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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381 추천 : 0 글자수 : 5,005 자 2025-05-26
성민은 낯선 무게감과 온기에 눈을 떴다. 뻑뻑한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준호의 잠든 얼굴이었다. 숨 막힐 듯 가까운 거리. 그의 고른 숨결이 성민의 뺨에 느껴졌다. 성민은 순간 숨을 멈췄다. 지난밤의 기억들이 마치 폭풍처럼 그의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현관문 앞에서의 키스, 벽에 밀쳐진 채 나누었던 격렬한 입맞춤, 그리고 침대 위에서의… 뜨겁고 혼란스러웠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다. 그의 온몸에 남아있는 미세한 통증과 나른한 피로감, 그리고 준호의 팔이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는 이 현실이 그 증거였다. 성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준호의 팔을 풀어내고 침대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자마자, 잠결에도 예민하게 반응한 준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꼬대하듯 웅얼거렸다.
"으음… 어디 가…"
그리고는 무의식적으로 성민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성민은 그의 품에 다시 갇힌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준호의 잠든 얼굴은 어젯밤의 열정적인 모습과는 달리 너무나 평온하고 무방비해 보였다. 길고 짙은 속눈썹, 오뚝한 콧날,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고른 숨소리.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잠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젯밤, 이 얼굴이 자신을 향해 어떤 표정을 지었었는지, 어떤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었는지 떠올리자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돼. 그는 필사적으로 준호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그의 팔을 풀어내고 침대 밖으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다리가 후들거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성민은 비틀거리며 옷장으로 다가가 되는대로 옷을 껴입었다. 자신의 몸 곳곳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어젯밤의 흔적들을 차마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감히 준호 쪽을 돌아보지도 못한 채, 마치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욕실 거울 앞에 선 성민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퉁퉁 부은 눈,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 그리고… 누가 봐도 명백하게 키스 마크가 남은 목덜미와 쇄골. 그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그 붉은 자국들을 가렸다. 수치심과 당혹감, 그리고 어젯밤 자신이 느꼈던 강렬했던 쾌락의 기억이 뒤섞여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어떻게 해… 이걸 어떻게 하고 다녀…’
그는 찬물로 세수를 하고 양치를 했지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여전히 낯설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어젯밤의 일은 분명 후회스러운 충동이었을까? 아니면 억눌려왔던 자신의 진짜 욕망이 터져 나온 것일까? 그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준호를 이전처럼 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렸다.
성민은 목까지 올라오는 터틀넥 스웨터를 찾아 입고, 평소보다 훨씬 더 일찍 집을 나섰다. 오늘은 주말이라 수업도 없었지만, 도저히 준호와 한 공간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는 무작정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정처 없이 거리를 걷고, 텅 빈 공원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은 그의 혼란을 잠재워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게 만들 뿐이었다.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준호의 얼굴과 어젯밤의 기억이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녔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속이 메슥거리고 입맛도 없었다. 그는 결국 근처 카페에 들어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준호에게서 부재중 전화 한 통과 메시지 여러 개가 와 있었다.
[성민아, 어디야? 자고 일어났는데 네가 없어서 놀랐잖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걱정되니까 연락 좀 줘.]
[혹시… 어젯밤 일 때문에 그래? …미안하다.]
[얼굴 보고 얘기 좀 하자. 기다릴게.]
준호의 메시지를 읽는 성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걱정과 미안함이 묻어나는 그의 메시지에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넘길 수 있을까? 아니면 솔직하게 자신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털어놓아야 할까? 그는 어떤 선택지도 내키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성민은 결국 아무런 답장도 하지 못한 채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카페를 나와 다시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이대로 계속 준호를 피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해가 저물고 거리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질 무렵, 성민은 마침내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자취방으로 향했다. 어차피 돌아가야 할 곳이었다. 그는 최대한 마음을 다잡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어젯밤의 일은 그냥… 술김에 벌어진 실수라고, 해프닝이라고 치부해버리자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현관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준호가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준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과 안도감, 그리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왔네."
준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성민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네, 형."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성민은 어떻게든 이 침묵을 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괜히 가방을 뒤적이며 시간을 끌었다.
"…어디 갔었어?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되고. 걱정했잖아."
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원망과 함께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
"아… 그냥…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휴대폰은… 배터리가 없어서 꺼졌어요."
성민은 또다시 서툰 거짓말을 했다. 준호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듯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성민에게 다가왔다. 성민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성민아."
준호는 성민의 앞에 멈춰 서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성민은 그의 강렬한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목에 남은 흔적을 그가 보게 될까 봐 두려웠다.
