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을 졸업하고 국민학교라는 곳에 입학했다. 처음 가 본 학교는 매우 넓고 추웠다. 입학식을 바람이 부는 커다란 운동장에서 수 백명의 아이들과 함께 했고 1미터가 조금 넘는 파란 철제 단상에 여선생님이 올라와 우리와 놀아주셨다. '뭔 애들이 이렇게 많어?' 지지고 볶는 엄청난 소음으로 귀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 중에서 유난히 얼굴이 새까만 아이를 보았다.
'흑인인가? 여자애?' 그 아인 파란 네모 체크무늬의 치마를 입고 살짝이 웃고 있었다. 누구도 그 애와 말하지 않았다. 마치 큰 바다에 무인도가 하나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왜 인지 그 여자애가 불쌍해 보였다. 나도 말을 잘 안 했으니까. 그 애도 말이 없으니. '음... 나와 같은 내성적인 아이?' 반가웠다. 이 커다란 인파에서 나와 같은 이가 있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애의 얼굴이 너무 시커먼 것이다. 아이들의 속삭임이 작게 들려왔다. '쟤 진짜 까맣다. 그치?' '아까부터 저 남자애가 계속 쳐다봐. ㅋㅋㅋ'
귀가 너무 좋아도 신경이 쓰인다. 대부분 여자애들이 서로의 귀에 대고 하는 수다이다. 아무 의미도 없고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소리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애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가까이 보니 정말 까맣다. 얼굴에서 눈밖에 안 보인다. 근데 자세히 보니 이쁘다. 주근깨도 있고. 얘가 날 보고 살짝 웃는다. 난 머쓱해서 다가가는 것을 멈추고 단상에서 춤추고 있는 선생님을 바라 보았다. 율동을 알려주신다고 하며 몸개그를 하신다. 엉덩이를 마구 흔드시면서 웃으신다. 참 재미난 분이시다. 자기가 좀 젊었을 때는 인기가 좋았단다.
그런 얘기를 8살짜리 애들한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님의 파란 청바지가 역겨웠다. 체구가 작은 젊은 누나 선생님은 확성기를 쓰셨다. 우웅 거리는 그 기계는 내 귀를 너무 괴롭혔다. 자주 삐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이들의 귀를 막았다. 밖에서 30분정도를 교육을 받고 쉬는 시간이 다가왔다. 저 앞에 아까 그 여자애가 아이들과 손잡고 어디를 가고 있었다. 무심코 따라가 보니 화장실이었다. 외부에 있는 퍼세식 화장실은 남녀 구분도 없었다. 여자애들은 두 명이 한 조로 들어가서 볼일을 보았고 남자애들은 혼자서 바지를 내리고 볼일을 보았다. 어떤 애는 바지를 다 내리고 쌌다. 내 바로 옆에서 날 보며 웃으면서.... 나는 몰랐다. 그 녀석들이 미래의 나와 같은 반이 될 줄은 말이다. 정말로 꿈에도 몰랐다. 그 바지를 다 내리고 오줌을 누는 녀석은 6살인데 조기입학을 했다고 한다. '난 7살인데... 나보다도 어리네?'
다음 날에 학교에 가니 운동장에서 반을 나누었다. 무려 반이 13개??? 주간반 야간반이 나눠 졌다.
학교를 오후1시에 가는 것이 참 좋았다. 늦잠을 실컷 잘 수도 있고 도시락을 안 가져가도 되어서 정말 좋았다. 엄마는 언제나 김치 깍두기를 맨 밥이랑 된장국에 싸서 주셨다. 싸구려 소시지 하나도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단독주택세입자에서 아파트입주자가 되면서 엄마는 구두쇠가 되셨다. 아파트 중도금을 내기 위해 돈을 아끼신 거였다. 청약이 당첨되었다고 좋아하시더니 5층짜리 아파트로 이사가시면서 기뻐하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사하는 날에 큰 아빠랑 사촌 형 들도 모두 오셨다. 아버지는 벌개진 얼굴로 친척들의 축하를 받으셨다. 날이 더워지면 김치국물이 가방에 배어나왔다. 그 끔찍한 냄새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도시락을 다 집어던지고 가방을 손으로 빨아야 했다. 그렇게 학교에서 난리를 치니 소시지를 싸주기 시작하셨다. 엄청난 잔소리와 함께 온갖 구박을 맞으며 엄마와 싸워야 했지만 점심시간에는 아이들이 나에게 다가와서 같이 먹었다. 그 가난한 동네에서 소시지는 매우 귀한 반찬이었으니까 말이다.
이제 반을 짰으니 짝궁을 정해야 했다. 남자들이 먼저 앉고 여자들이 자리에 앉았다. 내 옆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선생님이 머뭇거리며 서 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어머. 넌 왜 이리고 있어? 저기 수한이 옆에 자리 비었다. 미경아."
파란 체크무늬치마의 소녀는 가만히 앉아서 수줍어 했다. 그 시커먼 얼굴이 더 까매졌다.
난 화가 났다. 까만 얼굴이 너무 싫었다. 나도 하얀 얼굴을 가진 여자애와 앉고 싶었다. 해서는 안 될일을 하고 말았다.
나는 짝꿍의 의자를 밀고 있었다. 미경이는 요동도 없이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야!!!!!!"
선생님이 새빨간 얼굴로 씩씩거렸다.
"뭐해? 어머 미경아. 괜찮니? 어디 보자.."
난 계속해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은 눈을 시리게 할 정도였다.
"너 당장 사과하지 못해? 안 되겠다. 수한이 너 부모님 모셔와 알겠어?"
대답하지 않았다. 사과도 안 했다. 난 그냥 더 이상 짝꿍을 밀지 못했다.
집에 가자 마자 악마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엄마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무서운 적은 없었다. 엄마의 일장연설과 빗자루 타작이 저녁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다음 날 엄마와 학교에 간 나는 미경이 에게 사과를 했다. 미경이는 언니와 같이 왔다. 언니도 얼굴이 까맸지만 정말 이쁜 사람이었다.
얼굴에서 빛이 났다. 너무나 미안했다. 그 후로 동네를 지날 때면 집 앞에서 볕을 쬐고 있는 미경이를 보았다. 언니와 함께 손을 꼬옥 잡고서 나를 알아보고는 옅게 미소지었다.
그럼 나도 손을 들어 살짝 흔들어 주곤 했다.
난 미경이를 4학년에 또 같은 반이 되었다. 조금 하얘진 그 애는 주근꺠가 더 늘었다. 난 너무 반가웠고 끊임없이 대화했다. 아이들이 질투할 때까지 말이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