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시즌2
조회 : 63 추천 : 0 글자수 : 7,093 자 2025-04-30
까르르 터지는 아이의 웃음소리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어른들의 발소리, 그리고 고소한 토스트 냄새. 이른 아침, 현우와 진수의 집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활기차면서도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특별한 날이었다. 바로 그들의 사랑스러운 아들, 민재가 드디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빠! 내 가방 못 봤어요? 파란색 공룡 그려진 거! 오늘 꼭 메고 가야 하는데!”
조금은 상기된 얼굴의 민재가 양말을 꿰어 신으며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어느새 훌쩍 자라 교복 느낌의 단정한 남색 재킷과 바지를 입은 모습이 제법 늠름했지만, 똘망똘망한 눈동자에는 초등학교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과 함께 약간의 긴장이 뒤섞여 있었다.
“어허, 어제 아빠랑 같이 책가방 다 챙겨놓고선. 여기 식탁 위에 있네, 아들.”
주방에서 민재의 도시락 통에 정성껏 과일을 담던 진수가 식탁 위 파란색 가방을 가리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하얀 셔츠 위에 깔끔하게 넥타이까지 맨 그의 모습은 이제 완연한 외과 전문의의 관록이 묻어났지만, 민재를 향한 눈빛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다정한 아빠의 것이었다.
“자, 오늘 점심 도시락은 민재가 제일 좋아하는 유부초밥이랑 미니 돈가스. 물통이랑 필통도 잘 챙겨 넣고. 오늘 학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알았지?”
“네! 진수 아빠!”
민재는 씩씩하게 대답하며 현관으로 달려가 가방을 챙겨 메었다. 하지만 현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고 조금은 두려운 마음일 터였다.
“우리 아들, 첫날부터 너무 긴장한 거 아니야?”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현우가 수건만 걸친채 젖은 머리를 커다란 수건으로 털며 민재에게 다가왔다. 국가대표 시절의 날카롭고 예민했던 모습은 세월과 함께 부드러워졌지만, 넓은 어깨와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은 여전했다. 그는 민재 앞에 자연스럽게 쭈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학교 가면 재밌는 거 엄청 많아.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유치원보다 더 신기한 것도 배우고. 그리고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거나, 어려운 일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언제든지 아빠들한테 전화하는 거야. 알았지? 아빠들이 우리 민재 항상 뒤에서 응원하고 있다는 거 절대 잊지 마.”
현우 특유의 든든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 그리고 따뜻하면서도 장난기 어린 눈빛에 민재는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듯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네, 현우 아빠! 저 잘할 수 있어요!”
진수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거실 한편에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세 식구가 함께하는 정신없지만 사랑스러운 아침 풍경. 매일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이지만, 이 소중한 순간들이 모여 그들이 꿈꿔왔던 ‘가족’의 모습을 완성해가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가슴 벅찬 감동과 감사함을 느꼈다.
민재를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고, 조금은 비장한 표정으로 교문 안으로 씩씩하게 걸어 들어가는 아들의 작은 뒷모습을 한참 동안 눈에 담은 후에야, 현우와 진수는 각자의 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우는 은퇴 후 얼마 전부터 새로 맡게 된 지역 유소년 유도 클럽의 코치로서, 진수는 언제나처럼 분주하고 긴박한 대학 병원의 외과 과장으로서. 그들의 하루는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현우가 도착한 유도장은 이미 하얀 도복을 입은 아이들의 활기찬 기합 소리로 가득했다.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매트 위에서 구르고, 뛰고, 서툰 몸짓으로 낙법 연습을 하고 있었다. 현우는 매트 한가운데 서서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자세를 꼼꼼하게 바로잡아주고, 때로는 직접 시범을 보이며 열정적으로 지도했다. 선수 시절, 오직 자신의 승리와 기록만을 위해 고독하게 매트 위에서 땀 흘렸던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책임감과 보람이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기술을 설명하고, 그들의 작은 성장 하나하나에 함께 기뻐하는 과정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주었다. 하지만 때로는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아이들이나, 결과에 조급해하는 학부모들 때문에 속상하고 지칠 때도 있었다. ‘역시… 가르친다는 건 직접 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하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눈을 반짝이며 “코치님! 저 방금 좀 잘한 것 같아요!” 하고 달려와 안길 때면,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따뜻한 무언가가 뭉클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자신이 찾아야 할 새로운 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조금씩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편, 진수는 병원에서 쉴 틈 없이 바쁜 오전을 보내고 있었다. 외과 과장으로 승진하면서 책임져야 할 환자들의 수와 처리해야 할 행정 업무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난 탓이었다. 아침부터 이어진 긴 수술 일정을 조율하고, 자신을 따르는 후배 의사들의 컨퍼런스를 주재하며 날카로운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밀려드는 외래 환자들을 진료하며 그들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다. 그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 한편에는 아침에 보았던 민재의 긴장한 얼굴과,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현우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다들 잘 하고 있겠지? 민재는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을까? 현우는 오늘 아이들 가르치면서 또 속상한 일은 없었으려나?’ 문득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다시 눈앞의 복잡한 환자 차트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지금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때였다. 점심시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잠시 숨을 돌리는 틈을 타 현우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민재 학교 잘 갔지? 당신도 오늘 코칭 파이팅! 저녁에 맛있는 거 먹자. 내가 살게.]
