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 8회
조회 : 578 추천 : 0 글자수 : 4,816 자 2024-02-08
#. 식자재 마트 앞 (N)
씁쓸한 얼굴로 선미를 보는 일동...
선미 : 몇 해 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완전히 고향을 등졌구요.
영숙 : 참 얘기 껄적지근하네, 괜히 들었나봐. 여기 명치까지 욱신거리네.
선미 : 그러게 내가 말 안한다고 했잖아요.
정씨 : 그러면 아인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거고?
선미 : 예.. 찾았으면 뒤에 소식이라도 들었겠죠.
재식 : 쯧쯧.. 너도 인생 꿀꿀하다. (어깨를 쳐주며 막걸리를 따라주는) 마시고 잊어.
선미 : (엷게 웃어 보이며 막걸리는 마시는)
만석 : (그런 둘을 보며) 그래, 보기 좋다. 동병상련이구나.
재식 : 뭐가요? 동병상련?
만석 : 아니, 얘기 쭉 들어보니까 둘 다 조금씩 양심에 하자 있는 애들인데 서로 덮어주고 보듬어주는 게 보기 좋아서 그래.
재식 : 허, 뭔 소리야? 누가 양심에 하자가 있어?
선미 : 진짜. 어이없네. 아저씨가 그런 말 할 자격 있어요?
재식 : 그러게,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누구한테 지적질이야?
만석 : 아, 말도 못 하냐? 성질들하곤...
선미 : 아니, 아저씨 자신을 돌아보세요. 그런 말이 나오나!
영숙 : 아, 왜들 그래! 말 한번 한 거 갖고 사람 잡을라 들어. 덕담한 건데.
덕담이 다 죽었다 계속 언성을 높이는 선미와 재식.
그만들 하라 말리는 추.
정씨, 미소 지으며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 시장 관리사무소 (N)
정씨가 들어서고 사무소 안을 둘러본다. 씁쓸한 표정으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짐 가방을 들고 나선다.
#. 식자재 마트 앞 (N)
정씨가 가방을 들고 술자리로 오면 다시 떠들썩해진 술판.
추 : 막걸리 통 그냥 둬. 난 특별하게 할 얘기도 없어.
만석 : 왜, 자기도 얼굴 보면 인생사 평탄했을 거 같지 않은데.
추: (쓰게 웃곤) 제가 고향 떠나 여기까지 온 이유는 딱 하나예요. (옆구리가 아픈 듯)
영숙 : 아, 또 아파요?
추 : (됐다는 듯 손을 젓는)
재식 : 그래서 뭐예요. 여기 온 이유가?
추: 나쁜 놈 잡으러.
무슨 소린가 싶은 일동.
만석 : 나쁜 놈을 잡아? 뭐 형사야? 흥신소야?
추 : 그게 아니고. 원수 같은 녀석이 하나 있어서 그놈 잡으러요.
영숙 : 원수?
추 : 그게... 고향에서 우리 집이 사업을 하나 했는데 동업하던 집안이 있었거든요. 근데 다른 데랑 붙어서 몰래 물건 빼돌리고 입 딱 씻은 거예요.
만석 : 어허... 뒤통수 쳤구먼. 그래서 동업은 함부로 하는 게 아냐.
재식 : 아니, 무슨 사업을 했는데요?
추 : 사업이 중요한 건 아닌데. 뭐 에너지 개발 그런 쪽.
재식 : 에너지 개발... 사업을 크게 하셨나봐.
추 : 작진 않았지. 그래서 피해도 컸고. 우리가 아주 끝장을 내겠다고 그 쪽 사람들 쫓아가서 뒤집어엎었는데 그 집 큰 아들 놈이 물건들 챙겨서 내뺀 거야.
선미 : 어, 그 놈 잡으러 온 거예요?
추 : 그렇지. 그 녀석이 아주 보통내기가 아냐. 잡았다 싶으면 내빼고 잡았다 싶으면 사라지고 사람 생고생 시키는데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어디 나타났다는 정보만 있으면 달려갔는데 결국 마지막으로 흘러온 데가 여긴 거지. 근데 또 흔적도 없이 사라졌네.
