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은밀한 거래
조회 : 42 추천 : 0 글자수 : 5,139 자 2025-08-20
노인은 누군가 다가옴을 눈치챘는지 서서히 눈을 떴다. 스치듯 소율의 전신을 훑던 그는 잠시 뜻밖이라는 기색을 보였으나, 몇 번 더 유심히 살피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소율의 시선은 곧장 노인 앞에 펼쳐진 거친 짐승가죽 위에 고정되었다. 그 위에 놓인 물건은 얼핏 접시와 비슷했으나 가장자리는 칼날처럼 예리했고, 표면에는 깊고 굵은 균열이 겹겹이 얽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균열은 조금만 힘이 더해져도 당장 산산조각 날 듯 위태로웠다. 물건은 고요히 놓여 있었으나 간헐적으로 은은한 빛을 내뿜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균열 사이로 드러난 문양은 음산했다. 흉악하게 일그러진 귀면(鬼面)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섬뜩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건 파손된 만기(蠻器)다. 네겐 어울리지 않아. 살 수도 없을 거다.”
소율이 자세히 들여다보던 중, 옆에서 노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기……?”
이미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확신이 입 밖으로 새어나오자 소율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오래전 할아버지에게서 전해 받은 가죽 책에서 그는 분명히 읽었다. 만기는 극도로 귀중한 보물로 오직 개진경(開塵境)에 오른 강자만이 제련하고 다룰 수 있다. 응혈경(凝血境)에 불과한 자가 손에 넣을 일은 거의 없고, 설사 소유한다 해도 지켜낼 힘이 없다면 보물은 곧 화근이 된다.
“비록 파손되어 제 기능은 못 하지만, 그래도 개진경 강자가 제련한 물건이다. 값은…… 석폐 천.”
담담한 음성 속에 묘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소율의 시선은 푸른빛을 띤 원반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눈빛에 선망과 갈망이 짙게 어려 있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그의 전 재산은 고작 석폐 다섯. ‘천’이라는 숫자 앞에서 손을 뻗어 볼 여지조차 없었다.
그는 깊게 들이쉰 숨을 길게 내쉬고, 마지막으로 푸른 만기를 눈에 새기듯 오래 바라보았다. 미련을 억지로 잘라내듯 천천히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과연 언제쯤이면…… 나만의 만기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북적이는 부방(部坊)의 길을 따라 걸으며, 소율은 조용히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부방의 구석구석에는 짐승가죽을 깔아 만든 좌판들이 질서 없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길을 지나는 이들 사이로 상인들의 고함과 호객 소리가 뒤엉켜, 공기 자체가 시장의 열기와 냄새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소율이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보아도, 더 이상 만기를 내놓은 이는 없었다. 그 푸른 원반이 유일무이했음을 실감하는 순간, 가슴속에서 아쉬움이 더 깊어졌다.
대신 곳곳에서 눈에 띄는 것은 로운엽이었다. 상인들은 크기와 빛깔이 제각각인 잎사귀들을 가지런히 늘어놓고 있었고, 그 가격은 혀를 내두를 만큼 높았다. 단 한 줄기에 석폐 하나. 희귀 약재로 꼽히는 우룡연과 맞먹는 값이었다.
해는 서서히 기울어 저녁빛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붉고 금빛이 섞인 석양의 마지막 빛줄기가 대지 위로 흘러내려 장터를 은은하게 감쌌다. 그러나 부방의 분위기는 고요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활기를 띠었다. 인파는 더욱 늘어나 웅성거림과 발걸음 소리가 사방에서 얽혀들었고, 가죽 좌판마다 호객하는 목소리와 거래가 성사되는 소리가 쉼 없이 오갔다.
소율은 하늘빛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가늠하더니, 이번에는 천막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평범한 좌판과 달리 값비싼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검증된 품질만큼이나 가격도 높았으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믿을 만한 물건을 얻기 위해 기꺼이 석폐를 꺼냈고 있었다.
