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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277 추천 : 0 글자수 : 5,679 자 2025-05-27
시간은 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느리고 불규칙하게 흘러갔다. 성민과 준호는 ‘없었던 일’로 하자는 암묵적인 합의 아래, 위태로운 평화를 유지하려 애썼다. 겉으로는 예전과 다름없는 평범한 룸메이트의 일상으로 돌아간 듯 보였다. 함께 밥을 먹고, TV를 보고, 가끔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평온함의 표면 아래에서는 여전히 미묘하고 불편한 긴장감이 끊임없이 감돌았다. 마치 얇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언제 깨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관계였다.
준호는 약속대로 성민을 이전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대했다. 불필요한 스킨십은 일절 없었고, 성민의 사적인 공간이나 시간을 존중해주려는 노력이 역력했다. 심지어 샤워 후에는 꼬박꼬박 옷을 챙겨 입고 나왔고, 밤늦게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들어올 때도 최대한 소리를 죽이려 애썼다. 그의 변화는 분명 성민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성민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 큰 거리감과 벽을 느꼈다. 예전의 그 자유분방하고 때로는 뻔뻔하기까지 했던 준호가 그리워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마치 자신 때문에 그가 부자연스러워진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성민 역시 준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최대한 태연하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의 말에 웃어 보이고, 먼저 다가가 말을 걸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폭풍은 좀처럼 잠잠해지지 않았다. 밤이 되면 어김없이 그날의 뜨거웠던 기억들이 되살아나 그를 괴롭혔고, 낮에는 준호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자괴감에 빠졌다. 특히, 준호가 여자 동기나 후배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거나 전화 통화를 하는 모습을 볼 때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질투. 성민은 그 단어를 애써 외면했지만, 자신의 감정이 단순한 혼란이나 호기심을 넘어섰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위태로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 생긴 미세한 균열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벌어졌고, 마침내 작은 사건 하나가 그 균열을 파고들어 숨겨져 있던 감정의 파편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은 금요일 저녁이었다. 성민은 과 동기들과의 간단한 술자리를 마치고 평소보다 조금 늦게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안에는 준호 혼자 있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통기타를 조율하고 있었다. 성민은 가볍게 인사하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형, 아직 안 자고 있었네요? 저는 동기들이랑 잠깐… 한잔하고 왔어요."
"어, 왔어? 재밌었냐?"
준호는 기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낮고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고 성민은 느꼈다.
"네, 뭐… 그냥 그랬어요. 형은 오늘 약속 없었어요?"
"어. 그냥 방에 있었어."
짧은 대화가 오갔고,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성민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옷장으로 향했다. 술기운 때문인지 몸이 살짝 비틀거렸다. 그때, 준호가 조율하던 기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성민에게 다가왔다. 성민은 갑작스러운 그의 움직임에 놀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 술 많이 마셨냐?"
준호는 성민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의 눈빛이 평소와는 다르게 날카롭고 차갑게 느껴졌다. 성민은 그의 시선에 압도당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아… 아니요. 그냥… 맥주 몇 잔… 조금 마셨어요."
"근데 왜 이렇게 술 냄새가 진동을 해? 그리고 얼굴은 또 왜 이렇게 빨개?"
준호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짜증과 불쾌감이 섞여 있었다. 성민은 당황했다. 그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형… 왜 그러세요? 저 뭐 잘못했어요?"
"잘못했냐고? 하… 김성민, 너 진짜…"
준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성민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성민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얏! 형, 왜 이래요!"
"너… 내가 그렇게 우습냐? 내가 네 마음 모를 거라고 생각해?"
준호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성민은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했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형…?"
"모르는 척하지 마!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나 피하고, 다른 놈들이랑 술 마시고 다니고… 내가…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준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얼굴은 고통과 분노, 그리고 절망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성민은 그의 격한 반응에 너무 놀라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가… 나 때문에 힘들어했다고? 나를 피한다고 생각했다고? 그리고… 질투… 한 건가?
