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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21 추천 : 0 글자수 : 5,300 자 2025-05-23
첫날 밤의 어색하고도 묘한 긴장감은 다음 날 아침에도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성민은 밤새 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을 설쳤다. 바로 옆 침대에서 들려오는 낯선 사람의 숨소리, 그것도 어젯밤 반나체로 돌아다니던 그 준호 형의 숨소리가 영 신경 쓰여 깊이 잠들지 못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지만, 몸에 밴 습관처럼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옆 침대를 슬쩍 보니, 준호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긴 채 세상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젯밤의 장난기 넘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잠든 얼굴은 의외로 순하고 어려 보였다. 성민은 저도 모르게 잠시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뭘 보고 있는 거야.
성민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살금살금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는 동안에도 신경은 온통 방 안에 있는 준호에게 쏠려 있었다. 혹시나 내가 내는 소리에 깨지는 않을까, 조심 또 조심하며 씻고 나왔지만 준호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자고 있었다. 성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옷장에서 가장 무난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첫 수업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남아 있었지만, 이 어색한 공간에 단둘이 깨어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책가방을 챙겨 들고,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새벽 공기가 아직 서늘한 캠퍼스를 향해 걸어가면서, 그는 어쩐지 도망치듯 집을 나선 기분이 들어 쓴웃음을 지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성민은 다시 자취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침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준호는 이미 일어나 씻었는지, 뽀송뽀송한 얼굴로 컴퓨터 앞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침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방 안에는 은은한 커피 향이 감돌았다.
"어, 성민아. 수업 끝났어? 배고프겠다. 나 방금 밥했는데, 같이 먹을래?"
준호는 헤드셋을 벗으며 성민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대충 때우려던 점심이었는데, 누군가와 함께 먹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작은 주방에서 준호는 능숙한 솜씨로 김치볶음밥을 만들었고, 성민은 옆에서 어색하게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거나, 그의 지시에 따라 수저를 놓거나 반찬을 꺼내는 등 소소한 도움을 주었다. 함께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는 동안, 준호는 어젯밤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성민에게 말을 걸었다.
"첫 수업은 어땠어? 들을 만했어? 우리 과 교수님들 중에 좀… 특이한 분들 많거든. 혹시 이상한 사람 없었고?"
"아… 네. 괜찮았어요. 교수님도 친절하셨고…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려고요."
"그래, 그래.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물어봐.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학교생활 짬밥은 좀 있잖아? 족보 같은 거 필요하면 말하고."
준호는 숟가락 가득 김치볶음밥을 떠먹으며 씩 웃었다. 그의 격의 없는 태도에 성민의 긴장도 조금씩 누그러지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성민은 준호를 편하게 대하기 어려웠다. 너무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았다. 자신은 늘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게 살아왔는데, 준호는 어딜 가나 주목받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그런 부류의 사람처럼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는 성민이 하겠다고 나섰다. 준호는 "아냐, 내가 할게"라고 말렸지만, 성민은 괜찮다며 고집을 부렸다. 좁은 싱크대 앞에서 서툰 솜씨로 그릇을 닦는 성민의 등 뒤로, 어느새 다가온 준호가 물었다.
"근데 성민아, 너 되게… 깔끔한 편인가 보다? 아침에 보니까 네 침대 완전 칼각으로 정리돼 있던데?"
"아… 네. 좀… 그런 편이에요. 어지러운 걸 잘 못 봐서…"
"흐음… 그럼 나 때문에 좀 피곤하겠는데? 난 좀… 자유로운 영혼이라. 하하."
준호는 멋쩍게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말대로 그의 책상 주변이나 옷장 안은 성민의 공간과는 달리 어딘가 자유분방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성민은 애써 괜찮다고 말했지만, 앞으로 함께 생활하면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서로 다른 생활 방식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오후에는 각자 수업을 듣고,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다시 방에서 마주쳤다. 성민은 과제를 하기 위해 책상에 앉았고, 준호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기타를 튕기며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처음에는 과제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귓가에 감미롭게 들려오는 준호의 노랫소리와 기타 선율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흘깃 쳐다본 준호는 눈을 감고 노래에 몰입한 모습이었는데, 평소의 장난기 넘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진지함과 감성이 느껴졌다. 의외의 모습이었다. 저렇게 노래도 잘 부르는 사람이었구나.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잠시 그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왜, 내 노래 별로야?"
갑자기 노래를 멈춘 준호가 눈을 뜨고 성민을 보며 물었다. 자신의 시선을 들켰다는 생각에 성민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좋아요! 진짜 잘 부르시네요…"
"푸흐, 뭘 그렇게 놀라. 그냥 불러본 거야. 혹시 시끄러웠으면 말하지 그랬어."
