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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9 추천 : 0 글자수 : 7,411 자 2025-05-24
시간이라는 강물은 좁디좁은 자취방의 먼지 쌓인 창틀을 조용히 적시며 흘러갔다. 계절은 어느덧 뜨거웠던 여름의 끝자락을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의 문턱에 서 있었다. 성민에게 준호라는 존재는 여전히 한 권의 난해한 시집처럼, 가까이 있지만 완벽히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하지만 매일 아침, 알람 소리보다 먼저 들려오는 옆 침대의 뒤척이는 소리에 눈을 뜨고, 밤에는 불 꺼진 어둠 속에서 그의 고른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드는 생활은 어느새 그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숨 막힐 듯 어색했던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그의 삶에 스며들어 있었다.
준호의 예측 불가능하고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모습들은 여전히 성민을 종종 당황하게 만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허리에 달랑 수건 한 장만 두른 채 물을 뚝뚝 흘리며 방 안을 활보하는 것은 이제 예삿일이었고, 주말 아침이면 팬티 바람으로 냉장고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먹을 것을 찾는 그의 모습은 성민의 도덕적 기준(?)을 아슬아슬하게 시험했다. 하지만 이제 성민은 처음처럼 동상처럼 굳어버리거나 허둥지둥 시선을 피하는 대신,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책을 보는 척하거나,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에 집중하는 식의 나름의 생존 전략을 터득해가고 있었다.
익숙해진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무뎌짐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음의 빗장이 조금씩 풀리고 있다는 신호일까. 성민은 가끔 그런 생각을 했지만, 명확한 답을 내리지는 못했다. 확실한 것은, 이제 준호가 뿜어내는 강렬한 존재감이 이전처럼 마냥 불편하거나 위협적인 장벽으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때때로 그의 넘치는 활기와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듯한 스스럼없는 친절함이, 낯선 도시와 버거운 학업에 지친 성민에게 예상치 못한 작은 위로와 숨 쉴 틈을 제공해주곤 했다.
준호는 이상할 정도로 성민의 끼니를 챙겼다. 성민이 혼자 방에서 컵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려고 하면,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나타나 "야, 그거 먹고 키 크겠냐? 같이 시켜 먹자"며 막무가내로 배달 앱을 켰다. 성민이 과제 때문에 밤을 새울 기미라도 보이면, "어휴, 불쌍한 신입생. 힘내라"며 툴툴거리면서도 어느새 따뜻한 믹스커피 한 잔을 그의 책상 위에 툭 내려놓고 가곤 했다. 냉장고에 성민이 좋아하는 특정 브랜드의 우유가 떨어지지 않게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나, 성민이 무심코 흘렸던 말을 기억하고 그의 취향에 맞는 영화나 음악을 추천해줄 때면,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 사소하지만 꾸준한 배려와 관심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성민의 마음속에 단단하게 세워져 있던 방어벽에도 조금씩, 하지만 분명하게 온기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따스함이 스며드는 균열 사이로 함께 비집고 들어오는 감정이 단순한 고마움이나 편안한 동료애, 혹은 형에 대한 친근함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성민은 자신이 점점 더 강박적으로 준호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인지하고 있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쇳가루처럼, 그의 시선은 자꾸만 방 안을 배회하는 준호의 움직임을 좇았고, 그의 아주 사소한 습관이나 찰나의 표정 변화 하나하나에 자신도 모르게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려 애썼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었다. 준호가 아침에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털 때 무심코 드러나는 탄탄한 목덜미의 선이라든지, 기타 코드를 잡기 위해 집중할 때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진지한 버릇, 혹은 전공 서적을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라도 발견한 듯 잠시 허공을 응시하는 깊은 눈매, 아니면 아주 가끔, 정말 아주 가끔 보여주는 소년처럼 해맑게 웃을 때 한쪽 입꼬리가 유난히 더 매력적으로 올라가는 모습 같은 것들. 그런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그의 모습들을 문득문득 포착할 때마다, 성민의 심장은 아무런 예고 없이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아찔한 감각에 휩싸였다.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했다.