그가 주의 깊게 살피던 중, 몇몇 만족 사내들이 다른 흐름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물건을 사러 온 손님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소율처럼 편루를 짊어진 채 몇몇 가죽 천막 속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무엇인가를 내놓고, 짧은 대화 끝에 거래를 마친 뒤 조용히 인파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소율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하루 종일 부방을 훑은 끝에야, 이곳의 거래 규칙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은 서서히 어둠에 잠겼다. 마지막 빛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부방 곳곳의 횃불이 일제히 타올랐다. 불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만들었고, 장터는 낮보다 더 요란하면서도 더 위험하게 변했다. 웃음과 흥정이 뒤섞였지만, 그 속에는 은근한 경계와 긴장이 배어 있었다.
소율은 불빛이 잘 닿지 않는 음습한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주위를 한 바퀴 훑어 시선이 완전히 끊긴 것을 확인한 뒤, 등에 멘 편루를 내려놓고 겉을 친 짐승가죽을 풀어 다른 가죽들을 차례로 몸에 걸쳤다.
얇은 것부터 두꺼운 것까지 겹겹이 두르자 체형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몸 전체를 휘감는 어두운 색 가죽을 로브처럼 덮어쓰자, 얼굴은 물론 본래의 윤곽마저 완벽히 가려졌다.
그는 매듭을 단단히 조이고 틈새를 손끝으로 다듬었다. 겹겹이 둘러싼 짐승가죽은 그의 몸을 무겁게 짓눌렀으나, 오히려 그것이 소율이 원하던 위장을 완성시켜 주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그는 편리 안쪽을 다시 확인하고 일부러 등을 구부리고 허약한 노인처럼 보이도록 몸을 낮춘 채, 낮부터 눈여겨보아둔 천막 쪽으로 향했다.
그 천막은 유독 적막했고, 드나드는 자들 또한 모두 얼굴을 가죽으로 가려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소율은 섣불리 들어가지 않고, 어둠 속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숨소리마저 죽이며 한동안 주위를 맴돌았다.
잠시 후, 천막 문이 스르르 젖히며 안쪽에서 누군가 빠져나왔다. 얼굴을 철저히 가린 채 발길을 재촉하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뒤쫓는 그림자가 없음을 확인하자, 소율은 더 망설이지 않고 천막 앞으로 다가가 단호히 손을 뻗어 무겁게 드리운 가죽문을 과감히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천막 안에 들어서는 순간, 소율은 곧바로 자신을 향해 꽂히는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그 시선은 마치 창끝처럼 그의 몸을 꿰뚫어 오는 듯했다.
안쪽에는 상반신을 드러낸 중년 사내가 가부좌로 앉아 있었고, 앞의 작은 화롯불이 ‘파직’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붉은 불빛이 간헐적으로 일렁이며 사내의 얼굴을 더 음산하게 부각했다. 그의 두 눈 중 하나는 이미 텅 비었고, 남은 한쪽은 소율을 곧추노려 보고 있었다.
소율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그의 앞에 다가가 낮고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심한 듯 흘러나왔지만, 천막 속에 퍼진 어둠과 맞물려 묘하게 울려 퍼졌다.
“불빛이 과하군.”
사내가 한참 노려보다가 오른손을 들어 화롯불 위를 가볍게 눌렀다. 손끝이 불꽃을 스치자, 활활 타던 불길이 바람에 꺼진 듯 소리 없이 움츠러들었다. 빛이 한 톤 가라앉자 천막 안은 그만큼 더 어두워졌고, 불길 대신 미묘한 긴장감이 공간을 채웠다.
사내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이제 괜찮겠지. 꺼내 보시오. 물건이 쓸 만하다면, 값은 후하게 쳐주리다.”
소율은 어둠 속에서 사내를 몇 번 더 훑어보고 낮게 웃었다. 쉰 기침 같은 웃음은 장막의 구석구석을 울리며 메아리쳤고, 불길한 기운이 실려 듣는 이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다.
그의 미간이 구겨지는 찰나, 소율의 손끝에서 묘한 약향이 피어올랐고, 그 냄새는 순간적으로 천막 안의 눅진한 공기를 휘감았다. 그러고는 동그란 알갱이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곧장 사내 앞으로 날아가자 그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낚아채 눈앞에 들이댔다.
