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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18 추천 : 0 글자수 : 8,526 자 2025-05-24
성민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이 대학 중앙 도서관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잠시 멈춰 섰다. 토요일 저녁, 황금 같은 주말 시간이었지만 중간고사 기간이 코앞으로 다가온 탓에 도서관 건물은 환하게 불을 밝힌 채 늦게까지 학업에 열중하는 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후텁지근한 바깥공기와는 다른, 서늘하고 정적인 공기가 그의 뺨을 감쌌다. 책 특유의 묵은 종이 냄새와 희미한 커피 향, 그리고 수많은 젊음들이 내뿜는 열띤 경쟁의 기운이 뒤섞여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는 마치 거대한 벌집 속으로 들어온 한 마리 벌처럼, 정숙을 요구하는 침묵 속에서 조심스럽게 열람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빈자리를 찾는 그의 눈에는 초조함과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단순히 앉을 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방금 전 자신이 저지른 어리석은 행동과 그로 인해 더욱 복잡해진 감정의 실타래로부터 잠시라도 숨을 곳을 찾는 심정이었다. 다행히 창가 구석진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는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다가가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딱딱한 나무 의자의 감촉이 그의 긴장된 신경을 조금이나마 현실로 되돌려 놓는 듯했다.
가방에서 다시 전공 서적과 노트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책 속의 깨알 같은 글씨 대신, 창밖으로 보이는 어둑해진 캠퍼스 풍경을 향해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한가롭게 거니는 연인들의 모습,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지나가는 학생들의 무리, 저 멀리 환하게 불 켜진 기숙사 건물의 창문들… 그 모든 평범한 풍경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마치 자신만이 투명한 유리 벽 너머, 다른 세계에 고립되어 있는 듯한 깊은 소외감이 그를 덮쳐왔다.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고, 대학에 합격해서 서울로 상경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고민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그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그것도 같은 방에 사는, 남자 룸메이트 형 때문에.
‘준호 형…’
그의 이름 석 자를 속으로 되뇌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다시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방금 전, 자신의 책상 옆에 아무렇지도 않게 주저앉아 과제를 도와주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너무나 가까웠던 거리, 귓가에 스치던 그의 숨결,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던 그의 눈빛…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속수무책으로 반응했던 자신의 몸과 마음. 성민은 괴로운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미쳤어. 이건 정상이 아니야.’ 그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나는 여자를 좋아해. 당연히 그래야만 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자를 보고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었어. 이건 그냥… 낯선 환경과 외로움 때문에 일시적으로 혼란스러운 것뿐이야. 아니면… 준호 형이 워낙 매력적인 사람이니까, 그냥 인간적인 호감을 조금… 이상하게 느끼는 걸 거야.’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합리화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여도, 심장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이 강렬한 떨림과 끌림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준호가 곁에 있을 때 느껴지는 아찔한 긴장감, 그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를 향한 시선을 거두기 어려운 이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책상 위에 펼쳐진 전공 서적의 복잡한 분자 구조 그림이 마치 뒤엉킨 자신의 감정 상태처럼 보였다. 안정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던 원자들이 외부의 자극(준호라는 존재)에 의해 결합이 끊어지고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모습. 그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공대생다운 비유였지만, 지금 자신의 상황을 너무나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나 있었던 건지도 몰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기를 좋아했던 학창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시끄럽게 떠드는 것보다는 조용히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것을 더 편안하게 여겼던 자신. 그런 성향 때문에 혹시 남들과는 다른 감정의 결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은…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쌓아온 세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그는 억지로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과제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샤프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문제 풀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 풀이 과정은 엉망진창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잠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열람실 안은 여전히 많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마다 자신의 목표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성민은 또다시 깊은 이질감을 느꼈다. 저들은 모두 자신처럼 이렇게 혼란스러운 감정 따위는 느끼지 않고, 오직 학업과 미래에만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겠지. 어쩌면 자신만이 이 세상에 잘못 떨어진, 외톨이 같은 존재는 아닐까.
