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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14 추천 : 0 글자수 : 6,198 자 2025-05-23
여름의 한복판, 숨 막히는 열기가 아스팔트에서 피어올라 도시 전체를 끈적하게 감싸고 있었다. 스무 해를 살아온 익숙한 고향 집을 떠나 생애 처음으로 발을 디딘 서울이라는 도시는, 성민에게 거대하고 낯선 정글처럼 느껴졌다. 대학 합격의 기쁨도 잠시, 부모님의 걱정 어린 배웅을 뒤로하고 도착한 자취방은 그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엘리베이터 없는 낡은 빌라의 4층, 좁은 복도를 지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선 공간은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도 어딘가 침침하고 비좁았다.
방 한가운데에는 아직 채 풀지 못한 이삿짐 박스들이 제멋대로 쌓여 공간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성민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힘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며 짐을 옮기느라 온몸은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앞으로 1년, 혹은 그 이상을 지내야 할 이 낯선 공간. 그리고 더 큰 걱정은, 이미 이곳에 살고 있다는, 오늘 처음 만나게 될 룸메이트의 존재였다.
어떤 사람일까. 제발, 무던하고 조용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성민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먼저 입주해 살고 있다는 룸메이트의 흔적들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책상 위에는 전공 서적으로 보이는 두꺼운 책들과 노트북이 비교적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옆으로는 유명 인디 밴드의 포스터들이 여러 장 붙어 있었고, 구석에는 검은색 통기타가 스탠드에 세워져 있었다. 책상 의자에는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놓은 듯한 후드티가 걸려 있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자신과는 분명 다른 종류의 사람일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어쩌면… 조금은 감당하기 힘든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성민은 애써 불안감을 떨쳐내려 고개를 저으며, 가장 큰 이삿짐 박스를 열었다.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기가 풍기는 옷가지들을 꺼내 서툰 손길로 개기 시작했다. 옷장 문을 열자, 이미 반쯤 채워져 있는 다른 사람의 옷들이 보였다. 자신과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의, 어딘가 자유분방해 보이는 옷들. 그는 조심스럽게 빈칸을 찾아 자신의 옷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옷 몇 벌을 정리했을 뿐인데도 이마에는 다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에어컨은 사치였고, 낡은 선풍기 하나가 천장 구석에서 힘겹게 돌아가며 뜨거운 바람을 섞어낼 뿐이었다.
그때였다. 현관문 쪽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디지털 도어락이 해제되는 전자음이 울렸다. ‘삑- 삑- 삑- 띠리릭.’ 성민의 심장이 크게 덜컥 내려앉았다. 올 것이 왔구나.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몸을 굳힌 채, 천천히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는 성민이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훤칠하다 못해 모델 같은 키, 햇볕에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 아래로 단단하게 자리 잡은 근육들이 얇은 운동복 위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살짝 젖은 검은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털어 넘긴 듯 자연스러웠고, 깊은 눈매에는 장난기와 함께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듯한 묘한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누가 봐도 잘생겼다,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법한 외모. 그가 바로 이 방의 다른 주인이자, 성민의 룸메이트인 준호였다.
준호는 막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듯, 가벼운 러닝셔츠와 반바지 차림에 목에는 땀에 젖은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그는 방 안에 어색하게 서 있는 성민을 발견하자마자,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시원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시원한 운동 후의 열기와 희미한 땀 냄새, 그리고 남성적인 스킨 향이 뒤섞여 성민의 후각을 자극했다.
"어? 혹시 오늘 이사 온다는 룸메? 생각보다 일찍 왔네. 반가워! 나는 민준호.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준호는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목소리는 보기와는 다르게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동시에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성민은 얼떨결에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단단하고, 뜨거운 손이었다. 갑작스러운 악수에 당황한 성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는… 김성민이라고 합니다. 신소재공학과… 신입생이에요. 잘 부탁… 드립니다."
간신히 자기소개를 마친 성민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염소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준호는 그런 성민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혹은 귀엽다는 듯 눈을 휘어 접어 웃으며 잡았던 손을 놓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하고 쳤다. 예상치 못한 가벼운 스킨십에 성민은 저도 모르게 살짝 몸을 움츠렸다.
"신입생? 이야, 완전 애기네, 애기. 스무 살? 아, 아니다. 빠른인가? 아무튼 완전 파릇파릇하네. 말 편하게 해, 성민아. 형이라고 부르든가. 앞으로 최소 1년은 얼굴 맞대고 살아야 하는데, 첫날부터 너무 딱딱하게 굴면 서로 피곤하잖아."
