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의 입시 슬럼프라는 예상치 못한 겨울 추위를 함께 이겨낸 후, 현우와 진수, 그리고 민재의 집에는 이전보다 더 깊은 이해와 따뜻한 배려가 깃든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세 사람은 지난겨울의 경험을 통해 서로에게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고, 각자의 어려움을 나누며 함께 해결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면서도, 함께하는 순간에는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하려 노력했고, 그 노력은 집안의 공기를 눈에 띄게 부드럽고 편안하게 만들었다.

민재는 두 아빠의 든든한 지지와 격려 속에서 입시 스트레스를 조금씩 극복해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밤늦게까지 그림을 그리고 고민하는 날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혼자 끙끙 앓기보다 아빠들에게 먼저 다가가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거나 조언을 구했다.

“아빠, 이 부분 명암 처리가 계속 어색한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포트폴리오 주제를 뭘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요.”

와 같은 질문들은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현우는 여전히 그림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아들의 고민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그의 입장에서 공감하려 애썼다. 때로는 유도에서의 경험을 비유하며

“슬럼프일수록 기본기가 중요해. 잠시 복잡한 생각은 접어두고, 가장 기본적인 선 긋기나 형태 잡는 연습부터 다시 해보는 건 어때?”

와 같은 서툴지만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그의 투박하지만 든든한 응원이 민재에게는 의외의 위로와 용기가 되어주었다.

진수는 의학적인 지식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날카로운 관찰력과 분석력으로 민재의 그림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제시해주곤 했다.

“민재야, 이 그림은 전체적인 구성은 좋은데, 인물의 시선 처리가 조금 아쉬운 것 같아. 보는 사람의 시선을 어디로 이끌고 싶은지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해보면 어떨까?”

와 같은 그의 조언은 민재가 자신의 작품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때로는 함께 미술관에 가서 거장들의 작품을 감상하며 영감을 얻도록 이끌어주기도 했다.

두 아빠의 서로 다른 방식의 지지와 격려 속에서 민재는 다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다. 결과에 대한 부담감에서 벗어나,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를 즐기려 노력했고, 그러자 신기하게도 슬럼프는 자연스럽게 극복되고 있었다. 아이의 스케치북에는 다시 밝고 희망적인 색채들이 채워지기 시작했고, 표정 역시 눈에 띄게 밝아졌다.

현우와 진수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안정감을 찾아가고 있었다. 현우는 클럽 운영 방식을 개선하고 지역 사회와의 연계를 강화하면서 재정적인 안정과 함께 지도자로서의 보람을 더욱 크게 느끼고 있었다. 진수는 병원에서의 과중한 업무 속에서도 효율적인 시간 관리와 후배들과의 협력을 통해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찾아가려 노력했고, 덕분에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도 조금씩 늘릴 수 있었다.

따스한 봄 햇살이 가득했던 어느 주말 오후, 세 사람은 오랜만에 함께 집 근처 공원으로 피크닉을 나섰다.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진수가 정성껏 싸온 샌드위치와 과일을 나누어 먹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민재는 한쪽에 작은 이젤을 펼쳐놓고 봄 풍경을 스케치하기 시작했고, 현우와 진수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재, 요즘 정말 많이 밝아졌지? 그림 그리는 모습도 훨씬 편안해 보이고.”

현우가 말했다.

“그러게. 저렇게 집중해서 그림 그리는 모습 보니까… 마음이 놓인다.”

진수도 동의했다.

“우리가 너무 조급했던 건지도 몰라. 아이가 스스로 이겨낼 시간을 충분히 주지 못하고.”

“맞아. 부모 역할이라는 게…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아. 끝없이 배우고 노력해야 하는…”

현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함께 고민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민재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거라고 믿어.”

진수는 현우의 손을 잡으며 따뜻하게 말했다.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서로에게 솔직하고, 함께 성장해나가려는 모습. 그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민재는 어느새 스케치를 마치고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돗자리로 다가와 두 아빠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빠들, 제 스케치 한번 보실래요?”

민재는 조금 쑥스러운 듯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스케치북에는 햇살 아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두 남자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간결한 선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현우와 진수는 그림 속 주인공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와… 민재야…”

현우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감탄했다.

“……정말… 멋진 그림이다, 아들.”

진수의 목소리도 감동으로 살짝 젖어 있었다. 그림 속에는 어떤 화려한 기교도 없었지만, 아이가 바라보는 아빠들의 모습,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애정과 신뢰가 너무나 깊고 진하게 느껴졌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풍경이에요.”

민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우 아빠랑 진수 아빠가… 저렇게 같이 계시는 모습이요. 세상에서 제일 든든하고… 따뜻해요.”

아이의 솔직한 고백에 현우와 진수는 다시 한번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그들이 민재에게 주었던 사랑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사랑을 아이로부터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고, 우리 아들…”

현우는 민재를 꼭 끌어안았다.

“아빠들도 우리 민재가 있어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이 그림… 아빠들한테 선물로 줄 수 있어? 우리 집 거실에 걸어놓고 매일 보고 싶다.”

“네! 당연하죠!”

민재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민재가 그린 ‘아빠들의 뒷모습’ 스케치는 거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렸다. 액자 속 그림은 특별한 말없이도 세 식구에게 늘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건네는 듯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더욱 따뜻해졌고, 집안에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봄날의 따스한 햇살처럼, 그들의 관계는 다시 한번 부드럽고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입시라는 현실적인 과제는 여전히 민재 앞에 놓여 있었지만, 이제 아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든든한 두 아빠의 변함없는 지지와 사랑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있었기에, 그는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터였다. 현우와 진수 역시 서로의 존재와 민재의 성장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더욱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그려나가는 봄날의 스케치는, 그 어떤 명화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