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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80 추천 : 0 글자수 : 4,844 자 2025-06-11
성민의 갑작스러운 술 약속 제안에, 준호는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특유의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짧게 답장을 보내왔다. <좋아요. 오늘 저녁 8시, ‘녹턴’에서 봐요, 형.> ‘녹턴’은 <블루 문>보다는 조금 더 밝고 넓었지만, 여전히 도시의 소음에서 한 발짝 비켜난 듯한 고즈넉한 분위기를 간직한 위스키 바였다. 성민은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건 데이트인가? 아니면 그저 모델과 작가의 사적인 만남일 뿐인가.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어떤 답을 원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약속 시간이 정확히 되자, 준호가 바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는 <블루 문>에서처럼 말끔한 셔츠 차림도, 작업실에서의 시크한 터틀넥 차림도 아니었다. 편안해 보이는 짙은 색 니트에 청바지, 그리고 그 위에 걸친 낡은 가죽 재킷. 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이 흘렀다. 그는 익숙하게 바 안을 둘러보다가 성민을 발견하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먼저 와 계셨네요, 형."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모르게 약간의 거리가 느껴지는 듯했다.
"어… 어. 조금 일찍 도착했어." 성민은 어색하게 대답하며 자리를 권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오는 길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준호는 자연스럽게 성민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가죽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성민은 놓치지 않고 눈으로 좇았다. 웨이터가 다가와 주문을 받았고, 두 사람은 각자 좋아하는 위스키를 한 잔씩 시켰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라 성민이 머뭇거리는 사이, 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진… 잘 나왔어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성민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정말… 너무 잘 나왔어. 네가 워낙… 피사체로서 훌륭해서 그런지… 내가 찍었던 어떤 사진들보다도 마음에 들어."
"다행이네요. 형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준호는 잔을 들어 가볍게 흔들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호박색 액체가 잔 안에서 부드럽게 일렁였다. "근데 왜 갑자기 술 마시자고 했어요? 다음 촬영 얘기라도 하려고요?"
"아… 뭐, 그런 것도 있고. 그냥… 너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어서."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솔직한 속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준호는 잠시 놀란 듯 성민을 바라보더니, 이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저에 대해서요? 별거 없는데. 그냥… 이렇게 바에서 일하고, 가끔 형 사진 모델이나 해주고. 그게 다예요."
그의 대답은 너무나 가볍고 평범했지만, 성민은 그 이면에 무언가가 더 숨겨져 있음을 직감했다. <블루 문>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느꼈던 그의 깊은 눈빛, 그리고 촬영 중에 언뜻언뜻 비쳤던 슬픔과 고독의 그림자. 그는 결코 '별거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너는… 원래 사진 찍히는 거 좋아해? 아니면… 모델 경험이 있었던 건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꼭 프로 같았어."
성민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준호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음… 좋아한다기보다는… 익숙하다고 해야 하나? 뭐, 비슷한 일… 조금 해본 적은 있어요. 아주 예전에."
그의 대답은 여전히 모호했다. '비슷한 일'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민은 더 묻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에서 더 이상 캐묻지 말라는 듯한 미묘한 경계심을 읽고 입을 다물었다.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바텐더 일은 언제부터 한 거야? <블루 문> 분위기가 너랑 너무 잘 어울려서… 오래 했을 것 같았는데."
"글쎄요… 그것도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어요. 그냥… 어쩌다 보니 하게 됐네요."
준호는 여전히 자신의 과거에 대해 명확하게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듯했다. 그는 능숙하게 화제를 돌려 성민에게 질문을 던졌다.
"형은 왜 사진작가가 됐어요? 원래 꿈이었어요?"
성민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낡은 필름 카메라로 처음 세상을 담기 시작했을 때의 설렘, 사진 동아리 활동을 하며 밤새 암실에서 인화 작업을 하던 추억, 그리고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사진작가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까지. 술기운이 돌아서인지, 아니면 준호의 진지하게 들어주는 눈빛 때문인지, 성민은 평소의 자신답지 않게 꽤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준호는 말없이 성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눈빛은 따뜻했고, 때로는 공감하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짓기도 했다. 성민은 그런 그의 모습에 점점 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혼자 품고 있던 비밀 이야기를 믿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에게 털어놓는 듯한 기분이었다.
"형은… 정말 사진을 사랑하는구나." 성민의 이야기가 끝나자 준호가 나지막이 말했다. "눈빛만 봐도 알겠어요. 그 열정이 느껴져요."
"…고마워." 성민은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잔을 들어 위스키를 마셨다.
"그런 형한테 내가 모델이 되어줄 수 있어서… 기쁘네요. 형 사진 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준호는 잔을 들어 성민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쨍'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다시 한번 얽혔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뜨겁고, 그리고… 위험한 불꽃이 튀는 듯했다.
