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조회 : 1,456 추천 : 0 글자수 : 6,120 자 2024-10-23
성민은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복잡하고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들에 휩싸여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촬영장에서 준호를 향해 느꼈던 강렬한 끌림과 미묘한 감정들이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 점점 더 선명해지면서, 그와의 관계가 더 이상 단순한 동료나 파트너로서의 일적인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부인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막다른 길에서 만난 새로운 기회, 어쩌면 도피처라고까지 여겼던 게이 포르노 배우로서의 도전이, 이제는 그의 삶과 감정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며 거센 소용돌이 속으로 그를 밀어 넣고 있었다.
늦은 저녁, 성민은 홀로 자신의 좁은 원룸 부엌 식탁에 앉아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이며, 최근 준호와 함께했던 촬영의 순간들을 필름처럼 되돌아보고 있었다. 카메라가 꺼지고, 스태프들이 흩어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준호의 얼굴, 그의 웃음소리, 그와 나누었던 시시콜콜한 대화들, 그리고 무엇보다 촬영 중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교감했던 그 강렬했던 순간들이 마치 잔상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것을 느꼈다. 이건 그저 연기에 몰입했던 후유증일 뿐이라고, 동료 배우에 대한 자연스러운 친밀감일 뿐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타일러보았지만, 준호와 함께하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길어질수록 그를 향한 마음은 억누를 수 없을 만큼 깊어지고 단단해지고 있었다. 이성애자로서 살아온 지난 삶의 궤적과 충돌하는 이 감정의 정체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그 강렬함만큼은 외면할 수 없었다.
그때, 적막을 깨고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진동하며 울렸다. 액정 화면에는 '민준호'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성민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잠시 망설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일까.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이 복잡한 감정을 더 키우고 싶지 않은 마음이 충돌했다. 몇 번의 신호음이 더 울린 후에야, 그는 마른 입술을 한번 축이고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형. 지금 시간 괜찮아요? 저 오늘 일이 생각보다 좀 일찍 끝났거든요. 혹시 저녁 아직 안 드셨으면 같이 먹을까 해서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준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밝고 에너지가 넘쳤다. 그 꾸밈없는 목소리가 성민의 불안한 마음을 아주 조금은 진정시켜주는 듯했다.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어… 그래. 나도 아직 안 먹었어. 어디서 볼까?”
“우리 저번에 갔던 그 골목에 있는 작은 식당 있잖아요? 거기 조용하고 음식도 맛있던데. 거기서 봬요, 형.”
“그래, 좋아. 옷 갈아입고 바로 나갈게. 그럼 거기서 보자.”
전화를 끊고 나서, 성민은 잠시 현관 앞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피곤함과 혼란스러움이 뒤섞인 얼굴. 이렇게 준호를 만나는 것이 맞는 걸까. 그의 얼굴을 보면 또 어떤 감정들이 요동칠까. 준호와의 갑작스러운 만남이 내심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부담감으로 다가온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생경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미 약속은 했고, 아니, 어쩌면 그는 이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오랜 단골들이 주로 찾는 듯한 허름하지만 정겨운 분위기의 식당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저녁 식사는 생각보다 편안하게 흘러갔다. 준호는 최근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나 업계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고, 성민은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간간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준호와 함께하는 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대화 속에서, 성민은 잠시나마 자신을 짓누르던 복잡한 감정의 무게를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득문득 마주치는 준호의 깊은 눈빛, 그의 사소한 배려 섞인 행동들 속에서,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더 이상 이 감정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명확한 신호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성민은 준호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편안함의 근원이, 단순히 마음 맞는 동료에게서 느끼는 친밀감을 넘어선, 훨씬 더 깊고 개인적인 차원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더 이상 떨쳐낼 수가 없었다.
따뜻한 국물과 함께 소주 몇 잔을 기울이며 식사를 마친 후, 식당을 나섰을 때 준호가 먼저 제안했다.
