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시간, 원래 주중 이틀씩 지방에서 일을 하는 와이프가 요즘 일이 많아져 3, 4일씩 내려가기 시작한 지 어느덧 한달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와이프가 있으면 밤 10시, 늦어도 11시에는 잠이 들고는 했는데 이상하게도 와이프가 없고 혼자 자는 날이면 12시, 새벽 1시가 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그렇다고 딱히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그 다음 날 무척이나 피곤해 하고는 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6시쯤 퇴근을 하고 친한 동생들과 약속한 3달 뒤의 10km 마라톤을 위해 약 30분 정도 달리기를 하고 집에 와서 씻고 혼자 대충 저녁을 차려 먹었다. 그리고 소파에 기대어 응원하는 팀의 야구 경기를 보고 그동안 지겹도록 봐왔던 손흥민의 골 영상을 보고도 도통 졸리지 않아 핸드폰만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지난 주 상가집에 다녀오는 길에 들었던 라디오가 생각나 한 번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요즘은 라디오도 스마트폰의 각 방송사의 어플로 듣기 때문에 어떻게 주파수를 찾아야 할 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옛날처럼 주파수를 찾아서 방송을 들을 수 있는 어플을 다운 받아 그 주파수를 찾아보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고에 쳐박혀있던 예전 라디오를 꺼내어 틀어보았다. 안테나를 길게 뽑고 치지직 소리와 함께 손으로 돌려가며 주파수를 찾던 중, 그날 들었던 목소리를 듣게 되었고 조금 더 섬세하게 잡음을 지워내고는 다시 소파에 누웠다.
안녕하세요, 저는 24살 여자 사람입니다. 얼마전까지 집 안에만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흔히 말해 부모 등에 빨대 꼽고 살던 인간입니다. 어렸을 때 6-7살 즈음인 걸로 기억합니다. 엄마란 사람은 갑자기 집을 나가 그 후로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알 지 못합니다. 아빠와 엄마 사이의 일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어렸을 때 할머니나 주변 친척 분들 말을 지금 와서 기억해 보면 아마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도망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워낙 평소에도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아빠는 평생 엄마란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빠 덕에 엄마의 빈 자리를 크게 느끼지는 못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중학교 때까지는 친구들도 몇몇 사귀고 평범하게 보냈습니다.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았고 그냥 평범한 학창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올라오고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사소한 일을 계기로 학교 안에서 잘나가는 소위 일진 무리에 찍혀 왕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엄마도 없고 집도 가난하다는 이야기까지 퍼져 고등학교 3년 내내 혼자서 외롭게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나마 한 둘 있던 친구들도 그 무리에 찍힐까봐 다들 멀어지고 학교에서는 매일 잠만 자고 최대한 눈에 안 띄게 지내왔습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내 목소리가 아직 잘 나오는지 궁금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린 적도 많았습니다.
저희 아빠는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공장만 계속 다니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런 아빠의 속을 썩이기 싫어 억지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을 때 였습니다. 평소처럼 아빠와 둘이서 저녁을 먹던 중에 아빠가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 대학은 갈거냐 라고 한 두마디에 갑자기 그동안 쌓아뒀던 설움이 폭발하여 아빠한테 마구 쏟아냈습니다. 대학은 무슨 대학이냐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기는 하느냐 고등학교 내내 친구도 없었고 주말에는 집에 있기 싫어 그냥 나가서 돌아다녔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 번 이라도 비 오는 날 우산 가지고 학교에 데리러 와 준 적 있었냐 여태까지 관심도 없었으면서 이제와서 그런 소리하지마라 라고 울면서 마구마구 쏟아냈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담배를 피러 나갔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제 방에만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고 밥도 아빠가 차려주면 아빠 없을 때 방으로 가져와서 먹고 매일 컴퓨터랑 핸드폰만 하며 지냈습니다.
그렇게 지낸지 3-4년 정도 지났을 어느 저녁 시간,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습니다. 모르는 번호이기도 하고 평소에도 울리지 않는 전화기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문자 한 통이 날라왔습니다. 아빠 회사 동료인데 아빠가 일을 하다 조금 다치셨다 라는 내용과 함께 한 병원의 위치였습니다. 너무 놀란 저는 며칠간 씻지도 않은 몰골 그대로 집에서 입던 옷에 슬리퍼를 신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 대중교통을 탈 자신도 없었고 택시를 타기에는 무섭고 돈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뛰었는지도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결국 병원에 도착했고 무작정 응급실로 가서 우리 아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응급실 한 쪽 구석에서 피에 젖은 옷을 찢고 붕대로 한쪽 팔을 칭칭 감고 있던 아빠를 찾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저를 보고 놀라며 여길 어떻게 왔냐고 하셨고, 저는 저도 모르게 그냥 아빠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별거 아니니 걱정 말라고 하셨고 저녁밥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알고 보니 아빠가 일하는 공장이 유리공장인데 유리가 왼쪽 손목에 떨어져 베었다고 합니다. 천만 다행히도 작은 유리였고 피는 많이 낫지만 신경 등은 다치지 않아 수술하고 2-3달 재활하면 완치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아빠가 다니는 회사에서도 다 회복할 때까지 안 나와도 되니 푹 쉬면서 재활만 잘하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아빠는 수술하고 일주일 정도 입원을 했고 저는 뭔가 느낀 게 있어 달라져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아마 그 날 아빠 무릎 위에서 울면서 제 마음속에 있던 무언가가 씻겨 내려간 듯 하더라고요. 우선 아빠가 입원해 계시는 동안 집 청소도 하고 어설프지만 나름 도시락도 싸서 갖다 드렸습니다. 수술하고 난 후라서 그런건지 우느라 그런건지 거의 먹진 못하더라고요. 맛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동네 산책도 하고 버스나 지하철도 타보고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같은 고등학교 사람을 만날까봐 많이 두렵기도 했지만 점점 나아지더라고요. 그리고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보자 결심을 하고 우선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지원을 해서 다행히도 일을 시작한 지 어느덧 반년 정도 지났습니다. 처음에는 손님이 안 오기만을 바라고 진상 손님이라도 오면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울기도 많이 했었지만 3-4달이 지나자 차츰 익숙해지고 제 사정을 어느 정도 아시는 점장님의 많은 도움과 배려 덕분에 꾸준히 계속해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남들보다 늦었다면 늦은 시기이지만 조금씩 변해보려 합니다. 점장님께서 손님들 없을 땐 공부해도 좋으니 수능 공부를 다시 해보라고 권해주셔서 지금은 틈날 때마다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동안 뭘 그렇게 두려워하고 걱정만 했나 싶습니다. 앞으로도 잘 할 수 있겠죠? 아 참, 그리고 저희 아빠는 완전히 회복하셔서 무사히 복직하여 전처럼 무뚝뚝하지만 그보다는 조금씩 서로 대화를 늘려가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신 모든 분께 앞으로 행복한 일만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문득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네요. 우리 모두 못 가진 것에 불만을 갖기 보다는 지금가지고 있는 것에 행복을 느끼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와 같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는 이 메일 주소로 사연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hometownfriend@naver.com
털어놓기만 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고민을 들어주는 고향친구 같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노래 한 곡 듣겠습니다. 서영은의 "혼자가 아닌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