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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0 추천 : 0 글자수 : 4,720 자 2025-07-02
골목길에서의 처절했던 사투 이후, 성민과 준호의 삶은 또 한 번의 격랑을 맞이했다. 목숨을 위협받는 극도의 공포 속에서 서로를 지키려 했던 필사적인 몸부림은 그들의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현실의 무게는 더욱 무겁게 그들을 짓눌렀다. 준호의 팔에 남은 깊은 상처는 단순한 육체적 고통을 넘어, 그들이 처한 위험한 현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낙인과 같았다. 성민의 작업실은 더 이상 안전한 피난처가 될 수 없었고, 그들을 노리는 어둠의 그림자는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도시 전체를 뒤덮는 듯했다.
두 사람은 경찰의 보호 아래 임시 거처로 옮겨졌다. 경찰은 준호를 괴롭혔던 조직에 대한 수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지만, 그 뿌리가 생각보다 깊고 넓게 퍼져 있어 쉽사리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조직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움직였고, 준호와 성민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했던 하수인들은 꼬리 자르기 식으로 처벌받는 데 그칠 가능성이 높았다. 완전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 그들은 잠시 숨을 고르면서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낯선 임시 거처에서의 생활은 불편하고 불안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도, 밤에 들려오는 소음도 모두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불안정한 공간 속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버텨냈다. 성민은 밤새 악몽에 시달리는 준호의 등을 토닥여주었고, 준호는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리는 성민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서로의 두려움을 나누며, 위태로운 현실 속에서 서로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성민은 작업을 잠시 중단하고 준호의 곁을 지켰다. 그의 상처를 돌보고, 식사를 챙기고, 그가 잠 못 이루는 밤에는 조용히 곁에 앉아 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작가로서의 꿈과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한 고민은 잠시 잊은 채, 오직 준호를 지키고 그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의 헌신적인 모습에 준호는 깊은 감동과 함께 미안함을 느꼈다. 자신 때문에 그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괴로웠지만, 동시에 그의 변함없는 사랑 속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어쩌면 처음으로 느껴보는 깊은 안정감과 소속감을 경험하고 있었다.
"형… 나 때문에 너무 힘들죠. 미안해요."
어느 날 밤, 잠 못 들고 뒤척이던 준호가 성민에게 속삭였다.
"그런 말 하지 마."
성민은 그의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닦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힘들지 않아. 네 곁에 있는 게… 나는 좋아.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하지만… 형 인생까지 망치고 있는 것 같아서…" 준호의 목소리가 죄책감으로 떨렸다.
"망치다니? 절대 아니야." 성민은 그의 손을 잡고 힘주어 말했다.
"너를 만나고 나서… 나는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있어. 사랑이 뭔지, 용기가 뭔지, 그리고…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얼마나 강렬한 건지. 너는 내 인생을 망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의미 있게 만들어주고 있어."
성민의 진심 어린 고백에 준호는 말없이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고여 있었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눈빛 속에서 깊은 이해와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경찰 수사는 조금씩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준호가 용기를 내어 자신이 알고 있는 조직의 내부 정보들을 상세하게 증언했고, 그것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 조직의 핵심 인물 몇몇이 추가로 검거되었다. 물론 조직 전체를 와해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준호와 성민을 직접적으로 위협했던 세력은 상당 부분 약화된 것으로 보였다. 경찰은 그들에게 더 이상 직접적인 위협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들은 마침내 임시 거처를 나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성민의 작업실은 여전히 어수선했지만, 이제 그 공간은 두 사람에게 단순한 작업 공간이나 임시 거처가 아닌, 함께 위기를 극복하고 사랑을 확인했던 소중한 추억이 깃든 곳이 되어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정말 괜찮은 걸까?" 성민이 창밖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을 거야."
준호가 그의 옆에 서서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단단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설령 괜찮지 않다고 해도… 이제 우리는 함께잖아. 뭐든 이겨낼 수 있어."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함께 겪어낸 시련에 대한 회고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 그리고 앞으로 함께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그날 저녁, 준호는 성민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형. 우리… <블루 문>에 한번 가볼래요?"
성민은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블루 문>. 그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던 곳이자, 준호의 과거와 아픔이 서려 있는 곳. 그곳에 다시 가자고 제안하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이제… 더 이상 피하고 싶지 않아요. 형이랑 같이… 다시 가보고 싶어요."