시간은 어느덧 밤 10시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도서관 폐관 시간이 다가오면서 학생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성민 역시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명분이 없었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책과 노트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준호 형을 다시 마주해야 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도서관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밤 11시가 가까워진 시간, 캠퍼스는 낮의 활기와는 달리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길을 비추고 있었고, 차갑게 식은 밤공기가 옷깃 사이로 스며들어 몸을 떨게 했다. 성민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덜터덜 자취방으로 향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낮의 일에 대해 그가 먼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처럼 대할 수 있을까? 아니면 또다시 어색하게 굴어서 그를 불편하게 만들게 될까?
수많은 걱정과 시나리오들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차라리 준호 형이 잠들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작은 부분에서는 그와 마주 앉아 솔직하게 대화하고 싶다는 모순적인 마음도 고개를 들었다. 물론,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털어놓을 용기는 추호도 없었지만, 적어도 낮의 일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고 오해를 풀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이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내 익숙한 빌라 건물 앞에 도착했다. 성민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4층, 자신들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불이 꺼져 있었다. ‘자는 건가…?’ 약간의 안도감과 함께, 설명하기 힘든 아주 미미한 실망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는 깊은 심호흡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괜찮아. 그냥 조용히 들어가서 씻고 자면 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스스로를 다독이며 낡은 계단을 한 칸 한 칸 밟아 올라갔다.
4층 복도 끝, 익숙한 현관문 앞에 섰다. 주머니에서 열쇠 대신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15분. 이 시간이면 준호 형은 보통 깨어 있을 때가 많았다. 그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와 같은 속도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 띠- 띠- 띠리릭-’
경쾌한 전자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성민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방 안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만이 사물의 윤곽을 희미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스탠드 불빛 하나 없이 완벽한 어둠. 준호 형은 정말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성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신의 침대 쪽으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왔어?"
어둠 속에서 나지막하게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 성민은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한 충격과 함께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어오르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분명 준호의 침대 쪽이었다. 그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깨어 있었다. 그것도, 이 어둠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성민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마른침을 삼켰다. 어둠 속에서 준호의 형체가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아마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왜 불도 켜지 않고 이 어둠 속에 혼자 앉아 있었던 걸까. 성민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수만 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네, 형. 아직… 안 주무시고 계셨네요."
성민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려 노력했다. 어둠 속에서 준호가 몸을 돌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등골이 서늘해졌다.
"…과제는… 다 마무리했고?"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고 차분했다. 어딘가 모르게 무게감이 실려 있는 듯한 말투였다.
"아… 네. 뭐… 대충은요. 이제 거의 다… 끝냈어요."
또다시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솔직하게 과제를 하나도 못 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방 안에는 다시 무겁고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밤바람 소리와 성민 자신의 요란한 심장 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 성민은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씻고 와서 잠자리에 들면, 이 어색함도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몸이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준호가 무슨 말을 할지, 혹시… 낮의 일에 대해 직접적으로 물어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잔뜩 긴장한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성민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낮에는… 내가 미안했다."
성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미안하다니? 왜 형이 나한테 미안하다는 거지? 그는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어둠에 눈이 조금 익숙해지자, 침대에 앉아 있는 준호의 실루엣이 좀 더 분명하게 보였다. 그의 표정까지는 읽을 수 없었지만, 그의 자세나 분위기에서 평소와는 다른 진지함이 느껴졌다.
"네? 뭐가… 뭐가 미안하다는 거예요, 형?"
"아까… 과제 알려줄 때 말이야. 내가 너무… 부담스럽게 굴었나 싶어서. 네 표정이 너무 안 좋길래. 네가 그렇게 불편해하는 줄도 모르고… 혼자 신나서 떠든 것 같아서 좀… 그랬다."
준호의 말은 성민에게 또 다른 충격이었다. 그는 성민이 불편해했던 이유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당황하고 얼굴을 붉혔던 것이, 과제를 알려주는 그의 행동 자체가 부담스러워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진실을 말해야 할까? 사실은 형 때문이 아니라, 형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껴버린 나 자신 때문에 그랬던 거라고? 하지만 차마 그럴 용기는 없었다. 그의 오해가 차라리 지금 상황에서는 더 나은 선택지처럼 느껴졌다.