"아니에요! 전혀요! 계속… 하셔도 돼요."
성민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준호는 그런 성민의 반응이 또다시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기타를 내려놓았다.
"됐어. 나도 이제 슬슬 배고프네. 저녁은 뭐 먹을까? 오늘은 내가 진짜 맛있는 파스타 해줄게. 기대해도 좋아."
준호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성민은 얼떨결에 그의 뒤를 따랐다. 요리하는 준호의 뒷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능숙하고 자연스러웠다. 재료를 다듬는 손길도 거침없었고, 프라이팬을 다루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았다. 자취 경력이 꽤 되는 모양이었다. 성민은 요리에는 영 소질이 없었기에, 뚝딱뚝딱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준호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준호가 만들어준 토마토 파스타는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레스토랑에서 파는 것 못지않았다. 성민은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을 먹었고, 준호는 그런 성민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는 어제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워졌다. 성민은 준호가 생각보다 세심하고 남을 잘 챙기는 면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마냥 밝고 가벼워 보이지만, 은근히 속정이 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식사 후, 준호는 갑자기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며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성민은 혼자 남아 설거지를 하고 과제를 마저 했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준호가 돌아왔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 두 명과 함께였다. 준호는 성민에게 친구들이라며 소개했고, 친구들은 성민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야, 박지훈! 네 룸메 완전 순둥순둥하게 생겼다? 너랑 완전 반대네!"
준호의 친구 중 한 명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성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준호는 친구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야, 조용히 해. 성민이 놀라겠다. 미안, 성민아. 얘네가 좀 짓궂어서 그래. 그냥 잠깐 뭐 전해주러 온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친구들은 잠시 방 안을 둘러보며 준호와 몇 마디 농담을 주고받더니 금방 돌아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성민은 친구들과 있을 때의 준호가 자신을 대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훨씬 더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모습. 어쩌면 저 모습이 그의 본모습에 더 가까울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보여주는 친절함과 배려는, 그저 새로 온 어리숙한 후배를 대하는 선배로서의 태도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성민은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샤워기 옆 선반에 놓여 있어야 할 자신의 샴푸와 바디워시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던 성민은, 세면대 위에 놓인 준호의 세면도구 바구니 안에서 자신의 것과 똑같은 브랜드의, 하지만 거의 새것인 샴푸와 바디워시를 발견했다. 순간 성민은 아찔해졌다. 아마도 준호가 자신의 것을 모르고 쓴 모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성민 자신이 쓰는 제품은 피부가 예민해서 특별히 순한 성분으로 골라 쓰는, 제법 가격대가 있는 제품이라는 점이었다.
성민은 잠시 망설였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괜히 말했다가 옹졸해 보이지는 않을까. 하지만 앞으로 계속 같이 살아야 하는데, 이런 일이 반복되면 곤란했다. 그는 어렵게 용기를 내어 욕실 문을 빼꼼 열고 방 안에 있는 준호를 불렀다.
"저… 형."
"어?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던 준호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제 샴푸랑 바디워시… 쓰셨어요?"
성민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목소리는 준호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이마를 탁 쳤다.
"아! 맞다! 미안, 미안! 내 거 다 떨어졌길래 급한 대로 네 거 있는 줄 모르고 새 거 그냥 뜯어서 썼네. 어쩐지 향이 좀 다르더라니. 정말 미안하다, 성민아. 내가 내일 바로 똑같은 걸로 사다 놓을게."
준호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사과했다. 그의 솔직한 사과에 성민은 오히려 자신이 너무 속 좁게 군 것 같아 민망해졌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뭐. 그냥… 다음에 쓰실 일 있으면 저한테 먼저 물어봐 주시면…"
"당연하지! 아, 진짜 미안하네. 내가 원래 이렇게 눈치가 없다. 내일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그걸로 퉁치자, 응?"
준호는 윙크를 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의 능청스러운 사과에 성민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색했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성민은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옆 침대에서는 준호가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든 듯했다. 성민은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낯설고 어색했던 첫 만남, 함께 먹었던 저녁 식사, 준호의 노랫소리, 그리고 방금 전의 작은 해프닝까지. 준호라는 사람은 알면 알수록 단순하지 않은, 여러 가지 매력을 가진 사람인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에게 조금씩 익숙해지고, 어쩌면… 조금씩 다른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아까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의 몸에서 나던 비누 향, 아니 자신이 쓰는 바디워시 향기가 떠올랐다. 자신과 같은 향기를 풍기던 그의 모습이 왜인지 모르게 낯설면서도 야릇하게 느껴졌다. 성민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밤이었다. 좁은 방 안의 온도는, 이제 막 서로에게 낯선 떨림을 느끼기 시작한 두 사람의 체온처럼, 미지근하지만 분명하게 데워지고 있었다.