“……이건 대체…….”
손바닥 위에는 손톱만 한 둥근 약환이 있었다. 은은히 퍼져 나오는 향이 혈맥을 자극해, 깊숙한 곳에서 기혈이 끓어오르는 듯했다. 숨결이 거칠어지고, 눈빛 속에는 경계와 탐욕이 동시에 일렁였다.
“그 물건, 석폐로 얼마나 치를 생각이지?”
사내는 손안의 약환을 한참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들어 진지한 눈빛으로 소율을 바라보며 낮게 물었다.
“이건…… 무슨 약물이오? 어디서 얻었소? 효능은 무엇이오?”
소율은 질문을 흘려보내듯 태연히 말을 돌렸다.
“부방으로 오던 길에 짐승 하나가 눈에 띄더군.”
그는 편루를 옆으로 내려놓고, 그 안에서 단단히 포박한 담비(貂狸) 한 마리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담비는 기력이 빠져 축 늘어졌지만 두 눈빛만은 여전히 사납게 빛났다. 여기저기 아물지 않은 상처가 선명했고, 몸이 묶여 있어 도망칠 여지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집어 왔다. 보시다시피 아직 살아 있지.”
소율의 음성은 낮고 담담했지만,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장막 속에서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사내의 미간이 더 깊게 찌푸려졌다.
“살아 있다고 말하는 중이지. 왜 잡아 왔느냐고? 호기심이 지나쳤거든. 내 뒤를 꽤 오래 따라붙더군.”
소율의 왼손이 담비의 등줄기를 스치듯 쓸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자락을 손끝이 지나간 바로 그 순간—
몸부림도 비명도 없었다.
단 한 번, 전신이 짧게 경련하더니 몸속의 피가 불붙은 것처럼 환히 타올랐다 꺼지는 그 한순간에, 사내의 눈앞에서 짐승의 형체는 통째로 사라졌고, 바닥에는 검붉은 기운이 엉긴 뼈무더기만이 남았다.
“이제, 죽었다.”
소율의 왼손이 뼈에 살짝 닿자 뼈더미는 모래처럼 부서져 잿가루로 흩어졌다.
사내는 숨을 거칠게 들이키고 저절로 뒤로 물러났다. 두어 걸음 휘청인 뒤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다시 올려다본 시선에는 이미 두려움과 경외가 가득했다.
“…사만(邪蛮)…….”
“응?”
소율은 눈빛이 순간 살기가 번뜩이며 사내를 노려봤다.
사내는 떨리는 입술을 달래 변명이라도 하려 했으나, 소율이 성가시다는 듯 손을 가볍게 저었다. 기세에 눌린 사내는 그대로 입을 닫았다.
“다시 묻겠다.” 소율이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 손에 든 것, 석폐 얼마의 값어치가 있나.”
그리고 덧붙였다.
“효능은 간단하다. 수련 중 약초를 복용할 때, 효과를 정확히 일할 더 끌어올린다. 나머지 의문은 접어라. 때로 과한 호기심은 화를 부르지.”
“이 약은……”
사내는 한동안 약환을 내려다보다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낮게 말했다.
“전례가 없는 물건이옵니다. 소인은 본 적이 없어…….”
그의 말끝이 머뭇거렸다. 보통 손님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자세를 낮추지 않았을 테지만 방금 그 기괴한 장면을 떠오르면 아직도 오금이 저려온다.
소율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느긋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시험해 보아라. 효과가 없다면, 나는 바로 떠난다. 효과가 있다면…… 그때 값을 논하지.”
그제야 사내는 공손히 “알겠습니다.” 하고는 품속에서 작은 방울(鈴鐺)을 꺼내 손목을 가볍게 튕겼다.
딸랑, 딸랑—
맑고 얇은 금속성 울림이 장막 안을 가르며 번졌다.
