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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67 추천 : 0 글자수 : 6,218 자 2025-06-18
준호의 차가운 거절과 매몰찬 외면에도 불구하고, 성민의 마음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그의 눈빛, 그의 목소리, 그리고 그가 애써 감추려 했던 그 미세한 흔들림 속에서 성민은 여전히 진심의 편린들을 발견했다. 그가 자신을 밀어내는 것은 진심이 아닐 것이라고, 그에게는 분명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성민은 굳게 믿었다. <블루 문>에서의 그 서늘했던 밤 이후, 성민은 마치 집요한 스토커처럼, 그러나 한편으로는 길 잃은 강아지처럼, 준호의 궤적을 조심스럽게 좇기 시작했다.
그가 일하는 바 근처 카페에 죽치고 앉아 그가 출근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기도 했고, 그의 자취방으로 추정되는 낡은 오피스텔 건물 앞에서 불 꺼진 창문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준호는 철저하게 성민의 존재를 무시했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양 싸늘한 눈빛으로 스쳐 지나갔고, 성민이 용기를 내어 말을 걸려 하면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이어폰을 귀에 꽂아버렸다. 그럴 때마다 성민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기는 듯 아팠지만, 동시에 그의 완고한 태도 뒤에 숨겨진 무언가를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더욱 강하게 피어올랐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들의 관계가, 그들이 서로의 눈을 보며 나누었던 그 뜨거웠던 감정들이 정말 준호의 말처럼 하룻밤의 실수나 가벼운 유희 따위로 치부될 수는 없었다. 성민은 자신에게, 그리고 준호에게 그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궂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었다. 성민은 검은색 우산을 쓴 채 또다시 <블루 문> 앞, 맞은편 건물 처마 밑에 몸을 숨기고 서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바 안에서는 여전히 희미한 불빛과 나른한 재즈 음악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감을 하고 있을 준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외면당하는 관계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성민이 초조하게 바의 입구를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바의 뒷문 쪽, 좁고 어두운 골목 안에서 무언가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거친 남자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성민의 심장이 불안감으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준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그는 망설일 겨를도 없이 빗속을 뚫고 소리가 나는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골목길 안쪽,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펼쳐진 광경은 성민의 불길한 예감을 현실로 만들었다. 험악한 인상의 덩치 큰 남자 두 명이 준호를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준호의 얼굴은 이미 몇 군데 멍들고 부어 있었고, 찢어진 입가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하얀 셔츠는 흙탕물에 더럽혀져 있었고, 멱살을 잡힌 채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의 눈빛만은 굴복하지 않고, 마치 상처 입은 맹수처럼 독기 서린 빛을 뿜어내며 남자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준호가 피 섞인 침을 바닥에 뱉으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어허, 우리 시우. 오랜만에 봤는데 너무 빡빡하게 구는 거 아니야? 형들이 얼마나 널 보고 싶어 했는데." 앞장서서 준호의 멱살을 잡고 있던,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가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시우'. 그들은 준호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것이 준호의 진짜 이름이거나, 혹은 그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과거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갚을 돈 따위 없어. 그리고… 난 더 이상 당신들이 알던 예전의 내가 아니야. 그러니까 당장 꺼져." 준호는 고통 속에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하! 뭐가 달라졌는데? 여전히 이렇게 쥐뿔도 없는 인생, 어두컴컴한 뒷골목 바에서 술이나 팔고 있는 주제에." 옆에 서 있던 다른 남자가 조롱하듯 비웃었다. "아직도 그 잘난 얼굴 하나 믿고 까부는 거냐? 그때처럼… 또 한 번 몸이라도 팔아서 갚아보시든가? 우리가 아주 비싸게 사줄 용의는 있는데 말이야. 응?"
그 모욕적인 말에 준호의 눈빛이 살기마저 띠며 번뜩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남자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멱살을 잡힌 채라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남자는 그런 준호의 발악을 즐기려는 듯 더욱 세게 그의 몸을 벽에 밀쳤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준호의 등에서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만해요!"