“형, 이대로 헤어지기 좀 아쉬운데. 근처에 공원 있는데, 바람 좀 쐬면서 잠깐 걸을래요? 오늘 밤 날씨도 선선하고 좋고, 산책하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성민은 준호의 제안에 별다른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 역시 이 만남이 이렇게 끝나기를 원치 않았는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비추는 한적한 밤거리를 나란히 걸으며, 이전과는 조금 다른, 좀 더 진솔하고 내밀한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준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고, 그의 생각과 감정의 결을 따라 함께 걷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편안함은 곧바로 또 다른 종류의 불편함과 불안함을 불러일으켰다. 준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깊어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공원 안쪽, 불빛이 희미하게 닿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잠시 말을 멈춘 두 사람은,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난 고요한 저녁 공기를 молча 느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준호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성민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있잖아요. 요즘 형… 예전이랑 좀 달라진 것 같아요. 표정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혹시 무슨 힘든 일 있는 건 아니죠? 저한테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준호의 직설적이면서도 걱정이 묻어나는 질문에 성민은 잠시 숨을 골랐다. 심장이 다시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여기서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아니면 또다시 애매하게 얼버무려야 할까. 하지만 더 이상은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준호야… 나 사실… 요즘 정말 많이 혼란스러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그렇고… 처음엔 그저 연기라고만, 역할에 충실하자고만 생각했어. 근데 요즘은… 이상하게 네가 자꾸 신경 쓰여. 촬영할 때뿐만 아니라, 이렇게 같이 있을 때도 그렇고… 혼자 있을 때도 네 생각이 나고. 이게 단순히 같이 일하는 동료라서 그런 감정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 스스로도 너무 당황스럽고 힘들어.”
성민의 용기 있는 고백에, 준호는 놀란 표정 없이 오히려 담담하게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역시 성민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 사실은 저도 그런 생각하고 있었어요. 형이랑 같이 촬영하면서, 형이랑 이렇게 밖에서 만나면서… 뭔가 예전과는 달라진 것 같다고 계속 느꼈어요. 처음엔 그냥 우리가 부쩍 친해져서, 편해져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형처럼 저도… 이게 맞는 건지, 내가 왜 이러는지 혼란스러웠어요.”
성민은 준호가 자신과 너무나 비슷한 감정의 파고를 겪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동시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 역시 성민과 마찬가지로, 이 낯설고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홀로 힘들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그동안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애써 외면하려 했던 감정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저 연기라고, 역할에 대한 몰입이라고 스스로를 속여왔던 감정들이, 실제로는 서로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소리 없이 자라나고 있었음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던 벽이 허물어지며 한층 더 깊은 솔직함과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처음엔 정말… 그냥 촬영이 끝나면 아무렇지 않게 잊힐 줄 알았어.”
성민이 먼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근데 이상하게… 네 얼굴이, 네 목소리가, 네가 했던 말들이 계속 머릿속에 남더라. 솔직히… 내가 남자한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래서 더 무섭고 혼란스러웠는지도 몰라.”
준호는 성민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포갰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저도 비슷해요, 형. 이상하게 다른 배우들이랑 촬영할 때는 전혀 이런 느낌이 없는데… 형이랑 같이 연기할 때면, 형이랑 눈을 마주칠 때면… 저도 모르게 자꾸 감정이입이 되고, 그래서 더 힘들고 혼란스러웠어요. 이게 단순히 일 때문에 느끼는 감정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인지 계속 헷갈렸거든요. 근데… 이제는 더 이상 외면하고 싶지 않아요. 저도 솔직해지려고 해요. 우리 사이에… 뭔가 다른 사람들하고는 다른, 좀 더 특별한 뭔가가 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그날 밤 공원 벤치에서의 대화 이후, 성민과 준호는 서로를 향한 감정에 대해 더 이상 망설이거나 숨기지 않았다. 촬영장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더욱 깊어졌고, 사적인 자리에서의 만남은 더욱 잦아졌다. 그들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서로의 불안감을 다독여주며 단순한 동료 그 이상의 관계로 빠르게 발전해 나갔다. 신기하게도, 준호와 함께 있을 때 성민은 더 이상 극심한 두려움이나 혼란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존재 자체가 주는 편안함과 깊은 안정감 속에서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행복감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가 깊어지고 서로에 대한 감정이 확고해질수록, 성민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종류의 새로운 고민과 불안감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관계가 만약 세상 밖으로 알려지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들은 성인 영화, 그것도 동성애 코드를 다루는 장르의 배우들이었고, 그 안에서 실제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수많은 오해와 편견, 그리고 비난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배우와 파트너라는 직업적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서고 있었고, 이러한 관계는 보수적인 시선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 업계에서 쉽게 받아들여지기 힘들 수도 있었다. 성민은 자신들의 진심이 왜곡되고, 그들의 관계가 그저 가십거리나 잘못된 방향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걱정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민은 다음 작품에 대한 논의를 위해 찾아간 제작사 사무실에서 감독에게서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다. 감독은 서류를 검토하다 말고 툭 던지듯 물었다.