성민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살금살금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는 동안에도 신경은 온통 방 안에 있는 준호에게 쏠려 있었다. 혹시나 내가 내는 소리에 깨지는 않을까, 조심 또 조심하며 씻고 나왔지만 준호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자고 있었다. 성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옷장에서 가장 무난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첫 수업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남아 있었지만, 이 어색한 공간에 단둘이 깨어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책가방을 챙겨 들고,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새벽 공기가 아직 서늘한 캠퍼스를 향해 걸어가면서, 그는 어쩐지 도망치듯 집을 나선 기분이 들어 쓴웃음을 지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성민은 다시 자취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침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준호는 이미 일어나 씻었는지, 뽀송뽀송한 얼굴로 컴퓨터 앞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침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방 안에는 은은한 커피 향이 감돌았다.
"어, 성민아. 수업 끝났어? 배고프겠다. 나 방금 밥했는데, 같이 먹을래?"
준호는 헤드셋을 벗으며 성민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대충 때우려던 점심이었는데, 누군가와 함께 먹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작은 주방에서 준호는 능숙한 솜씨로 김치볶음밥을 만들었고, 성민은 옆에서 어색하게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거나, 그의 지시에 따라 수저를 놓거나 반찬을 꺼내는 등 소소한 도움을 주었다. 함께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는 동안, 준호는 어젯밤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성민에게 말을 걸었다.
"첫 수업은 어땠어? 들을 만했어? 우리 과 교수님들 중에 좀… 특이한 분들 많거든. 혹시 이상한 사람 없었고?"
"아… 네. 괜찮았어요. 교수님도 친절하셨고…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려고요."
"그래, 그래.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물어봐.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학교생활 짬밥은 좀 있잖아? 족보 같은 거 필요하면 말하고."
준호는 숟가락 가득 김치볶음밥을 떠먹으며 씩 웃었다. 그의 격의 없는 태도에 성민의 긴장도 조금씩 누그러지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성민은 준호를 편하게 대하기 어려웠다. 너무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았다. 자신은 늘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게 살아왔는데, 준호는 어딜 가나 주목받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그런 부류의 사람처럼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는 성민이 하겠다고 나섰다. 준호는 "아냐, 내가 할게"라고 말렸지만, 성민은 괜찮다며 고집을 부렸다. 좁은 싱크대 앞에서 서툰 솜씨로 그릇을 닦는 성민의 등 뒤로, 어느새 다가온 준호가 물었다.
"근데 성민아, 너 되게… 깔끔한 편인가 보다? 아침에 보니까 네 침대 완전 칼각으로 정리돼 있던데?"
"아… 네. 좀… 그런 편이에요. 어지러운 걸 잘 못 봐서…"
"흐음… 그럼 나 때문에 좀 피곤하겠는데? 난 좀… 자유로운 영혼이라. 하하."
준호는 멋쩍게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말대로 그의 책상 주변이나 옷장 안은 성민의 공간과는 달리 어딘가 자유분방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성민은 애써 괜찮다고 말했지만, 앞으로 함께 생활하면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서로 다른 생활 방식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오후에는 각자 수업을 듣고,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다시 방에서 마주쳤다. 성민은 과제를 하기 위해 책상에 앉았고, 준호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기타를 튕기며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처음에는 과제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귓가에 감미롭게 들려오는 준호의 노랫소리와 기타 선율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흘깃 쳐다본 준호는 눈을 감고 노래에 몰입한 모습이었는데, 평소의 장난기 넘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진지함과 감성이 느껴졌다. 의외의 모습이었다. 저렇게 노래도 잘 부르는 사람이었구나.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잠시 그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왜, 내 노래 별로야?"
갑자기 노래를 멈춘 준호가 눈을 뜨고 성민을 보며 물었다. 자신의 시선을 들켰다는 생각에 성민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좋아요! 진짜 잘 부르시네요…"
"푸흐, 뭘 그렇게 놀라. 그냥 불러본 거야. 혹시 시끄러웠으면 말하지 그랬어."
"아니에요! 전혀요! 계속… 하셔도 돼요."
성민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준호는 그런 성민의 반응이 또다시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기타를 내려놓았다.
