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민이 보낸 다음 촬영 약속 메시지에, 준호는 의외로 담담하게 답장을 보내왔다. 마치 지난밤 '녹턴'에서의 싸늘했던 분위기는 처음부터 없었던 일인 것처럼. <내일 오후 시간 괜찮아요. 형 작업실로 갈게요.> 그의 짧고 건조한 메시지에서 성민은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불안했다. 그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아니면 애써 괜찮은 척, 다시 벽을 세우고 있는 걸까.

다음 날 오후, 약속 시간에 맞춰 준호가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성민은 긴장된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준호는 평소처럼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져 있었고, 입가에는 억지로 끌어올린 듯한 희미한 미소만 걸려 있었다.

"기다렸어요, 형?"

준호가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 어서 와."

성민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맞이했다. 작업실 안으로 들어선 준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성민이 미리 준비해둔 촬영 공간으로 향했다. 오늘은 특별한 콘셉트 없이, 그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그의 모습을 담고 싶다고 성민은 미리 이야기해둔 상태였다.

"오늘은 뭘 하면 돼요, 형?" 준호가 조용히 물었다.

"그냥… 편하게 있어. 소파에 앉아도 좋고, 창밖을 봐도 좋고. 내가 알아서 찍을게."

준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가 옆 낡은 안락의자에 몸을 기댔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성민은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조용한 작업실 안에 셔터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촬영은 이전과는 다른, 무겁고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성민은 섣불리 말을 걸거나 디렉션을 하기 어려웠고, 준호 역시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카메라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두꺼운 유리 벽이 가로막고 있는 듯한 답답함. 성민은 그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지난밤의 일이 떠올라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준호가 앉아 있던 안락의자 옆 작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그의 휴대폰이 갑자기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발신자 표시 없이 숫자만 떠 있었다. 준호는 화면을 확인하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재빨리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휴대폰은 보란 듯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준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성민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숨을 죽인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전화일까. 누구길래 저렇게 굳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는 걸까.

"…됐다고 했잖아. 더 이상 나 찾아오지 마."
"……"
"약속? 웃기지 마. 이미 끝난 일이야."
"……"
"…나한테 상관하지 마. 내 인생이야."
"……"
"…다시는… 전화하지 마."

준호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휴대폰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유리창에 비친 그의 얼굴은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깊은 절망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성민은 그의 그런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숨기고 있던 어둠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는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준호야. 괜찮아?"

성민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준호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하려 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어? 어… 괜찮아요, 형. 그냥… 스팸 전화."

그의 서툰 변명에 성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모른 척해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오늘 촬영은 이만하면 된 것 같네. 피곤해 보이는데, 그만할까?"

"……네. 그럼 좋죠."

준호는 더 이상 작업실에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 재빨리 자신의 물건들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민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다음 촬영은…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형."

준호는 성민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서둘러 작업실을 빠져나갔다. 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홀로 남겨진 성민은 텅 빈 작업실 안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준호의 모습과 그의 통화 내용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끝난 일', '상관하지 마', '다시는 전화하지 마'… 그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걸까. 그의 과거에는 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그날 이후, 준호는 눈에 띄게 성민을 피하기 시작했다. 성민이 보내는 메시지에는 단답으로 답하거나 아예 읽지 않았고, 전화는 받지 않았다. <블루 문>에 찾아가도 그는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의 흔적은 성민의 일상에서 서서히 지워져 가고 있었다. 성민은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가 자신을 완전히 밀어내기로 결심한 걸까?

며칠 밤낮을 걱정과 불안 속에서 보내던 성민은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블루 문>을 찾아갔다. 다행히 그날은 준호가 바에 나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고, 눈빛은 공허했으며, 입가에는 냉소적인 미소마저 감돌았다. 그는 성민을 발견하고도 아는 척하지 않고, 다른 손님들과 기계적으로 대화를 나누며 술을 만들 뿐이었다.

성민은 바 테이블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다른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바 안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을 때, 성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준호야…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무슨 일 있었어?"

준호는 술잔을 닦던 손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성민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무감정했다.

"무슨 일 있었냐고요? 글쎄요… 별일 없었는데."

"거짓말하지 마. 너 뭔가 숨기는 거 있잖아. 그날 전화도 그렇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성민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형이 상관할 일 아니에요." 준호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왜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너는… 너는 나한테…" 성민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 이제 연인 아니었냐고, 서로 좋아한다고 고백하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의 차가운 태도 앞에서 그 말들은 힘없이 부서져 내렸다.

"우리? 우리 사이에 뭐가 있었는데요?" 준호가 비웃듯 말했다. "그냥… 하룻밤 실수였잖아요. 형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고. 아니에요?"

그의 잔인한 말에 성민은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그날 밤의 감정들, 서로의 눈을 보며 나누었던 고백들, 그 모든 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인가?

"준호야… 어떻게… 그런 말을…" 성민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뭘 새삼스럽게 그러세요. 원래 이런 관계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잠깐 즐거웠으면 된 거지.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형. 형만 피곤해져요."

준호는 일부러 더 차갑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단호해 보였다. 하지만 성민은 그의 가면 뒤에 숨겨진 깊은 고통과 두려움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성민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더 잔인하게 굴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야." 성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우리… 진심이었잖아."

"진심? 푸흐, 순진하시긴." 준호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만 가보세요. 저 마감해야 하니까."

그는 더 이상 성민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듯, 등을 돌리고 바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성민은 텅 빈 바 테이블에 홀로 남아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수조차 없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가 자신을 밀어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상처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자신에게 더 큰 아픔을 가져다줄지라도.

성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결심을 한 표정으로 바를 나섰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 준호의 뒤를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숨기고 있는 비밀의 실체를, 그리고 그를 괴롭히는 과거의 그림자를 직접 마주해야 했다. 위험한 속삭임은 이미 시작되었고, 성민은 이제 그 위험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그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