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조회 : 853 추천 : 0 글자수 : 6,922 자 2024-10-23
성민은 좁디좁은 원룸 침대에 몸을 뉘인 채,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스물넷, 성인 영화 배우로서의 첫 촬영 현장에 섰던 그날의 떨림과 설렘은 마치 어제 일처럼 그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뜨거웠던 열정과 막연했던 자신감은 시간의 흐름 속에 야금야금 좀먹혀, 이제는 희미한 흔적만을 남기고 있었다. 그의 배우 경력은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가파른 내리막길을 질주하고 있었고, 어느덧 스물아홉이라는 나이는 더 이상 꿈만 좇을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새로운 작품을 제안하는 연락은 뜸해진 지 오래였고, 간혹 들어오는 대본들은 하나같이 흥미를 끌지 못하는, 형식적이고 깊이 없는 이야기들의 반복일 뿐이었다.
처음 이 길에 발을 들였을 때, 성민은 오직 연기력 하나로 승부하겠다는 다부진 각오를 품고 있었다. 비록 성인 영화라는 장르적 한계가 있을지라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섬세한 감정 연기를 펼쳐 보일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한때 업계에서 ‘눈빛에 감정을 담을 줄 아는 배우’, ‘진심으로 연기하는 배우’라는 긍정적인 평판을 얻으며 여러 작품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섬세한 감정선과 상대 배우와의 자연스러운 호흡은 그의 강점이었고, 몇몇 감독들은 그의 가능성을 높이 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찬란했던 순간은 영원하지 않았다. 변화하는 시장의 흐름과 끊임없이 등장하는 새로운 얼굴들 속에서 성민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경력은 예전과 같은 빛을 잃어갔고, 한때 그를 찾았던 감독들의 연락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특히 최근 몇 개월 동안은 촬영 제안 자체가 거의 끊기다시피 했고, 자연스레 수입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통장 잔고는 매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고, 다음 달 월세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 어릴 적, 막연하게 배우라는 꿈을 꾸며 상상했던 화려하고 안정된 삶은 이미 오래전에 빛바랜 사진처럼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매달 어김없이 찾아오는 카드 값 고지서와 밀린 공과금, 그리고 ‘다음 달은 어떻게 버텨야 하나’하는 현실적인 고민들뿐이었다. 그는 한때,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영상 통화를 걸어 "걱정 마세요, 저는 꼭 성공해서 유명한 배우가 될 거예요. 연기 하나로 당당하게 먹고살겠습니다!" 라고 호언장담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성민은 그 약속은커녕, 부모님의 걱정 어린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두려워 전화를 피하기 일쑤였다. 배우라는 꿈을 완전히 포기하기에는 그동안 걸어온 길이 너무 멀고 아쉬웠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전혀 다른 새로운 분야에서 시작을 하기엔 스물아홉이라는 나이가 너무 많게만 느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그는 깊은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그런 깊은 상념과 자괴감에 빠져 침대 위를 뒹굴고 있을 때, 그의 낡은 스마트폰이 진동하며 오랜만에 반가운 이름 하나를 화면에 띄웠다. 혁진 감독이었다. 혁진은 성민이 처음 이 업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그의 초기 경력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던 고마운 사람이었다. 혁진은 언제나 성민의 연기에 대한 열정과 성실한 태도를 높이 평가하며 그를 여러 작품에 기용했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은 혁진 역시 자신의 작품에 성민을 캐스팅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연락을 해왔다는 사실에, 성민은 가라앉았던 마음에 작은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반가움과 동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혹시 새로운 작품 제안일까, 아니면 그냥 안부를 묻는 연락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약속 장소인 동네의 작은 술집에 도착하자, 이미 혁진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민은 어색하지만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으며 혁진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만난 혁진은 예전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여전히 눈빛에는 감독 특유의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다. 혁진은 자리에 앉는 성민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성민아, 오랜만이다. 근데… 얼굴이 많이 상했네. 요즘 많이 힘들지?"
혁진의 직설적인 물음에 성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독님도 잘 아시잖아요. 이 바닥 다들 힘든 시기니까요. 그래도 뭐, 어떻게든 버티고 있습니다."
"네 얘기 들었어. 요즘 통 촬영이 없다면서. 너 정도 되는 배우가 일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싶더라."
혁진은 술잔을 채우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다들 그렇긴 하지. 성인 영화 시장 자체가 예전 같지 않으니까. 무료 콘텐츠는 넘쳐나고, 플랫폼은 계속 바뀌고… 경쟁은 더 치열해졌지. 근데, 요즘 시장 트렌드가 좀 변하고 있는 거, 혹시 알고 있니?"
