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첫만남
조회 : 56 추천 : 0 글자수 : 4,618 자 2025-08-18
소율은 뇌진의 얼굴에서 두려움과 난처함이 뒤엉킨 기색을 단번에 읽어냈다.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쓰고 있었으나, 속마음을 숨기기에는 그의 표정이 지나치게 서툴렀다. 소율은 작은 숨을 고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울려 나온 방향으로 시선을 옮긴 순간, 그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다.
거기 서 있던 이는 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담비털과 짐승가죽을 엮어 만든 짧은 웃옷을 걸쳤고, 왜소한 소율을 내려다볼 만큼 키가 훤칠했다. 곧게 뻗은 몸선은 매끈하고 탄탄하여 서 있기만 해도 시선을 빼앗았다. 피부는 흔히 보는 만족 여인들과는 달리, 거친 기운이 전혀 없었다. 흰 설원 위에서 막 꺼낸 도자기처럼 맑고 고운 빛이 돌았고, 눈길이 스칠 때마다 묘한 설렘과 긴장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머리칼은 칠흑처럼 검었으며, 붉은 덩굴풀로 단단히 묶여 귀 옆으로 두 갈래의 가느다란 땋은 머리가 내려와 있었다. 나머지 머리칼은 등 뒤로 흘러내려 바람에 휘날렸고, 몇 올이 흩날릴 때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한층 더 도드라졌다.
그녀의 두 눈은 깊은 샘물 같았다. 겉보기에는 고요하고 맑아 보였으나, 그 안에는 한 점 한기(寒氣)가 비수처럼 흘러나왔고, 마주 보는 이의 심장을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이마에는 수정 가루처럼 빛나는 반짝임이 흩어져 설원의 햇살을 받아 반사되었고. 특히 미소를 지을 때 살짝 드러나는 하얀 작은 송곳니 두 개는, 그녀에게 야성의 매력을 덧칠해 주었다.
그녀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소율과 마찬가지로 만사였고, 몸에서 뻗어 나오는 기혈의 파고로 미루어 보아 응혈경 제삼층에 이른 듯했다. 그리고 소율의 시선을 사로잡은건 그녀의 뒤에 나란히 서있는 산을 옮겨다 놓은 듯한 만족 대한 셋이다. 눈빛은 얼음처럼 냉랭했으며, 흘러나오는 기혈의 기세는 북릉보다는 근소하게 약했지만, 여전히 보는 이를 압도하는 중압감을 품고 있었다.
그들의 팔과 목덜미, 쇄골 주변까지 이어진 문양은 특히 소율의 시선을 붙잡았다. 짙은 검은 무늬가 마치 살아 있는 지네처럼 꿈틀대는 듯 그려져 있었고,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소율은 그 문양을 무심한 듯 바라보다가 곧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뇌진! 너 감히 여길 다시 기웃거리다니!”
여인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목소리에는 맹수 같은 살기와 억눌린 분노가 가득했다.
뇌진은 멋쩍게 코를 긁적이며, 언제나처럼 어리숙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억지스러운 웃음은 상황을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여인의 분노를 더욱 격앙시켰다.
그녀는 분노로 치를 떨며 뇌진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지난번에도 네 억지 웃음에 속아 넘어 색만 칠한 잡초를 약초라 속이고는, 석폐 셋을 받아 챙겨갔잖아! ”
뇌진은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억울하다는 듯 말끝을 더듬으며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 그건 정말 몰랐어…… 나도 그냥 아무렇게나 두었던 건데, 네가 먼저 사겠다고 해서…… 난 그냥……”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인의 눈매가 매섭게 바뀌며 뇌진을 쏘아보았다.
“변명은 됐고 당장 석폐를 내놔!”
그 차가운 분노는 뇌진에게만 머무르지 않았다. 잠시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소율에게로도 시선이 스쳤으나, 삐쩍 마른 몸매와 평범한 외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듯 곧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뇌진은 억울함을 토로하려 다시 입을 열었지만, 그 순간 여인의 몸에서 서늘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녀 뒤에 서 있던 세 대한 또한 차갑게 기혈을 끌어올리며 위압감을 더했다. 퍼져나오는 기운은 눈덩이처럼 뇌진을 짓눌렀고, 그는 결국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변명을 삼켜내며 숨을 죽였다.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소율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뇌진, 저 여인이 네가 할아버지께 말했던, 우룡부의 사람 맞지?”