술잔이 몇 번 더 오가고, 시간은 깊어갔다. 취기가 오르면서 두 사람 사이의 경계는 더욱 희미해졌다. 성민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법한 질문들을 용기를 내어 던지기 시작했다.
"너는… 가족들이랑은 연락하고 지내?"
그 질문을 던진 순간, 성민은 아차 싶었다. 준호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웃음기가 사라지고 차갑게 굳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상처와 분노, 혹은 슬픔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가족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네요."
준호는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쳐 있었다. 성민은 그의 반응에 당황하며 서둘러 사과했다.
"아… 미안해, 준호야. 내가 너무 실례되는 질문을…"
"됐어요." 준호는 성민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바를 빠져나갔다. 혼자 남겨진 성민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건드려서는 안 될 그의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았다. 즐거웠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준호가 돌아왔다. 그의 얼굴은 다시 평소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눈빛 속의 차가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남은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형?"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사무적이었다. 성민은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모든 것을 망쳐버린 것 같았다.
"어… 그래. 그러자."
두 사람은 말없이 계산을 하고 바를 나섰다. 밤공기는 아까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나란히 걷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성민은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풀어보려 애썼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준호는 앞만 보며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의 단단하게 다문 입술과 굳은 옆모습에서 성민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견고한 벽을 느꼈다.
마침내 성민의 작업실 건물이 있는 골목 어귀에 도착했을 때, 준호가 걸음을 멈추고 성민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희미하게나마 미안함과 후회 같은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세요, 형. 조심해서 가고."
"너는… 괜찮아?" 성민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야 뭐… 늘 그렇죠." 준호는 짧게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외롭고 위태로워 보였다. 성민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작업실로 돌아온 성민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창가에 서서 밤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마음이 복잡하고 무거웠다. 준호의 감춰진 상처를 본의 아니게 건드려 버렸고, 그로 인해 그와의 관계에 또 다른 벽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되면서 그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 또한 강렬해졌다. 그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그를 괴롭히는 과거의 그림자는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자신은 과연 그 그림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성민은 책상 위에 놓인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오늘 밤, 바에서 찍었던 준호의 사진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웃고 있을 때조차 그의 눈빛 속에 언뜻언뜻 비치던 슬픔의 조각들. 성민은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나가고 싶었다. 그의 진짜 모습을,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위험하고 아픈 진실이라 할지라도.
창밖에는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잿빛 도시 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 소리가 성민의 마음을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그는 준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다음 촬영은… 언제 시간 괜찮아?>
그들의 관계는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간 듯했지만, 이제 성민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의 렌즈는 여전히, 그리고 더욱더 간절하게, 그림자 속에 숨겨진 준호를 향하고 있었다. 그 그림자의 깊이를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기꺼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약속 시간이 정확히 되자, 준호가 바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는 <블루 문>에서처럼 말끔한 셔츠 차림도, 작업실에서의 시크한 터틀넥 차림도 아니었다. 편안해 보이는 짙은 색 니트에 청바지, 그리고 그 위에 걸친 낡은 가죽 재킷. 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이 흘렀다. 그는 익숙하게 바 안을 둘러보다가 성민을 발견하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먼저 와 계셨네요, 형."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모르게 약간의 거리가 느껴지는 듯했다.
"어… 어. 조금 일찍 도착했어." 성민은 어색하게 대답하며 자리를 권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오는 길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준호는 자연스럽게 성민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가죽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성민은 놓치지 않고 눈으로 좇았다. 웨이터가 다가와 주문을 받았고, 두 사람은 각자 좋아하는 위스키를 한 잔씩 시켰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라 성민이 머뭇거리는 사이, 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진… 잘 나왔어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성민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정말… 너무 잘 나왔어. 네가 워낙… 피사체로서 훌륭해서 그런지… 내가 찍었던 어떤 사진들보다도 마음에 들어."
"다행이네요. 형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준호는 잔을 들어 가볍게 흔들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호박색 액체가 잔 안에서 부드럽게 일렁였다. "근데 왜 갑자기 술 마시자고 했어요? 다음 촬영 얘기라도 하려고요?"
"아… 뭐, 그런 것도 있고. 그냥… 너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어서."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솔직한 속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준호는 잠시 놀란 듯 성민을 바라보더니, 이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저에 대해서요? 별거 없는데. 그냥… 이렇게 바에서 일하고, 가끔 형 사진 모델이나 해주고. 그게 다예요."
그의 대답은 너무나 가볍고 평범했지만, 성민은 그 이면에 무언가가 더 숨겨져 있음을 직감했다. <블루 문>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느꼈던 그의 깊은 눈빛, 그리고 촬영 중에 언뜻언뜻 비쳤던 슬픔과 고독의 그림자. 그는 결코 '별거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너는… 원래 사진 찍히는 거 좋아해? 아니면… 모델 경험이 있었던 건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꼭 프로 같았어."