성민은 혁진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시장이 변하고 있다고요? 어떻게 말인가요?"
혁진은 잠시 술잔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성민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의 눈빛은 단순한 안부 인사를 넘어선, 무언가 중요한 제안을 담고 있는 듯했다.
"성민아, 잘 들어봐. 요즘 성소수자 관련 콘텐츠 시장이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어. 너도 대충은 들어서 알겠지만, 소위 말하는 LGBT, 특히 BL(Boys' Love)이나 퀴어 콘텐츠 시장은 이제 더 이상 일부 마니아층만 즐기는 서브컬처가 아니야. 규모도 엄청나게 커졌고, 투자도 활발해지고 있어. 그러다 보니 그쪽으로 넘어가는 배우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고. 특히 남자 배우들 중에서… 게이 포르노 쪽으로 전향하는 친구들이 꽤 늘었어. 이게 예전처럼 음지에서만 머무는 게 아니라, 나름의 팬덤도 형성되고 있고, 작품성 있는 시도들도 많아지고 있거든. 네가 한번 그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기회가 될 수도 있어."
혁진의 말을 듣는 순간, 성민은 마치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여 잠시 말을 잃었다. 게이 포르노라니. 성소수자 콘텐츠는 그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완전히 낯선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는 평생을 이성애자로 살아왔고, 동성애 코드가 담긴 영화나 드라마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자신이, 직접 그런 역할, 그것도 성적인 행위를 연기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듯했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켜 혼란스러웠다.
"…게이 포르노요?"
성민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되물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감독님, 그건… 저랑은 좀 많이 안 맞는 것 같은데요. 저는 한 번도 그런 쪽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혁진은 성민의 당혹스러운 반응이 충분히 이해된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당장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네가 어떤 성향인지 아는데, 당연히 거부감이 들겠지. 하지만 성민아, 이건 단순히 성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배우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는 기회로 봐야 해. 이쪽 시장이 정말 무섭게 크고 있어. 수요는 계속 늘어나는데, 제대로 연기할 줄 아는 배우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야. 특히 너처럼 감정 연기가 되는 배우는 정말 드물어. 네가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배우라는 건 이 바닥 사람들은 다 알고 있고, 네 연기력이야 뭐, 내가 보증하지. 내가 볼 때, 너라면 충분히 그 안에서도 네 연기력을 보여주면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페이도 기존 시장보다 훨씬 나을 거고."
성민은 혁진의 말을 들으면서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상반된 생각들이 충돌했다. 배우로서의 자존심, 이성애자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사회적인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동시에,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자신의 처절한 현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밀린 월세, 바닥난 통장 잔고, 그리고 점점 희미해져 가는 배우라는 꿈. 그는 자신이 정말 이 낯선 길로 발을 들여야 할지, 아니면 지금처럼 희망 없는 기다림 속에서 계속 버텨야 할지, 도무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시간이나 여유가 그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 혁진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 성민아. 이건 도피가 아니라 새로운 도전이 될 수도 있어. 넌 연기력도 있고, 외모도 괜찮고, 무엇보다 성실하잖아. 네 강점을 살리면 이쪽에서도 충분히 인정받고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 내가 괜찮은 제작사 쪽이랑 연결해 줄 수도 있고."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리고 그 후 며칠 동안 성민은 깊은 고민의 늪에 빠졌다. 밤에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 낮에는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동안 배우로서 살아온 시간들, 그 안에서 느꼈던 희로애락을 떠올리면, 이대로 주저앉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오기가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이성애자로 살아온 자신이 게이 포르노에 출연한다는 것은 여전히 상상하기 힘들고 불편한 일이었지만, 눈앞에 닥친 현실적인 문제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배우’라는 타이틀을 지키고 싶다는 절박함, 그리고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고 싶다는 갈망이 그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밤낮을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성민은 마침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혁진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목소리는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어떤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이 선택이 앞으로 그의 배우 커리어에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혹은 그의 개인적인 삶에 어떤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올지는 감히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망설일 만한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냉혹한 현실은 변함이 없었다. 성민은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었다. ‘이건 그냥 연기일 뿐이야. 하나의 역할일 뿐이라고. 프로답게 해내자.’ 그렇게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길을 향해 불안한 첫 발을 내딛기로 결심했다.