“성민 씨, 근데 요즘 준호 씨랑 유난히 더 친해 보이는 것 같네? 하긴, 워낙 붙어서 촬영하는 씬이 많긴 했지. 그래도 촬영 없는 날에도 둘이 자주 만나나 봐요?”
감독의 목소리에는 어떤 특별한 의도가 담겨있지 않은 듯했지만, 성민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쓰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아, 네. 아무래도 같이 호흡을 맞춰야 하는 장면이 많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친해졌죠. 서로 연기에 대해서 얘기도 많이 나누고요. 같이 연기 합 맞추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감독은 그저 “하긴, 둘이 워낙 연기 합이 좋긴 하지.” 라며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넘겼지만, 성민의 마음은 좀처럼 편치 않았다. 혹시 감독뿐만 아니라 다른 스태프들이나 관계자들도 그들과 준호의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챈 건 아닐까? 그들의 관계가 이미 업계에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성민은 이제 단순히 자신의 감정 문제를 넘어, 준호와의 관계가 앞으로 그들의 커리어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성민은 결심했다. 더 이상 불안감에 흔들리거나 현실을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준호와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야 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들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단단해질수록, 서로의 미래에 대한 솔직하고 현실적인 대화가 반드시 필요했다. 성민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무게만큼이나, 앞으로 짊어져야 할 책임과 현실적인 문제들을 명확히 인지하고 준호와 함께 헤쳐나갈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곧 시작될 새로운 작품의 촬영을 함께 준비하면서, 그들 앞에 놓인 미지의 길과 다가올 수많은 도전과 변화에 조심스럽게 대비하고 있었다. 성민과 준호는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충만한, 함께 만들어갈 미래를 조심스럽게 기대하면서도, 그 길이 결코 꽃길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아프게 깨닫고 있었다. 감정의 소용돌이는 잠시 잦아들었지만, 이제는 현실이라는 또 다른 파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저녁, 성민은 홀로 자신의 좁은 원룸 부엌 식탁에 앉아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이며, 최근 준호와 함께했던 촬영의 순간들을 필름처럼 되돌아보고 있었다. 카메라가 꺼지고, 스태프들이 흩어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준호의 얼굴, 그의 웃음소리, 그와 나누었던 시시콜콜한 대화들, 그리고 무엇보다 촬영 중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교감했던 그 강렬했던 순간들이 마치 잔상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것을 느꼈다. 이건 그저 연기에 몰입했던 후유증일 뿐이라고, 동료 배우에 대한 자연스러운 친밀감일 뿐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타일러보았지만, 준호와 함께하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길어질수록 그를 향한 마음은 억누를 수 없을 만큼 깊어지고 단단해지고 있었다. 이성애자로서 살아온 지난 삶의 궤적과 충돌하는 이 감정의 정체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그 강렬함만큼은 외면할 수 없었다.
그때, 적막을 깨고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진동하며 울렸다. 액정 화면에는 '민준호'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성민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잠시 망설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일까.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이 복잡한 감정을 더 키우고 싶지 않은 마음이 충돌했다. 몇 번의 신호음이 더 울린 후에야, 그는 마른 입술을 한번 축이고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형. 지금 시간 괜찮아요? 저 오늘 일이 생각보다 좀 일찍 끝났거든요. 혹시 저녁 아직 안 드셨으면 같이 먹을까 해서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준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밝고 에너지가 넘쳤다. 그 꾸밈없는 목소리가 성민의 불안한 마음을 아주 조금은 진정시켜주는 듯했다.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어… 그래. 나도 아직 안 먹었어. 어디서 볼까?”
“우리 저번에 갔던 그 골목에 있는 작은 식당 있잖아요? 거기 조용하고 음식도 맛있던데. 거기서 봬요, 형.”
