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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15 추천 : 0 글자수 : 5,884 자 2025-07-03
<블루 문>의 푸른 조명 아래서 나누었던 위스키 잔의 부딪힘은, 마치 그들의 위태롭고 불안했던 관계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챕터의 시작을 알리는 조용한 의식과 같았다. 그 밤 이후, 성민과 준호의 시간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밀도와 온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지독했던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거짓말처럼 찾아온 고요함. 그것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된 후의 평화라기보다는, 잿더미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 함께 맞이하는, 조심스럽고도 경건한 새벽의 기운과 닮아 있었다.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는 여전히 그들의 삶 주변을 희미하게 맴돌고 있었다. 준호를 옭아맸던 조직의 잔당들이 여전히 어딘가에 숨 쉬고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 그가 짊어져야 할 막막한 빚의 무게, 그리고 세상의 편견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까지.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길은 여전히 험난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서로의 가장 깊고 어두운 심연까지 들여다보고, 그 상처마저도 기꺼이 끌어안기로 약속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단한 뿌리이자 흔들림 없는 등대가 되어주고 있었다.
경찰의 보호 아래 머물렀던 낯선 임시 거처를 떠나, 그들은 다시 성민의 낡은 옥탑 작업실로 돌아왔다. 이전에는 성민 혼자만의 고독한 성역이었던 그 공간은, 이제 두 사람의 온기와 숨결, 그리고 함께 겪어낸 아픔과 사랑의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 그들만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 보금자리로 변모해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자, 겨울 초입의 싸늘하지만 상쾌한 공기가 밀려 들어와 밤새 쌓였던 불안의 잔재들을 씻어내는 듯했다.
"…집에 오니까 좋다."
창가에 서서 멀리 보이는 도시 풍경을 바라보던 준호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안도감과 함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작은 감격이 묻어 있었다. 성민은 말없이 다가가 그의 등 뒤에서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익숙하고 편안한 그의 체취가 느껴졌다.
"나도 좋아.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성민의 진심 어린 속삭임에 준호는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과거의 어둠에 갇혀 있지 않았다. 성민이라는 빛을 만나 새롭게 태어난 사람처럼, 맑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성민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고, 깊은 입맞춤을 건넸다. 뜨겁고 격정적이었던 이전의 키스와는 다른,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감사하는 듯한 부드럽고 감미로운 입맞춤이었다.
그들의 일상은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성민은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렌즈는 더 이상 도시의 어둡고 소외된 풍경만을 담지 않았다. 그는 이제 잿빛 건물 틈새를 비집고 피어난 작은 들꽃에서도, 허름한 골목길 담벼락에 그려진 서툰 그래피티에서도,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평범한 표정 속에서도 아름다움과 희망을 발견할 줄 알게 되었다. 특히, 그의 카메라가 가장 사랑하는 피사체는 단연 준호였다. 아침 햇살 속에서 잠든 그의 모습, 커피를 내리며 나른하게 하품하는 모습, 서툰 솜씨로 요리를 하다가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 혹은 창가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그의 고독하면서도 평화로운 옆모습까지. 성민은 그 모든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렌즈에 담았다. 그의 사진에는 준호를 향한 깊은 애정과 연민, 그리고 그를 통해 변화된 자신의 시선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사진이 이전보다 훨씬 더 깊어지고 따뜻해졌다고 이야기했고, 그의 작품은 점차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마침내, 작은 갤러리 관장의 눈에 띄어 생애 첫 개인전을 열게 되는 행운까지 찾아왔다. '그림자 속의 빛(Light in the Shadow)'이라는 주제로 열린 그의 사진전은, 비록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과 울림을 선사하며 조용한 반향을 일으켰다.