바로 그때, 성민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골목 안으로 뛰어들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남자들과 준호 모두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형?" 준호가 당혹감과 불안감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여길 왜…"
"넌 또 뭐야? 꺼져, 애송아.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 덩치 큰 남자가 성민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경멸하듯 말했다.
하지만 성민은 물러서지 않았다. 비록 공포에 온몸이 떨리고 있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에 처한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남자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 사람한테서 당장 떨어져요!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하! 경찰? 웃기고 있네.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남자가 비웃으며 성민에게 다가오려던 순간, 준호가 남은 힘을 짜내 남자의 팔을 뿌리치며 성민 앞을 가로막았다.
"…내 일이야. 형은 빠져요. 어서 가요!" 준호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는 성민이 이 위험한 상황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싫어! 너 혼자 두고 어떻게 가!" 성민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남자들은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렸다.
"오호라? 이 순진하게 생긴 양반이 네 새로운 스폰서라도 되나 보지, 시우? 취향 한번 독특하네. 근데 어쩌나? 우리가 지금 좀 바빠서 말이야. 네 연애 놀이는 나중에 하고, 일단 돈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겠어?"
덩치 큰 남자가 다시 준호에게 달려들려던 찰나, 골목 입구 쪽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이미 경찰에 신고한 모양이었다. 남자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준호를 향해 협박하듯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오늘은 운 좋은 줄 알아, 시우. 하지만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조만간 다시 찾아올 테니, 그때까지 돈 준비해놔. 알았어?"
그들은 앙칼진 말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순식간에 골목 안에는 성민과 준호, 그리고 차갑게 내리는 빗소리만이 남았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 힘이 풀린 준호가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신음하며 옆구리를 감쌌다. 성민은 황급히 그에게 달려가 부축했다.
"준호야!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병원에 가야…"
"…괜찮아." 준호는 성민의 손을 뿌리치며 힘겹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 그리고… 형은 여길 어떻게 온 거야. 내가 형 때문에…"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거친 기침을 쏟아냈다.
"너 걱정돼서 왔어! 대체 무슨 일이야? 저 사람들은 누구고? 너한테 왜 돈을 달라고 하는 거야!" 성민은 울먹이며 다그쳤다.
"…알 거 없어요." 준호는 여전히 차갑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듯 비틀거렸다.
"준호야!" 성민은 다시 그를 부축하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번에는 준호도 그의 도움을 거부하지 않았다. 성민의 어깨에 기댄 그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일단 우리 작업실로 가자. 가서 상처부터 치료해야 해."
준호는 아무 말 없이 성민에게 몸을 맡겼다. 성민은 비틀거리는 그를 힘겹게 부축하며 빗속을 뚫고 자신의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성민은 준호를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히고, 서둘러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그의 찢어진 입가와 멍든 얼굴의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는 성민의 손길은 조심스러웠지만 떨리고 있었다. 준호는 말없이 눈을 감은 채 성민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과 체념, 그리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다.
치료를 마친 후, 성민은 젖은 수건으로 준호의 얼굴을 닦아주고 따뜻한 차를 건넸다. 준호는 말없이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성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이제… 말해줄 수 있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준호는 찻잔을 내려놓고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성민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둡고 고통스러운 과거였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어릴 때부터 뒷골목을 전전하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던 시간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던 어둠의 세계와 그 속에서 얽히게 된 위험한 관계들, 그리고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빚. 그는 성민을 만난 후 처음으로 과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꿈꾸었지만, 과거의 그림자는 끈질기게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성민을 밀어냈던 이유도, 자신 때문에 성민마저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준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성민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 아팠다. 그의 차가운 가면 뒤에 숨겨져 있던 깊은 상처와 고독을 이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준호의 옆에 앉아, 그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힘들었겠다. 혼자서…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성민의 따뜻한 위로에, 강한 척 버티고 있던 준호의 마지막 방어선마저 무너져 내렸다.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성민의 어깨에 기대어 서럽게 울었다. 성민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등을 토닥이며 그의 눈물을 함께 나누었다. 그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곁에서 함께 아파해주고 싶었다.