"형… 오해예요. 저는 그냥 동기들이랑…"
"오해? 뭐가 오해야! 네 눈빛, 네 행동, 전부 다 티 나는데! 왜 솔직하게 말 못 해! 왜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준호는 성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의 힘에 성민의 몸이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성민은 그의 분노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격렬한 그의 감정 표출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그날 밤 일, 없었던 걸로 하자고 한 건 너였잖아! 그래서 나도 참고, 또 참고… 네가 불편할까 봐, 네가 힘들어할까 봐 얼마나 노력했는데! 근데 너는… 나를 이렇게 무시해?"
준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그의 눈에는 붉은 핏발이 서 있었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마침내 폭발한 것이었다. 성민을 향한 애정과 갈망, 그리고 성민의 외면으로 인한 상처와 분노가 뒤섞여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온 것이다.
성민은 그의 절규와도 같은 외침 속에서,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기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의 혼란과 두려움에만 매몰되어, 그의 감정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 역시 자신만큼,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 더 힘들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형… 미안해요…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성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준호의 분노 앞에서, 그의 진심 앞에서, 성민의 마지막 방어벽마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제가… 형을 피했던 건… 형이 싫어서가 아니었어요. 제 마음을… 저도 잘 모르겠어서… 너무 혼란스럽고 두려워서 그랬어요. 형한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서…"
성민은 흐느끼며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의 눈물 섞인 고백에, 준호의 분노로 가득 찼던 눈빛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성민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고, 대신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의 손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이전의 거칠음 대신 안타까움과 연민이 담겨 있었다.
"…바보야. 그걸 왜 이제 말해."
준호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그는 성민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 힘껏 안았다. 성민은 그의 품에 안겨 아이처럼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들이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준호는 말없이 성민의 등을 토닥이며 그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성민의 울음이 잦아들자, 준호는 그의 어깨를 잡고 살짝 떨어져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성민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이전과는 다른, 솔직함과 마주할 용기가 담겨 있었다.
"…나도… 나도 너 때문에 힘들었어, 성민아."
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네가 날 밀어내는 것 같아서…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준 건가 싶어서… 매일 밤 잠도 제대로 못 잤어.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다가가지도 못하고… 바보같이 혼자 속앓이만 했어."
그의 솔직한 고백에 성민은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역시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다니.
"…미안해요, 형. 정말… 몰랐어요."
"됐어. 이제 알았으면 됐어."
준호는 성민의 붉어진 눈가를 다시 한번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두 뺨을 감싸고, 아주 진지하고 깊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민아. 네 마음이 아직 혼란스럽고 두렵다는 거 알아.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기다릴 수 있어.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너한테 진심이야. 그날 밤 일도, 그냥 술김에 벌어진 실수가 아니었어. 나는… 너를…"
준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용기를 내어, 그동안 마음속 깊이 숨겨왔던 진심을 꺼내놓았다.
"…좋아해, 성민아. 아주 많이."
그의 고백은 마치 천둥처럼 성민의 심장을 강타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게 되니 그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 성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준호는 그런 성민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부담스럽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았어. 내 진심을 네가 알아줬으면 했어."
그리고 그는 성민의 뺨을 감쌌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하지만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의 손길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형."
성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도… 저도 형이 좋아요."
마침내, 성민의 입에서 나온 솔직한 고백.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오랫동안 그를 짓눌렀던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가슴속에서 사라지는 듯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더 이상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고 싶었다.
성민의 고백에 준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성민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성민아, 너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성민은 눈물을 글썽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심이에요. 저도 형이 좋아요.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형이 자꾸 신경 쓰이고, 보고 싶고… 형이 다른 사람이랑 있으면… 질투도 났어요. 제가 이상한 건 줄 알고… 너무 무서웠는데… 이제는… 더 이상 제 마음을 속이고 싶지 않아요."
성민의 용기 있는 고백에, 준호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와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그는 성민을 다시 한번 힘껏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분노나 절망이 아닌, 오롯이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 찬 포옹이었다.
"고맙다, 성민아… 정말 고마워… 이렇게 말해줘서…"
준호의 목소리는 감격에 겨워 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동안 서로를 향해 쌓아왔던 오해와 불안감, 그리고 숨겨왔던 진심들이 마침내 폭발하고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얇고 위태로웠던 경계선은 마침내 무너져 내렸고, 그 자리에는 서로를 향한 솔직하고 뜨거운 감정만이 남았다.