'아니야, 이건 그냥… 너무 가까이 지내서 그래. 매일 얼굴 보고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니까… 그냥 익숙해져서, 그래서 눈에 더 잘 띄는 것뿐이야.' 성민은 속으로 끊임없이 자기 검열의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솔직히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겼잖아. 인기도 많고. 누가 봐도 매력적인 사람이니까 그냥… 사람으로서 호감이 가는 거지, 그 이상은 절대 아니야. 나는 여자를 좋아하고,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합리화하고 기존의 틀 안에 욱여넣으려 애썼지만, 자정 넘어 과제를 하다 말고 문득, 옆 침대에서 새근새근 잠든 준호의 얼굴을 달빛에 의지해 몰래 훔쳐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혹은 그가 샤워하는 동안 욕실 문 너머로 아련하게 들려오는 그의 낮은 콧노래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는 자신을 깨달을 때면, 깊이를 알 수 없는 혼란의 늪으로 속절없이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이 감정은 대체 뭘까. 단순한 호기심? 아니면 동성 선배에 대한 막연한 동경? 그것도 아니라면… 그가 가진 자유분방함과 자신감에 대한 부러움? 성민은 가능한 모든 긍정적이고 안전한 단어들을 떠올려 자신의 감정을 포장하려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꾸만 '아니다'라고 속삭이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아닐 거야. 그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거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금기시된 단어의 불온한 가능성 앞에서 공포에 질린 아이처럼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는 자신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다음 주로 다가온 중간고사 때문에 캠퍼스는 시험공부에 몰두하는 학생들로 북적였지만, 성민은 도서관의 소란스러움을 피해 자취방 책상 앞에 틀어박혀 있었다. 유난히 어렵게 느껴지는 전공 필수 과목의 과제가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복잡한 수식과 이해하기 힘든 개념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째 같은 페이지만 붙들고 끙끙대던 그는 결국 백기를 들고 샤프를 내려놓았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뻐근해진 목을 좌우로 돌리는데, 어느새 그의 등 뒤로 다가온 준호가 그의 책상 옆 빈 공간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야, 우리 모범생 성민이. 얼굴 완전 죽상이네? 과제 잘 안 풀려? 어디 한번 보자, 뭐가 그렇게 네 머리를 아프게 하는지."
준호는 언제나처럼 편안한 회색 트레이닝복 세트에 검은색 캡 모자를 비스듬히 눌러쓴 차림이었다. 방금 외출했다 돌아온 것인지, 그의 몸에서는 시원한 가을바람 냄새와 함께 은은하게 햇볕에 잘 마른 빨래 같은, 깨끗하고 기분 좋은 향기가 풍겨왔다. 성민은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너무나 가까워진 거리에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아… 네, 형. 좀… 어렵네요, 이 파트가. 교수님 설명 들을 땐 알 것 같았는데, 막상 혼자 하려니까 하나도 모르겠어요."
성민은 자신이 밤새도록 씨름했던 전공 서적의 문제 페이지를 힘없이 가리키며 푸념하듯 대답했다. 준호는 "어디 보자"하며 흥미롭다는 듯 책을 집어 들었다. 준호의 전공은 경영학이었기에 성민의 신소재공학과는 전혀 접점이 없었지만, 그는 의외로 깊은 집중력을 발휘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몇 분간 복잡한 수식과 그래프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무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거… 가만있어 보자. 내가 예전에 공대 다니는 친구 놈 과제 도와주다가 얼핏 봤던 개념 같은데… 이게 아마… 음… 잠깐만, 내가 한번 찾아볼게."
