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마치 꿈인 것 처럼... 모든 것은 생생하게 펼쳐졌다.
마치 그 시간과 공간 속으로 빨려 드는 것과 같이 수한은 과거의 세계로 들어와 있었다.
'여기는?'
고향이다. 푸르른 들판과 노랗게 벼를 숙인 논들이 끝없이 이어진 아름다운 곳. 한 쪽으로는 이름 모를 강이 굽이 치며 흐르고 저 동네 뒤엔 언덕배기 에서는 아이들이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이 냄새...고향의 내음? 엄마의 따스한 보금자리...'
"수한. 지금 뭐가 보이죠?"
"난 3살이었어."
그 한 마디 이후로 수한은 대답이 없다. 길게 띄어진 작은 눈은 초점이 없다.
"위험해. 중단시켜!!!"
독일인 의사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요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입으로 작은 손가락을 갖다 대며 신호를 했다
.
수한의 내면세계는 매우 깊었다. 단 1회의 최면 만으로 수한은 유아기의 기억을 끄집어 내었다. 그것은 태어나서 얼마 안되어 전혀 기억을 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건 기적이었다. 닥터 요한은 한숨을 내쉬며 턱에 손을 괴었다.
'저러다 죽을 수도 있겠는 걸?'
그렇게 요나와 닥터가 숨을 죽이며 누워있는 수한을 보는 사이에 그가 입을 떼었다.
"형아!"
이름 모를 강 어귀에서 형과 함께 물놀이를 하는 수한은 형을 부르고 있었다. 형은 열심히 친구들과 물장구를 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영을 못하는 어린 수한은 그런 형과 놀고 싶었나 보다. 그 작은 몸으로 형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자그마한 수한의 몸은 점점 물 속으로 파고 들었다.
"형아!"
수한의 형은 친구들과 장난을 치느라 그런 동생을 신경 쓰지 못하였다. 시끄러운 물장구 소리에 묻혀 그렇게 수한은 물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수한아!!!!!"
요나가 소리쳤다.
수한이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아!!!!!!!!!"
그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로 형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쓰러지며 나뒹굴기 시작했다.
수한의 최면은 아직 깨지 않았다.
"당신은 '수한아' 라고 하면 최면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은 '수한아'........."
다급히 요나가 같은 말을 반복하며 수한의 어꺠를 흔들어 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때 닥터 요한이 나섰다.
"쫘아아아아 악!!!"
엄청나고 우왁스러운 힘으로 닥터가 수한의 뺨을 후려쳐 댔다.
몇 대를 맞고 나서야 수한은 입에 거품을 물며 자리에서 경련을 했다.
"아트로핀!!! 빨리.."
"하지만 그건 .... 그 약은.."
요나가 말렸다. 그 약은 마약과 같았다. 너무 위험했다.
"빨리... 아트로핀 10미리... 어서...요나.... 빨리 !!!!"
닥터의 다급한 외침에 요나는 할 수 없이 정신없이 달려가 주사를 준비했다.
"잡아!!!"
닥터는 수한의 엉덩이에 아트로핀 주사를 쑤셔 박았다.
"제발.... 제발 .... 죽지마......"
잠시 후 약기운에 수한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쓰러져 잠에 들었다.
닥터와 요나는 온 몸에 땀을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오. 쉣.... 사람 죽일 뻔 했군...세상에... "
"파파... 이 사람.. 정말 ... 어떻게 처음 최면에 이렇게..."
요나가 놀란 듯이 아빠에게 물어댔다. 10년을 넘게 최면을 해봤지만 지금과 같이 유아기의 기억으로 들어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딸의 질문에 닥터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혼자서 하늘을 보며 이렇게 속삭였다.
"오 주여.. 수한이에게 도대체 어떤 것을 하신 것입니까?"
형은 나를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물 속에서 형의 뒷 모습만을 바라보던 나에게 어떠한 형체가 다가왔다.
그것은 낮인데도 밝았으며 또한 어두웠다. 그것은 사람이 아닌 것이었고 내 눈앞에서 아른거리기만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형체를 본 순간부터 숨이 쉬어졌다. 분명 나는 물 속에 있다. 사람은 물 속에서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러나 어린 수한은 그것을 몰랐다. 마냥 신이 난 수한은 그 상태로 형의 등 뒤로 가서 형을 안았다.
순간 놀란 형의 표정이 엄청났다. 물 속에서 입을 뻐끔거리며 마치 붕어처럼 말을 하고 있는 동생을 본 형은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그 사건 이후로 동네의 모든 아이들은 형과 나를 없는 아이처럼 대했다.
형은 늘 나와 함께였으며 절대로 물가에는 가지 않았다. 형은 언제나 수한을 동네 뒷 산이나 집 주변 논에서 데리고 있으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는 하였다.
수한은 그런 형이 너무 좋았다. 형은 항상 수한의 옆에서 그를 말없이 지켜주었다.
수한에게 형은 수호천사와 같았으며 가끔은 엄마보다 더 좋은 존재였다. 그렇다.
수한에게 형은 이 세상의 모두였다.
"너무 위험해요. 파파... 저 사람.. 저러다가..."
닥터의 표정이 굳어졌다.
수한을 잘 만 이용한다면 노벨의학상도 가능했다. 이미 그의 정신세계는 지금까지의 정신의학계를 뒤집어 놓을 만큼 혁신적이다.
그러나 수한의 육체가 이를 견딜 수 있을 지는 의문이었다. 그의 정신과 육체는 이미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일단 수액을 좀 놔줘... 체력을 회복하게... 차차 생각해 보자.. 요나..."
"파파... 우린 이 사람을 도와주려 온 거지. 죽이려는 게 아니에요?"
"나도 안다.. 요나.. 그렇지만 .."
닥터는 말을 더 이상 이어나가지 못했다.
요나가 침대에 누워 수액을 맞고 있는 수한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이 사람이 전에 썼던 편지들을 읽었어요.."
"요나..."
"파파. 저는 남자들이 모두 다 짐승인 줄 알았어요..."
요나는 고개를 숙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닥터는 그런 딸을 살포시 안아주며 속삭였다.
"남자라고 모두 다 그런 건 아니란다. 요나야.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색깔이 있거든."
"그럼 수한은 도대체 무슨 색깔이에요? 파파? 지금까지 만난 어떤 남자와 맞지 않아요. 저는 이해가 가지 않아요.. 어떻게 남자가 여자와 같은 감성을 가질 수 있죠?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나요... 마치 그의 감정들이 하나 하나. 내 심장에 꽂히는 것 같다구요..."
요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병실을 나가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 수한의 어머니가 닥터의 연락을 받고 찾아왔다.
수한의 엄마는 아들을 보자마자 병실 앞에 주저 앉아 멍한 눈으로 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닥터는 병실 앞으로 가서 수한의 어머니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어머님... 걱... 정 ..마세...요. 수한이 괜..찮아..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한의 엄니는 닥터를 노려보며 외쳐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