성민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준호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음… 좋아한다기보다는… 익숙하다고 해야 하나? 뭐, 비슷한 일… 조금 해본 적은 있어요. 아주 예전에."
그의 대답은 여전히 모호했다. '비슷한 일'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민은 더 묻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에서 더 이상 캐묻지 말라는 듯한 미묘한 경계심을 읽고 입을 다물었다.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바텐더 일은 언제부터 한 거야? <블루 문> 분위기가 너랑 너무 잘 어울려서… 오래 했을 것 같았는데."
"글쎄요… 그것도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어요. 그냥… 어쩌다 보니 하게 됐네요."
준호는 여전히 자신의 과거에 대해 명확하게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듯했다. 그는 능숙하게 화제를 돌려 성민에게 질문을 던졌다.
"형은 왜 사진작가가 됐어요? 원래 꿈이었어요?"
성민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낡은 필름 카메라로 처음 세상을 담기 시작했을 때의 설렘, 사진 동아리 활동을 하며 밤새 암실에서 인화 작업을 하던 추억, 그리고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사진작가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까지. 술기운이 돌아서인지, 아니면 준호의 진지하게 들어주는 눈빛 때문인지, 성민은 평소의 자신답지 않게 꽤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준호는 말없이 성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눈빛은 따뜻했고, 때로는 공감하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짓기도 했다. 성민은 그런 그의 모습에 점점 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혼자 품고 있던 비밀 이야기를 믿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에게 털어놓는 듯한 기분이었다.
"형은… 정말 사진을 사랑하는구나." 성민의 이야기가 끝나자 준호가 나지막이 말했다. "눈빛만 봐도 알겠어요. 그 열정이 느껴져요."
"…고마워." 성민은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잔을 들어 위스키를 마셨다.
"그런 형한테 내가 모델이 되어줄 수 있어서… 기쁘네요. 형 사진 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준호는 잔을 들어 성민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쨍'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다시 한번 얽혔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뜨겁고, 그리고… 위험한 불꽃이 튀는 듯했다.
술잔이 몇 번 더 오가고, 시간은 깊어갔다. 취기가 오르면서 두 사람 사이의 경계는 더욱 희미해졌다. 성민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법한 질문들을 용기를 내어 던지기 시작했다.
"너는… 가족들이랑은 연락하고 지내?"
그 질문을 던진 순간, 성민은 아차 싶었다. 준호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웃음기가 사라지고 차갑게 굳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상처와 분노, 혹은 슬픔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가족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네요."
준호는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쳐 있었다. 성민은 그의 반응에 당황하며 서둘러 사과했다.
"아… 미안해, 준호야. 내가 너무 실례되는 질문을…"
"됐어요." 준호는 성민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바를 빠져나갔다. 혼자 남겨진 성민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건드려서는 안 될 그의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았다. 즐거웠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준호가 돌아왔다. 그의 얼굴은 다시 평소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눈빛 속의 차가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남은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형?"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사무적이었다. 성민은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모든 것을 망쳐버린 것 같았다.
"어… 그래. 그러자."
두 사람은 말없이 계산을 하고 바를 나섰다. 밤공기는 아까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나란히 걷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성민은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풀어보려 애썼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준호는 앞만 보며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의 단단하게 다문 입술과 굳은 옆모습에서 성민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견고한 벽을 느꼈다.
마침내 성민의 작업실 건물이 있는 골목 어귀에 도착했을 때, 준호가 걸음을 멈추고 성민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희미하게나마 미안함과 후회 같은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세요, 형. 조심해서 가고."
"너는… 괜찮아?" 성민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야 뭐… 늘 그렇죠." 준호는 짧게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외롭고 위태로워 보였다. 성민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작업실로 돌아온 성민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창가에 서서 밤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마음이 복잡하고 무거웠다. 준호의 감춰진 상처를 본의 아니게 건드려 버렸고, 그로 인해 그와의 관계에 또 다른 벽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되면서 그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 또한 강렬해졌다. 그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그를 괴롭히는 과거의 그림자는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자신은 과연 그 그림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성민은 책상 위에 놓인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오늘 밤, 바에서 찍었던 준호의 사진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웃고 있을 때조차 그의 눈빛 속에 언뜻언뜻 비치던 슬픔의 조각들. 성민은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나가고 싶었다. 그의 진짜 모습을,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위험하고 아픈 진실이라 할지라도.
창밖에는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잿빛 도시 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 소리가 성민의 마음을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그는 준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다음 촬영은… 언제 시간 괜찮아?>
그들의 관계는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간 듯했지만, 이제 성민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의 렌즈는 여전히, 그리고 더욱더 간절하게, 그림자 속에 숨겨진 준호를 향하고 있었다. 그 그림자의 깊이를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기꺼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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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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