곧이어 현우에게서 답장이 왔다. 특유의 이모티콘과 함께.
[걱정 마셔, 김 과장님 (-■ㅂ■-) 우리 아들 완전 씩씩하게 들어갔어. 당신도 수술 잘 하고 환자들 잘 돌봐. 저녁 메뉴는 내가 정한다! 사랑해♡]
짧은 메시지였지만, 그 안에 담긴 익숙한 온기와 유쾌함이 진수의 지친 마음에 작은 위안과 웃음을 선사했다.
저녁 시간이 되어, 세 식구는 다시 따뜻한 불빛이 감도는 식탁에 마주 앉았다. 현우가 장난스럽게 예고했던 저녁 메뉴는 역시나 민재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두툼한 수제 돈가스와, 요즘 부쩍 피곤해하는 진수를 위해 현우가 특별히 신경 써서 끓인 전복 미역국이었다.
“그래서, 우리 첫 등교하신 이민재 씨! 오늘 학교 어땠어? 재밌었어? 친구는 사귀었고?”
현우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돈가스를 포크와 나이프로 먹기 좋게 잘라주며 물었다. 그의 손놀림은 유도 기술만큼이나 능숙했다.
“네! 옆자리에 앉은 친구랑 같이 그림 그렸어요! 이름은 강지훈이래요. 그리고 급식도 유치원보다 훨씬 맛있었어요! 치킨 나왔어요! 근데…”
민재는 잠시 포크를 내려놓고 우물쭈물하더니, 아까보다 조금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쉬는 시간에… 어떤 형아가 와서… 나보고 아빠가 왜 둘이냐고 물어봤어요.”
순간, 현우와 진수의 얼굴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스쳤다. 올 것이 왔구나.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현실에 두 사람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진수가 애써 태연한 척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최대한 차분했다.
“어… 그랬구나. 그래서… 우리 민재는 뭐라고 대답했어?”
“음…”
민재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오히려 조금은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우리 아빠들은 다른 아빠들보다 두 배로 멋있고 힘도 세다고 했어요! 그리고 나 사랑도 두 배로 많이 해준다고요!”
현우와 진수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과 함께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그들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현명하게 자라고 있었다.
“와, 우리 아들 대답 진짜 기가 막히게 멋진데? 이야, 최고다!”
현우가 민재의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칭찬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감탄과 뿌듯함이 가득했다.
“맞아! 아빠들은 우리 민재를 두 배, 아니 백 배, 천 배는 더 많이 사랑하니까! 그 형아한테 다음에 또 물어보면 그렇게 말해줘!”
“그리고 민재야,”
진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는 민재의 눈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에는 아주 아주 다양한 모습의 가족들이 있단다. 엄마 아빠가 있는 가족도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사는 가족도 있고, 엄마나 아빠 혼자 아이를 키우는 가족도 있고, 또 우리처럼 아빠가 둘인 가족도 있어. 어떤 모습이든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 그게 바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족인 거야. 알겠지? 그러니까 민재는 아무것도 걱정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우리 민재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니까.”
“네!”
민재는 그제야 완전히 안심한 듯, 다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돈가스를 향해 열심히 포크질을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은 거실 바닥에 둘러앉아 보드 게임을 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민재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집안 가득 울려 퍼졌다. 현우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꼈던 고충과 스트레스를 잠시 잊을 수 있었고, 진수 역시 하루 종일 그를 짓눌렀던 병원에서의 긴장감과 책임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각자의 하루는 분명 고단하고 녹록지 않았지만, 이렇게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 시간의 평범하고 따뜻한 온기가 그 모든 피로와 걱정을 눈 녹듯 사라지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꿈꾸고 지켜나가야 할 행복이었다.