준호 역시 새로운 삶에 조금씩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블루 문>에서의 어둡고 위태로웠던 바텐더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그는 성민의 격려에 힘입어 동네의 작은 베이커리 카페에서 바리스타 겸 파티시에 보조로 일하기 시작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빵 반죽을 하고, 커피를 내리고, 서툰 솜씨로 케이크 장식을 배우는 일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는 그 속에서 처음으로 정직한 노동의 가치와 평범한 삶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었다. 손님들의 작은 칭찬 한마디에 얼굴을 붉히며 기뻐하고, 자신이 만든 커피나 빵을 성민에게 자랑스럽게 내미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스물여덟 청년의 모습이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그는, 성민이라는 따뜻한 햇살을 만나 마침내 땅에 발을 딛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얼굴에서는 과거의 그늘이 서서히 옅어져 갔고, 그 자리에는 건강한 생기와 함께 미래에 대한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준호가 짊어진 빚은 여전히 큰 부담이었고, 언제 다시 과거의 망령들이 그들을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완전히 떨쳐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혼자서 그 무게를 감당하지 않았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 방법을 고민했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묵묵히 현실과 맞서 싸워나갔다. 성민은 자신의 전시회 수익금 일부를 기꺼이 준호의 빚을 갚는 데 보탰고, 준호 역시 카페에서 받는 많지 않은 월급을 쪼개어 빚을 갚아나가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서로에 대한 책임감과 신뢰를 더욱 깊게 확인하며, 단순한 연인을 넘어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이제 격정적인 불꽃보다는, 깊은 밤 난롯가에서 타오르는 장작불처럼 은은하고 꾸준한 온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함께 장을 보고,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드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그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존재가 주는 안정감과 행복을 만끽했다. 좁은 옥탑방은 더 이상 고독한 예술가의 도피처나 상처 입은 영혼의 은신처가 아니었다. 그곳은 서로의 체온으로 데워진,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안전한 그들만의 작은 도시가 되어 있었다.
어느 눈이 소복하게 내리는 주말 아침이었다. 창밖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동화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성민은 평소보다 조금 늦잠에서 깨어났다. 옆자리를 보니 준호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밤새 내린 눈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찾아온 완벽한 휴식 때문인지, 그의 잠든 얼굴은 더없이 평화롭고 고요해 보였다. 성민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날카롭고 위태로웠던 인상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그의 얼굴에는 부드럽고 온화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사랑은 사람을 이렇게 변화시킬 수도 있구나, 새삼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
성민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뺨 위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 따뜻한 그의 체온.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에 가슴 벅찬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는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살며시 침대에서 빠져나온 성민은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낡은 필름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침대 가장자리에 조용히 걸터앉아, 잠든 준호의 모습을 뷰파인더에 담았다.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부드러운 겨울 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 위로 부서지듯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빛이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성민은 숨을 멈추고, 아주 조심스럽게 셔터를 눌렀다.
‘찰칵-’
아주 작고 낮은, 그러나 성민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기록될 소리. 그것은 단순히 피사체를 담는 행위를 넘어선, 사랑하는 이를 향한 그의 깊은 애정과 경외심, 그리고 그를 통해 발견한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와도 같았다. 그는 오랫동안 잿빛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렌즈는 더 이상 어둠만을 좇지 않았다. 그는 준호라는 빛을 통해, 그 그림자 속에서도 피어나는 눈부신 생명력과 희망을 발견했던 것이다.
셔터 소리에 준호가 잠결에 으음, 하고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자신을 향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성민의 모습이었다. 그는 잠이 덜 깬 몽롱한 눈으로 성민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뭐예요, 형. 아침부터 도촬이에요?"
그의 목소리는 잠기운에 푹 잠겨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너무 예뻐서."
성민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의 곁에 다시 누우며 속삭였다.
"네가 너무 예뻐서… 안 찍을 수가 없었어."
성민의 솔직한 고백에 준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는 성민의 품으로 파고들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형이 더 예뻐요."
"거짓말."
"진짠데."
두 사람은 아이처럼 투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찾아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아침 햇살처럼 따스하고, 갓 내린 눈처럼 순수하고, 깊은 겨울밤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키스. 그 키스는 곧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는 다정한 손길로 이어졌다.
