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이었다.
나이가 40을 넘어가자 일년에 한두 번 정도 있는 친구 아버님의 장례식장에 다녀가는 길이었다. 집 근처나 가까운 수도권이라면 술 한잔하고 대리운전이라도 부를 수 있지만 그날처럼 편도 4시간 이상 걸리는 지방의 경우에는 졸음운전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다행히도 요즘은 고속도로 휴게소에 24시간 운영하는 무인카페가 많이 생겨 한두시간 운전하면 휴게소에 꼭 들르곤 했다. 그리고 평소엔 잠을 잘 못 잔다는 이유로 멀리하던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담배를 한꺼번에 두대를 태우고 차에 다시 올랐다.
그날도 그렇게 휴게소에 들른 후 운전하기 전 불편한 구두를 슬리퍼로 갈아 신고 운전대에 앉아 핸드폰을 차에 연결하였다. 아무 생각없이 항상 듣던 80~90년대 노래가 차에서 흘러나오는데 그날은 왠지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택시 탈 때나 듣던 라디오를 틀어보았다. 내 차에서 라디오를 틀어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을 더듬으며 예전 고3때 수능 공부하며 듣던 ‘정지영의 스위트뮤직박스’로 그나마 익숙한 주파수를 찾았다. 그런데 내 기억이 잘못됐는지 주파수가 영 잘 잡히지 않고 지지직거리는 소리만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아 각 지역마다 라디오 주파수가 다른가보다.’ 라는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열어 해당 채널 주파수를 찾아볼까 했지만 왠지 귀찮은 마음에 그냥 위아래로 주파수를 변경해 보았다. 그러다가 109위로는 없는 줄 알았던 주파수로 넘어가더니 111.11이라는 주파수에서 마치 핸드폰으로 음악이 나오듯이 매우 깨끗한 음질로 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릴 적 듣던 매력적인 아나운서가 생각나는 목소리였다. ‘오 이건 뭐지’ 라는 생각으로 주파수를 고정한 채 천천히 차를 몰아 휴게소를 빠져나왔다.
흔한 이 시간대 프로그램처럼 청취자의 사연을 소개하고 그에 어울릴 만한 음악이나 신청곡을 DJ가 틀어주는 형태의 프로그램인 것 같았다. 새벽이라 도로에 차도 별로 없고 휴게소에서 사 온 커피 덕분인지 정신도 이상할 정도로 말짱해서 그 어느때보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결혼을 하루 앞두고 있는 35살 남성입니다.
결혼에 대한 걱정이나 불안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응원을 부탁드리는 마음으로 사연을 보냅니다. 저는 남들보다는 조금 다른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제 예비 신부가 저보다 나이가 조금 많습니다. 아니 11살이니 많이 많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결혼을 한 번 한 적이 있어 중3 아들도 한 명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결혼까지 오기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저희 부모님. 저는 장남이고 나름 여태까지 효자라고 불리며 부모님 속을 크게 썩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법한 회사를 다니고 있고요. 제가 약 1년 정도의 취업 준비를 빙자한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지금 다니는 회사에 입사가 결정되었을 때 기뻐하시던 부모님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티는 내지 않으셨지만 주변 지인분들께 그렇게 자랑을 하시며 식사 대접을 하고 다니신다고 저희 어머니께서 전화로 말씀해 주시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저 나름 회사에서 열심히 생활하며 차츰 인정을 받고 있던 중에 지금의 그녀를 알게 되었습니다. 같은 팀이지만 하는 일이 달라 접점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지만 항상 보여주는 밝은 모습에 괜찮은 사람이구나 라는 정도의 생각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1년 2년이 지나자 전보다 더 가까워지게 되었고 점차 호감이 더 커져만 갔습니다.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생활도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그녀였기에 일상생활에서 사소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왜 이런 것도 못해봤지’ 하는 생각이 점차 ‘앞으로 다 많은 즐거움을 그녀와 함께 하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본인의 상황을 이유로 저를 밀어내던 그녀를 설득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제 가까운 지인들부터 서서히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조건 찬성하고 믿어주던 친한 형님, 무조건 반대하던 대학 동기,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던 고향친구 등 모든 이들의 조언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저희 부모님께도 말씀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다행히도 아버지께서는 일단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결혼부터 서둘러라 하고 말씀해 주셨고, 저희 어머니께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군 제대 이후로 쓰지 않던 편지까지 써가며 마음을 돌리려 노력하였고, 결국 한 번 만나보자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보다 제가 더 긴장했던 식사자리 이후에 “네가 왜 그렇게 실제로 한 번 만나보자고 했는지 알겠다.”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이후에는 순조롭게 결혼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일이면 가족 친지 친구 분들을 모시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길도 쉽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더 어려운 일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모든 난관을 뚫고 더 많은 행복을 그녀와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결혼생활이 되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긴 얘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이름을 밝히진 않으신 한 남성분의 사연 잘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분께는 어떤 조언도 필요하지 않을 것 같네요. 아마도 이렇게 이야기를 쓰시면서 본인의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고 용기를 돋우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모쪼록 두 분의 앞에 행복한 날들이 펼쳐지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노래 한 곡 듣겠습니다. 오석준, 장필순, 박정운님이 부르신 “내일이 찾아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