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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93 추천 : 0 글자수 : 6,267 자 2025-04-30
민재의 입학식이 남긴 설렘과 약간의 긴장감이 채 가시지 않은 며칠이 흘렀다. 노란색 스쿨버스를 향해 씩씩하게 손을 흔드는 아들의 뒷모습은 이제 조금씩 익숙한 아침 풍경이 되었고, 현우와 진수는 다시 각자의 치열한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가족이라는 따뜻한 울타리 안에서의 역할과 함께, 사회 속에서의 그들의 역할 또한 새로운 무게와 책임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현우가 운영하는 유소년 유도 클럽은 아이들의 건강한 땀과 웃음소리로 언제나 활기가 넘쳤지만, 그 이면에는 섬세한 감정 조율과 인내심이 필요한 순간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히 현우는 요즘 들어 부쩍 신경이 쓰이는 아이가 있었다. 이름은 시우. 기술 습득 능력은 또래 아이들보다 월등히 뛰어났지만, 이상하리만치 승부욕이 없고 작은 실수 하나에도 금방 주눅 들어 매트 구석으로 숨어버리곤 했다. 훈련 중 조금이라도 힘든 기색이 보이면 금세 포기하려 들었고, 친구들과의 자유 대련 시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겉도는 모습이 잦았다.
“시우야, 방금 업어치기 들어가는 타이밍 아주 좋았어! 거의 완벽했는데?”
현우가 곁에 다가가 칭찬하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근데 마지막에 던지려는 마음이 너무 앞서서 네 중심이 살짝 흔들렸어. 상대방 움직임을 조금만 더 느끼면서, 네 몸이랑 하나가 된다는 느낌으로 다시 해볼까? 할 수 있어.”
현우는 최대한 부드럽고 격려하는 말투로 지도했지만, 시우는 또다시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너무 다그치는 건가? 아니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하는 건가?’ 현우는 과거 오직 승리만을 향해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던 선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의 자신과 너무나 다른 시우의 모습 앞에서, 그는 기술 이전에 아이에게 자신감과 과정을 즐기는 법을 어떻게 가르쳐줘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날 훈련이 끝나고 탈의실 앞에서 망설이던 시우의 엄마가 조심스럽게 현우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코치님, 죄송하지만 잠시… 우리 시우가 요즘 유도 가는 걸 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요. 혹시…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저희 아이한테 유도가 너무 어려운 운동은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
걱정이 가득한 엄마의 목소리와 시우의 풀 죽은 얼굴이 겹쳐지며 현우의 마음 한구석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아닙니다, 어머님. 시우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재능도 정말 뛰어나고요. 아마 지금은 새로운 기술들을 익히는 과정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작은 어려움을 느끼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아이가 즐겁게 운동하면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제가 옆에서 더 세심하게 살피고 지도하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정중하게 대답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이의 성장을 바라는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압박감, 그리고 혹시나 자신이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주지 못하고 상처를 주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 매트 위에서 상대 선수와 온몸으로 부딪히며 승부를 가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책임감과 어려움이었다. 그는 아이들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진정한 지도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 길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한 싸움처럼 느껴졌다.
같은 시간, 하얀 마스크와 수술모 너머로 보이는 김진수의 눈빛은 극도의 집중력으로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대학 병원 외과 과장으로서, 그는 복잡하고 위중한 환자의 개복 수술을 몇 시간째 집도하는 중이었다. 차갑고 건조한 수술실의 공기 속에는 생명을 다루는 엄숙한 긴장감과 함께, 예리한 메스가 움직이는 소리, 모니터의 규칙적인 신호음, 그리고 의료진들의 낮고 빠른 대화만이 오갔다. 진수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과감하게 수술을 이끌어갔다. 그의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판단과 움직임 하나하나가 환자의 생사와 직결된다는 것을 알기에, 매 순간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지만, 그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오랜 수련과 경험으로 다져진 그의 실력과 냉철한 판단력은 함께하는 동료들에게도 큰 신뢰감을 주었다.
길고 길었던 수술이 마침내 성공적으로 끝나고, 녹초가 된 몸으로 수술실 문을 나섰을 때, 진수의 어깨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땀으로 축축해진 수술복을 벗고 잠시 의국 소파에 등을 기대앉아 뻑뻑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방금 끝난 수술 과정의 복기와 환자의 안정적인 회복을 위한 앞으로의 치료 계획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갔다. 문득 주머니 속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꺼내 보니, 현우에게서 온 짧은 메시지가 있었다.