만석 : 허어... 미꾸라지 같은 놈.
추 : 어디로 갔는지 알 수는 없고. 그러니 어째. 이럴 땐 일단 바짝 몸 낮추고 기다리는 수밖에. 그놈 꼬리가 보이든 머리가 보이든 때만 기다리면서. 그러다 보니 이렇게 아예 자리 잡고 눌러앉게 된 건데. 참.. 오래도 있었네.
영숙 : 허... 이래서 사람 거죽 보고 모르는 거지. 그런 속사정 있는 줄은 몰랐네.
정씨 : 그러게요. (추를 지긋이 보는) 그래 아직 그 사람 소식은 모르고?
추 : 예, 잠잠해요. (엷게 웃어 보이는)
이때 저만치 길목에 서 있는 꽃집 승합차가 요란하게 시동을 걸다 덜컹대며 꺼져버린다. 운전석의 경수가 다시 시동을 거나 되지 않고...
선미 : 저거 또 퍼졌네.
CUT TO
승합차 보닛이 열고 손보고 있는 정씨...
정씨 : (스패너로 밸브를 조이고) 시동 한번 걸어봐.
경수가 시동을 걸자 이제서 제대로 걸린다.
경수 : 됐네요!
정씨 : 일단 급한 대로 손봤으니까 움직이는데 지장은 없을 거야. (공구를 챙기는)
선미 : 역시 우리 오라버니는 해결사셔. 오라버니 없으면 시장 사람들 어떻게 살까 몰라.
CUT TO
만석 : 무슨 소리야? 떠나다니?
다시 술자리에 모인 일동.
다들 정씨 옆에 놓인 짐 가방을 본다.
영숙 : 아니, 여기 시장을 떠난다고요?
정씨 : 그렇게 됐네요.
재식 : 갑자기 어딜 가는데요?
선미 : 고향에 가는 거예요?
정씨 : 고향은 아니고... 난 사실 고향이 없어.
무슨 소린가 싶은 일동...
만석 : 고향이 없다니, 고향 없는 사람도 있나?
정씨 : 그게..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세상에서 사라졌거든요.
재식 : 예? (헛웃음) 태어나고 자란 곳이 어떻게 사라져요?
선미 : 아.. 댐 같은 거 만들어서 수몰되고 뭐 그런 거요?
정씨 : (미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고향은 외부 침략을 받아서 파괴돼버렸어.
황당한 표정이 되는 일동.
영숙 : 아니, 무슨 소리래...누가 침략을 했는데요?
정씨 : 그게... 우리한테 오래전부터 가까이 하던 무리가 있었는데 문제가 좀 생겼어요. 서로 간에 갈등이 생기면서 그쪽에서 공격을 해온 건데... 전쟁이죠.
전쟁... 읊조리며 입이 벌어지는 일동.
정씨 : 해서 그 전쟁에서 우리가 패했고 우리 땅을 잃어버린 거죠.
뭐라 못하고 서로 보는 일동..
영숙 : 정씨... 우리나라 사람 아니에요?
선미 : 진짜.. 무슨 난민 그런 소리 같네.
정씨 : 뭐...다를 거 없지. 하여튼 나를 비롯해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고향을 떠나 서 떠돌 다가 정착할 곳을 찾아왔는데 드디어 적당한 델 발견했다는 연락이 와서..
재식 : 아니, 잠깐. 이거 뭐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도 아니고 통 알아먹을 수가 없네. 적당한 데는 또 어딘데요?
정씨 : 그건 말해도 모를 거고. 어쨌든 이제 떠나야 될 시간이 됐네..
만석 : 정씨, 지금 우리 놀리는 거지? 정씨 고향이 어딘데 전쟁이 나서 도망 왔다는 거야?
선미 : 진짜... 우리가 무식해서 모르는 건지. 영 접수가 안 되네.
순간 어두워지는 하늘... 다시 비가 쏟아지려는지 멀리 천둥소리도 들려온다..