균열은 더 이상 아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소중한 통로였다. 밤은 깊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제 막 새로운 관계의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준호는 약속대로 성민을 이전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대했다. 불필요한 스킨십은 일절 없었고, 성민의 사적인 공간이나 시간을 존중해주려는 노력이 역력했다. 심지어 샤워 후에는 꼬박꼬박 옷을 챙겨 입고 나왔고, 밤늦게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들어올 때도 최대한 소리를 죽이려 애썼다. 그의 변화는 분명 성민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성민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 큰 거리감과 벽을 느꼈다. 예전의 그 자유분방하고 때로는 뻔뻔하기까지 했던 준호가 그리워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마치 자신 때문에 그가 부자연스러워진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성민 역시 준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최대한 태연하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의 말에 웃어 보이고, 먼저 다가가 말을 걸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폭풍은 좀처럼 잠잠해지지 않았다. 밤이 되면 어김없이 그날의 뜨거웠던 기억들이 되살아나 그를 괴롭혔고, 낮에는 준호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자괴감에 빠졌다. 특히, 준호가 여자 동기나 후배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거나 전화 통화를 하는 모습을 볼 때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질투. 성민은 그 단어를 애써 외면했지만, 자신의 감정이 단순한 혼란이나 호기심을 넘어섰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위태로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 생긴 미세한 균열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벌어졌고, 마침내 작은 사건 하나가 그 균열을 파고들어 숨겨져 있던 감정의 파편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은 금요일 저녁이었다. 성민은 과 동기들과의 간단한 술자리를 마치고 평소보다 조금 늦게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안에는 준호 혼자 있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통기타를 조율하고 있었다. 성민은 가볍게 인사하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형, 아직 안 자고 있었네요? 저는 동기들이랑 잠깐… 한잔하고 왔어요."
"어, 왔어? 재밌었냐?"
준호는 기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낮고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고 성민은 느꼈다.
"네, 뭐… 그냥 그랬어요. 형은 오늘 약속 없었어요?"
"어. 그냥 방에 있었어."
짧은 대화가 오갔고,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성민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옷장으로 향했다. 술기운 때문인지 몸이 살짝 비틀거렸다. 그때, 준호가 조율하던 기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성민에게 다가왔다. 성민은 갑작스러운 그의 움직임에 놀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 술 많이 마셨냐?"
준호는 성민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의 눈빛이 평소와는 다르게 날카롭고 차갑게 느껴졌다. 성민은 그의 시선에 압도당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아… 아니요. 그냥… 맥주 몇 잔… 조금 마셨어요."
"근데 왜 이렇게 술 냄새가 진동을 해? 그리고 얼굴은 또 왜 이렇게 빨개?"
준호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짜증과 불쾌감이 섞여 있었다. 성민은 당황했다. 그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형… 왜 그러세요? 저 뭐 잘못했어요?"
"잘못했냐고? 하… 김성민, 너 진짜…"
준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성민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성민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얏! 형, 왜 이래요!"
"너… 내가 그렇게 우습냐? 내가 네 마음 모를 거라고 생각해?"
준호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성민은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했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형…?"
"모르는 척하지 마!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나 피하고, 다른 놈들이랑 술 마시고 다니고… 내가…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준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얼굴은 고통과 분노, 그리고 절망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성민은 그의 격한 반응에 너무 놀라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가… 나 때문에 힘들어했다고? 나를 피한다고 생각했다고? 그리고… 질투… 한 건가?
"형… 오해예요. 저는 그냥 동기들이랑…"
"오해? 뭐가 오해야! 네 눈빛, 네 행동, 전부 다 티 나는데! 왜 솔직하게 말 못 해! 왜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준호는 성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의 힘에 성민의 몸이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성민은 그의 분노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격렬한 그의 감정 표출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그날 밤 일, 없었던 걸로 하자고 한 건 너였잖아! 그래서 나도 참고, 또 참고… 네가 불편할까 봐, 네가 힘들어할까 봐 얼마나 노력했는데! 근데 너는… 나를 이렇게 무시해?"