한참 동안 울고 나서야 준호는 조금 진정된 듯, 눈물 젖은 얼굴로 성민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경계심이나 냉담함 대신, 깊은 슬픔과 함께 성민을 향한 애틋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제 다 알았으니까… 나 떠날 거지, 형?"
준호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민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젖은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니. 안 떠나. 내가 말했잖아. 네가 어떤 사람이든, 네게 어떤 과거가 있든… 나는 네 곁에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나 때문에 형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 저놈들… 보통 놈들 아니야."
"괜찮아." 성민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너 혼자 아니잖아. 우리가… 함께 있잖아."
성민의 흔들림 없는 눈빛과 진심 어린 말에 준호는 다시 한번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성민의 손을 잡고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감사함과 미안함, 그리고 깊은 사랑이 담긴 입맞춤이었다.
그리고 그 입맞춤은 자연스럽게 더 깊고 뜨거운 것으로 이어졌다.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고 보듬어 안은 두 사람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갈망으로 서로를 원했다. 옷가지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지고, 뜨거운 살결이 서로에게 맞닿았다. 좁은 소파 위에서, 혹은 바닥에 깔린 러그 위에서, 그들은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온 것처럼 서로를 격렬하게 탐했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위태로운 현실 속에서 서로에게 유일한 구원이 되어주는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몸짓이었다. 성민은 준호의 상처 입은 몸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그의 고통을 함께 느꼈고, 준호는 성민의 따뜻한 품 안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위안과 안식을 찾았다.
격렬한 다툼 끝에 나누는 정사는 이전보다 더 거칠고, 더 절박하고, 더 애틋했다. 서로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떨어질 수 없는 강한 이끌림으로 서로를 갈망했다. 눈물과 땀, 그리고 타액이 뒤섞여 범벅이 된 채,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쾌락과 고통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은 비로소 온전하게 하나가 되었다. 서로의 그림자마저도 기꺼이 끌어안으며.
밤새도록 창밖에는 비가 내렸다. 도시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킨 빗소리만이 두 사람의 뜨거운 숨결과 뒤엉켜 작업실 안을 가득 메웠다. 그 밤, 그들은 서로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상처를 마주했고, 그 상처를 통해 역설적으로 더욱 깊고 단단하게 연결되었다. 폭풍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제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그 폭풍 속을 헤쳐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일하는 바 근처 카페에 죽치고 앉아 그가 출근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기도 했고, 그의 자취방으로 추정되는 낡은 오피스텔 건물 앞에서 불 꺼진 창문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준호는 철저하게 성민의 존재를 무시했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양 싸늘한 눈빛으로 스쳐 지나갔고, 성민이 용기를 내어 말을 걸려 하면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이어폰을 귀에 꽂아버렸다. 그럴 때마다 성민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기는 듯 아팠지만, 동시에 그의 완고한 태도 뒤에 숨겨진 무언가를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더욱 강하게 피어올랐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들의 관계가, 그들이 서로의 눈을 보며 나누었던 그 뜨거웠던 감정들이 정말 준호의 말처럼 하룻밤의 실수나 가벼운 유희 따위로 치부될 수는 없었다. 성민은 자신에게, 그리고 준호에게 그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궂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었다. 성민은 검은색 우산을 쓴 채 또다시 <블루 문> 앞, 맞은편 건물 처마 밑에 몸을 숨기고 서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바 안에서는 여전히 희미한 불빛과 나른한 재즈 음악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감을 하고 있을 준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외면당하는 관계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성민이 초조하게 바의 입구를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바의 뒷문 쪽, 좁고 어두운 골목 안에서 무언가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거친 남자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성민의 심장이 불안감으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준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그는 망설일 겨를도 없이 빗속을 뚫고 소리가 나는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골목길 안쪽,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펼쳐진 광경은 성민의 불길한 예감을 현실로 만들었다. 