촬영 첫날, 성민은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촬영장에 도착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기가 스튜디오 안에 감돌았다. 심장은 여전히 불안하게 뛰고 있었고,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곳에서 만난 스태프들과 관계자들은 성민이 막연하게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훨씬 더 체계적이고 프로페셔널한 분위기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오늘의 상대 배우인 '준호'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준호는 성민을 발견하자마지 밝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선배님이랑 같이 촬영하게 된 민준호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준호는 성민보다 한 살 어린 배우였지만, 이미 이 분야에서는 탄탄한 입지를 다지며 꽤 유명세를 얻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자신감 넘치면서도 예의 바른 태도에 성민은 어색하게 인사를 받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 어색하고 불편한 촬영이 자신에게 어떤 경험을 안겨줄지, 두려움과 일말의 기대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그의 마음속을 휘저었다. 준호는 성민의 긴장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촬영 준비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옆으로 다가와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며 분위기를 풀어주려 애썼다.
"저도 처음 이쪽 일 시작했을 땐 엄청 긴장하고 걱정도 많았어요. 제가 원래 숫기도 별로 없는 편이라서요. 근데 막상 해보니까, 생각보다 다들 젠틀하고 서로 배려하는 분위기더라고요. 특히 파트너 배우랑 호흡 맞추는 게 중요한데, 서로 불편하지 않게 대화 많이 하고, 편하게 친구처럼 대하다 보면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예요.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그냥 평소 하시던 대로 연기한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해보세요, 선배님."
준호의 진심 어린 조언과 격려에 성민은 딱딱하게 굳어있던 마음이 아주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는 쉽사리 떨쳐내기 힘든 불안함과 어색함이 짙게 남아 있었다. 잠시 후, 감독의 "레디, 액션!" 사인이 떨어지고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성민은 애써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최대한 프로페셔널한 배우로서의 자세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카메라 렌즈 너머로 보이는 낯선 상황과, 이성애자인 자신이 동성과의 성적인 행위를 연기해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 과연 자신이 이 상황을 얼마나 온전히 견뎌내고 연기해낼 수 있을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길고도 짧았던 첫 촬영이 끝나고, 성민은 마치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자신이 과연 제대로 연기를 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뻣뻣하게 굳어 있기만 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평가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예상과는 달리, 그날의 촬영은 큰 문제나 사고 없이 비교적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무엇보다 상대 배우였던 준호의 세심한 배려와 능숙한 리드 덕분에, 성민은 극도의 어색함 속에서도 조금씩 긴장을 풀고 상황에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그와의 연기 호흡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고 나쁘지 않았다.
텅 빈 밤거리를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성민은 복잡하게 얽힌 여러 가지 생각에 깊이 잠겼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자신이 이제 '게이 포르노 배우'로서 첫발을 내디뎠다는 사실이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예상치 못한 새로운 선택이 앞으로 자신의 멈춰버린 배우 인생에 어떤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어 줄지, 혹은 또 다른 좌절을 안겨줄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과 불안감이 교차했다. 확실한 것은, 그의 인생에 또 한 번의 거대한 전환점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이 길에 발을 들였을 때, 성민은 오직 연기력 하나로 승부하겠다는 다부진 각오를 품고 있었다. 비록 성인 영화라는 장르적 한계가 있을지라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섬세한 감정 연기를 펼쳐 보일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한때 업계에서 ‘눈빛에 감정을 담을 줄 아는 배우’, ‘진심으로 연기하는 배우’라는 긍정적인 평판을 얻으며 여러 작품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섬세한 감정선과 상대 배우와의 자연스러운 호흡은 그의 강점이었고, 몇몇 감독들은 그의 가능성을 높이 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찬란했던 순간은 영원하지 않았다. 변화하는 시장의 흐름과 끊임없이 등장하는 새로운 얼굴들 속에서 성민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경력은 예전과 같은 빛을 잃어갔고, 한때 그를 찾았던 감독들의 연락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특히 최근 몇 개월 동안은 촬영 제안 자체가 거의 끊기다시피 했고, 자연스레 수입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통장 잔고는 매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고, 다음 달 월세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 어릴 적, 막연하게 배우라는 꿈을 꾸며 상상했던 화려하고 안정된 삶은 이미 오래전에 빛바랜 사진처럼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매달 어김없이 찾아오는 카드 값 고지서와 밀린 공과금, 그리고 ‘다음 달은 어떻게 버텨야 하나’하는 현실적인 고민들뿐이었다. 그는 한때,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영상 통화를 걸어 "걱정 마세요, 저는 꼭 성공해서 유명한 배우가 될 거예요. 연기 하나로 당당하게 먹고살겠습니다!" 라고 호언장담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성민은 그 약속은커녕, 부모님의 걱정 어린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두려워 전화를 피하기 일쑤였다. 배우라는 꿈을 완전히 포기하기에는 그동안 걸어온 길이 너무 멀고 아쉬웠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전혀 다른 새로운 분야에서 시작을 하기엔 스물아홉이라는 나이가 너무 많게만 느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그는 깊은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그런 깊은 상념과 자괴감에 빠져 침대 위를 뒹굴고 있을 때, 그의 낡은 스마트폰이 진동하며 오랜만에 반가운 이름 하나를 화면에 띄웠다. 혁진 감독이었다. 혁진은 성민이 처음 이 업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그의 초기 경력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던 고마운 사람이었다. 혁진은 언제나 성민의 연기에 대한 열정과 성실한 태도를 높이 평가하며 그를 여러 작품에 기용했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은 혁진 역시 자신의 작품에 성민을 캐스팅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연락을 해왔다는 사실에, 성민은 가라앉았던 마음에 작은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반가움과 동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혹시 새로운 작품 제안일까, 아니면 그냥 안부를 묻는 연락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약속 장소인 동네의 작은 술집에 도착하자, 이미 혁진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민은 어색하지만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으며 혁진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만난 혁진은 예전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여전히 눈빛에는 감독 특유의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다. 혁진은 자리에 앉는 성민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성민아, 오랜만이다. 근데… 얼굴이 많이 상했네. 요즘 많이 힘들지?"