[오늘 유독 말 안 듣는 꼬맹이 때문에 진땀 뺐네^^;; 당신은 수술 잘 끝났어? 힘들었지? 걱정돼서 연락했어. 민재 하교 시간 맞춰서 내가 데리러 갈게. 끝나고 연락 줘.]
짧은 글귀였지만, 그 안에 담긴 투박하면서도 진심 어린 걱정과 다정함이 며칠간 누적된 진수의 팽팽했던 신경과 피로를 조금이나마 느슨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방금 끝났어. 잘 끝났으니 걱정 마. 고생했네 당신도. 민재 잘 부탁해. 환자 보고 정리 좀 하고 나갈게. 저녁에 봐.]
답장을 보내며, 진수는 다시 책상 위에 산처럼 쌓인 다음 환자의 차트와 밀린 서류 더미를 향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의사의 길은 끝없는 책임감과의 싸움이었다.
그날 저녁, 식탁에는 현우가 민재를 데리고 오는 길에 사 온 따끈하고 바삭한 프라이드치킨과, 진수가 퇴근길에 집 앞 반찬 가게에서 사 온 신선한 나물 반찬들이 조화롭게 놓였다. 각자의 바쁜 일과 속에서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담긴 저녁상이었다. 민재는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특유의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신나게 재잘거렸다.
“아빠들! 오늘 미술 시간에 그린 내 그림, 교실 뒤에 붙여놨어요! 선생님이 친구들 앞에서 ‘민재 그림 정말 멋지다!’ 하고 칭찬해주셨어요! 그리고요, 옆 반에 지훈이가 있는데, 걔가 우리 집에 놀러 오고 싶대요! 이번 주 토요일에 오면 안 돼요? 네? 네?”
현우와 진수는 잠시 포크를 내려놓고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민재가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의 사회성이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건강한 신호였지만, 동시에 그들의 조금은 특별한 가족 형태가 외부의 시선, 특히 다른 부모의 시선에 좀 더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빛 교환은 길지 않았다. 망설임보다는 아이의 성장을 지지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당연히 와도 되지! 우리 아들 친구인데!”
현우가 먼저 환하게 웃으며 흔쾌히 대답했다.
“지훈이 오면 아빠가 특별히 맛있는 간식 만들어줄게. 지훈이는 뭐 좋아한대?”
“와! 진짜요? 신난다! 지훈이한테 당장 전화해서 물어볼래요!”
민재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내려와 폴짝폴짝 뛰었다.
진수도 따뜻한 미소로 민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지훈이랑 같이 놀 생각하니까 우리 민재 엄청 신났네. 대신 손님 오시는 거니까, 어지럽힌 장난감 정리도 잘 하고, 지훈이랑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놀아야 한다? 아빠들이랑 약속!”
“네! 약속할게요!”
민재는 새끼손가락까지 내밀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토요일 오후, 초인종 소리와 함께 민재의 친구 지훈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현관 앞에 섰다. 통통한 볼에 호기심 가득한 눈을 가진, 사진으로만 봤던 것보다 훨씬 더 귀엽고 똘망똘망한 아이였다. 처음에는 엄마 뒤에 숨어 수줍어하던 지훈이는, 민재가 자신의 공룡 피규어 컬렉션을 자랑하며 먼저 다가가자 금세 경계를 풀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들은 언제 어색했냐는 듯, 순식간에 레고 블록과 로봇, 공룡 피규어들을 잔뜩 늘어놓고 거실 바닥을 뒹굴며 시끌벅적하게 놀기 시작했다. 현우는 아이들을 위해 갓 구운 쿠키와 시원한 과일 주스를 내왔고, 진수는 옆에서 조용히 전공 서적을 읽는 척하며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한참 동안 숨바꼭질과 로봇 변신 놀이에 푹 빠져 있던 지훈이가 문득 거실 벽 한쪽에 걸린 세 식구의 활짝 웃는 가족사진을 발견하고는, 레고 블록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이 특유의 꾸밈없고 순수한 궁금증이 담긴 질문이었다.
