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 새벽에 잠을 못 자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뒹굴거렸지만 아침에 눈을 뜨니 몸이 개운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고 퇴근하는 길에는 늘 술을 찾았다.
단골 술집에서 잔을 채우고 있는데 누군가 내 앞에 앉았다.
"여기 앉아도 돼요?"
동네에서 종이를 줍고 다니는 할머니였다.
"아. 네. 그럼요."
소주 1병을 막 마시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 분은 나를 바라보며 슬픔에 잠기어 있는 듯 했다. 그 작은 얼굴에 세월의 고단함이 여기저기 묻어서 내 눈을 괴롭게 했다.
"딸이 하나 있어요. 근데 결혼을 안 하겠다는 거야. 아휴..."
동네에서 몇 번 지나다가 인사를 하는 사이인데 이렇게 속내까지 말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할머니는 내게 자신의 고민을 훌훌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그래.. 왜 맨날 혼자 청승이요?"
갑자기 뜨끔했다. 하긴 거의 매일 와서 같은 시간에 이러고 있으니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이상할 만도 했다.
"그게. 집에 가기 싫어서요. 애도 다 크고 ... 헤헤."
멋적게 웃었다. 더 할 말도 없고 그저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하기만 했다.
"그래. 혼자라고? 애 엄마는 없고? 아이고 그랬구나. 쯧쯧쯧."
할머니는 가여운 듯이 혀를 차셨다.
"헤헤헤. 이제 괜찮아요. 오래되어서..."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난 전혀 괜찮지 않다.
"술을 이렇게 매일 마시면 어떡하나. 몸도 생각해야지. 내 딸은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해. 아휴. 그것 생각만 하면은..."
할머니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들더니 작은 구슬이 반짝이며 또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냅킨을 뽑아 드리며 말했다.
"울지 마세요. 할머니. 저 같은 놈도 살잖아요. 힘내세요."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위로다. 저 같은 놈?
"내 딸 좀 만나 볼려? 남자가 베필이 있어야제. 허구한 날 이렇게 술만 퍼먹고 있으면 쓰나."
"아니에요. 할머니. 전 생각없어요."
'네' 라고 크고 분명하게 소리쳐야 했으나 반대로 말하고 말았다. 나의 거짓말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내 자신도 나의 이런 모습에 감탄하며 놀라고 있다.
"그려... 그럼."
할머니는 자리를 뜨셨다. 그리고 술집 주인과 무슨 얘기를 속닥 거리더니 나가셨다. 난 그 후로도 술을 계속 마셨으며 노래방에 가고 또 회사를 관두었다.
미친 놈의 삶이었다. 새벽에 집에 가면 아들은 여전히 게임중이었고 고양이는 밥을 달라고 울어댔으며 부엌에는 밀린 설거지가 백두산처럼 높이 쌓아져 전시되어 있었고 방에는 양말들이 옷들이 너부러져 냄새를 풍기며 있고 세탁기에는 옷들이 뒤엉켜서' 나를 세탁해줘 '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도깨비 시장'
그렇다 바로 내 집이 이 다섯 글자로 표현할 수가 있다.
며칠이 지난 후에 할머니의 리어카를 끄는 아줌마를 볼 수 있었다. 누가 봐도 그 할머니의 딸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저 멀리에서 할머니가 허리춤을 붙잡고 따라가고 있고 난 퇴근하는 차 안에서 그 모습을 훔쳐보았다. 솔직히 내 맘에 들지는 않았다. 여자가 덩치가 있었다. 키가 나보다 컸다. '아니에요' 라고 대답하기를 잘 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날도 어김없이 술집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또 노래를 부르러 갔다. 새벽에 가니 아들이 자고 있다. 신기했다. 오랜만에 밤 12시에 자고 있으니 모든 것이 감사했다.
우리집 고양이는 얼굴이 시커멓다. 데리고 온지는 7년이 되었는데 처음엔 얼굴이 하얀 애였다. 아들의 생일에 맞추어 11월달에 분양받았다. 아들은 처음에 고양이를 보고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10살에 고양이와 만난 아들은 17살이 되었다. 이제는 고양이를 껴안고 뽀뽀하고 부비고 장난치고 별 짓을 다한다. 18살이 되던 해부터는 고양이하고도 잘 놀지 않는다.
오로지 게임에만 푹 빠져서 산다. 게임 중독이 된 것이다. 그렇게 나와 아들은 점점 멀어져 갔다.
외로웠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혼자인 나는 그 즈음에 친구들과 자주 전화를 했다. 누군가 말을 할 상대가 필요했나보다.
어떤 친구와는 늘 여자얘기만 하고 이 친구하고는 돈얘기. 저 동생하고 전화하면은 다니는 회사얘기를 들어주기만 하고. 바보 친구하고는 종교에 대해 토론을 한다.
매일 똑같은 일상. 집> 회사> 술집> 노래방의 쳇바퀴가 너무나 지겨워 질 때 회사를 관두었다.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보며 제정신이냐고 걱정했다.
"아니. 이 미친 놈아. 생활은 해야 할 거 아냐? 도대체 어떻게 할라고 그래?"
친구가 내게 잔소리를 한다. 걱정이 되겠지.
"아. 몰라. 몸 건강하면 뭐라도 한다. 걱정하지마."
"아휴, 너 지금 나이가 몇 갠데.... 일할 곳은 있냐?"
"없겠냐? 있겠지. 나도 몰라. 하하하"
봉이 김선달. 조선시대에 대동강 물을 팔아서 정승이 되었다는 시대의 사기꾼.. 그가 내 조상인가 보다. 삿갓을 쓰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사는 김삿갓... 그게 바로 나다.
"야. 너 그냥 산에 올라가서 뒈져!"
여자이야기를 좋아하는 친구가 내게 한 말이다. 물론 장난이겠지만 이 녀석은 진지하다.
"카카카. 그럴까? 하하하"
"미친 놈. 진짜 왜 그러냐? 너는. 나이값 좀 해라."
"그 나이값 나도 하고 싶다. 그래서 오늘은 술 안 마셨다."
"뻥 치지마 . 니가 술을 안 먹어?"
그 친구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가끔씩 밤늦게 전화해서 어디냐고 묻는 엉뚱한 친구이다. 그래도 심성이 착해서 관계는 유지하고 있는데 하는 짓을 보면 참 재미나다.
전화를 마치고 노래방에 도착했다.
"또 왔어? 야. 집에 가. 그제도 놀고... 왜 그래? 내일 일 안 가?"
"응. 안 가. 누나"
사장 누나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한동안 정신이 멍했다.
"그건 그렇고 외상은 언제 줘? 너 월급은 받어?"
"네 받아요. 며칠 있다 가요."
"너 진짜 내가 널 어떻게 믿어. 장사도 안 되는데."
한참을 누나랑 놀고 있는 데 낯선 여자가 가게로 들어왔다.
자그마한 키에 애들 옷을 입고 있는 아줌마는 나이가 꽤 들어 보였다. 나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다..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