넉살 좋은 준호의 말에 성민은 어쩔 줄 몰라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애기’라는 말이 조금 거슬렸지만, 대놓고 싫은 티를 낼 용기는 없었다. 준호는 그런 성민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연스럽게 성민의 뒤편,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이삿짐 박스 더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짐 되게 많네. 혼자 옮기느라 고생했겠다. 이쪽 침대 써. 창가 쪽이 그래도 좀 더 시원하니까. 옷장은 저쪽 칸 쓰면 되고. 뭐 정리하다가 필요한 거 있거나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바로바로 물어보고. 끙끙 앓지 말고."
준호는 마치 제집 안방을 소개하듯 편안하게 말하며,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이마와 목덜미의 땀을 슥슥 닦아냈다. 그 무심한 동작 하나하나에도 어딘가 모르게 시선이 갔다. 성민은 애써 그의 몸에서 시선을 떼려 노력하며 고개를 숙였다. 바닥만 바라보는 성민을 잠시 지켜보던 준호는, 짧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냉장고로 향했다.
"아, 더워 죽겠네. 운동하고 왔더니 목말라. 성민 너도 목마르지? 잠깐만 기다려봐."
작은 냉장고 문이 열리자 시원한 냉기가 확 풍겨 나왔다. 준호는 능숙하게 생수병 두 개를 꺼내, 그중 하나를 성민에게 툭 건넸다.
"자, 마셔. 이거라도 마시면 좀 나을 거야."
얼떨결에 차가운 물병을 받아든 성민은 손바닥에 전해지는 냉기에 잠시 더위를 잊는 듯했다. 물병 표면에는 이미 하얀 김이 서려 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그 물방울 몇 개가 그의 손가락 사이를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준호는 자신의 물병 뚜껑을 따서 단숨에 반 병 가까이 들이켰다. 그의 목울대가 시원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성민의 눈에 들어왔다. 물을 다 마신 준호는 젖은 입술을 무심하게 혀로 쓱 핥으며, 다시 성민을 바라보았다. 장난기 어렸던 이전의 눈빛과는 조금 다른, 조금 더 깊고 가늠하기 어려운 시선이었다. 그 시선에 성민은 저도 모르게 뺨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저녁이 되었고, 방 안은 형광등 불빛과 스탠드의 은은한 주황빛으로 채워졌다. 성민은 겨우 산더미 같던 짐 정리를 끝내고 지친 몸을 자신의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혔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준호가 나왔다. 김이 서린 욕실에서 풍기는 샴푸와 바디워시 향기가 방 안에 은은하게 퍼졌다. 그리고 성민은 숨을 헙, 하고 들이켰다. 샤워를 마친 준호는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상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허리에 수건만 아슬아슬하게 두르고 나온 것이다.
성민은 당황해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남자끼리 사는 자취방이라지만, 이건 너무… 예상치 못한 노출이었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는 척했지만, 시야 가장자리로는 물기에 젖어 반짝이는 준호의 탄탄한 가슴과 복근, 그리고 넓은 어깨가 어른거렸다. 준호는 그런 성민의 당황스러움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너무나 태연하게 자신의 옷장으로 다가가 편안한 반바지를 찾아 입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상의는 탈의한 채로, 자신의 침대에 털썩 걸터앉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툭툭 털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방 안에는 어색한 침묵과 함께 준호가 머리를 터는 소리, 그리고 휴대폰 액정을 누르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은은한 스탠드 조명 아래 드러난 준호의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하게 뻗은 등과 날렵한 허리 라인, 그리고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견갑골의 윤곽이 성민의 시선을 자꾸만 사로잡았다.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흘깃거리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 성민은 속으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침묵을 깬 것은 준호였다.
"성민아, 첫날인데 저녁은 먹었어? 피곤할 텐데. 뭐 시켜 먹을까? 아니면… 형이 간단하게 냉장고에 있는 걸로 뭐라도 뚝딱 만들어줄까?"
휴대폰에서 시선을 뗀 준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성민은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깨를 살짝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형. 저녁은… 아까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산 빵으로 대충… 때웠어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에이, 첫날인데 어떻게 그래. 자취 선배이자 룸메이트 형 된 기념으로 내가 한턱 쏠게. 사양하지 말고.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좋아하는 거 아무거나 말해봐."
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성민이 앉아 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성민의 바로 옆에 털썩 주저앉아 휴대폰 배달 앱을 켰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성민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샤워를 막 마친 준호에게서는 깨끗한 비누 향과 샴푸 향, 그리고 그의 체취가 뒤섞여 성민의 감각을 어지럽혔다. 준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성민 쪽으로 휴대폰 화면을 기울여 보여주며 물었다.