뇌진은 흠칫 놀라더니 소율을 흘끗 바라보고, 곧 황급히 뒤로 물러서 소율의 뒤에 섰다. 그의 태도는 마치 주군을 받들 듯 공손했다.
“소만께 아뢴 대로, 바로 그 여인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여인의 시선이 날카롭게 소율에게 꽂혔다. ‘소만’이라 불리는 이는 곧 만공의 계승 자격을 지닌 존재였다. 그녀는 순간 의아한 표정으로 소율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마를 찌푸렸다.
“소만이든 아니든 내 알 바 아냐. 석폐를 내놔.”
소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품에서 석폐 셋을 꺼내 보이며 담담히 말했다.
“석폐는 돌려줄 테니, 네가 뇌진에게서 사 간 약초도 돌려줘.”
여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으나, 곧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를 띠었다.
“그게 대체 무슨 약초라고 그러는 거지?”
“그건……” 뇌진이 반사적으로 입을 열려는 순간, 소율의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를 끊었다.
“그만.”
순간, 뇌진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감히 더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여인은 눈을 찌푸리더니, 잠시 망설인 끝에 품 속에서 보랏빛 풀 한 줌을 꺼냈다. 풀잎은 거칠었으나 온몸이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색깔은 섬뜩할 만큼 기괴했다.
소율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그는 무심한 척했으나, 손끝이 떨리는 것이 들킬까 싶을 정도로 숨을 고르며 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찰나, 여인은 은방울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홱 거두었다.
“흥, 왜 그렇게 급해? 이건 이미 내 거야. 내가 산 거니까!”
소율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석폐를 돌려줬으니 약초를 다시 받는 건 당연한거 아냐?”
여인은 소율을 뚫어지게 노려보다 비웃듯 말했다.
“네가 정말 소만이라면, 그걸 증명해 봐.”
소율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왼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응혈경 이층의 강렬한 기혈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억눌려 있던 힘이 한꺼번에 흘러나오자, 공기가 진동하며 주위로 서릿발 같은 긴장감이 퍼졌다.
그 순간, 여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고, 그녀 뒤의 세 대한 역시 눈빛이 번뜩였다. 그들의 즉시 여인에게 다가가 경계했고, 소율한테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소율은 그 대한들은 못본듯 여인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이 정도면 증명으로 충분하겠지. 이젠 약초를 내놔, 네가 원한다면 석폐 다섯 개까지 내어주마.”
그는 단호히 석폐 둘을 더 꺼내 손에 쥐었다.
“다섯 개다. 내놔라.”
여인은 잠시 흔들렸지만, 곧 입꼬리를 올렸다.
“다섯 개? 웃기지 마. 난 마음을 바꿨어. 이 풀을 원한다면 석폐 서른 개는 가져와야지!”
그녀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돌아섰다. 세 대한은 그녀 뒤에 바짝 붙어 호위하며 순식간에 북적이는 부방(部坊) 속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뇌진은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며 코끝을 긁적였다.
“소율, 넌 어떻게 그녀가 우룡부라는 걸 알았어?”
소율은 대답대신 무심히 그를 훑어보며 손을 내밀었다.
“네가 말한 석폐 넷 중, 아직 하나 남았지? 내놔라.”
뇌진은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지난번에 이미 써버렸어. 아, 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간다! 저녁에 여기서 보자!”
그는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황급히 발걸음을 돌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소율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뇌진이 늘 그렇듯 궁색한 변명으로 도망치듯 사라진 뒷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하아…… 결국 이 방법밖에 없는 건가.”
소율은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손끝은 무심히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내렸지만, 마음속은 복잡하게 뒤얽혀 있었다. 자신이 지닌 기혈의 흐름은 할아버지의 만술로 은폐된 상태였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이상 누구도 그의 힘을 눈치챌 수 없는데, 조금 전 그 여인을 상대로 굳이 기혈을 발산해 보인 것은 어쩌면 너무 서두른 선택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면, 뇌진이 빌려 준 석폐 두 개는 고스란히 잃고, 오히려 자신도 손해를 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는 어깨에 걸친 허름한 짐꾼용 가죽끈을 고쳐 매고, 북적이는 부방의 안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부방은 이미 한겨울의 매서운 눈바람 속에서도 활기가 가득했다. 크고 작은 초막집마다 사람들로 붐볐고, 눈 덮인 바닥 위에는 두터운 짐승가죽을 펼쳐 놓은 좌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 위에는 낯선 약초, 짐승의 뼈, 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사람들의 고함과 흥정하는 소리, 불길에 끓여지는 약탕의 김이 어우러져 눈보라 속에서도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소율은 생전 처음으로 이곳에 와본 터라,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호기심과 경계심이 교차했다.