"…어젯밤 일 말이야."
준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성민의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내 감정만 앞섰던 것 같아. 네 마음은 생각하지 못하고… 미안하다. 많이 놀랐지?"
준호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성민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작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봐도 내가 너무 심했어. 술기운이라고 핑계 대고 싶지도 않고… 그냥, 너한테 너무 미안하다는 말 하고 싶었어. 그리고…"
준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이전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하거나 힘들면… 언제든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줘. 억지로 괜찮은 척할 필요 없어. 네 마음이 가장 중요하니까."
성민은 준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진심이었고, 그 안에는 성민을 향한 깊은 배려와 함께… 어떤 간절함 같은 것이 담겨 있는 듯했다. 성민은 그 눈빛을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 그의 진심을 믿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솔직해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두려움이 더 컸다. 자신의 진짜 감정을 드러냈을 때, 이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준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너무나 두려웠다.
결국 성민은 또다시 자신의 진심을 숨기는 길을 택했다.
"…정말 괜찮아요, 형. 어젯밤 일은… 그냥, 우리 둘 다 술에 취해서… 실수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잊을게요."
성민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심장이 시리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준호는 성민의 말을 듣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실망감과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성민은 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성민이 원하는 대로 맞춰주기로 한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알았어. 그럼 우리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 앞으로는… 다시 예전처럼, 편한 형 동생으로 지내면 되는 거지?"
"…네. 그래요, 형."
성민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은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없었던 일’로 치부하기에는 어젯밤의 기억과 감각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리고 준호의 눈빛 속에 담겨 있던 그 미묘한 감정의 의미를, 정말 모르는 척해도 되는 걸까.
그날 이후, 성민과 준호는 약속이라도 한 듯 어젯밤의 일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예전처럼, 혹은 예전보다 조금 더 어색하게, 룸메이트로서의 일상을 이어갔다. 준호는 더 이상 성민에게 과도한 스킨십을 하거나 그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성민 역시 그를 최대한 편안하게 대하려 애썼다.
하지만 한번 넘어진 경계는 쉽게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이 마주칠 때마다, 혹은 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몸이 스칠 때마다 어젯밤의 뜨거운 기억들이 불쑥 되살아나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하고 긴장된 기류를 만들어냈다. 외면하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흔적들. 그들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이미 서로의 존재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일상 아래,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격렬한 감정의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성민은 준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인정해야 할지, 아니면 끝까지 부정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준호는 성민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그의 곁을 맴돌며 조심스럽게 그의 마음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태로운 동거는 계속되었고, 그들 사이의 온도는 언제 다시 뜨겁게 타오를지 모르는 불씨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다. 그의 온몸에 남아있는 미세한 통증과 나른한 피로감, 그리고 준호의 팔이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는 이 현실이 그 증거였다. 성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준호의 팔을 풀어내고 침대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자마자, 잠결에도 예민하게 반응한 준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꼬대하듯 웅얼거렸다.
"으음… 어디 가…"
그리고는 무의식적으로 성민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성민은 그의 품에 다시 갇힌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준호의 잠든 얼굴은 어젯밤의 열정적인 모습과는 달리 너무나 평온하고 무방비해 보였다. 길고 짙은 속눈썹, 오뚝한 콧날,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고른 숨소리.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잠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젯밤, 이 얼굴이 자신을 향해 어떤 표정을 지었었는지, 어떤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었는지 떠올리자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돼. 그는 필사적으로 준호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그의 팔을 풀어내고 침대 밖으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다리가 후들거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성민은 비틀거리며 옷장으로 다가가 되는대로 옷을 껴입었다. 자신의 몸 곳곳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어젯밤의 흔적들을 차마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감히 준호 쪽을 돌아보지도 못한 채, 마치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욕실 거울 앞에 선 성민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퉁퉁 부은 눈,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 그리고… 누가 봐도 명백하게 키스 마크가 남은 목덜미와 쇄골. 그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그 붉은 자국들을 가렸다. 수치심과 당혹감, 그리고 어젯밤 자신이 느꼈던 강렬했던 쾌락의 기억이 뒤섞여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어떻게 해… 이걸 어떻게 하고 다녀…’
그는 찬물로 세수를 하고 양치를 했지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여전히 낯설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어젯밤의 일은 분명 후회스러운 충동이었을까? 아니면 억눌려왔던 자신의 진짜 욕망이 터져 나온 것일까? 그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준호를 이전처럼 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렸다.