험악한 인상의 덩치 큰 남자 두 명이 준호를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준호의 얼굴은 이미 몇 군데 멍들고 부어 있었고, 찢어진 입가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하얀 셔츠는 흙탕물에 더럽혀져 있었고, 멱살을 잡힌 채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의 눈빛만은 굴복하지 않고, 마치 상처 입은 맹수처럼 독기 서린 빛을 뿜어내며 남자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준호가 피 섞인 침을 바닥에 뱉으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어허, 우리 시우. 오랜만에 봤는데 너무 빡빡하게 구는 거 아니야? 형들이 얼마나 널 보고 싶어 했는데." 앞장서서 준호의 멱살을 잡고 있던,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가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시우'. 그들은 준호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것이 준호의 진짜 이름이거나, 혹은 그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과거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갚을 돈 따위 없어. 그리고… 난 더 이상 당신들이 알던 예전의 내가 아니야. 그러니까 당장 꺼져." 준호는 고통 속에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하! 뭐가 달라졌는데? 여전히 이렇게 쥐뿔도 없는 인생, 어두컴컴한 뒷골목 바에서 술이나 팔고 있는 주제에." 옆에 서 있던 다른 남자가 조롱하듯 비웃었다. "아직도 그 잘난 얼굴 하나 믿고 까부는 거냐? 그때처럼… 또 한 번 몸이라도 팔아서 갚아보시든가? 우리가 아주 비싸게 사줄 용의는 있는데 말이야. 응?"
그 모욕적인 말에 준호의 눈빛이 살기마저 띠며 번뜩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남자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멱살을 잡힌 채라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남자는 그런 준호의 발악을 즐기려는 듯 더욱 세게 그의 몸을 벽에 밀쳤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준호의 등에서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만해요!"
바로 그때, 성민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골목 안으로 뛰어들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남자들과 준호 모두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형?" 준호가 당혹감과 불안감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여길 왜…"
"넌 또 뭐야? 꺼져, 애송아.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 덩치 큰 남자가 성민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경멸하듯 말했다.
하지만 성민은 물러서지 않았다. 비록 공포에 온몸이 떨리고 있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에 처한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남자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 사람한테서 당장 떨어져요!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하! 경찰? 웃기고 있네.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남자가 비웃으며 성민에게 다가오려던 순간, 준호가 남은 힘을 짜내 남자의 팔을 뿌리치며 성민 앞을 가로막았다.
"…내 일이야. 형은 빠져요. 어서 가요!" 준호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는 성민이 이 위험한 상황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싫어! 너 혼자 두고 어떻게 가!" 성민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남자들은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렸다.
"오호라? 이 순진하게 생긴 양반이 네 새로운 스폰서라도 되나 보지, 시우? 취향 한번 독특하네. 근데 어쩌나? 우리가 지금 좀 바빠서 말이야. 네 연애 놀이는 나중에 하고, 일단 돈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겠어?"
덩치 큰 남자가 다시 준호에게 달려들려던 찰나, 골목 입구 쪽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이미 경찰에 신고한 모양이었다. 남자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준호를 향해 협박하듯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오늘은 운 좋은 줄 알아, 시우. 하지만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조만간 다시 찾아올 테니, 그때까지 돈 준비해놔. 알았어?"
그들은 앙칼진 말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순식간에 골목 안에는 성민과 준호, 그리고 차갑게 내리는 빗소리만이 남았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 힘이 풀린 준호가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신음하며 옆구리를 감쌌다. 성민은 황급히 그에게 달려가 부축했다.
"준호야!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병원에 가야…"
"…괜찮아." 준호는 성민의 손을 뿌리치며 힘겹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 그리고… 형은 여길 어떻게 온 거야. 내가 형 때문에…"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거친 기침을 쏟아냈다.
"너 걱정돼서 왔어! 대체 무슨 일이야? 저 사람들은 누구고? 너한테 왜 돈을 달라고 하는 거야!" 성민은 울먹이며 다그쳤다.
"…알 거 없어요." 준호는 여전히 차갑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듯 비틀거렸다.