“민재야, 이 사진에 있는 사람… 너랑… 또 아빠랑… 또 아빠야? 너희 집에는 아빠가 두 명이야?”
현우와 진수는 순간 숨을 죽이고 민재의 반응을 기다렸다. 지난번 학교에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조금은 덜 걱정했지만, 친구 앞에서는 또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민재는 블록을 조립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사진을 한번 쓱 쳐다보더니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리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응! 우리 아빠들은 다른 집 아빠들보다 힘도 두 배로 세고, 나랑 놀아주는 것도 두 배로 잘해줘! 엄청 좋지?”
지난번 학교에서의 대답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 이제 이 블록으로 우주선을 만들 차례야!”
하며 다시 놀이에 집중했다.
지훈이는 잠시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현우와 진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우와! 진짜? 그럼 너 완전 좋겠다! 부럽다!”
하고는 금세 민재가 만드는 우주선에 관심을 보였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복잡한 편견이나 선입견보다 훨씬 더 단순하고 명쾌했다. 현우와 진수는 서로를 보며 안도의 미소와 함께, 아이의 성장에 대한 깊은 감사를 교환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지훈이를 데리러 온 엄마가 현관 앞에 섰다. 밝고 상냥한 인상을 가진 젊은 여성이었다. 지훈이 엄마는 집안을 둘러보며
“어머, 집이 참 예쁘네요. 정리도 잘 되어 있고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지훈이 엄마예요. 오늘 저희 애가 너무 시끄럽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민재 덕분에 정말 즐겁게 잘 놀았다고 하더라고요.”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민재 친구가 와줘서 더 즐거웠는걸요. 둘이 아주 죽이 잘 맞던데요.”
진수가 부드럽게 웃으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네, 덕분에 저희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놀러 오세요.”
현우도 옆에서 미소로 거들었다.
지훈 엄마는 현우와 진수를 번갈아 보며 잠시 시선을 멈추는 듯했지만, 어떤 어색함이나 불편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네, 감사합니다. 민재도 참 밝고 씩씩하게 잘 자란 것 같아요. 저희 집에도 다음에 꼭 한번 놀러 오세요. 제가 맛있는 거 해드릴게요.”
“네,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짧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웃 간의 인사였지만, 그 안에는 어떤 편견이나 곱지 않은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아이 친구의 부모로서 나누는 자연스럽고 따뜻한 대화였다. 문이 닫히고, 현우와 진수는 괜히 서로 마주 보며 멋쩍게 웃었다. 그들이 지레짐작하며 걱정했던 것보다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하고 열려있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신나게 뛰어논 덕분에 일찍 잠든 민재의 방에 들어간 현우와 진수는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낮 동안의 소란스러움은 온데간데없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 영락없는 작은 천사였다. 현우는 민재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흘러내린 이불을 목까지 다시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우리 아들, 오늘 친구 앞에서도 정말 씩씩하게 대답 잘했지?”
현우가 방문을 닫고 나오며 속삭이듯 말했다.
“응. 정말… 얼마나 대견하고 예쁘던지. 괜히 나 혼자 마음 졸였나 봐.”
진수도 조용히 동의하며 현우의 팔짱을 꼈다.
거실 창가에 나란히 서서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각자의 매트 위에서, 혹은 수술대 위에서, 그리고 때로는 부모라는 이름 아래에서 치열하고 고단한 하루를 보냈지만, 결국 그들이 돌아와 안식하고 기댈 곳은 바로 이 곳, 서로와 민재가 함께 만들어가는 따뜻하고 평범한 이 집이었다.
“힘든 일도 많고, 앞으로 더 어려운 순간들도 찾아오겠지만… 그래도 우리 이렇게 서로 마주 보고, 손잡고 함께 있으니까… 다 괜찮을 거야. 앞으로도. 그렇지?”
진수가 현우의 손을 잡으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과 다짐에 가까운 울림이 있었다.
“당연하지.”