"됐어. 나도 이제 슬슬 배고프네. 저녁은 뭐 먹을까? 오늘은 내가 진짜 맛있는 파스타 해줄게. 기대해도 좋아."
준호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성민은 얼떨결에 그의 뒤를 따랐다. 요리하는 준호의 뒷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능숙하고 자연스러웠다. 재료를 다듬는 손길도 거침없었고, 프라이팬을 다루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았다. 자취 경력이 꽤 되는 모양이었다. 성민은 요리에는 영 소질이 없었기에, 뚝딱뚝딱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준호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준호가 만들어준 토마토 파스타는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레스토랑에서 파는 것 못지않았다. 성민은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을 먹었고, 준호는 그런 성민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는 어제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워졌다. 성민은 준호가 생각보다 세심하고 남을 잘 챙기는 면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마냥 밝고 가벼워 보이지만, 은근히 속정이 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식사 후, 준호는 갑자기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며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성민은 혼자 남아 설거지를 하고 과제를 마저 했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준호가 돌아왔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 두 명과 함께였다. 준호는 성민에게 친구들이라며 소개했고, 친구들은 성민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야, 박지훈! 네 룸메 완전 순둥순둥하게 생겼다? 너랑 완전 반대네!"
준호의 친구 중 한 명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성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준호는 친구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야, 조용히 해. 성민이 놀라겠다. 미안, 성민아. 얘네가 좀 짓궂어서 그래. 그냥 잠깐 뭐 전해주러 온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친구들은 잠시 방 안을 둘러보며 준호와 몇 마디 농담을 주고받더니 금방 돌아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성민은 친구들과 있을 때의 준호가 자신을 대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훨씬 더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모습. 어쩌면 저 모습이 그의 본모습에 더 가까울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보여주는 친절함과 배려는, 그저 새로 온 어리숙한 후배를 대하는 선배로서의 태도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성민은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샤워기 옆 선반에 놓여 있어야 할 자신의 샴푸와 바디워시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던 성민은, 세면대 위에 놓인 준호의 세면도구 바구니 안에서 자신의 것과 똑같은 브랜드의, 하지만 거의 새것인 샴푸와 바디워시를 발견했다. 순간 성민은 아찔해졌다. 아마도 준호가 자신의 것을 모르고 쓴 모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성민 자신이 쓰는 제품은 피부가 예민해서 특별히 순한 성분으로 골라 쓰는, 제법 가격대가 있는 제품이라는 점이었다.
성민은 잠시 망설였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괜히 말했다가 옹졸해 보이지는 않을까. 하지만 앞으로 계속 같이 살아야 하는데, 이런 일이 반복되면 곤란했다. 그는 어렵게 용기를 내어 욕실 문을 빼꼼 열고 방 안에 있는 준호를 불렀다.
"저… 형."
"어?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던 준호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제 샴푸랑 바디워시… 쓰셨어요?"
성민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목소리는 준호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이마를 탁 쳤다.
"아! 맞다! 미안, 미안! 내 거 다 떨어졌길래 급한 대로 네 거 있는 줄 모르고 새 거 그냥 뜯어서 썼네. 어쩐지 향이 좀 다르더라니. 정말 미안하다, 성민아. 내가 내일 바로 똑같은 걸로 사다 놓을게."
준호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사과했다. 그의 솔직한 사과에 성민은 오히려 자신이 너무 속 좁게 군 것 같아 민망해졌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뭐. 그냥… 다음에 쓰실 일 있으면 저한테 먼저 물어봐 주시면…"
"당연하지! 아, 진짜 미안하네. 내가 원래 이렇게 눈치가 없다. 내일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그걸로 퉁치자, 응?"
준호는 윙크를 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의 능청스러운 사과에 성민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색했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성민은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옆 침대에서는 준호가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든 듯했다. 성민은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낯설고 어색했던 첫 만남, 함께 먹었던 저녁 식사, 준호의 노랫소리, 그리고 방금 전의 작은 해프닝까지. 준호라는 사람은 알면 알수록 단순하지 않은, 여러 가지 매력을 가진 사람인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에게 조금씩 익숙해지고, 어쩌면… 조금씩 다른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아까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의 몸에서 나던 비누 향, 아니 자신이 쓰는 바디워시 향기가 떠올랐다. 자신과 같은 향기를 풍기던 그의 모습이 왜인지 모르게 낯설면서도 야릇하게 느껴졌다. 성민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밤이었다. 좁은 방 안의 온도는, 이제 막 서로에게 낯선 떨림을 느끼기 시작한 두 사람의 체온처럼, 미지근하지만 분명하게 데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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