"자, 봐봐. 이 집 닭볶음탕이 기가 막히게 맛있는데, 매운 거 잘 먹나? 아니면 피자? 치킨? 뭐든 말만 해."
준호의 팔이 성민의 팔에 스치고, 그의 숨결이 귓가에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성민은 그의 맨 어깨와 팔 근육을 바로 옆에서 보게 되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그는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저… 저는 진짜 아무거나… 다 괜찮은데… 형 좋아하시는 걸로 시키세요…"
"음… 그래? 그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로 시킨다? 여기 닭볶음탕 진짜 맛있어. 대신 좀 매우니까 각오해야 할걸?"
준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문을 넣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성민은 바로 옆에서 보이는 준호의 옆얼굴을 훔쳐볼 수밖에 없었다. 조명 아래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과 반듯하면서도 날렵한 콧날, 그리고 살짝 올라가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꼬리.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룸메이트가… 너무 잘생긴 거 아닌가…’ 하는, 조금은 위험하고 엉뚱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달된 매콤한 닭볶음탕과 시원한 맥주 캔 몇 개가 작은 접이식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아직은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매콤한 음식 냄새와 톡 쏘는 맥주 덕분인지 이전보다는 조금 더 편안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준호는 학교생활의 팁이나 주변 맛집 정보, 혹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었고, 성민은 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었지만, 가끔씩 용기를 내어 자신의 고향 이야기나 대학 생활에 대한 기대를 조심스럽게 꺼내놓기도 했다.
"자, 아무튼! 앞으로 우리 싸우지 말고, 서로 배려하면서 잘 지내보자, 성민아! 건배!"
준호가 맥주 캔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성민도 서둘러 자신의 캔을 들어 그의 캔에 가볍게 부딪혔다. ‘쨍’하는 경쾌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네… 형.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 제가 뭐 잘못하거나 불편하게 해드리면 바로바로 말씀해주세요."
성민의 조심스러운 말에 준호는 맥주를 한 모금 크게 들이켜고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성민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이전보다 조금 더 짙고 깊어진 것 같았다.
"글쎄… 네가 날 불편하게 만들 일이… 과연 있으려나? 오히려… 반대가 될 수도 있고?"
준호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에 성민은 딸꾹질을 하며 마시던 맥주를 뿜을 뻔했다. 얼굴은 순식간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준호는 그런 성민의 반응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낮게 웃었다.
좁은 자취방 안, 이제 막 어색한 동거를 시작한 두 사람 사이의 온도는, 아직 서로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아주 느리지만 분명하게 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예측 불가능한 시간들에 대한 예고처럼.
방 한가운데에는 아직 채 풀지 못한 이삿짐 박스들이 제멋대로 쌓여 공간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성민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힘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며 짐을 옮기느라 온몸은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앞으로 1년, 혹은 그 이상을 지내야 할 이 낯선 공간. 그리고 더 큰 걱정은, 이미 이곳에 살고 있다는, 오늘 처음 만나게 될 룸메이트의 존재였다.
어떤 사람일까. 제발, 무던하고 조용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성민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먼저 입주해 살고 있다는 룸메이트의 흔적들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책상 위에는 전공 서적으로 보이는 두꺼운 책들과 노트북이 비교적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옆으로는 유명 인디 밴드의 포스터들이 여러 장 붙어 있었고, 구석에는 검은색 통기타가 스탠드에 세워져 있었다. 책상 의자에는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놓은 듯한 후드티가 걸려 있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자신과는 분명 다른 종류의 사람일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어쩌면… 조금은 감당하기 힘든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성민은 애써 불안감을 떨쳐내려 고개를 저으며, 가장 큰 이삿짐 박스를 열었다.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기가 풍기는 옷가지들을 꺼내 서툰 손길로 개기 시작했다. 옷장 문을 열자, 이미 반쯤 채워져 있는 다른 사람의 옷들이 보였다. 자신과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의, 어딘가 자유분방해 보이는 옷들. 그는 조심스럽게 빈칸을 찾아 자신의 옷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옷 몇 벌을 정리했을 뿐인데도 이마에는 다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에어컨은 사치였고, 낡은 선풍기 하나가 천장 구석에서 힘겹게 돌아가며 뜨거운 바람을 섞어낼 뿐이었다.