소율은 방울을 힐끗 스쳐본 뒤, 짐승가죽 속에 감춘 왼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손바닥에는 방금 쓰고 남은 혈산의 분말이 아직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소율의 시선은 곧장 노인 앞에 펼쳐진 거친 짐승가죽 위에 고정되었다. 그 위에 놓인 물건은 얼핏 접시와 비슷했으나 가장자리는 칼날처럼 예리했고, 표면에는 깊고 굵은 균열이 겹겹이 얽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균열은 조금만 힘이 더해져도 당장 산산조각 날 듯 위태로웠다. 물건은 고요히 놓여 있었으나 간헐적으로 은은한 빛을 내뿜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균열 사이로 드러난 문양은 음산했다. 흉악하게 일그러진 귀면(鬼面)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섬뜩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건 파손된 만기(蠻器)다. 네겐 어울리지 않아. 살 수도 없을 거다.”
소율이 자세히 들여다보던 중, 옆에서 노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기……?”
이미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확신이 입 밖으로 새어나오자 소율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오래전 할아버지에게서 전해 받은 가죽 책에서 그는 분명히 읽었다. 만기는 극도로 귀중한 보물로 오직 개진경(開塵境)에 오른 강자만이 제련하고 다룰 수 있다. 응혈경(凝血境)에 불과한 자가 손에 넣을 일은 거의 없고, 설사 소유한다 해도 지켜낼 힘이 없다면 보물은 곧 화근이 된다.
“비록 파손되어 제 기능은 못 하지만, 그래도 개진경 강자가 제련한 물건이다. 값은…… 석폐 천.”
담담한 음성 속에 묘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소율의 시선은 푸른빛을 띤 원반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눈빛에 선망과 갈망이 짙게 어려 있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그의 전 재산은 고작 석폐 다섯. ‘천’이라는 숫자 앞에서 손을 뻗어 볼 여지조차 없었다.
그는 깊게 들이쉰 숨을 길게 내쉬고, 마지막으로 푸른 만기를 눈에 새기듯 오래 바라보았다. 미련을 억지로 잘라내듯 천천히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과연 언제쯤이면…… 나만의 만기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북적이는 부방(部坊)의 길을 따라 걸으며, 소율은 조용히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부방의 구석구석에는 짐승가죽을 깔아 만든 좌판들이 질서 없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길을 지나는 이들 사이로 상인들의 고함과 호객 소리가 뒤엉켜, 공기 자체가 시장의 열기와 냄새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소율이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보아도, 더 이상 만기를 내놓은 이는 없었다. 그 푸른 원반이 유일무이했음을 실감하는 순간, 가슴속에서 아쉬움이 더 깊어졌다.
대신 곳곳에서 눈에 띄는 것은 로운엽이었다. 상인들은 크기와 빛깔이 제각각인 잎사귀들을 가지런히 늘어놓고 있었고, 그 가격은 혀를 내두를 만큼 높았다. 단 한 줄기에 석폐 하나. 희귀 약재로 꼽히는 우룡연과 맞먹는 값이었다.
해는 서서히 기울어 저녁빛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붉고 금빛이 섞인 석양의 마지막 빛줄기가 대지 위로 흘러내려 장터를 은은하게 감쌌다. 그러나 부방의 분위기는 고요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활기를 띠었다. 인파는 더욱 늘어나 웅성거림과 발걸음 소리가 사방에서 얽혀들었고, 가죽 좌판마다 호객하는 목소리와 거래가 성사되는 소리가 쉼 없이 오갔다.
소율은 하늘빛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가늠하더니, 이번에는 천막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평범한 좌판과 달리 값비싼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검증된 품질만큼이나 가격도 높았으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믿을 만한 물건을 얻기 위해 기꺼이 석폐를 꺼냈고 있었다.
그가 주의 깊게 살피던 중, 몇몇 만족 사내들이 다른 흐름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물건을 사러 온 손님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소율처럼 편루를 짊어진 채 몇몇 가죽 천막 속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무엇인가를 내놓고, 짧은 대화 끝에 거래를 마친 뒤 조용히 인파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소율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하루 종일 부방을 훑은 끝에야, 이곳의 거래 규칙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은 서서히 어둠에 잠겼다. 마지막 빛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부방 곳곳의 횃불이 일제히 타올랐다. 불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만들었고, 장터는 낮보다 더 요란하면서도 더 위험하게 변했다. 웃음과 흥정이 뒤섞였지만, 그 속에는 은근한 경계와 긴장이 배어 있었다.