옷가지들이 다시 한번 침대 아래로 떨어져 내렸지만,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망설임이나 불안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서로를 향한 완전한 신뢰와 깊은 사랑, 그리고 함께 있다는 충만한 행복감만이 가득했다. 성민은 준호의 몸 곳곳에 남은 희미한 상처 자국들에 이전보다 더 깊고 정성스럽게 입을 맞추었고, 준호는 그런 성민의 손길과 입맞춤에 온전히 몸을 맡기며 나른한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들의 몸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깊숙하게 하나로 얽혀들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나누는 사랑은 그 어떤 예술 작품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결합을 넘어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의 영혼을 위로하는, 가장 순수하고도 성스러운 교감이었다. 쾌락의 절정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고, 서로의 눈을 보며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나고, 그들은 땀으로 젖은 채 서로를 꼭 끌어안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창밖으로는 하얀 눈이 세상을 온통 뒤덮고 있었고, 방 안에는 두 사람의 사랑으로 데워진 따뜻한 온기만이 가득했다. 성민은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잠든 준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잿빛 도시는 간밤의 눈으로 새하얗게 정화되어 있었다. 마치 그들의 상처 입었던 과거가 깨끗이 씻겨 내려가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성민은 문득, 처음 준호를 만났던 <블루 문>을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낡고 어두운 재즈 바는 그에게 단순한 도피처가 아니라,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운명의 장소였을지도 모른다고. 그곳에서 만난 준호는 그의 삶에 예기치 않게 스며들어와 그의 세상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지만, 결국에는 그의 가장 깊은 외로움을 달래주고 그의 렌즈에 새로운 빛을 담아주었다.
그는 더 이상 도시의 그림자 속을 홀로 헤매는 고독한 사진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서로의 빛이 되어주며 그들만의 도시를 만들어가는 행복한 남자였다. 과거의 상처가 남긴 흉터는 여전히 남아있을 테고, 앞으로 또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두렵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그의 손을 잡아주고 함께 걸어갈 준호가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의 카메라 렌즈는 이제, 절망적인 어둠이 아닌, 그 어둠 속에서도 끝내 길을 잃지 않고 피어나는 눈부신 사랑의 빛을 담아낼 것이었다.
성민은 잠든 준호의 입술에 아주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의 곁에 누워 함께 눈을 감았다. 창밖의 세상은 온통 하얗게 빛나고 있었고, 그들의 작은 도시 안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을 따뜻하고 밝은 빛이 가득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새로운 시작일 뿐이었다. 그들만의 도시에서, 그들만의 빛으로 써 내려갈, 끝없는 사랑 이야기의 시작.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는 여전히 그들의 삶 주변을 희미하게 맴돌고 있었다. 준호를 옭아맸던 조직의 잔당들이 여전히 어딘가에 숨 쉬고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 그가 짊어져야 할 막막한 빚의 무게, 그리고 세상의 편견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까지.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길은 여전히 험난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서로의 가장 깊고 어두운 심연까지 들여다보고, 그 상처마저도 기꺼이 끌어안기로 약속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단한 뿌리이자 흔들림 없는 등대가 되어주고 있었다.
경찰의 보호 아래 머물렀던 낯선 임시 거처를 떠나, 그들은 다시 성민의 낡은 옥탑 작업실로 돌아왔다. 이전에는 성민 혼자만의 고독한 성역이었던 그 공간은, 이제 두 사람의 온기와 숨결, 그리고 함께 겪어낸 아픔과 사랑의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 그들만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 보금자리로 변모해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자, 겨울 초입의 싸늘하지만 상쾌한 공기가 밀려 들어와 밤새 쌓였던 불안의 잔재들을 씻어내는 듯했다.
"…집에 오니까 좋다."
창가에 서서 멀리 보이는 도시 풍경을 바라보던 준호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안도감과 함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작은 감격이 묻어 있었다. 성민은 말없이 다가가 그의 등 뒤에서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익숙하고 편안한 그의 체취가 느껴졌다.
"나도 좋아.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성민의 진심 어린 속삭임에 준호는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과거의 어둠에 갇혀 있지 않았다. 성민이라는 빛을 만나 새롭게 태어난 사람처럼, 맑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성민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고, 깊은 입맞춤을 건넸다. 뜨겁고 격정적이었던 이전의 키스와는 다른,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감사하는 듯한 부드럽고 감미로운 입맞춤이었다.