"아니에요! 절대 형 때문 아니에요! 제가… 제가 그냥 좀… 생각이 많아서 그랬어요. 과제도 너무 어렵고… 머리가 복잡해서… 형은 아무 잘못 없어요! 오히려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죄송해요, 제가 괜히 이상하게 굴어서…"
성민은 다급하게 변명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준호가 피식, 하고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푸흐, 야. 네가 왜 사과를 해.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솔직히 말해봐. 내가 너무… 스스럼없이 대해서 불편했던 거지? 막… 아무렇지도 않게 옷 벗고 돌아다니고 그런 거. 사실 좀… 생각이 짧긴 했어. 나는 남자끼리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네 입장에서는 충분히 불편하고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네가 워낙 조심스럽고 예의 바른 애니까. 앞으로는… 그런 부분들 좀 더 신경 쓸게. 조심할게."
준호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미안함을 담고 있었다. 그의 예상치 못한 반성과 사과에 성민은 오히려 자신이 너무 옹졸하고 예민하게 군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의 오해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지만, 자신을 배려해주려는 그의 진심 어린 마음은 충분히 느껴졌다.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무겁고 아렸다.
"…아니에요, 형. 진짜 괜찮아요. 형 말대로 남자끼리인데 뭐 어때요. 그냥… 제가 아직 좀… 낯을 많이 가려서 그래요. 성격이 좀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저도 형처럼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성민은 애써 밝고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준호가 다시 한번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푸흐, 너 진짜 웃긴다, 김성민. 꼭 그렇게 착한 말만 골라서 하더라.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더 미안해지고 신경 쓰이잖아, 임마."
준호는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섰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성민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그의 큰 형체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성민은 다시 숨을 멈추고 몸을 굳혔다. 준호는 성민의 바로 눈앞,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깊고 반짝이는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한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성민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정말…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 나 때문에 불편한 거… 진짜 없는 거지?"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듯 울리는 낮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 성민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네… 진짜예요. 정말 괜찮아요, 형."
"…그래. 알았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준호는 잠시 더 성민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듯하더니, 이내 그의 어깨를 이전보다 조금 더 힘주어, 다독이듯 두어 번 툭툭 치고는 다시 자신의 침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성민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가늘게 내쉴 수 있었다.
"피곤할 텐데 얼른 씻고 자라. 너 내일 아침 9시 수업이라며. 늦잠자지 말고."
"…네. 형도… 안녕히 주무세요."
성민은 마치 허락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타일이 깔린 욕실 바닥에 발을 딛고 문을 닫고 나서야, 그는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은 여전히 제멋대로 뛰고 있었지만, 아까 도서관에서 느꼈던 극도의 불안감이나 공포감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준호의 예상치 못한 사과와 배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느껴졌던 그의 진지하고 따뜻한 목소리가 성민의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아주 조금은… 다독여준 것 같았다.
비록 여전히 오해는 풀리지 않았지만, 그 오해 덕분에 오히려 그와 한 뼘 더 가까워진 듯한 묘한 기분. 그리고 그의 진심 어린 배려 속에서, 어쩌면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이 그렇게까지 끔찍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위안 같은 것을 얻은 듯했다.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조심스럽게 방으로 돌아오니, 준호는 이미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잠든 듯 보였다. 방 안에는 그의 고르고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낮게 울리고 있었다. 성민도 자신의 침대에 조용히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겼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옆 침대를 향해 벽을 세우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귀를 기울여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오늘 밤은 더 가깝고, 더 선명하게, 그리고 더… 안정적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성민의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롤러코스터를 탔다. 준호를 향한 낯설고 강렬한 떨림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자각하고 극심한 혼란에 빠졌으며, 그 감정 때문에 겁을 먹고 도망치듯 그를 피했다. 하지만 결국,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에게서 뜻밖의 위로와 안도감을 얻었다. 비록 그것이 서로의 진심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 오해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평화일지라도, 그의 진심 어린 사과와 따뜻한 배려는 분명 성민의 요동치던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어쩌면, 준호 형은 내가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다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느끼는 이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은… 어쩌면 그렇게까지 두려워하거나 필사적으로 부정할 필요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여전히 혼란스럽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를 무작정 피하거나 밀어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민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준호의 침대 윤곽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와의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경계선 위에서, 성민은 이제 무작정 도망치거나 눈을 감는 대신, 잠시 멈춰 서서 그의 숨결을, 그의 존재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느껴보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어떤 감정의 파도가 밀려와 자신을 덮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존재가 주는 낯선 떨림과 함께,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이 미묘한 위로의 온기를 조용히 음미하고 싶었다. 밤은 깊었고, 성민은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깊고 편안한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옆 침대에서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가 더 이상 불안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묘한 안정감을 주는 익숙한 배경음악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방 안의 온도는, 아주 조금 더 따뜻해져 있었다.