준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그의 눈에는 붉은 핏발이 서 있었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마침내 폭발한 것이었다. 성민을 향한 애정과 갈망, 그리고 성민의 외면으로 인한 상처와 분노가 뒤섞여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온 것이다.
성민은 그의 절규와도 같은 외침 속에서,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기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의 혼란과 두려움에만 매몰되어, 그의 감정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 역시 자신만큼,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 더 힘들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형… 미안해요…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성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준호의 분노 앞에서, 그의 진심 앞에서, 성민의 마지막 방어벽마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제가… 형을 피했던 건… 형이 싫어서가 아니었어요. 제 마음을… 저도 잘 모르겠어서… 너무 혼란스럽고 두려워서 그랬어요. 형한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서…"
성민은 흐느끼며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의 눈물 섞인 고백에, 준호의 분노로 가득 찼던 눈빛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성민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고, 대신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의 손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이전의 거칠음 대신 안타까움과 연민이 담겨 있었다.
"…바보야. 그걸 왜 이제 말해."
준호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그는 성민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 힘껏 안았다. 성민은 그의 품에 안겨 아이처럼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들이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준호는 말없이 성민의 등을 토닥이며 그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성민의 울음이 잦아들자, 준호는 그의 어깨를 잡고 살짝 떨어져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성민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이전과는 다른, 솔직함과 마주할 용기가 담겨 있었다.
"…나도… 나도 너 때문에 힘들었어, 성민아."
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네가 날 밀어내는 것 같아서…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준 건가 싶어서… 매일 밤 잠도 제대로 못 잤어.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다가가지도 못하고… 바보같이 혼자 속앓이만 했어."
그의 솔직한 고백에 성민은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역시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다니.
"…미안해요, 형. 정말… 몰랐어요."
"됐어. 이제 알았으면 됐어."
준호는 성민의 붉어진 눈가를 다시 한번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두 뺨을 감싸고, 아주 진지하고 깊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민아. 네 마음이 아직 혼란스럽고 두렵다는 거 알아.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기다릴 수 있어.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너한테 진심이야. 그날 밤 일도, 그냥 술김에 벌어진 실수가 아니었어. 나는… 너를…"
준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용기를 내어, 그동안 마음속 깊이 숨겨왔던 진심을 꺼내놓았다.
"…좋아해, 성민아. 아주 많이."
그의 고백은 마치 천둥처럼 성민의 심장을 강타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게 되니 그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 성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준호는 그런 성민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부담스럽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았어. 내 진심을 네가 알아줬으면 했어."
그리고 그는 성민의 뺨을 감쌌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하지만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의 손길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형."
성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도… 저도 형이 좋아요."
마침내, 성민의 입에서 나온 솔직한 고백.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오랫동안 그를 짓눌렀던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가슴속에서 사라지는 듯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더 이상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고 싶었다.
성민의 고백에 준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성민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성민아, 너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성민은 눈물을 글썽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심이에요. 저도 형이 좋아요.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형이 자꾸 신경 쓰이고, 보고 싶고… 형이 다른 사람이랑 있으면… 질투도 났어요. 제가 이상한 건 줄 알고… 너무 무서웠는데… 이제는… 더 이상 제 마음을 속이고 싶지 않아요."
성민의 용기 있는 고백에, 준호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와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그는 성민을 다시 한번 힘껏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분노나 절망이 아닌, 오롯이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 찬 포옹이었다.
"고맙다, 성민아… 정말 고마워… 이렇게 말해줘서…"
준호의 목소리는 감격에 겨워 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동안 서로를 향해 쌓아왔던 오해와 불안감, 그리고 숨겨왔던 진심들이 마침내 폭발하고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얇고 위태로웠던 경계선은 마침내 무너져 내렸고, 그 자리에는 서로를 향한 솔직하고 뜨거운 감정만이 남았다.
균열은 더 이상 아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소중한 통로였다. 밤은 깊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제 막 새로운 관계의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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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위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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