“그래, 좋아. 옷 갈아입고 바로 나갈게. 그럼 거기서 보자.”
전화를 끊고 나서, 성민은 잠시 현관 앞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피곤함과 혼란스러움이 뒤섞인 얼굴. 이렇게 준호를 만나는 것이 맞는 걸까. 그의 얼굴을 보면 또 어떤 감정들이 요동칠까. 준호와의 갑작스러운 만남이 내심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부담감으로 다가온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생경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미 약속은 했고, 아니, 어쩌면 그는 이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오랜 단골들이 주로 찾는 듯한 허름하지만 정겨운 분위기의 식당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저녁 식사는 생각보다 편안하게 흘러갔다. 준호는 최근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나 업계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고, 성민은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간간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준호와 함께하는 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대화 속에서, 성민은 잠시나마 자신을 짓누르던 복잡한 감정의 무게를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득문득 마주치는 준호의 깊은 눈빛, 그의 사소한 배려 섞인 행동들 속에서,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더 이상 이 감정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명확한 신호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성민은 준호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편안함의 근원이, 단순히 마음 맞는 동료에게서 느끼는 친밀감을 넘어선, 훨씬 더 깊고 개인적인 차원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더 이상 떨쳐낼 수가 없었다.
따뜻한 국물과 함께 소주 몇 잔을 기울이며 식사를 마친 후, 식당을 나섰을 때 준호가 먼저 제안했다.
“형, 이대로 헤어지기 좀 아쉬운데. 근처에 공원 있는데, 바람 좀 쐬면서 잠깐 걸을래요? 오늘 밤 날씨도 선선하고 좋고, 산책하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성민은 준호의 제안에 별다른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 역시 이 만남이 이렇게 끝나기를 원치 않았는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비추는 한적한 밤거리를 나란히 걸으며, 이전과는 조금 다른, 좀 더 진솔하고 내밀한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준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고, 그의 생각과 감정의 결을 따라 함께 걷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편안함은 곧바로 또 다른 종류의 불편함과 불안함을 불러일으켰다. 준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깊어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공원 안쪽, 불빛이 희미하게 닿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잠시 말을 멈춘 두 사람은,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난 고요한 저녁 공기를 молча 느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준호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성민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있잖아요. 요즘 형… 예전이랑 좀 달라진 것 같아요. 표정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혹시 무슨 힘든 일 있는 건 아니죠? 저한테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준호의 직설적이면서도 걱정이 묻어나는 질문에 성민은 잠시 숨을 골랐다. 심장이 다시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여기서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아니면 또다시 애매하게 얼버무려야 할까. 하지만 더 이상은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준호야… 나 사실… 요즘 정말 많이 혼란스러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그렇고… 처음엔 그저 연기라고만, 역할에 충실하자고만 생각했어. 근데 요즘은… 이상하게 네가 자꾸 신경 쓰여. 촬영할 때뿐만 아니라, 이렇게 같이 있을 때도 그렇고… 혼자 있을 때도 네 생각이 나고. 이게 단순히 같이 일하는 동료라서 그런 감정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 스스로도 너무 당황스럽고 힘들어.”
성민의 용기 있는 고백에, 준호는 놀란 표정 없이 오히려 담담하게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역시 성민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 사실은 저도 그런 생각하고 있었어요. 형이랑 같이 촬영하면서, 형이랑 이렇게 밖에서 만나면서… 뭔가 예전과는 달라진 것 같다고 계속 느꼈어요. 처음엔 그냥 우리가 부쩍 친해져서, 편해져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형처럼 저도… 이게 맞는 건지, 내가 왜 이러는지 혼란스러웠어요.”
성민은 준호가 자신과 너무나 비슷한 감정의 파고를 겪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동시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 역시 성민과 마찬가지로, 이 낯설고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홀로 힘들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그동안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애써 외면하려 했던 감정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저 연기라고, 역할에 대한 몰입이라고 스스로를 속여왔던 감정들이, 실제로는 서로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소리 없이 자라나고 있었음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던 벽이 허물어지며 한층 더 깊은 솔직함과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처음엔 정말… 그냥 촬영이 끝나면 아무렇지 않게 잊힐 줄 알았어.”