그의 시선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다양한 물건들을 담아냈다. 어떤 장막 안에서는 두꺼운 짐승의 골격이 매달려 있었고, 다른 곳에서는 기묘한 빛깔의 약초를 한 움큼 묶어 값싸게 외치는 상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는 작게 정제된 약즙이 작은 뿔잔에 담겨 거래되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이때 소율은 눈앞의 짐승가죽 위에 작은 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맑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우룡연이잖아. 한 병에 석폐 하나라니.”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마신 게 얼마인데…… 석폐로 치면 도대체 얼마치였던 거지? 소홍도 적잖이 마셨는데……”
씁쓸하게 중얼거리던 그가 곧 몸을 돌리려 한 그 순간.
눈 덮인 좌판 위, 한 조각 짐승가죽 위에 놓인 물건 하나가 소율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는 무심코 발걸음을 옮겨 그 좌판 앞으로 다가갔다. 좌판 주인은 오십 전후로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헐렁한 짐승가죽 옷차림에 두 팔을 무릎 위로 얹고는 눈밭 위에 가부좌를 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소율의 눈빛은 곧바로 그 짐승가죽 위의 물건으로 향했고 호흡마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건.”
거기 서 있던 이는 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담비털과 짐승가죽을 엮어 만든 짧은 웃옷을 걸쳤고, 왜소한 소율을 내려다볼 만큼 키가 훤칠했다. 곧게 뻗은 몸선은 매끈하고 탄탄하여 서 있기만 해도 시선을 빼앗았다. 피부는 흔히 보는 만족 여인들과는 달리, 거친 기운이 전혀 없었다. 흰 설원 위에서 막 꺼낸 도자기처럼 맑고 고운 빛이 돌았고, 눈길이 스칠 때마다 묘한 설렘과 긴장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머리칼은 칠흑처럼 검었으며, 붉은 덩굴풀로 단단히 묶여 귀 옆으로 두 갈래의 가느다란 땋은 머리가 내려와 있었다. 나머지 머리칼은 등 뒤로 흘러내려 바람에 휘날렸고, 몇 올이 흩날릴 때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한층 더 도드라졌다.
그녀의 두 눈은 깊은 샘물 같았다. 겉보기에는 고요하고 맑아 보였으나, 그 안에는 한 점 한기(寒氣)가 비수처럼 흘러나왔고, 마주 보는 이의 심장을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이마에는 수정 가루처럼 빛나는 반짝임이 흩어져 설원의 햇살을 받아 반사되었고. 특히 미소를 지을 때 살짝 드러나는 하얀 작은 송곳니 두 개는, 그녀에게 야성의 매력을 덧칠해 주었다.
그녀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소율과 마찬가지로 만사였고, 몸에서 뻗어 나오는 기혈의 파고로 미루어 보아 응혈경 제삼층에 이른 듯했다. 그리고 소율의 시선을 사로잡은건 그녀의 뒤에 나란히 서있는 산을 옮겨다 놓은 듯한 만족 대한 셋이다. 눈빛은 얼음처럼 냉랭했으며, 흘러나오는 기혈의 기세는 북릉보다는 근소하게 약했지만, 여전히 보는 이를 압도하는 중압감을 품고 있었다.
그들의 팔과 목덜미, 쇄골 주변까지 이어진 문양은 특히 소율의 시선을 붙잡았다. 짙은 검은 무늬가 마치 살아 있는 지네처럼 꿈틀대는 듯 그려져 있었고,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소율은 그 문양을 무심한 듯 바라보다가 곧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뇌진! 너 감히 여길 다시 기웃거리다니!”
여인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목소리에는 맹수 같은 살기와 억눌린 분노가 가득했다.
뇌진은 멋쩍게 코를 긁적이며, 언제나처럼 어리숙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억지스러운 웃음은 상황을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여인의 분노를 더욱 격앙시켰다.
그녀는 분노로 치를 떨며 뇌진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지난번에도 네 억지 웃음에 속아 넘어 색만 칠한 잡초를 약초라 속이고는, 석폐 셋을 받아 챙겨갔잖아! ”
뇌진은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억울하다는 듯 말끝을 더듬으며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 그건 정말 몰랐어…… 나도 그냥 아무렇게나 두었던 건데, 네가 먼저 사겠다고 해서…… 난 그냥……”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인의 눈매가 매섭게 바뀌며 뇌진을 쏘아보았다.