그때였다. 현관문 쪽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디지털 도어락이 해제되는 전자음이 울렸다. ‘삑- 삑- 삑- 띠리릭.’ 성민의 심장이 크게 덜컥 내려앉았다. 올 것이 왔구나.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몸을 굳힌 채, 천천히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는 성민이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훤칠하다 못해 모델 같은 키, 햇볕에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 아래로 단단하게 자리 잡은 근육들이 얇은 운동복 위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살짝 젖은 검은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털어 넘긴 듯 자연스러웠고, 깊은 눈매에는 장난기와 함께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듯한 묘한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누가 봐도 잘생겼다,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법한 외모. 그가 바로 이 방의 다른 주인이자, 성민의 룸메이트인 준호였다.
준호는 막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듯, 가벼운 러닝셔츠와 반바지 차림에 목에는 땀에 젖은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그는 방 안에 어색하게 서 있는 성민을 발견하자마자,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시원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시원한 운동 후의 열기와 희미한 땀 냄새, 그리고 남성적인 스킨 향이 뒤섞여 성민의 후각을 자극했다.
"어? 혹시 오늘 이사 온다는 룸메? 생각보다 일찍 왔네. 반가워! 나는 민준호.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준호는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목소리는 보기와는 다르게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동시에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성민은 얼떨결에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단단하고, 뜨거운 손이었다. 갑작스러운 악수에 당황한 성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는… 김성민이라고 합니다. 신소재공학과… 신입생이에요. 잘 부탁… 드립니다."
간신히 자기소개를 마친 성민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염소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준호는 그런 성민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혹은 귀엽다는 듯 눈을 휘어 접어 웃으며 잡았던 손을 놓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하고 쳤다. 예상치 못한 가벼운 스킨십에 성민은 저도 모르게 살짝 몸을 움츠렸다.
"신입생? 이야, 완전 애기네, 애기. 스무 살? 아, 아니다. 빠른인가? 아무튼 완전 파릇파릇하네. 말 편하게 해, 성민아. 형이라고 부르든가. 앞으로 최소 1년은 얼굴 맞대고 살아야 하는데, 첫날부터 너무 딱딱하게 굴면 서로 피곤하잖아."
넉살 좋은 준호의 말에 성민은 어쩔 줄 몰라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애기’라는 말이 조금 거슬렸지만, 대놓고 싫은 티를 낼 용기는 없었다. 준호는 그런 성민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연스럽게 성민의 뒤편,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이삿짐 박스 더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짐 되게 많네. 혼자 옮기느라 고생했겠다. 이쪽 침대 써. 창가 쪽이 그래도 좀 더 시원하니까. 옷장은 저쪽 칸 쓰면 되고. 뭐 정리하다가 필요한 거 있거나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바로바로 물어보고. 끙끙 앓지 말고."
준호는 마치 제집 안방을 소개하듯 편안하게 말하며,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이마와 목덜미의 땀을 슥슥 닦아냈다. 그 무심한 동작 하나하나에도 어딘가 모르게 시선이 갔다. 성민은 애써 그의 몸에서 시선을 떼려 노력하며 고개를 숙였다. 바닥만 바라보는 성민을 잠시 지켜보던 준호는, 짧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냉장고로 향했다.
"아, 더워 죽겠네. 운동하고 왔더니 목말라. 성민 너도 목마르지? 잠깐만 기다려봐."
작은 냉장고 문이 열리자 시원한 냉기가 확 풍겨 나왔다. 준호는 능숙하게 생수병 두 개를 꺼내, 그중 하나를 성민에게 툭 건넸다.
"자, 마셔. 이거라도 마시면 좀 나을 거야."
얼떨결에 차가운 물병을 받아든 성민은 손바닥에 전해지는 냉기에 잠시 더위를 잊는 듯했다. 물병 표면에는 이미 하얀 김이 서려 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그 물방울 몇 개가 그의 손가락 사이를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준호는 자신의 물병 뚜껑을 따서 단숨에 반 병 가까이 들이켰다. 그의 목울대가 시원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성민의 눈에 들어왔다. 물을 다 마신 준호는 젖은 입술을 무심하게 혀로 쓱 핥으며, 다시 성민을 바라보았다. 장난기 어렸던 이전의 눈빛과는 조금 다른, 조금 더 깊고 가늠하기 어려운 시선이었다. 그 시선에 성민은 저도 모르게 뺨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저녁이 되었고, 방 안은 형광등 불빛과 스탠드의 은은한 주황빛으로 채워졌다. 성민은 겨우 산더미 같던 짐 정리를 끝내고 지친 몸을 자신의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혔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준호가 나왔다. 김이 서린 욕실에서 풍기는 샴푸와 바디워시 향기가 방 안에 은은하게 퍼졌다. 그리고 성민은 숨을 헙, 하고 들이켰다. 샤워를 마친 준호는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상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허리에 수건만 아슬아슬하게 두르고 나온 것이다.
