는 루아의 시선을 피했다.
그때 머릿속이 타는 느낌이 나기 시작하더니, 누군가 내게 말했다.
['흑색'의 아이를 결국 찾아낸 것이냐? 이것이 운명이란 것이겠지.]
'화신······!'
화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잠시.
머릿속에서 불길이 요동치는 느낌에 나는 신음을 참을 수 없었다.
"끄아아악······!"
[신격체의 힘을 사용해서 기억을 지웠건만,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것이냐? 남은 기억마저 지워주겠다.]
"제발, 제발 나를 내버려다오!"
[내 힘을 선택한 이상 너는 피할 수 없다.]
화신이 내 기억을 헤집었다.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그 순간, 나는 남은 기억의 편린들을 찾아냈다.
[결국 기억을 되찾은 것이냐!]
화신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
하지만 그런 화신을 무시하고 기억을 되찾자, 옛 추억들이 하나하나 생각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페를린······ 과거 루아와 옛 친구.'
나의 과거 기억을 찾은 그때.
화신은 또다시 내 기억을 지웠다.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나는 이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루아는 혼란스러웠다.
그가 갑자기 자기 머리를 부여잡더니, 이내 쓰러졌기 때문이다.
"잘생겼다 해서 믿으면 안 되나······. 물론 나도 기억이 끊겨서 이 산맥으로 왔지만."
자신의 처지가 남을 뭐라 할 처지가 아님을 알아버리자, 이내 그냥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기 먼 곳에 건물이 몇 채가 보였다.
저 건물 몇 채들은 아마도 작은 마을인 것 같았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사내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거운 사내를 들고 갈 루아는 벌써부터 뒷골이 당겨왔다.
"쳇··· 무거운 짐 덩이네."
루아는 투덜대며 사내를 짐 덩이라 칭했다.
별수가 없던 루아는 자신의 등에 사내를 업고 건물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 *
"베르덴 죽어!"
"이런 무능한 녀석!"
"네가 살아있을 가치는 없다!"
베르덴의 귀속으로 들려오는 소리.
"또 시작인가······."
이미 환청은 익숙한지 애써 무시하고 루아의 추적을 재개했다.
해는 거의 다 져가서 주황빛 노을을 띠고 있었다.
문득 베르덴은 과거 주치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무언가 후작님의 자아를 갉아먹고 있습니다. 그 환청, 치료할 방도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두웠던 진료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는······."
베르덴은 다양한 생각과 잡다한 감정을 뒤로 하고 금지된 힘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다시 한참을 걸었을 때 흔적이 끊겼다.
"······흔적이 끊겼다?"
"킥킥. 네가 그렇지 뭐."
"베르덴이 실패했다! 베르덴이 실패했다!"
"추격엔 자신이 없나 봐!"
다시 들리는 환청들에 베르덴은 참지 못했다.
" · · · · · · . "
「아이스 프레임!」
- 피이이! 차자자작!
베르덴의 양쪽으로 얇은 벽들이 여러 겹, 다른 각도로 일제로 펼쳐졌다.
"케에엑!"
"베르덴······!"
"나쁜··· 녀석!"
"이제야 쓸만한 말을 하는구나."
베르덴은 다시 환청을 뒤로하고 추적에 집중했다.
이미 해는 졌지만, 그래도 추적에 집중했다.
하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어떻게든 남아있어야 하는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흑마법을 조절할 수 있다고? 아니, 그건 불가능해."
아무리 찾아도 더 이상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우선 다음에 다시 찾아와야겠군."
* * *
- 수근수근!
"저기 마녀다."
"뭐? 마녀 어디?"
"쓰러진 사람이 마녀의 손에!"
"마녀가 사람을 죽였나 보다!"
"우리도 죽을지 몰라."
루아는 그들의 말을 애써 무시하고 작은 마을에 여관을 찾아갔다.
- 띠링띠링
여관에 루아가 들어오자 방금까지 따뜻했던 공기들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 덜덜덜덜
루아는 카운터에 있는 직원에게 하루 묵고 싶다고 했다.
"하루 묵고 싶습니다."
"이, 이십··· 아니, 무료입니다. 바, 방은 132호를 이용해 주세요."
카운터에 있는 직원은 겁에 질린 듯 몸을 떨고,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아는 작은 방에 들어섰다.
루아는 침대에 앉으며 쓰러진 사내를 침대에 눕혔다.
"당신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루아는 화장실로 들어가 간단한 샤워만 하고 밖으로 나와 침대에 누웠다.
사내가 옆에 있어서 거슬렸던 루아는 잠시 고민했다.
'같은 침대··· 쓰면 조금 그러려나? 에잇, 알 게 뭐야!'
루아는 사내를 옆에 두고 같은 이불을 덮고 등을 돌렸다.
루아의 얼굴은 마치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불이 꺼지고 한참이나 뒤척거리고 난 후에야 잠에 들었다.
'내일은 꼭 일어나길······.'
· · · · · · 《 증오, 혼돈 그리고 살심 - 2화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