“변명은 됐고 당장 석폐를 내놔!”
그 차가운 분노는 뇌진에게만 머무르지 않았다. 잠시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소율에게로도 시선이 스쳤으나, 삐쩍 마른 몸매와 평범한 외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듯 곧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뇌진은 억울함을 토로하려 다시 입을 열었지만, 그 순간 여인의 몸에서 서늘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녀 뒤에 서 있던 세 대한 또한 차갑게 기혈을 끌어올리며 위압감을 더했다. 퍼져나오는 기운은 눈덩이처럼 뇌진을 짓눌렀고, 그는 결국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변명을 삼켜내며 숨을 죽였다.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소율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뇌진, 저 여인이 네가 할아버지께 말했던, 우룡부의 사람 맞지?”
뇌진은 흠칫 놀라더니 소율을 흘끗 바라보고, 곧 황급히 뒤로 물러서 소율의 뒤에 섰다. 그의 태도는 마치 주군을 받들 듯 공손했다.
“소만께 아뢴 대로, 바로 그 여인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여인의 시선이 날카롭게 소율에게 꽂혔다. ‘소만’이라 불리는 이는 곧 만공의 계승 자격을 지닌 존재였다. 그녀는 순간 의아한 표정으로 소율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마를 찌푸렸다.
“소만이든 아니든 내 알 바 아냐. 석폐를 내놔.”
소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품에서 석폐 셋을 꺼내 보이며 담담히 말했다.
“석폐는 돌려줄 테니, 네가 뇌진에게서 사 간 약초도 돌려줘.”
여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으나, 곧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를 띠었다.
“그게 대체 무슨 약초라고 그러는 거지?”
“그건……” 뇌진이 반사적으로 입을 열려는 순간, 소율의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를 끊었다.
“그만.”
순간, 뇌진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감히 더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여인은 눈을 찌푸리더니, 잠시 망설인 끝에 품 속에서 보랏빛 풀 한 줌을 꺼냈다. 풀잎은 거칠었으나 온몸이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색깔은 섬뜩할 만큼 기괴했다.
소율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그는 무심한 척했으나, 손끝이 떨리는 것이 들킬까 싶을 정도로 숨을 고르며 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찰나, 여인은 은방울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홱 거두었다.
“흥, 왜 그렇게 급해? 이건 이미 내 거야. 내가 산 거니까!”
소율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석폐를 돌려줬으니 약초를 다시 받는 건 당연한거 아냐?”
여인은 소율을 뚫어지게 노려보다 비웃듯 말했다.
“네가 정말 소만이라면, 그걸 증명해 봐.”
소율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왼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응혈경 이층의 강렬한 기혈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억눌려 있던 힘이 한꺼번에 흘러나오자, 공기가 진동하며 주위로 서릿발 같은 긴장감이 퍼졌다.
그 순간, 여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고, 그녀 뒤의 세 대한 역시 눈빛이 번뜩였다. 그들의 즉시 여인에게 다가가 경계했고, 소율한테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소율은 그 대한들은 못본듯 여인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이 정도면 증명으로 충분하겠지. 이젠 약초를 내놔, 네가 원한다면 석폐 다섯 개까지 내어주마.”
그는 단호히 석폐 둘을 더 꺼내 손에 쥐었다.
“다섯 개다. 내놔라.”
여인은 잠시 흔들렸지만, 곧 입꼬리를 올렸다.
“다섯 개? 웃기지 마. 난 마음을 바꿨어. 이 풀을 원한다면 석폐 서른 개는 가져와야지!”
그녀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돌아섰다. 세 대한은 그녀 뒤에 바짝 붙어 호위하며 순식간에 북적이는 부방(部坊) 속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뇌진은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며 코끝을 긁적였다.
“소율, 넌 어떻게 그녀가 우룡부라는 걸 알았어?”
소율은 대답대신 무심히 그를 훑어보며 손을 내밀었다.
“네가 말한 석폐 넷 중, 아직 하나 남았지? 내놔라.”
뇌진은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지난번에 이미 써버렸어. 아, 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간다! 저녁에 여기서 보자!”
그는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황급히 발걸음을 돌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소율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뇌진이 늘 그렇듯 궁색한 변명으로 도망치듯 사라진 뒷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하아…… 결국 이 방법밖에 없는 건가.”