그들의 일상은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성민은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렌즈는 더 이상 도시의 어둡고 소외된 풍경만을 담지 않았다. 그는 이제 잿빛 건물 틈새를 비집고 피어난 작은 들꽃에서도, 허름한 골목길 담벼락에 그려진 서툰 그래피티에서도,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평범한 표정 속에서도 아름다움과 희망을 발견할 줄 알게 되었다. 특히, 그의 카메라가 가장 사랑하는 피사체는 단연 준호였다. 아침 햇살 속에서 잠든 그의 모습, 커피를 내리며 나른하게 하품하는 모습, 서툰 솜씨로 요리를 하다가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 혹은 창가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그의 고독하면서도 평화로운 옆모습까지. 성민은 그 모든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렌즈에 담았다. 그의 사진에는 준호를 향한 깊은 애정과 연민, 그리고 그를 통해 변화된 자신의 시선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사진이 이전보다 훨씬 더 깊어지고 따뜻해졌다고 이야기했고, 그의 작품은 점차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마침내, 작은 갤러리 관장의 눈에 띄어 생애 첫 개인전을 열게 되는 행운까지 찾아왔다. '그림자 속의 빛(Light in the Shadow)'이라는 주제로 열린 그의 사진전은, 비록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과 울림을 선사하며 조용한 반향을 일으켰다.
준호 역시 새로운 삶에 조금씩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블루 문>에서의 어둡고 위태로웠던 바텐더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그는 성민의 격려에 힘입어 동네의 작은 베이커리 카페에서 바리스타 겸 파티시에 보조로 일하기 시작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빵 반죽을 하고, 커피를 내리고, 서툰 솜씨로 케이크 장식을 배우는 일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는 그 속에서 처음으로 정직한 노동의 가치와 평범한 삶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었다. 손님들의 작은 칭찬 한마디에 얼굴을 붉히며 기뻐하고, 자신이 만든 커피나 빵을 성민에게 자랑스럽게 내미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스물여덟 청년의 모습이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그는, 성민이라는 따뜻한 햇살을 만나 마침내 땅에 발을 딛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얼굴에서는 과거의 그늘이 서서히 옅어져 갔고, 그 자리에는 건강한 생기와 함께 미래에 대한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준호가 짊어진 빚은 여전히 큰 부담이었고, 언제 다시 과거의 망령들이 그들을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완전히 떨쳐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혼자서 그 무게를 감당하지 않았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 방법을 고민했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묵묵히 현실과 맞서 싸워나갔다. 성민은 자신의 전시회 수익금 일부를 기꺼이 준호의 빚을 갚는 데 보탰고, 준호 역시 카페에서 받는 많지 않은 월급을 쪼개어 빚을 갚아나가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서로에 대한 책임감과 신뢰를 더욱 깊게 확인하며, 단순한 연인을 넘어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이제 격정적인 불꽃보다는, 깊은 밤 난롯가에서 타오르는 장작불처럼 은은하고 꾸준한 온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함께 장을 보고,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드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그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존재가 주는 안정감과 행복을 만끽했다. 좁은 옥탑방은 더 이상 고독한 예술가의 도피처나 상처 입은 영혼의 은신처가 아니었다. 그곳은 서로의 체온으로 데워진,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안전한 그들만의 작은 도시가 되어 있었다.
어느 눈이 소복하게 내리는 주말 아침이었다. 창밖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동화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성민은 평소보다 조금 늦잠에서 깨어났다. 옆자리를 보니 준호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밤새 내린 눈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찾아온 완벽한 휴식 때문인지, 그의 잠든 얼굴은 더없이 평화롭고 고요해 보였다. 성민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날카롭고 위태로웠던 인상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그의 얼굴에는 부드럽고 온화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사랑은 사람을 이렇게 변화시킬 수도 있구나, 새삼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
성민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뺨 위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 따뜻한 그의 체온.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에 가슴 벅찬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는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살며시 침대에서 빠져나온 성민은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낡은 필름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침대 가장자리에 조용히 걸터앉아, 잠든 준호의 모습을 뷰파인더에 담았다.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부드러운 겨울 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 위로 부서지듯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빛이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성민은 숨을 멈추고, 아주 조심스럽게 셔터를 눌렀다.