정씨 : (하늘을 올려보고) 내 설명이 좀 부족했나보네. 우리 고향은 여기서 아주 먼 곳이에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먼 곳...
표정이 사라지는 일동...
식자재 마트 앞 게임기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는 꼬마의 뒷모습...
그 게임기 화면... 우주를 배경으로 전투 비행선이 레이저를 발사하며 적선을 격추시키는 슈팅게임이 펼쳐지고 있다.
정씨 : (V. O) 그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들이 있었는데 우리보다 월등히 강한 힘을 가진 무리였죠. 병력이나 무기 모두. 그들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시킬 생각으로 공격을 해왔어요.
게임 화면 속 비행선들의 현란한 공중전...
정씨 : (V. O) 물론 우리도 우리 땅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맞서 싸웠죠. 전쟁은 아주 치열했어요.
혼란스런 표정으로 듣고 있는 일동...
게임 화면, 비행선이 공격을 받아 파괴되자 다시 새로운 비행선이 나타나 출동하며 격전을 벌인다.
정씨 : (V. O)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죠. 동료들이 하나 둘 적의 손에 떠나갔지만.. (기억이 떠오르는 듯 상기되는) 그럴수록 우리는 강하게 뭉쳤습니다. 그렇게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서 적의 선봉을 섬멸했을 땐 희망도 생겼죠. 하지만 거기까지였어요...
게임화면 속 비행선이 공격을 받아 파괴되고 연쇄적인 폭발과 함께 행성도 파괴된다. 눈이 커지는 일동의 표정...
정씨 : 역부족이었죠. 고도로 훈련된 우리들이었지만 적의 압도적인 화력 앞엔... 한순간 승기를 잡긴 했어도 전쟁의 결과는 패배였고 우리 땅은 그렇게 사라진 겁니다.
일동, 괜스레 숙연해지는 분위기..
선미 : (눈치를 보며) 그...그런데 오라버닌 사셨네요?
정씨 : (미소) 운이 좋았던 거지. 그래서 결국 난 남은 이들을 이끌고 그 곳을 탈출했고 새로 정착할 곳을 찾아 떠돌게 된 거야. 다시 우리들이 뿌리내리고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아서. 그리고 이제 그 곳을 찾았단 소식을 듣게 된 거고.
말을 끝낸 정씨, 일동의 얼굴 하나하나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일동...
정씨 : 이제 동료들과 합류해서 떠날 약속된 장소로 갈 때가 됐네.
순간 강한 바람이 시장에 휘몰아친다. 술상 위 물건들이 날아가고 눈을 바로 뜨기 힘들 정도에 천둥소리도 요란해지고 번개도 친다..
정씨 :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 여러분들 도움이 아녔으면 버텨내지 못했을 겁니다. 쉴 거처와 일자리도 마련해주시고 형제처럼 누이처럼 살펴준 덕분에 오늘이 온 겁니다.
영숙 : (어색한) 아우, 우리가 뭐 한 게...
만석 : (영숙의 옆구릴 찌르는)
정씨 : (미소 짓는) 절대 그 고마움 잊지 않겠습니다. (요란해진 하늘을 올려보며) 늦었네요.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일동, 엉거주춤 따라 일어서고..
정씨 : (둘러보며 미소로 인사를 하고) 그럼.. (돌아서 나서는)
뭐라 입을 뗄 듯 하나 말이 나오지 않는 일동, 멀어지는 정씨를 그저 지켜본다.
그렇게 정씨가 서서히 시장을 빠져나가고...
천둥 번개 요란한 시장에 정씨가 멀어지는 저편 하늘은 마치 타는 듯 붉어지고 그 빛 속으로 사라져가는 정씨의 실루엣... 뭔가에 홀린 듯 바라보는 일동...
그렇게 시야에서 정씨가 사라지고 나자 서서히 바람도 가라앉기 시작한다...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지는 시장. 그러나 미동도 하지 못하는 일동... 그 속에 굳은 얼굴로 정씨가 사라진 쪽을 응시하는 추...
순간 ‘게임 오버!’ 하는 소리에 놀라 모두 돌아보면 게임기 앞 꼬마가 손을 털며 일어나 게임기를 발로 찬다.