혁진의 직설적인 물음에 성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독님도 잘 아시잖아요. 이 바닥 다들 힘든 시기니까요. 그래도 뭐, 어떻게든 버티고 있습니다."
"네 얘기 들었어. 요즘 통 촬영이 없다면서. 너 정도 되는 배우가 일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싶더라."
혁진은 술잔을 채우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다들 그렇긴 하지. 성인 영화 시장 자체가 예전 같지 않으니까. 무료 콘텐츠는 넘쳐나고, 플랫폼은 계속 바뀌고… 경쟁은 더 치열해졌지. 근데, 요즘 시장 트렌드가 좀 변하고 있는 거, 혹시 알고 있니?"
성민은 혁진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시장이 변하고 있다고요? 어떻게 말인가요?"
혁진은 잠시 술잔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성민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의 눈빛은 단순한 안부 인사를 넘어선, 무언가 중요한 제안을 담고 있는 듯했다.
"성민아, 잘 들어봐. 요즘 성소수자 관련 콘텐츠 시장이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어. 너도 대충은 들어서 알겠지만, 소위 말하는 LGBT, 특히 BL(Boys' Love)이나 퀴어 콘텐츠 시장은 이제 더 이상 일부 마니아층만 즐기는 서브컬처가 아니야. 규모도 엄청나게 커졌고, 투자도 활발해지고 있어. 그러다 보니 그쪽으로 넘어가는 배우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고. 특히 남자 배우들 중에서… 게이 포르노 쪽으로 전향하는 친구들이 꽤 늘었어. 이게 예전처럼 음지에서만 머무는 게 아니라, 나름의 팬덤도 형성되고 있고, 작품성 있는 시도들도 많아지고 있거든. 네가 한번 그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기회가 될 수도 있어."
혁진의 말을 듣는 순간, 성민은 마치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여 잠시 말을 잃었다. 게이 포르노라니. 성소수자 콘텐츠는 그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완전히 낯선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는 평생을 이성애자로 살아왔고, 동성애 코드가 담긴 영화나 드라마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자신이, 직접 그런 역할, 그것도 성적인 행위를 연기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듯했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켜 혼란스러웠다.
"…게이 포르노요?"
성민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되물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감독님, 그건… 저랑은 좀 많이 안 맞는 것 같은데요. 저는 한 번도 그런 쪽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혁진은 성민의 당혹스러운 반응이 충분히 이해된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당장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네가 어떤 성향인지 아는데, 당연히 거부감이 들겠지. 하지만 성민아, 이건 단순히 성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배우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는 기회로 봐야 해. 이쪽 시장이 정말 무섭게 크고 있어. 수요는 계속 늘어나는데, 제대로 연기할 줄 아는 배우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야. 특히 너처럼 감정 연기가 되는 배우는 정말 드물어. 네가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배우라는 건 이 바닥 사람들은 다 알고 있고, 네 연기력이야 뭐, 내가 보증하지. 내가 볼 때, 너라면 충분히 그 안에서도 네 연기력을 보여주면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페이도 기존 시장보다 훨씬 나을 거고."