성민은 목까지 올라오는 터틀넥 스웨터를 찾아 입고, 평소보다 훨씬 더 일찍 집을 나섰다. 오늘은 주말이라 수업도 없었지만, 도저히 준호와 한 공간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는 무작정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정처 없이 거리를 걷고, 텅 빈 공원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은 그의 혼란을 잠재워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게 만들 뿐이었다.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준호의 얼굴과 어젯밤의 기억이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녔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속이 메슥거리고 입맛도 없었다. 그는 결국 근처 카페에 들어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준호에게서 부재중 전화 한 통과 메시지 여러 개가 와 있었다.
[성민아, 어디야? 자고 일어났는데 네가 없어서 놀랐잖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걱정되니까 연락 좀 줘.]
[혹시… 어젯밤 일 때문에 그래? …미안하다.]
[얼굴 보고 얘기 좀 하자. 기다릴게.]
준호의 메시지를 읽는 성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걱정과 미안함이 묻어나는 그의 메시지에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넘길 수 있을까? 아니면 솔직하게 자신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털어놓아야 할까? 그는 어떤 선택지도 내키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성민은 결국 아무런 답장도 하지 못한 채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카페를 나와 다시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이대로 계속 준호를 피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해가 저물고 거리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질 무렵, 성민은 마침내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자취방으로 향했다. 어차피 돌아가야 할 곳이었다. 그는 최대한 마음을 다잡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어젯밤의 일은 그냥… 술김에 벌어진 실수라고, 해프닝이라고 치부해버리자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현관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준호가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준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과 안도감, 그리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왔네."
준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성민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네, 형."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성민은 어떻게든 이 침묵을 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괜히 가방을 뒤적이며 시간을 끌었다.
"…어디 갔었어?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되고. 걱정했잖아."
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원망과 함께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
"아… 그냥…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휴대폰은… 배터리가 없어서 꺼졌어요."
성민은 또다시 서툰 거짓말을 했다. 준호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듯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성민에게 다가왔다. 성민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성민아."
준호는 성민의 앞에 멈춰 서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성민은 그의 강렬한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목에 남은 흔적을 그가 보게 될까 봐 두려웠다.
"…어젯밤 일 말이야."
준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성민의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내 감정만 앞섰던 것 같아. 네 마음은 생각하지 못하고… 미안하다. 많이 놀랐지?"
준호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성민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작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봐도 내가 너무 심했어. 술기운이라고 핑계 대고 싶지도 않고… 그냥, 너한테 너무 미안하다는 말 하고 싶었어. 그리고…"
준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이전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하거나 힘들면… 언제든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줘. 억지로 괜찮은 척할 필요 없어. 네 마음이 가장 중요하니까."
성민은 준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진심이었고, 그 안에는 성민을 향한 깊은 배려와 함께… 어떤 간절함 같은 것이 담겨 있는 듯했다. 성민은 그 눈빛을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 그의 진심을 믿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솔직해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두려움이 더 컸다. 자신의 진짜 감정을 드러냈을 때, 이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준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너무나 두려웠다.
결국 성민은 또다시 자신의 진심을 숨기는 길을 택했다.
"…정말 괜찮아요, 형. 어젯밤 일은… 그냥, 우리 둘 다 술에 취해서… 실수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잊을게요."
성민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심장이 시리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준호는 성민의 말을 듣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실망감과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성민은 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성민이 원하는 대로 맞춰주기로 한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알았어. 그럼 우리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 앞으로는… 다시 예전처럼, 편한 형 동생으로 지내면 되는 거지?"
"…네. 그래요, 형."
성민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은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없었던 일’로 치부하기에는 어젯밤의 기억과 감각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리고 준호의 눈빛 속에 담겨 있던 그 미묘한 감정의 의미를, 정말 모르는 척해도 되는 걸까.
그날 이후, 성민과 준호는 약속이라도 한 듯 어젯밤의 일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예전처럼, 혹은 예전보다 조금 더 어색하게, 룸메이트로서의 일상을 이어갔다. 준호는 더 이상 성민에게 과도한 스킨십을 하거나 그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성민 역시 그를 최대한 편안하게 대하려 애썼다.
하지만 한번 넘어진 경계는 쉽게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이 마주칠 때마다, 혹은 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몸이 스칠 때마다 어젯밤의 뜨거운 기억들이 불쑥 되살아나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하고 긴장된 기류를 만들어냈다. 외면하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흔적들. 그들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이미 서로의 존재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일상 아래,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격렬한 감정의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성민은 준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인정해야 할지, 아니면 끝까지 부정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준호는 성민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그의 곁을 맴돌며 조심스럽게 그의 마음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태로운 동거는 계속되었고, 그들 사이의 온도는 언제 다시 뜨겁게 타오를지 모르는 불씨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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