F. O
씁쓸한 얼굴로 선미를 보는 일동...
선미 : 몇 해 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완전히 고향을 등졌구요.
영숙 : 참 얘기 껄적지근하네, 괜히 들었나봐. 여기 명치까지 욱신거리네.
선미 : 그러게 내가 말 안한다고 했잖아요.
정씨 : 그러면 아인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거고?
선미 : 예.. 찾았으면 뒤에 소식이라도 들었겠죠.
재식 : 쯧쯧.. 너도 인생 꿀꿀하다. (어깨를 쳐주며 막걸리를 따라주는) 마시고 잊어.
선미 : (엷게 웃어 보이며 막걸리는 마시는)
만석 : (그런 둘을 보며) 그래, 보기 좋다. 동병상련이구나.
재식 : 뭐가요? 동병상련?
만석 : 아니, 얘기 쭉 들어보니까 둘 다 조금씩 양심에 하자 있는 애들인데 서로 덮어주고 보듬어주는 게 보기 좋아서 그래.
재식 : 허, 뭔 소리야? 누가 양심에 하자가 있어?
선미 : 진짜. 어이없네. 아저씨가 그런 말 할 자격 있어요?
재식 : 그러게,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누구한테 지적질이야?
만석 : 아, 말도 못 하냐? 성질들하곤...
선미 : 아니, 아저씨 자신을 돌아보세요. 그런 말이 나오나!
영숙 : 아, 왜들 그래! 말 한번 한 거 갖고 사람 잡을라 들어. 덕담한 건데.
덕담이 다 죽었다 계속 언성을 높이는 선미와 재식.
그만들 하라 말리는 추.
정씨, 미소 지으며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 시장 관리사무소 (N)
정씨가 들어서고 사무소 안을 둘러본다. 씁쓸한 표정으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짐 가방을 들고 나선다.
#. 식자재 마트 앞 (N)
정씨가 가방을 들고 술자리로 오면 다시 떠들썩해진 술판.
추 : 막걸리 통 그냥 둬. 난 특별하게 할 얘기도 없어.
만석 : 왜, 자기도 얼굴 보면 인생사 평탄했을 거 같지 않은데.
추: (쓰게 웃곤) 제가 고향 떠나 여기까지 온 이유는 딱 하나예요. (옆구리가 아픈 듯)
영숙 : 아, 또 아파요?
추 : (됐다는 듯 손을 젓는)
재식 : 그래서 뭐예요. 여기 온 이유가?
추: 나쁜 놈 잡으러.
무슨 소린가 싶은 일동.
만석 : 나쁜 놈을 잡아? 뭐 형사야? 흥신소야?
추 : 그게 아니고. 원수 같은 녀석이 하나 있어서 그놈 잡으러요.
영숙 : 원수?
추 : 그게... 고향에서 우리 집이 사업을 하나 했는데 동업하던 집안이 있었거든요. 근데 다른 데랑 붙어서 몰래 물건 빼돌리고 입 딱 씻은 거예요.
만석 : 어허... 뒤통수 쳤구먼. 그래서 동업은 함부로 하는 게 아냐.
재식 : 아니, 무슨 사업을 했는데요?
추 : 사업이 중요한 건 아닌데. 뭐 에너지 개발 그런 쪽.
재식 : 에너지 개발... 사업을 크게 하셨나봐.
추 : 작진 않았지. 그래서 피해도 컸고. 우리가 아주 끝장을 내겠다고 그 쪽 사람들 쫓아가서 뒤집어엎었는데 그 집 큰 아들 놈이 물건들 챙겨서 내뺀 거야.
선미 : 어, 그 놈 잡으러 온 거예요?
추 : 그렇지. 그 녀석이 아주 보통내기가 아냐. 잡았다 싶으면 내빼고 잡았다 싶으면 사라지고 사람 생고생 시키는데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어디 나타났다는 정보만 있으면 달려갔는데 결국 마지막으로 흘러온 데가 여긴 거지. 근데 또 흔적도 없이 사라졌네.