‘찰칵-’
아주 작고 낮은, 그러나 성민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기록될 소리. 그것은 단순히 피사체를 담는 행위를 넘어선, 사랑하는 이를 향한 그의 깊은 애정과 경외심, 그리고 그를 통해 발견한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와도 같았다. 그는 오랫동안 잿빛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렌즈는 더 이상 어둠만을 좇지 않았다. 그는 준호라는 빛을 통해, 그 그림자 속에서도 피어나는 눈부신 생명력과 희망을 발견했던 것이다.
셔터 소리에 준호가 잠결에 으음, 하고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자신을 향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성민의 모습이었다. 그는 잠이 덜 깬 몽롱한 눈으로 성민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뭐예요, 형. 아침부터 도촬이에요?"
그의 목소리는 잠기운에 푹 잠겨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너무 예뻐서."
성민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의 곁에 다시 누우며 속삭였다.
"네가 너무 예뻐서… 안 찍을 수가 없었어."
성민의 솔직한 고백에 준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는 성민의 품으로 파고들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형이 더 예뻐요."
"거짓말."
"진짠데."
두 사람은 아이처럼 투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찾아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아침 햇살처럼 따스하고, 갓 내린 눈처럼 순수하고, 깊은 겨울밤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키스. 그 키스는 곧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는 다정한 손길로 이어졌다.
옷가지들이 다시 한번 침대 아래로 떨어져 내렸지만,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망설임이나 불안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서로를 향한 완전한 신뢰와 깊은 사랑, 그리고 함께 있다는 충만한 행복감만이 가득했다. 성민은 준호의 몸 곳곳에 남은 희미한 상처 자국들에 이전보다 더 깊고 정성스럽게 입을 맞추었고, 준호는 그런 성민의 손길과 입맞춤에 온전히 몸을 맡기며 나른한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들의 몸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깊숙하게 하나로 얽혀들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나누는 사랑은 그 어떤 예술 작품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결합을 넘어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의 영혼을 위로하는, 가장 순수하고도 성스러운 교감이었다. 쾌락의 절정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고, 서로의 눈을 보며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나고, 그들은 땀으로 젖은 채 서로를 꼭 끌어안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창밖으로는 하얀 눈이 세상을 온통 뒤덮고 있었고, 방 안에는 두 사람의 사랑으로 데워진 따뜻한 온기만이 가득했다. 성민은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잠든 준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잿빛 도시는 간밤의 눈으로 새하얗게 정화되어 있었다. 마치 그들의 상처 입었던 과거가 깨끗이 씻겨 내려가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성민은 문득, 처음 준호를 만났던 <블루 문>을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낡고 어두운 재즈 바는 그에게 단순한 도피처가 아니라,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운명의 장소였을지도 모른다고. 그곳에서 만난 준호는 그의 삶에 예기치 않게 스며들어와 그의 세상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지만, 결국에는 그의 가장 깊은 외로움을 달래주고 그의 렌즈에 새로운 빛을 담아주었다.
그는 더 이상 도시의 그림자 속을 홀로 헤매는 고독한 사진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서로의 빛이 되어주며 그들만의 도시를 만들어가는 행복한 남자였다. 과거의 상처가 남긴 흉터는 여전히 남아있을 테고, 앞으로 또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두렵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그의 손을 잡아주고 함께 걸어갈 준호가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의 카메라 렌즈는 이제, 절망적인 어둠이 아닌, 그 어둠 속에서도 끝내 길을 잃지 않고 피어나는 눈부신 사랑의 빛을 담아낼 것이었다.
성민은 잠든 준호의 입술에 아주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의 곁에 누워 함께 눈을 감았다. 창밖의 세상은 온통 하얗게 빛나고 있었고, 그들의 작은 도시 안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을 따뜻하고 밝은 빛이 가득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새로운 시작일 뿐이었다. 그들만의 도시에서, 그들만의 빛으로 써 내려갈, 끝없는 사랑 이야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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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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