준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무언가를 빠르게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의 길고 희고 곧은 손가락이 까만 액정 위를 능숙하고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 그리고 검색 결과에 집중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살짝 벌어진 도톰한 아랫입술에 성민은 또다시 넋을 잃고 시선을 빼앗겼다. 바로 옆에, 팔 하나 뻗으면 닿을 거리에 앉아 있는 준호의 존재감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크게, 그리고 무겁게 느껴졌다. 그가 내쉬는 규칙적인 숨소리, 그의 어깨에서부터 느껴지는 미세한 체온, 그에게서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특유의 향기까지. 마치 이 좁은 공간 안의 모든 공기가 오직 그를 중심으로만 느리게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 같았다. 성민은 애써 눈앞의 전공 서적에 집중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오직 옆에 앉은 준호의 존재만이 그의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자, 여기 이거 봐봐. 이 설명이랑 그림 같이 보면 이해가 좀 더 쉬울 거야. 그러니까 이 개념이 여기서 핵심인데…"
준호는 자신이 찾은 자료를 보여주기 위해 성민 쪽으로 몸을 더 가까이 기울였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는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다. 성민은 그의 팔꿈치가 자신의 팔에 닿는 것을, 그의 어깨가 자신의 어깨에 기대듯 포개지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따뜻하고 규칙적인 숨결이 자신의 귓바퀴와 뺨에 간질거리며 스치는 것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꼈다. '경계 위의 숨결'. 며칠 전 밤, 잠들기 전에 떠올렸던 그 단어가 다시 한번 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너무나 가까웠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피할 곳도 없는 거리. 넘어서는 안 될 것 같은, 하지만 미치도록 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경계선 위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성민의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통제 불능 상태로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얼굴은 용암처럼 들끓었고, 등줄기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손바닥은 축축하게 젖어들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조차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그래프에서 독립 변수가 x축이고, 종속 변수가 y축인데, 이 변수가 증가함에 따라서 이 곡선의 기울기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묻는 거잖아. 그럼 아까 그 공식에 이걸 대입해서…"
준호는 옆에서 얼어붙은 성민의 상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혹은 애써 모르는 척하는 건지, 여전히 친절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개념을 설명하고 문제 풀이 과정을 차근차근 짚어주었다. 하지만 성민의 귀에는 그의 논리정연한 목소리가 제대로 입력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귀를 때리는 요란한 심장 박동 소리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그의 나지막한 숨소리만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 것처럼 귓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준호의 시선은 스마트폰 화면과 전공 서적 사이를 오가고 있었지만, 성민은 마치 그가 꿰뚫어보는 듯한 강렬한 시선으로 자신을 샅샅이 훑고 있는 것 같은 망상적인 착각에 빠졌다. 이대로 시간이 영원히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비현실적인 생각과, 동시에 이 숨 막히는 상황에서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한 욕구가 그의 내면에서 격렬하게 충돌하며 그를 혼돈 속으로 몰아넣었다.
"…여기까지. 대충 감 좀 잡혔어? 아니면 다른 부분도 더 설명해줄까?"
마침내 설명을 마친 준호가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려 성민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예고 없이 마주친 그의 깊고 검은 눈동자. 그 안에는 방금 전까지의 진지함과는 다른, 걱정 반, 호기심 반, 그리고 어쩌면… 아주 희미한 장난기 같은 것이 뒤섞여 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성민은 그 강렬하고 복잡한 시선을 온전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혹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아… 네! 네! 덕분에…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아요! 진짜… 정말 감사합니다, 형!"
성민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스프링처럼 자리에서 벌떡 튀어 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과장된 움직임에 의자가 뒤로 요란하게 밀려나며 바닥에 끽, 하고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어… 어? 괜찮아? 성민아, 왜 그래 갑자기? 어디 불편해?"
성민의 돌발 행동에 준호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성민은 어색하게 헛웃음을 치며 식은땀이 흐르는 뒷머리를 마구 긁적였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아,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갑자기… 아, 목이 너무 말라서요! 네, 목이 말라서! 물 좀 마시고 오겠습니다!"