성민은 당황해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남자끼리 사는 자취방이라지만, 이건 너무… 예상치 못한 노출이었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는 척했지만, 시야 가장자리로는 물기에 젖어 반짝이는 준호의 탄탄한 가슴과 복근, 그리고 넓은 어깨가 어른거렸다. 준호는 그런 성민의 당황스러움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너무나 태연하게 자신의 옷장으로 다가가 편안한 반바지를 찾아 입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상의는 탈의한 채로, 자신의 침대에 털썩 걸터앉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툭툭 털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방 안에는 어색한 침묵과 함께 준호가 머리를 터는 소리, 그리고 휴대폰 액정을 누르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은은한 스탠드 조명 아래 드러난 준호의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하게 뻗은 등과 날렵한 허리 라인, 그리고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견갑골의 윤곽이 성민의 시선을 자꾸만 사로잡았다.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흘깃거리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 성민은 속으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침묵을 깬 것은 준호였다.
"성민아, 첫날인데 저녁은 먹었어? 피곤할 텐데. 뭐 시켜 먹을까? 아니면… 형이 간단하게 냉장고에 있는 걸로 뭐라도 뚝딱 만들어줄까?"
휴대폰에서 시선을 뗀 준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성민은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깨를 살짝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형. 저녁은… 아까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산 빵으로 대충… 때웠어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에이, 첫날인데 어떻게 그래. 자취 선배이자 룸메이트 형 된 기념으로 내가 한턱 쏠게. 사양하지 말고.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좋아하는 거 아무거나 말해봐."
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성민이 앉아 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성민의 바로 옆에 털썩 주저앉아 휴대폰 배달 앱을 켰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성민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샤워를 막 마친 준호에게서는 깨끗한 비누 향과 샴푸 향, 그리고 그의 체취가 뒤섞여 성민의 감각을 어지럽혔다. 준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성민 쪽으로 휴대폰 화면을 기울여 보여주며 물었다.
"자, 봐봐. 이 집 닭볶음탕이 기가 막히게 맛있는데, 매운 거 잘 먹나? 아니면 피자? 치킨? 뭐든 말만 해."
준호의 팔이 성민의 팔에 스치고, 그의 숨결이 귓가에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성민은 그의 맨 어깨와 팔 근육을 바로 옆에서 보게 되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그는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저… 저는 진짜 아무거나… 다 괜찮은데… 형 좋아하시는 걸로 시키세요…"
"음… 그래? 그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로 시킨다? 여기 닭볶음탕 진짜 맛있어. 대신 좀 매우니까 각오해야 할걸?"
준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문을 넣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성민은 바로 옆에서 보이는 준호의 옆얼굴을 훔쳐볼 수밖에 없었다. 조명 아래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과 반듯하면서도 날렵한 콧날, 그리고 살짝 올라가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꼬리.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룸메이트가… 너무 잘생긴 거 아닌가…’ 하는, 조금은 위험하고 엉뚱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달된 매콤한 닭볶음탕과 시원한 맥주 캔 몇 개가 작은 접이식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아직은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매콤한 음식 냄새와 톡 쏘는 맥주 덕분인지 이전보다는 조금 더 편안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준호는 학교생활의 팁이나 주변 맛집 정보, 혹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었고, 성민은 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었지만, 가끔씩 용기를 내어 자신의 고향 이야기나 대학 생활에 대한 기대를 조심스럽게 꺼내놓기도 했다.
"자, 아무튼! 앞으로 우리 싸우지 말고, 서로 배려하면서 잘 지내보자, 성민아! 건배!"
준호가 맥주 캔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성민도 서둘러 자신의 캔을 들어 그의 캔에 가볍게 부딪혔다. ‘쨍’하는 경쾌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네… 형.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 제가 뭐 잘못하거나 불편하게 해드리면 바로바로 말씀해주세요."
성민의 조심스러운 말에 준호는 맥주를 한 모금 크게 들이켜고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성민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이전보다 조금 더 짙고 깊어진 것 같았다.
"글쎄… 네가 날 불편하게 만들 일이… 과연 있으려나? 오히려… 반대가 될 수도 있고?"
준호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에 성민은 딸꾹질을 하며 마시던 맥주를 뿜을 뻔했다. 얼굴은 순식간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준호는 그런 성민의 반응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낮게 웃었다.
좁은 자취방 안, 이제 막 어색한 동거를 시작한 두 사람 사이의 온도는, 아직 서로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아주 느리지만 분명하게 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예측 불가능한 시간들에 대한 예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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