성민이 먼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근데 이상하게… 네 얼굴이, 네 목소리가, 네가 했던 말들이 계속 머릿속에 남더라. 솔직히… 내가 남자한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래서 더 무섭고 혼란스러웠는지도 몰라.”
준호는 성민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포갰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저도 비슷해요, 형. 이상하게 다른 배우들이랑 촬영할 때는 전혀 이런 느낌이 없는데… 형이랑 같이 연기할 때면, 형이랑 눈을 마주칠 때면… 저도 모르게 자꾸 감정이입이 되고, 그래서 더 힘들고 혼란스러웠어요. 이게 단순히 일 때문에 느끼는 감정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인지 계속 헷갈렸거든요. 근데… 이제는 더 이상 외면하고 싶지 않아요. 저도 솔직해지려고 해요. 우리 사이에… 뭔가 다른 사람들하고는 다른, 좀 더 특별한 뭔가가 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그날 밤 공원 벤치에서의 대화 이후, 성민과 준호는 서로를 향한 감정에 대해 더 이상 망설이거나 숨기지 않았다. 촬영장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더욱 깊어졌고, 사적인 자리에서의 만남은 더욱 잦아졌다. 그들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서로의 불안감을 다독여주며 단순한 동료 그 이상의 관계로 빠르게 발전해 나갔다. 신기하게도, 준호와 함께 있을 때 성민은 더 이상 극심한 두려움이나 혼란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존재 자체가 주는 편안함과 깊은 안정감 속에서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행복감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가 깊어지고 서로에 대한 감정이 확고해질수록, 성민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종류의 새로운 고민과 불안감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관계가 만약 세상 밖으로 알려지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들은 성인 영화, 그것도 동성애 코드를 다루는 장르의 배우들이었고, 그 안에서 실제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수많은 오해와 편견, 그리고 비난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배우와 파트너라는 직업적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서고 있었고, 이러한 관계는 보수적인 시선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 업계에서 쉽게 받아들여지기 힘들 수도 있었다. 성민은 자신들의 진심이 왜곡되고, 그들의 관계가 그저 가십거리나 잘못된 방향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걱정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민은 다음 작품에 대한 논의를 위해 찾아간 제작사 사무실에서 감독에게서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다. 감독은 서류를 검토하다 말고 툭 던지듯 물었다.
“성민 씨, 근데 요즘 준호 씨랑 유난히 더 친해 보이는 것 같네? 하긴, 워낙 붙어서 촬영하는 씬이 많긴 했지. 그래도 촬영 없는 날에도 둘이 자주 만나나 봐요?”
감독의 목소리에는 어떤 특별한 의도가 담겨있지 않은 듯했지만, 성민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쓰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아, 네. 아무래도 같이 호흡을 맞춰야 하는 장면이 많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친해졌죠. 서로 연기에 대해서 얘기도 많이 나누고요. 같이 연기 합 맞추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감독은 그저 “하긴, 둘이 워낙 연기 합이 좋긴 하지.” 라며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넘겼지만, 성민의 마음은 좀처럼 편치 않았다. 혹시 감독뿐만 아니라 다른 스태프들이나 관계자들도 그들과 준호의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챈 건 아닐까? 그들의 관계가 이미 업계에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성민은 이제 단순히 자신의 감정 문제를 넘어, 준호와의 관계가 앞으로 그들의 커리어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성민은 결심했다. 더 이상 불안감에 흔들리거나 현실을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준호와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야 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들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단단해질수록, 서로의 미래에 대한 솔직하고 현실적인 대화가 반드시 필요했다. 성민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무게만큼이나, 앞으로 짊어져야 할 책임과 현실적인 문제들을 명확히 인지하고 준호와 함께 헤쳐나갈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곧 시작될 새로운 작품의 촬영을 함께 준비하면서, 그들 앞에 놓인 미지의 길과 다가올 수많은 도전과 변화에 조심스럽게 대비하고 있었다. 성민과 준호는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충만한, 함께 만들어갈 미래를 조심스럽게 기대하면서도, 그 길이 결코 꽃길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아프게 깨닫고 있었다. 감정의 소용돌이는 잠시 잦아들었지만, 이제는 현실이라는 또 다른 파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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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속 사랑,예술로 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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