그는 거의 도망치듯,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와 좁은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차가운 생수병을 꺼내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켰지만,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은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차가운 싱크대에 위태롭게 몸을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성민은 방금 전의 아찔했던 순간을 필사적으로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썼다. 너무 가까웠다. 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그의 향기가 코끝을 어지럽힐 정도로.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자신이 느꼈던 강렬한 감정의 정체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분명했다. 그것은 단순한 긴장감이나 당혹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심장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발현된,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떨림이었다. 낯설고, 두렵고, 위험하고, 동시에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으로 강렬한 끌림.
'미쳤어, 김성민. 너 진짜 미쳤구나. 제발 정신 차려. 그는 그냥 네 룸메이트 형일 뿐이야. 그것도… 남자라고.'
성민은 차가운 물을 손에 받아 얼굴에 끼얹으며 스스로를 향해 경멸 어린 독백을 퍼부었다. 하지만 세면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여전히 낯설었다. 잔뜩 겁에 질린 눈동자는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귓불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준호라는 존재는 이제 단순히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타인이 아니었다. 그는 성민이 지난 20년간 단단하다고 믿어왔던, '이성애자 김성민'이라는 정체성의 경계선을 예고 없이 침범하여 무자비하게 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의 무심한 시선 하나, 사소한 몸짓 하나, 그리고 방금 전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던 그의 숨결 하나하나가 성민의 마음을, 그의 이성을, 그의 세계를 속수무책으로 뒤흔들고 있었다.
도저히 다시 방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준호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성민은 결국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도서관 가서 과제 마저 하고 저녁 늦게 들어갈게요"라는, 변명처럼 들리는 짧은 메시지를 준호에게 서둘러 보내고 다시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그의 다리는 후들거렸다. 집 밖으로 불어오는 싸늘한 가을바람이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주었지만, 마음속에서 피어오른 뜨거운 열기와 혼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경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흐릿해진 경계 너머에서 불어오는 준호의 숨결은, 어쩌면 성민의 남은 삶 전체를 송두리째 뒤바꿔 놓을지도 모르는, 위험하고도 달콤한 폭풍의 전조일지도 몰랐다. 불안하면서도, 이상하게 그 다음이 궁금해지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예감이었다.
준호의 예측 불가능하고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모습들은 여전히 성민을 종종 당황하게 만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허리에 달랑 수건 한 장만 두른 채 물을 뚝뚝 흘리며 방 안을 활보하는 것은 이제 예삿일이었고, 주말 아침이면 팬티 바람으로 냉장고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먹을 것을 찾는 그의 모습은 성민의 도덕적 기준(?)을 아슬아슬하게 시험했다. 하지만 이제 성민은 처음처럼 동상처럼 굳어버리거나 허둥지둥 시선을 피하는 대신,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책을 보는 척하거나,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에 집중하는 식의 나름의 생존 전략을 터득해가고 있었다.
익숙해진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무뎌짐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음의 빗장이 조금씩 풀리고 있다는 신호일까. 성민은 가끔 그런 생각을 했지만, 명확한 답을 내리지는 못했다. 확실한 것은, 이제 준호가 뿜어내는 강렬한 존재감이 이전처럼 마냥 불편하거나 위협적인 장벽으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때때로 그의 넘치는 활기와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듯한 스스럼없는 친절함이, 낯선 도시와 버거운 학업에 지친 성민에게 예상치 못한 작은 위로와 숨 쉴 틈을 제공해주곤 했다.