성민은 혁진의 말을 들으면서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상반된 생각들이 충돌했다. 배우로서의 자존심, 이성애자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사회적인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동시에,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자신의 처절한 현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밀린 월세, 바닥난 통장 잔고, 그리고 점점 희미해져 가는 배우라는 꿈. 그는 자신이 정말 이 낯선 길로 발을 들여야 할지, 아니면 지금처럼 희망 없는 기다림 속에서 계속 버텨야 할지, 도무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시간이나 여유가 그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 혁진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 성민아. 이건 도피가 아니라 새로운 도전이 될 수도 있어. 넌 연기력도 있고, 외모도 괜찮고, 무엇보다 성실하잖아. 네 강점을 살리면 이쪽에서도 충분히 인정받고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 내가 괜찮은 제작사 쪽이랑 연결해 줄 수도 있고."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리고 그 후 며칠 동안 성민은 깊은 고민의 늪에 빠졌다. 밤에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 낮에는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동안 배우로서 살아온 시간들, 그 안에서 느꼈던 희로애락을 떠올리면, 이대로 주저앉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오기가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이성애자로 살아온 자신이 게이 포르노에 출연한다는 것은 여전히 상상하기 힘들고 불편한 일이었지만, 눈앞에 닥친 현실적인 문제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배우’라는 타이틀을 지키고 싶다는 절박함, 그리고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고 싶다는 갈망이 그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밤낮을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성민은 마침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혁진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목소리는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어떤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이 선택이 앞으로 그의 배우 커리어에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혹은 그의 개인적인 삶에 어떤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올지는 감히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망설일 만한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냉혹한 현실은 변함이 없었다. 성민은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었다. ‘이건 그냥 연기일 뿐이야. 하나의 역할일 뿐이라고. 프로답게 해내자.’ 그렇게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길을 향해 불안한 첫 발을 내딛기로 결심했다.
촬영 첫날, 성민은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촬영장에 도착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기가 스튜디오 안에 감돌았다. 심장은 여전히 불안하게 뛰고 있었고,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곳에서 만난 스태프들과 관계자들은 성민이 막연하게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훨씬 더 체계적이고 프로페셔널한 분위기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오늘의 상대 배우인 '준호'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준호는 성민을 발견하자마지 밝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선배님이랑 같이 촬영하게 된 민준호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준호는 성민보다 한 살 어린 배우였지만, 이미 이 분야에서는 탄탄한 입지를 다지며 꽤 유명세를 얻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자신감 넘치면서도 예의 바른 태도에 성민은 어색하게 인사를 받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 어색하고 불편한 촬영이 자신에게 어떤 경험을 안겨줄지, 두려움과 일말의 기대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그의 마음속을 휘저었다. 준호는 성민의 긴장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촬영 준비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옆으로 다가와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며 분위기를 풀어주려 애썼다.
"저도 처음 이쪽 일 시작했을 땐 엄청 긴장하고 걱정도 많았어요. 제가 원래 숫기도 별로 없는 편이라서요. 근데 막상 해보니까, 생각보다 다들 젠틀하고 서로 배려하는 분위기더라고요. 특히 파트너 배우랑 호흡 맞추는 게 중요한데, 서로 불편하지 않게 대화 많이 하고, 편하게 친구처럼 대하다 보면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예요.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그냥 평소 하시던 대로 연기한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해보세요, 선배님."
준호의 진심 어린 조언과 격려에 성민은 딱딱하게 굳어있던 마음이 아주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는 쉽사리 떨쳐내기 힘든 불안함과 어색함이 짙게 남아 있었다. 잠시 후, 감독의 "레디, 액션!" 사인이 떨어지고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성민은 애써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최대한 프로페셔널한 배우로서의 자세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카메라 렌즈 너머로 보이는 낯선 상황과, 이성애자인 자신이 동성과의 성적인 행위를 연기해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 과연 자신이 이 상황을 얼마나 온전히 견뎌내고 연기해낼 수 있을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길고도 짧았던 첫 촬영이 끝나고, 성민은 마치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자신이 과연 제대로 연기를 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뻣뻣하게 굳어 있기만 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평가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예상과는 달리, 그날의 촬영은 큰 문제나 사고 없이 비교적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무엇보다 상대 배우였던 준호의 세심한 배려와 능숙한 리드 덕분에, 성민은 극도의 어색함 속에서도 조금씩 긴장을 풀고 상황에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그와의 연기 호흡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고 나쁘지 않았다.
텅 빈 밤거리를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성민은 복잡하게 얽힌 여러 가지 생각에 깊이 잠겼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자신이 이제 '게이 포르노 배우'로서 첫발을 내디뎠다는 사실이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예상치 못한 새로운 선택이 앞으로 자신의 멈춰버린 배우 인생에 어떤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어 줄지, 혹은 또 다른 좌절을 안겨줄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과 불안감이 교차했다. 확실한 것은, 그의 인생에 또 한 번의 거대한 전환점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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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속 사랑,예술로 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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