준호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는 과거의 상처를 외면하는 대신,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싶은 듯했다. 성민은 그의 용기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낯익은 뒷골목을 걸어 <블루 문> 앞에 섰다. 여전히 깜빡거리는 파란색 네온 간판과 낡은 나무 문.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그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마음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준호는 잠시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하더니, 성민의 손을 잡고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바 안은 여전히 푸른빛 조명 아래 나른한 재즈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몇몇 손님들이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바 테이블 안쪽에서는 새로운 바텐더가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준호는 익숙하게 바 테이블 가장 안쪽, 그들이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자리에 성민을 이끌고 가서 앉았다.
새로운 바텐더는 준호를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준호 역시 담담하게 인사를 받고, 자신들이 마실 위스키 두 잔을 주문했다. 잠시 후, 호박색 액체가 담긴 잔이 그들 앞에 놓였다. 준호는 잔을 들어 성민에게 내밀었다.
"…우리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성민도 잔을 들어 그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맑고 청아한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가 재즈 선율과 함께 공간을 채웠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쌉싸름하면서도 깊은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들은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더 이상 불안하거나 어색한 침묵이 아니었다.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깊고 편안한 침묵이었다. 서로의 상처를 알고,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후에 찾아온 고요함.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응?"
"…여기서 형을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나요."
성민도 그날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에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던,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태롭고 매혹적이었던 그의 모습.
"나도 기억나. 네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어."
"그때 형이 저를 찍었던 사진…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그럼. 내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데." 성민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푸흐, 그래요?" 준호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형이 저를 왜 찍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냥…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나도 네가 왜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어. 뭔가… 사연이 많아 보였거든."
"…결국 그 사연까지 다 알게 되셨네요.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준호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성민은 그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후회 안 해." 성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너를 알게 된 것도, 네 과거를 알게 된 것도… 그리고 너와 함께 이 모든 일을 겪게 된 것도… 나는 후회하지 않아. 오히려 감사해. 너라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줘서."
성민의 진심 어린 말에 준호는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성민의 손등에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그의 입술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이 성민의 심장까지 흘러 들어오는 듯했다.
"…고마워요, 형. 정말… 고마워요."
그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의 눈빛 속에서, 맞잡은 손의 온기 속에서, 그들은 세상 그 어떤 언어보다 더 깊고 진실된 약속을 나누고 있었다. 과거의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앞으로 다가올 모든 시간들을 함께 걸어가겠다는 약속.
밤은 깊어갔고, <블루 문> 안에는 여전히 애잔하면서도 아름다운 재즈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그 선율처럼, 성민과 준호의 사랑 이야기도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격정적이었지만, 결국에는 서로를 향한 깊은 이해와 신뢰 속에서 잔잔하고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잿빛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시작된 그들의 만남은, 이제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빛처럼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앞날이 순탄하지만은 않겠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의 빛이 되어주며, 그들은 함께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블루 문>에서의 조용한 약속처럼, 변함없이.
두 사람은 경찰의 보호 아래 임시 거처로 옮겨졌다. 경찰은 준호를 괴롭혔던 조직에 대한 수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지만, 그 뿌리가 생각보다 깊고 넓게 퍼져 있어 쉽사리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조직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움직였고, 준호와 성민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했던 하수인들은 꼬리 자르기 식으로 처벌받는 데 그칠 가능성이 높았다. 완전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 그들은 잠시 숨을 고르면서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낯선 임시 거처에서의 생활은 불편하고 불안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도, 밤에 들려오는 소음도 모두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불안정한 공간 속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버텨냈다. 성민은 밤새 악몽에 시달리는 준호의 등을 토닥여주었고, 준호는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리는 성민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서로의 두려움을 나누며, 위태로운 현실 속에서 서로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성민은 작업을 잠시 중단하고 준호의 곁을 지켰다. 그의 상처를 돌보고, 식사를 챙기고, 그가 잠 못 이루는 밤에는 조용히 곁에 앉아 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작가로서의 꿈과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한 고민은 잠시 잊은 채, 오직 준호를 지키고 그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의 헌신적인 모습에 준호는 깊은 감동과 함께 미안함을 느꼈다. 자신 때문에 그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괴로웠지만, 동시에 그의 변함없는 사랑 속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어쩌면 처음으로 느껴보는 깊은 안정감과 소속감을 경험하고 있었다.
"형… 나 때문에 너무 힘들죠. 미안해요."
어느 날 밤, 잠 못 들고 뒤척이던 준호가 성민에게 속삭였다.
"그런 말 하지 마."
성민은 그의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닦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힘들지 않아. 네 곁에 있는 게… 나는 좋아.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하지만… 형 인생까지 망치고 있는 것 같아서…" 준호의 목소리가 죄책감으로 떨렸다.
"망치다니? 절대 아니야." 성민은 그의 손을 잡고 힘주어 말했다.