그는 마치 거대한 벌집 속으로 들어온 한 마리 벌처럼, 정숙을 요구하는 침묵 속에서 조심스럽게 열람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빈자리를 찾는 그의 눈에는 초조함과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단순히 앉을 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방금 전 자신이 저지른 어리석은 행동과 그로 인해 더욱 복잡해진 감정의 실타래로부터 잠시라도 숨을 곳을 찾는 심정이었다. 다행히 창가 구석진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는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다가가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딱딱한 나무 의자의 감촉이 그의 긴장된 신경을 조금이나마 현실로 되돌려 놓는 듯했다.
가방에서 다시 전공 서적과 노트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책 속의 깨알 같은 글씨 대신, 창밖으로 보이는 어둑해진 캠퍼스 풍경을 향해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한가롭게 거니는 연인들의 모습,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지나가는 학생들의 무리, 저 멀리 환하게 불 켜진 기숙사 건물의 창문들… 그 모든 평범한 풍경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마치 자신만이 투명한 유리 벽 너머, 다른 세계에 고립되어 있는 듯한 깊은 소외감이 그를 덮쳐왔다.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고, 대학에 합격해서 서울로 상경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고민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그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그것도 같은 방에 사는, 남자 룸메이트 형 때문에.
‘준호 형…’
그의 이름 석 자를 속으로 되뇌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다시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방금 전, 자신의 책상 옆에 아무렇지도 않게 주저앉아 과제를 도와주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너무나 가까웠던 거리, 귓가에 스치던 그의 숨결,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던 그의 눈빛…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속수무책으로 반응했던 자신의 몸과 마음. 성민은 괴로운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미쳤어. 이건 정상이 아니야.’ 그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나는 여자를 좋아해. 당연히 그래야만 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자를 보고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었어. 이건 그냥… 낯선 환경과 외로움 때문에 일시적으로 혼란스러운 것뿐이야. 아니면… 준호 형이 워낙 매력적인 사람이니까, 그냥 인간적인 호감을 조금… 이상하게 느끼는 걸 거야.’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합리화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여도, 심장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이 강렬한 떨림과 끌림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준호가 곁에 있을 때 느껴지는 아찔한 긴장감, 그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를 향한 시선을 거두기 어려운 이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책상 위에 펼쳐진 전공 서적의 복잡한 분자 구조 그림이 마치 뒤엉킨 자신의 감정 상태처럼 보였다. 안정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던 원자들이 외부의 자극(준호라는 존재)에 의해 결합이 끊어지고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모습. 그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공대생다운 비유였지만, 지금 자신의 상황을 너무나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나 있었던 건지도 몰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기를 좋아했던 학창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시끄럽게 떠드는 것보다는 조용히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것을 더 편안하게 여겼던 자신. 그런 성향 때문에 혹시 남들과는 다른 감정의 결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은…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쌓아온 세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그는 억지로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과제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샤프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문제 풀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 풀이 과정은 엉망진창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잠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열람실 안은 여전히 많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마다 자신의 목표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성민은 또다시 깊은 이질감을 느꼈다. 저들은 모두 자신처럼 이렇게 혼란스러운 감정 따위는 느끼지 않고, 오직 학업과 미래에만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겠지. 어쩌면 자신만이 이 세상에 잘못 떨어진, 외톨이 같은 존재는 아닐까.
시간은 어느덧 밤 10시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도서관 폐관 시간이 다가오면서 학생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성민 역시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명분이 없었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책과 노트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준호 형을 다시 마주해야 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도서관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밤 11시가 가까워진 시간, 캠퍼스는 낮의 활기와는 달리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길을 비추고 있었고, 차갑게 식은 밤공기가 옷깃 사이로 스며들어 몸을 떨게 했다. 성민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덜터덜 자취방으로 향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낮의 일에 대해 그가 먼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처럼 대할 수 있을까? 아니면 또다시 어색하게 굴어서 그를 불편하게 만들게 될까?