밤이 깊어지고, 양치질을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민재가 꾸벅꾸벅 졸며 자신의 방으로 잠자리에 든 후, 현우와 진수는 오랜만에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조용한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현우는 자연스럽게 진수의 어깨에 팔을 둘렀고, 진수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에 편안하게 머리를 기댔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야경이 보석처럼 반짝였고, 집 안에는 낮의 활기참 대신 포근하고 아늑한 정적이 감돌았다.
“오늘 민재 대답하는 거 보고… 솔직히 좀 놀랐어. 걱정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씩씩하고 현명하더라고.”
현우가 나지막이, 그러나 감탄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괜히 우리만 너무 앞서서 걱정했나 봐.”
진수도 안도의 한숨과 함께 동의했다.
“하지만… 앞으로 학교생활하면서 민재가 저런 질문이나 시선을 더 자주 마주하게 될 텐데… 우리가 옆에서 더 든든하게 지지해주고, 혹시라도 상처받지 않도록 단단하게 키워야겠지.”
“응. 당연하지. 그러려면 우리가 더 강해져야 해. 민재가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아빠들이 되어줘야지.”
현우는 진수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책임감과 다짐이 서려 있었다.
“당신도 오늘 힘들었지? 과장 되고 나서 더 바빠지고 힘들어 보여. 얼굴이 반쪽이 다 됐어.”
현우는 진수의 뺨을 부드럽게 쓸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조금… 피곤하긴 하네.”
진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현우 앞에서만큼은 강한 척할 필요가 없었다.
“책임져야 할 일도 많아지고,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많아지고… 아직은 좀 버겁기도 해. 그래도… 내가 선택한 길이고, 또 그만큼 보람도 있으니까. 당신 코칭은 좀 어때? 아이들 가르치는 거, 생각보다 훨씬 더 에너지 많이 쏟아야 하지?”
“어휴, 말도 마.”
현우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마치 엄살처럼 들렸지만, 진심이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고 내 기록만 신경 쓰던 거랑은 정말 차원이 달라. 아이들 마음 얻는 게 제일 어렵더라. 그래도… 그 녀석들 눈 반짝거리면서 뭔가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할 때, 그리고 ‘코치님 덕분에 유도가 더 좋아졌어요!’ 이런 말 들으면… 뭔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게 확 올라와. 아직은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어.”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에 편안하게 기대어, 각자의 자리에서 겪고 있는 새로운 도전과 고민들, 그리고 그 안에서 느끼는 작은 보람과 성취들을 조심스럽게 나누었다. 서로에게 화려한 조언이나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서로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주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따뜻한 눈빛을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와 힘이 되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안식처이자, 세상 그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이제 뜨거운 열정보다는 잔잔하지만 깊은 강물처럼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적시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 참 잘하고 있는 거 맞겠지?”
진수가 문득 나지막이, 약간은 불안한 듯 물었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의사로서… 그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마음과 녹록지 않은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피로감일 터였다.
현우는 진수의 그런 마음을 읽었다는 듯, 그의 손을 찾아 자신의 크고 따뜻한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럼. 우리는 아주 잘하고 있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확신은 그 어떤 말보다 강력했다.
“완벽할 필요는 없어. 가끔 실수해도 괜찮고,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 중요한 건,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리고 민재랑 함께 지금 이 순간 행복하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는 거잖아.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거야, 진수야. 내 눈에는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아빠고, 최고의 의사고, 그리고…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하는 단 한 사람이야.”
현우의 진심 어린 말에 진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의 말처럼,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서로의 부족함을 탓하는 대신 따뜻하게 채워주고,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함께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들이 어렵게, 하지만 정성껏 만들어가고 있는 가족의 진짜 모습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늘 새로운 현우의 체온과 그의 심장 소리가 진수의 작은 불안을 조용히 잠재우고, 마음속 깊은 곳에 따뜻하고 단단한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새로운 계절은 그렇게 그들 가족에게도 찾아오고 있었다. 초등학생이 된 아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남편, 더 큰 책임감을 어깨에 짊어진 자신. 앞으로 또 어떤 예상치 못한 바람이 불어오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지 알 수 없었지만, 진수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자신의 곁에는 세상 누구보다 든든하고 사랑스러운 두 남자, 현우와 민재가 함께하고 있으니까. 그 익숙하면서도 늘 새로운 온기 속에서, 그는 다시 한번 내일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새로운 페이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빠! 내 가방 못 봤어요? 파란색 공룡 그려진 거! 오늘 꼭 메고 가야 하는데!”