소율은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손끝은 무심히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내렸지만, 마음속은 복잡하게 뒤얽혀 있었다. 자신이 지닌 기혈의 흐름은 할아버지의 만술로 은폐된 상태였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이상 누구도 그의 힘을 눈치챌 수 없는데, 조금 전 그 여인을 상대로 굳이 기혈을 발산해 보인 것은 어쩌면 너무 서두른 선택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면, 뇌진이 빌려 준 석폐 두 개는 고스란히 잃고, 오히려 자신도 손해를 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는 어깨에 걸친 허름한 짐꾼용 가죽끈을 고쳐 매고, 북적이는 부방의 안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부방은 이미 한겨울의 매서운 눈바람 속에서도 활기가 가득했다. 크고 작은 초막집마다 사람들로 붐볐고, 눈 덮인 바닥 위에는 두터운 짐승가죽을 펼쳐 놓은 좌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 위에는 낯선 약초, 짐승의 뼈, 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사람들의 고함과 흥정하는 소리, 불길에 끓여지는 약탕의 김이 어우러져 눈보라 속에서도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소율은 생전 처음으로 이곳에 와본 터라,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호기심과 경계심이 교차했다.
그의 시선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다양한 물건들을 담아냈다. 어떤 장막 안에서는 두꺼운 짐승의 골격이 매달려 있었고, 다른 곳에서는 기묘한 빛깔의 약초를 한 움큼 묶어 값싸게 외치는 상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는 작게 정제된 약즙이 작은 뿔잔에 담겨 거래되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이때 소율은 눈앞의 짐승가죽 위에 작은 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맑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우룡연이잖아. 한 병에 석폐 하나라니.”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마신 게 얼마인데…… 석폐로 치면 도대체 얼마치였던 거지? 소홍도 적잖이 마셨는데……”
씁쓸하게 중얼거리던 그가 곧 몸을 돌리려 한 그 순간.
눈 덮인 좌판 위, 한 조각 짐승가죽 위에 놓인 물건 하나가 소율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는 무심코 발걸음을 옮겨 그 좌판 앞으로 다가갔다. 좌판 주인은 오십 전후로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헐렁한 짐승가죽 옷차림에 두 팔을 무릎 위로 얹고는 눈밭 위에 가부좌를 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소율의 눈빛은 곧바로 그 짐승가죽 위의 물건으로 향했고 호흡마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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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魔)의 이름으로, 세상에 군림하리
30.제30장 월익의 귀환, 그리고 구원조회 : 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96 29.제29장 화만의 부락조회 : 1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35 28.제28장. 혈월강림, 월익의 광무조회 : 1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432 27.제27장 만신의 저주, 월익의 강림조회 : 3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457 26.제26장. 혈월(血月)의 밤조회 : 3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893 25.제25장 화근의 씨앗조회 : 4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184 24.제24장. 은밀한 거래조회 : 4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39 23.제23장. 첫만남조회 : 5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618 22.제22장. 변치 않으리...조회 : 6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03 21.제21장. 차가운 시선, 식지 않는 갈망조회 : 8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93 20.제20장. 서리바람 속의 재회조회 : 7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25 19.제19장. 석문 너머조회 : 8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55 18.제18장. 선만의 축복조회 : 7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835 17.제17장. 혈맥의 비밀과 할아버지의 경고조회 : 8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92 16.제16장. 귀향조회 : 10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410 15.제15장. 절망을 길들이는 자조회 : 5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82 14.제14장. 사만(邪蠻)의 그림자, 육치의 도주조회 : 6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92 13.제13장. 육혈 각성, 흑산의 추격자조회 : 8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398 12.제12장. 청진산의 효능조회 : 7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724 11.제11장. 혈산과 청진산조회 : 8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2,659 10.제10장 수산(淬散)조회 : 5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689 9.제9장 흑염봉(黑炎峰)조회 : 5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313 8.제8장. 기억의 문, 약석(藥石)의 비밀조회 : 5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2,559 7.제7장. 숨겨진 선물, 깨어나는 혈맥조회 : 6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235 6.제6장. 피로 각성한 의지, 그리고 첫 걸음조회 : 8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049 5.제5장 별을 향한 균열조회 : 7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152 4.제4장 밤의 망설임조회 : 10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2,998 3.제3장 만계(蠻啟)조회 : 16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248 2.제2장 소율 (韶律)조회 : 17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2,915 1.제1장 마서(魔序)조회 : 32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1,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