수많은 걱정과 시나리오들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차라리 준호 형이 잠들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작은 부분에서는 그와 마주 앉아 솔직하게 대화하고 싶다는 모순적인 마음도 고개를 들었다. 물론,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털어놓을 용기는 추호도 없었지만, 적어도 낮의 일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고 오해를 풀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이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내 익숙한 빌라 건물 앞에 도착했다. 성민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4층, 자신들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불이 꺼져 있었다. ‘자는 건가…?’ 약간의 안도감과 함께, 설명하기 힘든 아주 미미한 실망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는 깊은 심호흡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괜찮아. 그냥 조용히 들어가서 씻고 자면 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스스로를 다독이며 낡은 계단을 한 칸 한 칸 밟아 올라갔다.
4층 복도 끝, 익숙한 현관문 앞에 섰다. 주머니에서 열쇠 대신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15분. 이 시간이면 준호 형은 보통 깨어 있을 때가 많았다. 그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와 같은 속도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 띠- 띠- 띠리릭-’
경쾌한 전자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성민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방 안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만이 사물의 윤곽을 희미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스탠드 불빛 하나 없이 완벽한 어둠. 준호 형은 정말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성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신의 침대 쪽으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왔어?"
어둠 속에서 나지막하게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 성민은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한 충격과 함께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어오르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분명 준호의 침대 쪽이었다. 그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깨어 있었다. 그것도, 이 어둠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성민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마른침을 삼켰다. 어둠 속에서 준호의 형체가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아마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왜 불도 켜지 않고 이 어둠 속에 혼자 앉아 있었던 걸까. 성민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수만 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네, 형. 아직… 안 주무시고 계셨네요."
성민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려 노력했다. 어둠 속에서 준호가 몸을 돌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등골이 서늘해졌다.
"…과제는… 다 마무리했고?"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고 차분했다. 어딘가 모르게 무게감이 실려 있는 듯한 말투였다.
"아… 네. 뭐… 대충은요. 이제 거의 다… 끝냈어요."
또다시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솔직하게 과제를 하나도 못 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방 안에는 다시 무겁고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밤바람 소리와 성민 자신의 요란한 심장 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 성민은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씻고 와서 잠자리에 들면, 이 어색함도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몸이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준호가 무슨 말을 할지, 혹시… 낮의 일에 대해 직접적으로 물어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잔뜩 긴장한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성민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낮에는… 내가 미안했다."
성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미안하다니? 왜 형이 나한테 미안하다는 거지? 그는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어둠에 눈이 조금 익숙해지자, 침대에 앉아 있는 준호의 실루엣이 좀 더 분명하게 보였다. 그의 표정까지는 읽을 수 없었지만, 그의 자세나 분위기에서 평소와는 다른 진지함이 느껴졌다.
"네? 뭐가… 뭐가 미안하다는 거예요, 형?"
"아까… 과제 알려줄 때 말이야. 내가 너무… 부담스럽게 굴었나 싶어서. 네 표정이 너무 안 좋길래. 네가 그렇게 불편해하는 줄도 모르고… 혼자 신나서 떠든 것 같아서 좀… 그랬다."
준호의 말은 성민에게 또 다른 충격이었다. 그는 성민이 불편해했던 이유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당황하고 얼굴을 붉혔던 것이, 과제를 알려주는 그의 행동 자체가 부담스러워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진실을 말해야 할까? 사실은 형 때문이 아니라, 형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껴버린 나 자신 때문에 그랬던 거라고? 하지만 차마 그럴 용기는 없었다. 그의 오해가 차라리 지금 상황에서는 더 나은 선택지처럼 느껴졌다.
"아니에요! 절대 형 때문 아니에요! 제가… 제가 그냥 좀… 생각이 많아서 그랬어요. 과제도 너무 어렵고… 머리가 복잡해서… 형은 아무 잘못 없어요! 오히려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죄송해요, 제가 괜히 이상하게 굴어서…"
성민은 다급하게 변명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준호가 피식, 하고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푸흐, 야. 네가 왜 사과를 해.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솔직히 말해봐. 내가 너무… 스스럼없이 대해서 불편했던 거지? 막… 아무렇지도 않게 옷 벗고 돌아다니고 그런 거. 사실 좀… 생각이 짧긴 했어. 나는 남자끼리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네 입장에서는 충분히 불편하고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네가 워낙 조심스럽고 예의 바른 애니까. 앞으로는… 그런 부분들 좀 더 신경 쓸게. 조심할게."