"준호야!" 성민은 다시 그를 부축하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번에는 준호도 그의 도움을 거부하지 않았다. 성민의 어깨에 기댄 그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일단 우리 작업실로 가자. 가서 상처부터 치료해야 해."
준호는 아무 말 없이 성민에게 몸을 맡겼다. 성민은 비틀거리는 그를 힘겹게 부축하며 빗속을 뚫고 자신의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성민은 준호를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히고, 서둘러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그의 찢어진 입가와 멍든 얼굴의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는 성민의 손길은 조심스러웠지만 떨리고 있었다. 준호는 말없이 눈을 감은 채 성민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과 체념, 그리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다.
치료를 마친 후, 성민은 젖은 수건으로 준호의 얼굴을 닦아주고 따뜻한 차를 건넸다. 준호는 말없이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성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이제… 말해줄 수 있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준호는 찻잔을 내려놓고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성민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둡고 고통스러운 과거였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어릴 때부터 뒷골목을 전전하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던 시간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던 어둠의 세계와 그 속에서 얽히게 된 위험한 관계들, 그리고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빚. 그는 성민을 만난 후 처음으로 과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꿈꾸었지만, 과거의 그림자는 끈질기게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성민을 밀어냈던 이유도, 자신 때문에 성민마저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준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성민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 아팠다. 그의 차가운 가면 뒤에 숨겨져 있던 깊은 상처와 고독을 이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준호의 옆에 앉아, 그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힘들었겠다. 혼자서…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성민의 따뜻한 위로에, 강한 척 버티고 있던 준호의 마지막 방어선마저 무너져 내렸다.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성민의 어깨에 기대어 서럽게 울었다. 성민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등을 토닥이며 그의 눈물을 함께 나누었다. 그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곁에서 함께 아파해주고 싶었다.
한참 동안 울고 나서야 준호는 조금 진정된 듯, 눈물 젖은 얼굴로 성민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경계심이나 냉담함 대신, 깊은 슬픔과 함께 성민을 향한 애틋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제 다 알았으니까… 나 떠날 거지, 형?"
준호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민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젖은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니. 안 떠나. 내가 말했잖아. 네가 어떤 사람이든, 네게 어떤 과거가 있든… 나는 네 곁에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나 때문에 형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 저놈들… 보통 놈들 아니야."
"괜찮아." 성민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너 혼자 아니잖아. 우리가… 함께 있잖아."
성민의 흔들림 없는 눈빛과 진심 어린 말에 준호는 다시 한번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성민의 손을 잡고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감사함과 미안함, 그리고 깊은 사랑이 담긴 입맞춤이었다.
그리고 그 입맞춤은 자연스럽게 더 깊고 뜨거운 것으로 이어졌다.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고 보듬어 안은 두 사람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갈망으로 서로를 원했다. 옷가지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지고, 뜨거운 살결이 서로에게 맞닿았다. 좁은 소파 위에서, 혹은 바닥에 깔린 러그 위에서, 그들은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온 것처럼 서로를 격렬하게 탐했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위태로운 현실 속에서 서로에게 유일한 구원이 되어주는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몸짓이었다. 성민은 준호의 상처 입은 몸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그의 고통을 함께 느꼈고, 준호는 성민의 따뜻한 품 안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위안과 안식을 찾았다.
격렬한 다툼 끝에 나누는 정사는 이전보다 더 거칠고, 더 절박하고, 더 애틋했다. 서로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떨어질 수 없는 강한 이끌림으로 서로를 갈망했다. 눈물과 땀, 그리고 타액이 뒤섞여 범벅이 된 채,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쾌락과 고통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은 비로소 온전하게 하나가 되었다. 서로의 그림자마저도 기꺼이 끌어안으며.
밤새도록 창밖에는 비가 내렸다. 도시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킨 빗소리만이 두 사람의 뜨거운 숨결과 뒤엉켜 작업실 안을 가득 메웠다. 그 밤, 그들은 서로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상처를 마주했고, 그 상처를 통해 역설적으로 더욱 깊고 단단하게 연결되었다. 폭풍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제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그 폭풍 속을 헤쳐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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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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