소율은 불빛이 잘 닿지 않는 음습한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주위를 한 바퀴 훑어 시선이 완전히 끊긴 것을 확인한 뒤, 등에 멘 편루를 내려놓고 겉을 친 짐승가죽을 풀어 다른 가죽들을 차례로 몸에 걸쳤다.
얇은 것부터 두꺼운 것까지 겹겹이 두르자 체형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몸 전체를 휘감는 어두운 색 가죽을 로브처럼 덮어쓰자, 얼굴은 물론 본래의 윤곽마저 완벽히 가려졌다.
그는 매듭을 단단히 조이고 틈새를 손끝으로 다듬었다. 겹겹이 둘러싼 짐승가죽은 그의 몸을 무겁게 짓눌렀으나, 오히려 그것이 소율이 원하던 위장을 완성시켜 주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그는 편리 안쪽을 다시 확인하고 일부러 등을 구부리고 허약한 노인처럼 보이도록 몸을 낮춘 채, 낮부터 눈여겨보아둔 천막 쪽으로 향했다.
그 천막은 유독 적막했고, 드나드는 자들 또한 모두 얼굴을 가죽으로 가려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소율은 섣불리 들어가지 않고, 어둠 속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숨소리마저 죽이며 한동안 주위를 맴돌았다.
잠시 후, 천막 문이 스르르 젖히며 안쪽에서 누군가 빠져나왔다. 얼굴을 철저히 가린 채 발길을 재촉하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뒤쫓는 그림자가 없음을 확인하자, 소율은 더 망설이지 않고 천막 앞으로 다가가 단호히 손을 뻗어 무겁게 드리운 가죽문을 과감히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천막 안에 들어서는 순간, 소율은 곧바로 자신을 향해 꽂히는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그 시선은 마치 창끝처럼 그의 몸을 꿰뚫어 오는 듯했다.
안쪽에는 상반신을 드러낸 중년 사내가 가부좌로 앉아 있었고, 앞의 작은 화롯불이 ‘파직’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붉은 불빛이 간헐적으로 일렁이며 사내의 얼굴을 더 음산하게 부각했다. 그의 두 눈 중 하나는 이미 텅 비었고, 남은 한쪽은 소율을 곧추노려 보고 있었다.
소율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그의 앞에 다가가 낮고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심한 듯 흘러나왔지만, 천막 속에 퍼진 어둠과 맞물려 묘하게 울려 퍼졌다.
“불빛이 과하군.”
사내가 한참 노려보다가 오른손을 들어 화롯불 위를 가볍게 눌렀다. 손끝이 불꽃을 스치자, 활활 타던 불길이 바람에 꺼진 듯 소리 없이 움츠러들었다. 빛이 한 톤 가라앉자 천막 안은 그만큼 더 어두워졌고, 불길 대신 미묘한 긴장감이 공간을 채웠다.
사내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이제 괜찮겠지. 꺼내 보시오. 물건이 쓸 만하다면, 값은 후하게 쳐주리다.”
소율은 어둠 속에서 사내를 몇 번 더 훑어보고 낮게 웃었다. 쉰 기침 같은 웃음은 장막의 구석구석을 울리며 메아리쳤고, 불길한 기운이 실려 듣는 이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다.
그의 미간이 구겨지는 찰나, 소율의 손끝에서 묘한 약향이 피어올랐고, 그 냄새는 순간적으로 천막 안의 눅진한 공기를 휘감았다. 그러고는 동그란 알갱이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곧장 사내 앞으로 날아가자 그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낚아채 눈앞에 들이댔다.
“……이건 대체…….”
손바닥 위에는 손톱만 한 둥근 약환이 있었다. 은은히 퍼져 나오는 향이 혈맥을 자극해, 깊숙한 곳에서 기혈이 끓어오르는 듯했다. 숨결이 거칠어지고, 눈빛 속에는 경계와 탐욕이 동시에 일렁였다.