준호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미안함을 담고 있었다. 그의 예상치 못한 반성과 사과에 성민은 오히려 자신이 너무 옹졸하고 예민하게 군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의 오해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지만, 자신을 배려해주려는 그의 진심 어린 마음은 충분히 느껴졌다.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무겁고 아렸다.
"…아니에요, 형. 진짜 괜찮아요. 형 말대로 남자끼리인데 뭐 어때요. 그냥… 제가 아직 좀… 낯을 많이 가려서 그래요. 성격이 좀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저도 형처럼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성민은 애써 밝고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준호가 다시 한번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푸흐, 너 진짜 웃긴다, 김성민. 꼭 그렇게 착한 말만 골라서 하더라.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더 미안해지고 신경 쓰이잖아, 임마."
준호는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섰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성민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그의 큰 형체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성민은 다시 숨을 멈추고 몸을 굳혔다. 준호는 성민의 바로 눈앞,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깊고 반짝이는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한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성민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정말…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 나 때문에 불편한 거… 진짜 없는 거지?"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듯 울리는 낮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 성민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네… 진짜예요. 정말 괜찮아요, 형."
"…그래. 알았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준호는 잠시 더 성민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듯하더니, 이내 그의 어깨를 이전보다 조금 더 힘주어, 다독이듯 두어 번 툭툭 치고는 다시 자신의 침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성민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가늘게 내쉴 수 있었다.
"피곤할 텐데 얼른 씻고 자라. 너 내일 아침 9시 수업이라며. 늦잠자지 말고."
"…네. 형도… 안녕히 주무세요."
성민은 마치 허락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타일이 깔린 욕실 바닥에 발을 딛고 문을 닫고 나서야, 그는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은 여전히 제멋대로 뛰고 있었지만, 아까 도서관에서 느꼈던 극도의 불안감이나 공포감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준호의 예상치 못한 사과와 배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느껴졌던 그의 진지하고 따뜻한 목소리가 성민의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아주 조금은… 다독여준 것 같았다.
비록 여전히 오해는 풀리지 않았지만, 그 오해 덕분에 오히려 그와 한 뼘 더 가까워진 듯한 묘한 기분. 그리고 그의 진심 어린 배려 속에서, 어쩌면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이 그렇게까지 끔찍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위안 같은 것을 얻은 듯했다.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조심스럽게 방으로 돌아오니, 준호는 이미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잠든 듯 보였다. 방 안에는 그의 고르고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낮게 울리고 있었다. 성민도 자신의 침대에 조용히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겼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옆 침대를 향해 벽을 세우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귀를 기울여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오늘 밤은 더 가깝고, 더 선명하게, 그리고 더… 안정적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성민의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롤러코스터를 탔다. 준호를 향한 낯설고 강렬한 떨림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자각하고 극심한 혼란에 빠졌으며, 그 감정 때문에 겁을 먹고 도망치듯 그를 피했다. 하지만 결국,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에게서 뜻밖의 위로와 안도감을 얻었다. 비록 그것이 서로의 진심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 오해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평화일지라도, 그의 진심 어린 사과와 따뜻한 배려는 분명 성민의 요동치던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어쩌면, 준호 형은 내가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다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느끼는 이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은… 어쩌면 그렇게까지 두려워하거나 필사적으로 부정할 필요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여전히 혼란스럽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를 무작정 피하거나 밀어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민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준호의 침대 윤곽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와의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경계선 위에서, 성민은 이제 무작정 도망치거나 눈을 감는 대신, 잠시 멈춰 서서 그의 숨결을, 그의 존재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느껴보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어떤 감정의 파도가 밀려와 자신을 덮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존재가 주는 낯선 떨림과 함께,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이 미묘한 위로의 온기를 조용히 음미하고 싶었다. 밤은 깊었고, 성민은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깊고 편안한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옆 침대에서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가 더 이상 불안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묘한 안정감을 주는 익숙한 배경음악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방 안의 온도는, 아주 조금 더 따뜻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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