만석 : 허어... 미꾸라지 같은 놈.
추 : 어디로 갔는지 알 수는 없고. 그러니 어째. 이럴 땐 일단 바짝 몸 낮추고 기다리는 수밖에. 그놈 꼬리가 보이든 머리가 보이든 때만 기다리면서. 그러다 보니 이렇게 아예 자리 잡고 눌러앉게 된 건데. 참.. 오래도 있었네.
영숙 : 허... 이래서 사람 거죽 보고 모르는 거지. 그런 속사정 있는 줄은 몰랐네.
정씨 : 그러게요. (추를 지긋이 보는) 그래 아직 그 사람 소식은 모르고?
추 : 예, 잠잠해요. (엷게 웃어 보이는)
이때 저만치 길목에 서 있는 꽃집 승합차가 요란하게 시동을 걸다 덜컹대며 꺼져버린다. 운전석의 경수가 다시 시동을 거나 되지 않고...
선미 : 저거 또 퍼졌네.
CUT TO
승합차 보닛이 열고 손보고 있는 정씨...
정씨 : (스패너로 밸브를 조이고) 시동 한번 걸어봐.
경수가 시동을 걸자 이제서 제대로 걸린다.
경수 : 됐네요!
정씨 : 일단 급한 대로 손봤으니까 움직이는데 지장은 없을 거야. (공구를 챙기는)
선미 : 역시 우리 오라버니는 해결사셔. 오라버니 없으면 시장 사람들 어떻게 살까 몰라.
CUT TO
만석 : 무슨 소리야? 떠나다니?
다시 술자리에 모인 일동.
다들 정씨 옆에 놓인 짐 가방을 본다.
영숙 : 아니, 여기 시장을 떠난다고요?
정씨 : 그렇게 됐네요.
재식 : 갑자기 어딜 가는데요?
선미 : 고향에 가는 거예요?
정씨 : 고향은 아니고... 난 사실 고향이 없어.
무슨 소린가 싶은 일동...
만석 : 고향이 없다니, 고향 없는 사람도 있나?
정씨 : 그게..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세상에서 사라졌거든요.
재식 : 예? (헛웃음) 태어나고 자란 곳이 어떻게 사라져요?
선미 : 아.. 댐 같은 거 만들어서 수몰되고 뭐 그런 거요?
정씨 : (미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고향은 외부 침략을 받아서 파괴돼버렸어.
황당한 표정이 되는 일동.
영숙 : 아니, 무슨 소리래...누가 침략을 했는데요?
정씨 : 그게... 우리한테 오래전부터 가까이 하던 무리가 있었는데 문제가 좀 생겼어요. 서로 간에 갈등이 생기면서 그쪽에서 공격을 해온 건데... 전쟁이죠.
전쟁... 읊조리며 입이 벌어지는 일동.
정씨 : 해서 그 전쟁에서 우리가 패했고 우리 땅을 잃어버린 거죠.
뭐라 못하고 서로 보는 일동..
영숙 : 정씨... 우리나라 사람 아니에요?
선미 : 진짜.. 무슨 난민 그런 소리 같네.
정씨 : 뭐...다를 거 없지. 하여튼 나를 비롯해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고향을 떠나 서 떠돌 다가 정착할 곳을 찾아왔는데 드디어 적당한 델 발견했다는 연락이 와서..
재식 : 아니, 잠깐. 이거 뭐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도 아니고 통 알아먹을 수가 없네. 적당한 데는 또 어딘데요?
정씨 : 그건 말해도 모를 거고. 어쨌든 이제 떠나야 될 시간이 됐네..
만석 : 정씨, 지금 우리 놀리는 거지? 정씨 고향이 어딘데 전쟁이 나서 도망 왔다는 거야?
선미 : 진짜... 우리가 무식해서 모르는 건지. 영 접수가 안 되네.
순간 어두워지는 하늘... 다시 비가 쏟아지려는지 멀리 천둥소리도 들려온다..
정씨 : (하늘을 올려보고) 내 설명이 좀 부족했나보네. 우리 고향은 여기서 아주 먼 곳이에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먼 곳...