준호는 이상할 정도로 성민의 끼니를 챙겼다. 성민이 혼자 방에서 컵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려고 하면,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나타나 "야, 그거 먹고 키 크겠냐? 같이 시켜 먹자"며 막무가내로 배달 앱을 켰다. 성민이 과제 때문에 밤을 새울 기미라도 보이면, "어휴, 불쌍한 신입생. 힘내라"며 툴툴거리면서도 어느새 따뜻한 믹스커피 한 잔을 그의 책상 위에 툭 내려놓고 가곤 했다. 냉장고에 성민이 좋아하는 특정 브랜드의 우유가 떨어지지 않게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나, 성민이 무심코 흘렸던 말을 기억하고 그의 취향에 맞는 영화나 음악을 추천해줄 때면,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 사소하지만 꾸준한 배려와 관심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성민의 마음속에 단단하게 세워져 있던 방어벽에도 조금씩, 하지만 분명하게 온기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따스함이 스며드는 균열 사이로 함께 비집고 들어오는 감정이 단순한 고마움이나 편안한 동료애, 혹은 형에 대한 친근함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성민은 자신이 점점 더 강박적으로 준호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인지하고 있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쇳가루처럼, 그의 시선은 자꾸만 방 안을 배회하는 준호의 움직임을 좇았고, 그의 아주 사소한 습관이나 찰나의 표정 변화 하나하나에 자신도 모르게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려 애썼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었다. 준호가 아침에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털 때 무심코 드러나는 탄탄한 목덜미의 선이라든지, 기타 코드를 잡기 위해 집중할 때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진지한 버릇, 혹은 전공 서적을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라도 발견한 듯 잠시 허공을 응시하는 깊은 눈매, 아니면 아주 가끔, 정말 아주 가끔 보여주는 소년처럼 해맑게 웃을 때 한쪽 입꼬리가 유난히 더 매력적으로 올라가는 모습 같은 것들. 그런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그의 모습들을 문득문득 포착할 때마다, 성민의 심장은 아무런 예고 없이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아찔한 감각에 휩싸였다.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했다.
'아니야, 이건 그냥… 너무 가까이 지내서 그래. 매일 얼굴 보고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니까… 그냥 익숙해져서, 그래서 눈에 더 잘 띄는 것뿐이야.' 성민은 속으로 끊임없이 자기 검열의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솔직히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겼잖아. 인기도 많고. 누가 봐도 매력적인 사람이니까 그냥… 사람으로서 호감이 가는 거지, 그 이상은 절대 아니야. 나는 여자를 좋아하고,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합리화하고 기존의 틀 안에 욱여넣으려 애썼지만, 자정 넘어 과제를 하다 말고 문득, 옆 침대에서 새근새근 잠든 준호의 얼굴을 달빛에 의지해 몰래 훔쳐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혹은 그가 샤워하는 동안 욕실 문 너머로 아련하게 들려오는 그의 낮은 콧노래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는 자신을 깨달을 때면, 깊이를 알 수 없는 혼란의 늪으로 속절없이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이 감정은 대체 뭘까. 단순한 호기심? 아니면 동성 선배에 대한 막연한 동경? 그것도 아니라면… 그가 가진 자유분방함과 자신감에 대한 부러움? 성민은 가능한 모든 긍정적이고 안전한 단어들을 떠올려 자신의 감정을 포장하려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꾸만 '아니다'라고 속삭이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아닐 거야. 그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거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금기시된 단어의 불온한 가능성 앞에서 공포에 질린 아이처럼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는 자신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다음 주로 다가온 중간고사 때문에 캠퍼스는 시험공부에 몰두하는 학생들로 북적였지만, 성민은 도서관의 소란스러움을 피해 자취방 책상 앞에 틀어박혀 있었다. 유난히 어렵게 느껴지는 전공 필수 과목의 과제가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복잡한 수식과 이해하기 힘든 개념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째 같은 페이지만 붙들고 끙끙대던 그는 결국 백기를 들고 샤프를 내려놓았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뻐근해진 목을 좌우로 돌리는데, 어느새 그의 등 뒤로 다가온 준호가 그의 책상 옆 빈 공간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야, 우리 모범생 성민이. 얼굴 완전 죽상이네? 과제 잘 안 풀려? 어디 한번 보자, 뭐가 그렇게 네 머리를 아프게 하는지."