조금은 상기된 얼굴의 민재가 양말을 꿰어 신으며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어느새 훌쩍 자라 교복 느낌의 단정한 남색 재킷과 바지를 입은 모습이 제법 늠름했지만, 똘망똘망한 눈동자에는 초등학교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과 함께 약간의 긴장이 뒤섞여 있었다.
“어허, 어제 아빠랑 같이 책가방 다 챙겨놓고선. 여기 식탁 위에 있네, 아들.”
주방에서 민재의 도시락 통에 정성껏 과일을 담던 진수가 식탁 위 파란색 가방을 가리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하얀 셔츠 위에 깔끔하게 넥타이까지 맨 그의 모습은 이제 완연한 외과 전문의의 관록이 묻어났지만, 민재를 향한 눈빛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다정한 아빠의 것이었다.
“자, 오늘 점심 도시락은 민재가 제일 좋아하는 유부초밥이랑 미니 돈가스. 물통이랑 필통도 잘 챙겨 넣고. 오늘 학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알았지?”
“네! 진수 아빠!”
민재는 씩씩하게 대답하며 현관으로 달려가 가방을 챙겨 메었다. 하지만 현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고 조금은 두려운 마음일 터였다.
“우리 아들, 첫날부터 너무 긴장한 거 아니야?”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현우가 수건만 걸친채 젖은 머리를 커다란 수건으로 털며 민재에게 다가왔다. 국가대표 시절의 날카롭고 예민했던 모습은 세월과 함께 부드러워졌지만, 넓은 어깨와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은 여전했다. 그는 민재 앞에 자연스럽게 쭈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학교 가면 재밌는 거 엄청 많아.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유치원보다 더 신기한 것도 배우고. 그리고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거나, 어려운 일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언제든지 아빠들한테 전화하는 거야. 알았지? 아빠들이 우리 민재 항상 뒤에서 응원하고 있다는 거 절대 잊지 마.”
현우 특유의 든든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 그리고 따뜻하면서도 장난기 어린 눈빛에 민재는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듯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네, 현우 아빠! 저 잘할 수 있어요!”
진수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거실 한편에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세 식구가 함께하는 정신없지만 사랑스러운 아침 풍경. 매일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이지만, 이 소중한 순간들이 모여 그들이 꿈꿔왔던 ‘가족’의 모습을 완성해가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가슴 벅찬 감동과 감사함을 느꼈다.
민재를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고, 조금은 비장한 표정으로 교문 안으로 씩씩하게 걸어 들어가는 아들의 작은 뒷모습을 한참 동안 눈에 담은 후에야, 현우와 진수는 각자의 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우는 은퇴 후 얼마 전부터 새로 맡게 된 지역 유소년 유도 클럽의 코치로서, 진수는 언제나처럼 분주하고 긴박한 대학 병원의 외과 과장으로서. 그들의 하루는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현우가 도착한 유도장은 이미 하얀 도복을 입은 아이들의 활기찬 기합 소리로 가득했다.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매트 위에서 구르고, 뛰고, 서툰 몸짓으로 낙법 연습을 하고 있었다. 현우는 매트 한가운데 서서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자세를 꼼꼼하게 바로잡아주고, 때로는 직접 시범을 보이며 열정적으로 지도했다. 선수 시절, 오직 자신의 승리와 기록만을 위해 고독하게 매트 위에서 땀 흘렸던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책임감과 보람이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기술을 설명하고, 그들의 작은 성장 하나하나에 함께 기뻐하는 과정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주었다. 하지만 때로는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아이들이나, 결과에 조급해하는 학부모들 때문에 속상하고 지칠 때도 있었다. ‘역시… 가르친다는 건 직접 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하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눈을 반짝이며 “코치님! 저 방금 좀 잘한 것 같아요!” 하고 달려와 안길 때면,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따뜻한 무언가가 뭉클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자신이 찾아야 할 새로운 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조금씩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편, 진수는 병원에서 쉴 틈 없이 바쁜 오전을 보내고 있었다. 외과 과장으로 승진하면서 책임져야 할 환자들의 수와 처리해야 할 행정 업무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난 탓이었다. 아침부터 이어진 긴 수술 일정을 조율하고, 자신을 따르는 후배 의사들의 컨퍼런스를 주재하며 날카로운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밀려드는 외래 환자들을 진료하며 그들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다. 그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 한편에는 아침에 보았던 민재의 긴장한 얼굴과,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현우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다들 잘 하고 있겠지? 민재는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을까? 현우는 오늘 아이들 가르치면서 또 속상한 일은 없었으려나?’ 문득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다시 눈앞의 복잡한 환자 차트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지금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때였다. 점심시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잠시 숨을 돌리는 틈을 타 현우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민재 학교 잘 갔지? 당신도 오늘 코칭 파이팅! 저녁에 맛있는 거 먹자. 내가 살게.]