현우는 진수의 손을 힘주어 마주 잡았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강하고 멋진 팀이니까. 그리고 우리에게는 저렇게 예쁘고 씩씩한 아들도 있잖아. 우리가 지켜야 할 세상이 이렇게나 큰데, 우리가 약해질 수 있겠어?”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여전히 깊고 변함없는 사랑과 함께,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지라도 함께 손잡고 헤쳐나가겠다는 굳건하고 단단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새로운 계절 속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온기가 되어주며 또 다른 하루를, 또 다른 미래를 함께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고 있었다. 그들의 가족 이야기는 이제 막, 더욱 풍성하고 깊은 다음 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현우가 운영하는 유소년 유도 클럽은 아이들의 건강한 땀과 웃음소리로 언제나 활기가 넘쳤지만, 그 이면에는 섬세한 감정 조율과 인내심이 필요한 순간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히 현우는 요즘 들어 부쩍 신경이 쓰이는 아이가 있었다. 이름은 시우. 기술 습득 능력은 또래 아이들보다 월등히 뛰어났지만, 이상하리만치 승부욕이 없고 작은 실수 하나에도 금방 주눅 들어 매트 구석으로 숨어버리곤 했다. 훈련 중 조금이라도 힘든 기색이 보이면 금세 포기하려 들었고, 친구들과의 자유 대련 시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겉도는 모습이 잦았다.
“시우야, 방금 업어치기 들어가는 타이밍 아주 좋았어! 거의 완벽했는데?”
현우가 곁에 다가가 칭찬하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근데 마지막에 던지려는 마음이 너무 앞서서 네 중심이 살짝 흔들렸어. 상대방 움직임을 조금만 더 느끼면서, 네 몸이랑 하나가 된다는 느낌으로 다시 해볼까? 할 수 있어.”
현우는 최대한 부드럽고 격려하는 말투로 지도했지만, 시우는 또다시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너무 다그치는 건가? 아니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하는 건가?’ 현우는 과거 오직 승리만을 향해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던 선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의 자신과 너무나 다른 시우의 모습 앞에서, 그는 기술 이전에 아이에게 자신감과 과정을 즐기는 법을 어떻게 가르쳐줘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날 훈련이 끝나고 탈의실 앞에서 망설이던 시우의 엄마가 조심스럽게 현우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코치님, 죄송하지만 잠시… 우리 시우가 요즘 유도 가는 걸 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요. 혹시…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저희 아이한테 유도가 너무 어려운 운동은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
걱정이 가득한 엄마의 목소리와 시우의 풀 죽은 얼굴이 겹쳐지며 현우의 마음 한구석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아닙니다, 어머님. 시우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재능도 정말 뛰어나고요. 아마 지금은 새로운 기술들을 익히는 과정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작은 어려움을 느끼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아이가 즐겁게 운동하면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제가 옆에서 더 세심하게 살피고 지도하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정중하게 대답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이의 성장을 바라는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압박감, 그리고 혹시나 자신이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주지 못하고 상처를 주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 매트 위에서 상대 선수와 온몸으로 부딪히며 승부를 가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책임감과 어려움이었다. 그는 아이들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진정한 지도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 길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한 싸움처럼 느껴졌다.
같은 시간, 하얀 마스크와 수술모 너머로 보이는 김진수의 눈빛은 극도의 집중력으로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대학 병원 외과 과장으로서, 그는 복잡하고 위중한 환자의 개복 수술을 몇 시간째 집도하는 중이었다. 차갑고 건조한 수술실의 공기 속에는 생명을 다루는 엄숙한 긴장감과 함께, 예리한 메스가 움직이는 소리, 모니터의 규칙적인 신호음, 그리고 의료진들의 낮고 빠른 대화만이 오갔다. 진수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과감하게 수술을 이끌어갔다. 그의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판단과 움직임 하나하나가 환자의 생사와 직결된다는 것을 알기에, 매 순간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지만, 그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오랜 수련과 경험으로 다져진 그의 실력과 냉철한 판단력은 함께하는 동료들에게도 큰 신뢰감을 주었다.
길고 길었던 수술이 마침내 성공적으로 끝나고, 녹초가 된 몸으로 수술실 문을 나섰을 때, 진수의 어깨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땀으로 축축해진 수술복을 벗고 잠시 의국 소파에 등을 기대앉아 뻑뻑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방금 끝난 수술 과정의 복기와 환자의 안정적인 회복을 위한 앞으로의 치료 계획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갔다. 문득 주머니 속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꺼내 보니, 현우에게서 온 짧은 메시지가 있었다.