표정이 사라지는 일동...
식자재 마트 앞 게임기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는 꼬마의 뒷모습...
그 게임기 화면... 우주를 배경으로 전투 비행선이 레이저를 발사하며 적선을 격추시키는 슈팅게임이 펼쳐지고 있다.
정씨 : (V. O) 그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들이 있었는데 우리보다 월등히 강한 힘을 가진 무리였죠. 병력이나 무기 모두. 그들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시킬 생각으로 공격을 해왔어요.
게임 화면 속 비행선들의 현란한 공중전...
정씨 : (V. O) 물론 우리도 우리 땅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맞서 싸웠죠. 전쟁은 아주 치열했어요.
혼란스런 표정으로 듣고 있는 일동...
게임 화면, 비행선이 공격을 받아 파괴되자 다시 새로운 비행선이 나타나 출동하며 격전을 벌인다.
정씨 : (V. O)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죠. 동료들이 하나 둘 적의 손에 떠나갔지만.. (기억이 떠오르는 듯 상기되는) 그럴수록 우리는 강하게 뭉쳤습니다. 그렇게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서 적의 선봉을 섬멸했을 땐 희망도 생겼죠. 하지만 거기까지였어요...
게임화면 속 비행선이 공격을 받아 파괴되고 연쇄적인 폭발과 함께 행성도 파괴된다. 눈이 커지는 일동의 표정...
정씨 : 역부족이었죠. 고도로 훈련된 우리들이었지만 적의 압도적인 화력 앞엔... 한순간 승기를 잡긴 했어도 전쟁의 결과는 패배였고 우리 땅은 그렇게 사라진 겁니다.
일동, 괜스레 숙연해지는 분위기..
선미 : (눈치를 보며) 그...그런데 오라버닌 사셨네요?
정씨 : (미소) 운이 좋았던 거지. 그래서 결국 난 남은 이들을 이끌고 그 곳을 탈출했고 새로 정착할 곳을 찾아 떠돌게 된 거야. 다시 우리들이 뿌리내리고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아서. 그리고 이제 그 곳을 찾았단 소식을 듣게 된 거고.
말을 끝낸 정씨, 일동의 얼굴 하나하나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일동...
정씨 : 이제 동료들과 합류해서 떠날 약속된 장소로 갈 때가 됐네.
순간 강한 바람이 시장에 휘몰아친다. 술상 위 물건들이 날아가고 눈을 바로 뜨기 힘들 정도에 천둥소리도 요란해지고 번개도 친다..
정씨 :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 여러분들 도움이 아녔으면 버텨내지 못했을 겁니다. 쉴 거처와 일자리도 마련해주시고 형제처럼 누이처럼 살펴준 덕분에 오늘이 온 겁니다.
영숙 : (어색한) 아우, 우리가 뭐 한 게...
만석 : (영숙의 옆구릴 찌르는)
정씨 : (미소 짓는) 절대 그 고마움 잊지 않겠습니다. (요란해진 하늘을 올려보며) 늦었네요.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일동, 엉거주춤 따라 일어서고..
정씨 : (둘러보며 미소로 인사를 하고) 그럼.. (돌아서 나서는)
뭐라 입을 뗄 듯 하나 말이 나오지 않는 일동, 멀어지는 정씨를 그저 지켜본다.
그렇게 정씨가 서서히 시장을 빠져나가고...
천둥 번개 요란한 시장에 정씨가 멀어지는 저편 하늘은 마치 타는 듯 붉어지고 그 빛 속으로 사라져가는 정씨의 실루엣... 뭔가에 홀린 듯 바라보는 일동...
그렇게 시야에서 정씨가 사라지고 나자 서서히 바람도 가라앉기 시작한다...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지는 시장. 그러나 미동도 하지 못하는 일동... 그 속에 굳은 얼굴로 정씨가 사라진 쪽을 응시하는 추...
순간 ‘게임 오버!’ 하는 소리에 놀라 모두 돌아보면 게임기 앞 꼬마가 손을 털며 일어나 게임기를 발로 찬다.
F.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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