준호는 언제나처럼 편안한 회색 트레이닝복 세트에 검은색 캡 모자를 비스듬히 눌러쓴 차림이었다. 방금 외출했다 돌아온 것인지, 그의 몸에서는 시원한 가을바람 냄새와 함께 은은하게 햇볕에 잘 마른 빨래 같은, 깨끗하고 기분 좋은 향기가 풍겨왔다. 성민은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너무나 가까워진 거리에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아… 네, 형. 좀… 어렵네요, 이 파트가. 교수님 설명 들을 땐 알 것 같았는데, 막상 혼자 하려니까 하나도 모르겠어요."
성민은 자신이 밤새도록 씨름했던 전공 서적의 문제 페이지를 힘없이 가리키며 푸념하듯 대답했다. 준호는 "어디 보자"하며 흥미롭다는 듯 책을 집어 들었다. 준호의 전공은 경영학이었기에 성민의 신소재공학과는 전혀 접점이 없었지만, 그는 의외로 깊은 집중력을 발휘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몇 분간 복잡한 수식과 그래프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무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거… 가만있어 보자. 내가 예전에 공대 다니는 친구 놈 과제 도와주다가 얼핏 봤던 개념 같은데… 이게 아마… 음… 잠깐만, 내가 한번 찾아볼게."
준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무언가를 빠르게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의 길고 희고 곧은 손가락이 까만 액정 위를 능숙하고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 그리고 검색 결과에 집중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살짝 벌어진 도톰한 아랫입술에 성민은 또다시 넋을 잃고 시선을 빼앗겼다. 바로 옆에, 팔 하나 뻗으면 닿을 거리에 앉아 있는 준호의 존재감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크게, 그리고 무겁게 느껴졌다. 그가 내쉬는 규칙적인 숨소리, 그의 어깨에서부터 느껴지는 미세한 체온, 그에게서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특유의 향기까지. 마치 이 좁은 공간 안의 모든 공기가 오직 그를 중심으로만 느리게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 같았다. 성민은 애써 눈앞의 전공 서적에 집중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오직 옆에 앉은 준호의 존재만이 그의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자, 여기 이거 봐봐. 이 설명이랑 그림 같이 보면 이해가 좀 더 쉬울 거야. 그러니까 이 개념이 여기서 핵심인데…"
준호는 자신이 찾은 자료를 보여주기 위해 성민 쪽으로 몸을 더 가까이 기울였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는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다. 성민은 그의 팔꿈치가 자신의 팔에 닿는 것을, 그의 어깨가 자신의 어깨에 기대듯 포개지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따뜻하고 규칙적인 숨결이 자신의 귓바퀴와 뺨에 간질거리며 스치는 것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꼈다. '경계 위의 숨결'. 며칠 전 밤, 잠들기 전에 떠올렸던 그 단어가 다시 한번 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너무나 가까웠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피할 곳도 없는 거리. 넘어서는 안 될 것 같은, 하지만 미치도록 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경계선 위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성민의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통제 불능 상태로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얼굴은 용암처럼 들끓었고, 등줄기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손바닥은 축축하게 젖어들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조차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그래프에서 독립 변수가 x축이고, 종속 변수가 y축인데, 이 변수가 증가함에 따라서 이 곡선의 기울기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묻는 거잖아. 그럼 아까 그 공식에 이걸 대입해서…"
준호는 옆에서 얼어붙은 성민의 상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혹은 애써 모르는 척하는 건지, 여전히 친절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개념을 설명하고 문제 풀이 과정을 차근차근 짚어주었다. 하지만 성민의 귀에는 그의 논리정연한 목소리가 제대로 입력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귀를 때리는 요란한 심장 박동 소리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그의 나지막한 숨소리만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 것처럼 귓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준호의 시선은 스마트폰 화면과 전공 서적 사이를 오가고 있었지만, 성민은 마치 그가 꿰뚫어보는 듯한 강렬한 시선으로 자신을 샅샅이 훑고 있는 것 같은 망상적인 착각에 빠졌다. 이대로 시간이 영원히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비현실적인 생각과, 동시에 이 숨 막히는 상황에서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한 욕구가 그의 내면에서 격렬하게 충돌하며 그를 혼돈 속으로 몰아넣었다.