[오늘 유독 말 안 듣는 꼬맹이 때문에 진땀 뺐네^^;; 당신은 수술 잘 끝났어? 힘들었지? 걱정돼서 연락했어. 민재 하교 시간 맞춰서 내가 데리러 갈게. 끝나고 연락 줘.]
짧은 글귀였지만, 그 안에 담긴 투박하면서도 진심 어린 걱정과 다정함이 며칠간 누적된 진수의 팽팽했던 신경과 피로를 조금이나마 느슨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방금 끝났어. 잘 끝났으니 걱정 마. 고생했네 당신도. 민재 잘 부탁해. 환자 보고 정리 좀 하고 나갈게. 저녁에 봐.]
답장을 보내며, 진수는 다시 책상 위에 산처럼 쌓인 다음 환자의 차트와 밀린 서류 더미를 향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의사의 길은 끝없는 책임감과의 싸움이었다.
그날 저녁, 식탁에는 현우가 민재를 데리고 오는 길에 사 온 따끈하고 바삭한 프라이드치킨과, 진수가 퇴근길에 집 앞 반찬 가게에서 사 온 신선한 나물 반찬들이 조화롭게 놓였다. 각자의 바쁜 일과 속에서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담긴 저녁상이었다. 민재는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특유의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신나게 재잘거렸다.
“아빠들! 오늘 미술 시간에 그린 내 그림, 교실 뒤에 붙여놨어요! 선생님이 친구들 앞에서 ‘민재 그림 정말 멋지다!’ 하고 칭찬해주셨어요! 그리고요, 옆 반에 지훈이가 있는데, 걔가 우리 집에 놀러 오고 싶대요! 이번 주 토요일에 오면 안 돼요? 네? 네?”
현우와 진수는 잠시 포크를 내려놓고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민재가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의 사회성이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건강한 신호였지만, 동시에 그들의 조금은 특별한 가족 형태가 외부의 시선, 특히 다른 부모의 시선에 좀 더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빛 교환은 길지 않았다. 망설임보다는 아이의 성장을 지지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당연히 와도 되지! 우리 아들 친구인데!”
현우가 먼저 환하게 웃으며 흔쾌히 대답했다.
“지훈이 오면 아빠가 특별히 맛있는 간식 만들어줄게. 지훈이는 뭐 좋아한대?”
“와! 진짜요? 신난다! 지훈이한테 당장 전화해서 물어볼래요!”
민재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내려와 폴짝폴짝 뛰었다.
진수도 따뜻한 미소로 민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지훈이랑 같이 놀 생각하니까 우리 민재 엄청 신났네. 대신 손님 오시는 거니까, 어지럽힌 장난감 정리도 잘 하고, 지훈이랑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놀아야 한다? 아빠들이랑 약속!”
“네! 약속할게요!”
민재는 새끼손가락까지 내밀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토요일 오후, 초인종 소리와 함께 민재의 친구 지훈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현관 앞에 섰다. 통통한 볼에 호기심 가득한 눈을 가진, 사진으로만 봤던 것보다 훨씬 더 귀엽고 똘망똘망한 아이였다. 처음에는 엄마 뒤에 숨어 수줍어하던 지훈이는, 민재가 자신의 공룡 피규어 컬렉션을 자랑하며 먼저 다가가자 금세 경계를 풀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들은 언제 어색했냐는 듯, 순식간에 레고 블록과 로봇, 공룡 피규어들을 잔뜩 늘어놓고 거실 바닥을 뒹굴며 시끌벅적하게 놀기 시작했다. 현우는 아이들을 위해 갓 구운 쿠키와 시원한 과일 주스를 내왔고, 진수는 옆에서 조용히 전공 서적을 읽는 척하며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한참 동안 숨바꼭질과 로봇 변신 놀이에 푹 빠져 있던 지훈이가 문득 거실 벽 한쪽에 걸린 세 식구의 활짝 웃는 가족사진을 발견하고는, 레고 블록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이 특유의 꾸밈없고 순수한 궁금증이 담긴 질문이었다.
“민재야, 이 사진에 있는 사람… 너랑… 또 아빠랑… 또 아빠야? 너희 집에는 아빠가 두 명이야?”