"너를 만나고 나서… 나는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있어. 사랑이 뭔지, 용기가 뭔지, 그리고…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얼마나 강렬한 건지. 너는 내 인생을 망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의미 있게 만들어주고 있어."
성민의 진심 어린 고백에 준호는 말없이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고여 있었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눈빛 속에서 깊은 이해와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경찰 수사는 조금씩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준호가 용기를 내어 자신이 알고 있는 조직의 내부 정보들을 상세하게 증언했고, 그것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 조직의 핵심 인물 몇몇이 추가로 검거되었다. 물론 조직 전체를 와해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준호와 성민을 직접적으로 위협했던 세력은 상당 부분 약화된 것으로 보였다. 경찰은 그들에게 더 이상 직접적인 위협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들은 마침내 임시 거처를 나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성민의 작업실은 여전히 어수선했지만, 이제 그 공간은 두 사람에게 단순한 작업 공간이나 임시 거처가 아닌, 함께 위기를 극복하고 사랑을 확인했던 소중한 추억이 깃든 곳이 되어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정말 괜찮은 걸까?" 성민이 창밖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을 거야."
준호가 그의 옆에 서서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단단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설령 괜찮지 않다고 해도… 이제 우리는 함께잖아. 뭐든 이겨낼 수 있어."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함께 겪어낸 시련에 대한 회고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 그리고 앞으로 함께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그날 저녁, 준호는 성민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형. 우리… <블루 문>에 한번 가볼래요?"
성민은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블루 문>. 그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던 곳이자, 준호의 과거와 아픔이 서려 있는 곳. 그곳에 다시 가자고 제안하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이제… 더 이상 피하고 싶지 않아요. 형이랑 같이… 다시 가보고 싶어요."
준호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는 과거의 상처를 외면하는 대신,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싶은 듯했다. 성민은 그의 용기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낯익은 뒷골목을 걸어 <블루 문> 앞에 섰다. 여전히 깜빡거리는 파란색 네온 간판과 낡은 나무 문.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그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마음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준호는 잠시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하더니, 성민의 손을 잡고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바 안은 여전히 푸른빛 조명 아래 나른한 재즈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몇몇 손님들이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바 테이블 안쪽에서는 새로운 바텐더가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준호는 익숙하게 바 테이블 가장 안쪽, 그들이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자리에 성민을 이끌고 가서 앉았다.
새로운 바텐더는 준호를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준호 역시 담담하게 인사를 받고, 자신들이 마실 위스키 두 잔을 주문했다. 잠시 후, 호박색 액체가 담긴 잔이 그들 앞에 놓였다. 준호는 잔을 들어 성민에게 내밀었다.
"…우리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성민도 잔을 들어 그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맑고 청아한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가 재즈 선율과 함께 공간을 채웠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쌉싸름하면서도 깊은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들은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더 이상 불안하거나 어색한 침묵이 아니었다.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깊고 편안한 침묵이었다. 서로의 상처를 알고,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후에 찾아온 고요함.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응?"
"…여기서 형을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나요."
성민도 그날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에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던,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태롭고 매혹적이었던 그의 모습.
"나도 기억나. 네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어."
"그때 형이 저를 찍었던 사진…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그럼. 내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데." 성민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푸흐, 그래요?" 준호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형이 저를 왜 찍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냥…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나도 네가 왜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어. 뭔가… 사연이 많아 보였거든."
"…결국 그 사연까지 다 알게 되셨네요.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준호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성민은 그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후회 안 해." 성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너를 알게 된 것도, 네 과거를 알게 된 것도… 그리고 너와 함께 이 모든 일을 겪게 된 것도… 나는 후회하지 않아. 오히려 감사해. 너라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줘서."
성민의 진심 어린 말에 준호는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성민의 손등에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그의 입술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이 성민의 심장까지 흘러 들어오는 듯했다.
"…고마워요, 형. 정말… 고마워요."
그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의 눈빛 속에서, 맞잡은 손의 온기 속에서, 그들은 세상 그 어떤 언어보다 더 깊고 진실된 약속을 나누고 있었다. 과거의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앞으로 다가올 모든 시간들을 함께 걸어가겠다는 약속.
밤은 깊어갔고, <블루 문> 안에는 여전히 애잔하면서도 아름다운 재즈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그 선율처럼, 성민과 준호의 사랑 이야기도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격정적이었지만, 결국에는 서로를 향한 깊은 이해와 신뢰 속에서 잔잔하고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잿빛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시작된 그들의 만남은, 이제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빛처럼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앞날이 순탄하지만은 않겠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의 빛이 되어주며, 그들은 함께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블루 문>에서의 조용한 약속처럼, 변함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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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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