"…여기까지. 대충 감 좀 잡혔어? 아니면 다른 부분도 더 설명해줄까?"
마침내 설명을 마친 준호가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려 성민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예고 없이 마주친 그의 깊고 검은 눈동자. 그 안에는 방금 전까지의 진지함과는 다른, 걱정 반, 호기심 반, 그리고 어쩌면… 아주 희미한 장난기 같은 것이 뒤섞여 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성민은 그 강렬하고 복잡한 시선을 온전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혹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아… 네! 네! 덕분에…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아요! 진짜… 정말 감사합니다, 형!"
성민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스프링처럼 자리에서 벌떡 튀어 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과장된 움직임에 의자가 뒤로 요란하게 밀려나며 바닥에 끽, 하고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어… 어? 괜찮아? 성민아, 왜 그래 갑자기? 어디 불편해?"
성민의 돌발 행동에 준호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성민은 어색하게 헛웃음을 치며 식은땀이 흐르는 뒷머리를 마구 긁적였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아,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갑자기… 아, 목이 너무 말라서요! 네, 목이 말라서! 물 좀 마시고 오겠습니다!"
그는 거의 도망치듯,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와 좁은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차가운 생수병을 꺼내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켰지만,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은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차가운 싱크대에 위태롭게 몸을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성민은 방금 전의 아찔했던 순간을 필사적으로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썼다. 너무 가까웠다. 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그의 향기가 코끝을 어지럽힐 정도로.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자신이 느꼈던 강렬한 감정의 정체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분명했다. 그것은 단순한 긴장감이나 당혹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심장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발현된,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떨림이었다. 낯설고, 두렵고, 위험하고, 동시에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으로 강렬한 끌림.
'미쳤어, 김성민. 너 진짜 미쳤구나. 제발 정신 차려. 그는 그냥 네 룸메이트 형일 뿐이야. 그것도… 남자라고.'
성민은 차가운 물을 손에 받아 얼굴에 끼얹으며 스스로를 향해 경멸 어린 독백을 퍼부었다. 하지만 세면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여전히 낯설었다. 잔뜩 겁에 질린 눈동자는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귓불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준호라는 존재는 이제 단순히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타인이 아니었다. 그는 성민이 지난 20년간 단단하다고 믿어왔던, '이성애자 김성민'이라는 정체성의 경계선을 예고 없이 침범하여 무자비하게 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의 무심한 시선 하나, 사소한 몸짓 하나, 그리고 방금 전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던 그의 숨결 하나하나가 성민의 마음을, 그의 이성을, 그의 세계를 속수무책으로 뒤흔들고 있었다.
도저히 다시 방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준호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성민은 결국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도서관 가서 과제 마저 하고 저녁 늦게 들어갈게요"라는, 변명처럼 들리는 짧은 메시지를 준호에게 서둘러 보내고 다시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그의 다리는 후들거렸다. 집 밖으로 불어오는 싸늘한 가을바람이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주었지만, 마음속에서 피어오른 뜨거운 열기와 혼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경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흐릿해진 경계 너머에서 불어오는 준호의 숨결은, 어쩌면 성민의 남은 삶 전체를 송두리째 뒤바꿔 놓을지도 모르는, 위험하고도 달콤한 폭풍의 전조일지도 몰랐다. 불안하면서도, 이상하게 그 다음이 궁금해지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예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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