곧이어 현우에게서 답장이 왔다. 특유의 이모티콘과 함께.
[걱정 마셔, 김 과장님 (-■ㅂ■-) 우리 아들 완전 씩씩하게 들어갔어. 당신도 수술 잘 하고 환자들 잘 돌봐. 저녁 메뉴는 내가 정한다! 사랑해♡]
짧은 메시지였지만, 그 안에 담긴 익숙한 온기와 유쾌함이 진수의 지친 마음에 작은 위안과 웃음을 선사했다.
저녁 시간이 되어, 세 식구는 다시 따뜻한 불빛이 감도는 식탁에 마주 앉았다. 현우가 장난스럽게 예고했던 저녁 메뉴는 역시나 민재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두툼한 수제 돈가스와, 요즘 부쩍 피곤해하는 진수를 위해 현우가 특별히 신경 써서 끓인 전복 미역국이었다.
“그래서, 우리 첫 등교하신 이민재 씨! 오늘 학교 어땠어? 재밌었어? 친구는 사귀었고?”
현우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돈가스를 포크와 나이프로 먹기 좋게 잘라주며 물었다. 그의 손놀림은 유도 기술만큼이나 능숙했다.
“네! 옆자리에 앉은 친구랑 같이 그림 그렸어요! 이름은 강지훈이래요. 그리고 급식도 유치원보다 훨씬 맛있었어요! 치킨 나왔어요! 근데…”
민재는 잠시 포크를 내려놓고 우물쭈물하더니, 아까보다 조금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쉬는 시간에… 어떤 형아가 와서… 나보고 아빠가 왜 둘이냐고 물어봤어요.”
순간, 현우와 진수의 얼굴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스쳤다. 올 것이 왔구나.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현실에 두 사람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진수가 애써 태연한 척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최대한 차분했다.
“어… 그랬구나. 그래서… 우리 민재는 뭐라고 대답했어?”
“음…”
민재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오히려 조금은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우리 아빠들은 다른 아빠들보다 두 배로 멋있고 힘도 세다고 했어요! 그리고 나 사랑도 두 배로 많이 해준다고요!”
현우와 진수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과 함께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그들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현명하게 자라고 있었다.
“와, 우리 아들 대답 진짜 기가 막히게 멋진데? 이야, 최고다!”
현우가 민재의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칭찬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감탄과 뿌듯함이 가득했다.
“맞아! 아빠들은 우리 민재를 두 배, 아니 백 배, 천 배는 더 많이 사랑하니까! 그 형아한테 다음에 또 물어보면 그렇게 말해줘!”
“그리고 민재야,”
진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는 민재의 눈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에는 아주 아주 다양한 모습의 가족들이 있단다. 엄마 아빠가 있는 가족도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사는 가족도 있고, 엄마나 아빠 혼자 아이를 키우는 가족도 있고, 또 우리처럼 아빠가 둘인 가족도 있어. 어떤 모습이든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 그게 바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족인 거야. 알겠지? 그러니까 민재는 아무것도 걱정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우리 민재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니까.”
“네!”
민재는 그제야 완전히 안심한 듯, 다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돈가스를 향해 열심히 포크질을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은 거실 바닥에 둘러앉아 보드 게임을 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민재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집안 가득 울려 퍼졌다. 현우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꼈던 고충과 스트레스를 잠시 잊을 수 있었고, 진수 역시 하루 종일 그를 짓눌렀던 병원에서의 긴장감과 책임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각자의 하루는 분명 고단하고 녹록지 않았지만, 이렇게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 시간의 평범하고 따뜻한 온기가 그 모든 피로와 걱정을 눈 녹듯 사라지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꿈꾸고 지켜나가야 할 행복이었다.