현우와 진수는 순간 숨을 죽이고 민재의 반응을 기다렸다. 지난번 학교에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조금은 덜 걱정했지만, 친구 앞에서는 또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민재는 블록을 조립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사진을 한번 쓱 쳐다보더니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리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응! 우리 아빠들은 다른 집 아빠들보다 힘도 두 배로 세고, 나랑 놀아주는 것도 두 배로 잘해줘! 엄청 좋지?”
지난번 학교에서의 대답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 이제 이 블록으로 우주선을 만들 차례야!”
하며 다시 놀이에 집중했다.
지훈이는 잠시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현우와 진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우와! 진짜? 그럼 너 완전 좋겠다! 부럽다!”
하고는 금세 민재가 만드는 우주선에 관심을 보였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복잡한 편견이나 선입견보다 훨씬 더 단순하고 명쾌했다. 현우와 진수는 서로를 보며 안도의 미소와 함께, 아이의 성장에 대한 깊은 감사를 교환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지훈이를 데리러 온 엄마가 현관 앞에 섰다. 밝고 상냥한 인상을 가진 젊은 여성이었다. 지훈이 엄마는 집안을 둘러보며
“어머, 집이 참 예쁘네요. 정리도 잘 되어 있고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지훈이 엄마예요. 오늘 저희 애가 너무 시끄럽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민재 덕분에 정말 즐겁게 잘 놀았다고 하더라고요.”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민재 친구가 와줘서 더 즐거웠는걸요. 둘이 아주 죽이 잘 맞던데요.”
진수가 부드럽게 웃으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네, 덕분에 저희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놀러 오세요.”
현우도 옆에서 미소로 거들었다.
지훈 엄마는 현우와 진수를 번갈아 보며 잠시 시선을 멈추는 듯했지만, 어떤 어색함이나 불편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네, 감사합니다. 민재도 참 밝고 씩씩하게 잘 자란 것 같아요. 저희 집에도 다음에 꼭 한번 놀러 오세요. 제가 맛있는 거 해드릴게요.”
“네,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짧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웃 간의 인사였지만, 그 안에는 어떤 편견이나 곱지 않은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아이 친구의 부모로서 나누는 자연스럽고 따뜻한 대화였다. 문이 닫히고, 현우와 진수는 괜히 서로 마주 보며 멋쩍게 웃었다. 그들이 지레짐작하며 걱정했던 것보다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하고 열려있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신나게 뛰어논 덕분에 일찍 잠든 민재의 방에 들어간 현우와 진수는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낮 동안의 소란스러움은 온데간데없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 영락없는 작은 천사였다. 현우는 민재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흘러내린 이불을 목까지 다시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우리 아들, 오늘 친구 앞에서도 정말 씩씩하게 대답 잘했지?”
현우가 방문을 닫고 나오며 속삭이듯 말했다.
“응. 정말… 얼마나 대견하고 예쁘던지. 괜히 나 혼자 마음 졸였나 봐.”
진수도 조용히 동의하며 현우의 팔짱을 꼈다.
거실 창가에 나란히 서서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각자의 매트 위에서, 혹은 수술대 위에서, 그리고 때로는 부모라는 이름 아래에서 치열하고 고단한 하루를 보냈지만, 결국 그들이 돌아와 안식하고 기댈 곳은 바로 이 곳, 서로와 민재가 함께 만들어가는 따뜻하고 평범한 이 집이었다.
“힘든 일도 많고, 앞으로 더 어려운 순간들도 찾아오겠지만… 그래도 우리 이렇게 서로 마주 보고, 손잡고 함께 있으니까… 다 괜찮을 거야. 앞으로도. 그렇지?”
진수가 현우의 손을 잡으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과 다짐에 가까운 울림이 있었다.
“당연하지.”
현우는 진수의 손을 힘주어 마주 잡았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강하고 멋진 팀이니까. 그리고 우리에게는 저렇게 예쁘고 씩씩한 아들도 있잖아. 우리가 지켜야 할 세상이 이렇게나 큰데, 우리가 약해질 수 있겠어?”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여전히 깊고 변함없는 사랑과 함께,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지라도 함께 손잡고 헤쳐나가겠다는 굳건하고 단단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새로운 계절 속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온기가 되어주며 또 다른 하루를, 또 다른 미래를 함께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고 있었다. 그들의 가족 이야기는 이제 막, 더욱 풍성하고 깊은 다음 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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