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푸르게 빛나던 하늘이, 빨갛게 물들었다.
잠깐이 아니었다.
빨간 하늘 아래 땅은 척박하게 갈라지고 천사와 악마의 시체들이 산을 이루었다.
"죄송.. 합니다.."
"미안, 나 더 이상은 못 살 것 같네.."
목숨만큼 소중했던 동료들의 죽음.
"비록 우리가 악마와 천사 사이더라도.. 친구여서 기뻤어.."
항상 웃으며 나를 기운 차리게 해줬던 친구의 죽음.
"살거라. 너는 살아야 한다..!"
"미안하구나.. 널 혼자 내버려두고 가서.."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따뜻하게 날 안아준 부모님.
모두가 떠났다.
세상이 날 배신이라도 한 듯 모두를 죽였다.
그러면서 나는 살았다.
죽을 수 없었다.
모두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죽을 수 없었다.
천사든 악마든 죽으면 영원한 안식 속에 잠이 든다.
더 이상, 그 존재의 이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하.. 하.. 하하."
맨정신으로 버틸 수 없었다.
더 이상 내 옆에는 같이 싸워줄 동료도, 기운을 차리게 해줄 친구도, 따뜻하게 안아줄 부모님도 없다.
그렇다고 모두를 죽인 악마와 천사가 밉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를 지키지 못한 내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하하.. 하하!!"
천사와 악마의 2차 전쟁에 투입된 천계 수호자 '레베리우스 스카니엘'.
전쟁에 투입된 모든 천사와 악마를 죽였다.
투욱.
천사와 악마를 죽인 창 끝에 검붉은 피가 떨어졌다.
더 이상 천사로 남을 수 없었다.
어둠에 삼켜져 악마도 천사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검게 물든 날개, 새로 생겨난 뿔.
"..."
타락한 천사.
즉, 타천사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었다.
***
"천계의 수호자, 레베리우스 스카니엘을 천계에서 추방한다!"
모든 천사들이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천사들을 몰살시킨 대죄니까.
"천사따위가 타락했다 한들 어딜 마계에 발을 들이려 하느냐! 꺼져라!"
악마들 또한 나로 부터 고개를 돌렸다.
이것 또한 예상한 결과였다. 악마들을 몰살시켰으니까.
결과적으로 나는 버려졌다.
바닥에 떨어진 휴지와 같은 처지였다.
더 이상 천사라는 이름도,
앞으로 악마라는 이름도, 쓸 수 없었다.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까.
모두를 잃고 모두에게 버림받는 운명이었던 것일까.
천계에서도, 마계에서도 쫒겨난 나는, 지상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지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살아가야 했다.
"타락한 성배.."
천사였을 때 갖게 된 유물.
축복받은 성배.
대천사의 가호를 받고 천계를 지키는 것.
하지만 타천사가 된 시점에서 축복받은 성배는 사라지고, 타락한 성배가 생겨났다.
맺을 수 있는 계약은 6가지.
계약을 맞치고 성배의 타락한 성수를 마시면, 나는 타천사의 힘을 숨기고 지상으로 내려갈 수 있다.
"첫 번째 맹약으로 '나의 천사의 이름'을 봉인 하겠다."
첫 번째 맹약을 말한 지금, 내 기억에서 '레베리우스 스카니엘' 이란 이름은 성수를 마시는 순간 바로 사라지게 된다.
천사도 악마도 아닌 내가 이 이름은 쓸 수 없으니까.
"두 번째 맹약으로 나는 위험한 상황일 때만 타천사의 힘을 사용하겠다."
지상은 천사와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가끔 악마들이 지상으로 내려가는 경우가 있긴하지만, 대부분은 없으니 내 힘도 숨겨야 했다.
"세 번째 맹약으로 나는 그 누구도 섬기지 않는다."
지상의 존재들은 사람들마다 각각의 많은 신들을 섬긴다 들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신도 있고 없는 신도 있다.
그 신이 악일 수도 있고 선일 수도 있기 때문에 선악을 모두 지니고 있는 나는 어느 신도 섬길 수 없었다.
"네 번째 맹약으로 나는 악마를 죽이지 않는다."
"다섯 번째 맹약으로 나는 천사를 죽이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천사와 악마를 죽였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타천사가 된 순간 이성을 잃고 모두 몰살했다.
이성을 되찾은 지금은, 그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여섯 번째 맹약으로.."
천계에서도, 마계에서도 죽을 수 없다.
나는 영원히 정화될 수 없고, 정화된다 하더라도 천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지구' 에서 죽는다."
타락한 성수가 빛나기 시작했다.
모든 계약이 채결된 것이었다.
이걸 마시면 나는 천사의 이름을 잃고 타천사의 힘을 잃으며 영원히 지상에 머무르게 된다.
딱히 천계에 미련은 없다.
나를 배웅할 존재들이 단 하나도 없었기에, 조금 쓸쓸한 것 빼곤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성배를 들어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성수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