밤이 깊어지고, 양치질을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민재가 꾸벅꾸벅 졸며 자신의 방으로 잠자리에 든 후, 현우와 진수는 오랜만에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조용한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현우는 자연스럽게 진수의 어깨에 팔을 둘렀고, 진수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에 편안하게 머리를 기댔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야경이 보석처럼 반짝였고, 집 안에는 낮의 활기참 대신 포근하고 아늑한 정적이 감돌았다.
“오늘 민재 대답하는 거 보고… 솔직히 좀 놀랐어. 걱정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씩씩하고 현명하더라고.”
현우가 나지막이, 그러나 감탄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괜히 우리만 너무 앞서서 걱정했나 봐.”
진수도 안도의 한숨과 함께 동의했다.
“하지만… 앞으로 학교생활하면서 민재가 저런 질문이나 시선을 더 자주 마주하게 될 텐데… 우리가 옆에서 더 든든하게 지지해주고, 혹시라도 상처받지 않도록 단단하게 키워야겠지.”
“응. 당연하지. 그러려면 우리가 더 강해져야 해. 민재가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아빠들이 되어줘야지.”
현우는 진수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책임감과 다짐이 서려 있었다.
“당신도 오늘 힘들었지? 과장 되고 나서 더 바빠지고 힘들어 보여. 얼굴이 반쪽이 다 됐어.”
현우는 진수의 뺨을 부드럽게 쓸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조금… 피곤하긴 하네.”
진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현우 앞에서만큼은 강한 척할 필요가 없었다.
“책임져야 할 일도 많아지고,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많아지고… 아직은 좀 버겁기도 해. 그래도… 내가 선택한 길이고, 또 그만큼 보람도 있으니까. 당신 코칭은 좀 어때? 아이들 가르치는 거, 생각보다 훨씬 더 에너지 많이 쏟아야 하지?”
“어휴, 말도 마.”
현우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마치 엄살처럼 들렸지만, 진심이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고 내 기록만 신경 쓰던 거랑은 정말 차원이 달라. 아이들 마음 얻는 게 제일 어렵더라. 그래도… 그 녀석들 눈 반짝거리면서 뭔가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할 때, 그리고 ‘코치님 덕분에 유도가 더 좋아졌어요!’ 이런 말 들으면… 뭔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게 확 올라와. 아직은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어.”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에 편안하게 기대어, 각자의 자리에서 겪고 있는 새로운 도전과 고민들, 그리고 그 안에서 느끼는 작은 보람과 성취들을 조심스럽게 나누었다. 서로에게 화려한 조언이나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서로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주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따뜻한 눈빛을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와 힘이 되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안식처이자, 세상 그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이제 뜨거운 열정보다는 잔잔하지만 깊은 강물처럼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적시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 참 잘하고 있는 거 맞겠지?”
진수가 문득 나지막이, 약간은 불안한 듯 물었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의사로서… 그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마음과 녹록지 않은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피로감일 터였다.
현우는 진수의 그런 마음을 읽었다는 듯, 그의 손을 찾아 자신의 크고 따뜻한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럼. 우리는 아주 잘하고 있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확신은 그 어떤 말보다 강력했다.
“완벽할 필요는 없어. 가끔 실수해도 괜찮고,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 중요한 건,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리고 민재랑 함께 지금 이 순간 행복하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는 거잖아.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거야, 진수야. 내 눈에는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아빠고, 최고의 의사고, 그리고…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하는 단 한 사람이야.”
현우의 진심 어린 말에 진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의 말처럼,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서로의 부족함을 탓하는 대신 따뜻하게 채워주고,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함께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들이 어렵게, 하지만 정성껏 만들어가고 있는 가족의 진짜 모습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늘 새로운 현우의 체온과 그의 심장 소리가 진수의 작은 불안을 조용히 잠재우고, 마음속 깊은 곳에 따뜻하고 단단한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새로운 계절은 그렇게 그들 가족에게도 찾아오고 있었다. 초등학생이 된 아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남편, 더 큰 책임감을 어깨에 짊어진 자신. 앞으로 또 어떤 예상치 못한 바람이 불어오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지 알 수 없었지만, 진수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자신의 곁에는 세상 누구보다 든든하고 사랑스러운 두 남자, 현우와 민재가 함께하고 있으니까. 그 익숙하면서도 늘 새로운 온기 속에서, 그는 다시 한번 내일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새로운 페이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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