“그 물건, 석폐로 얼마나 치를 생각이지?”
사내는 손안의 약환을 한참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들어 진지한 눈빛으로 소율을 바라보며 낮게 물었다.
“이건…… 무슨 약물이오? 어디서 얻었소? 효능은 무엇이오?”
소율은 질문을 흘려보내듯 태연히 말을 돌렸다.
“부방으로 오던 길에 짐승 하나가 눈에 띄더군.”
그는 편루를 옆으로 내려놓고, 그 안에서 단단히 포박한 담비(貂狸) 한 마리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담비는 기력이 빠져 축 늘어졌지만 두 눈빛만은 여전히 사납게 빛났다. 여기저기 아물지 않은 상처가 선명했고, 몸이 묶여 있어 도망칠 여지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집어 왔다. 보시다시피 아직 살아 있지.”
소율의 음성은 낮고 담담했지만,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장막 속에서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사내의 미간이 더 깊게 찌푸려졌다.
“살아 있다고 말하는 중이지. 왜 잡아 왔느냐고? 호기심이 지나쳤거든. 내 뒤를 꽤 오래 따라붙더군.”
소율의 왼손이 담비의 등줄기를 스치듯 쓸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자락을 손끝이 지나간 바로 그 순간—
몸부림도 비명도 없었다.
단 한 번, 전신이 짧게 경련하더니 몸속의 피가 불붙은 것처럼 환히 타올랐다 꺼지는 그 한순간에, 사내의 눈앞에서 짐승의 형체는 통째로 사라졌고, 바닥에는 검붉은 기운이 엉긴 뼈무더기만이 남았다.
“이제, 죽었다.”
소율의 왼손이 뼈에 살짝 닿자 뼈더미는 모래처럼 부서져 잿가루로 흩어졌다.
사내는 숨을 거칠게 들이키고 저절로 뒤로 물러났다. 두어 걸음 휘청인 뒤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다시 올려다본 시선에는 이미 두려움과 경외가 가득했다.
“…사만(邪蛮)…….”
“응?”
소율은 눈빛이 순간 살기가 번뜩이며 사내를 노려봤다.
사내는 떨리는 입술을 달래 변명이라도 하려 했으나, 소율이 성가시다는 듯 손을 가볍게 저었다. 기세에 눌린 사내는 그대로 입을 닫았다.
“다시 묻겠다.” 소율이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 손에 든 것, 석폐 얼마의 값어치가 있나.”
그리고 덧붙였다.
“효능은 간단하다. 수련 중 약초를 복용할 때, 효과를 정확히 일할 더 끌어올린다. 나머지 의문은 접어라. 때로 과한 호기심은 화를 부르지.”
“이 약은……”
사내는 한동안 약환을 내려다보다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낮게 말했다.
“전례가 없는 물건이옵니다. 소인은 본 적이 없어…….”
그의 말끝이 머뭇거렸다. 보통 손님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자세를 낮추지 않았을 테지만 방금 그 기괴한 장면을 떠오르면 아직도 오금이 저려온다.
소율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느긋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시험해 보아라. 효과가 없다면, 나는 바로 떠난다. 효과가 있다면…… 그때 값을 논하지.”
그제야 사내는 공손히 “알겠습니다.” 하고는 품속에서 작은 방울(鈴鐺)을 꺼내 손목을 가볍게 튕겼다.
딸랑, 딸랑—
맑고 얇은 금속성 울림이 장막 안을 가르며 번졌다.
소율은 방울을 힐끗 스쳐본 뒤, 짐승가죽 속에 감춘 왼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손바닥에는 방금 쓰고 남은 혈산의 분말이 아직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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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魔)의 이름으로, 세상에 군림하리
30.제30장 월익의 귀환, 그리고 구원조회 : 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96 29.제29장 화만의 부락조회 : 2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35 28.제28장. 혈월강림, 월익의 광무조회 : 1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432 27.제27장 만신의 저주, 월익의 강림조회 : 3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457 26.제26장. 혈월(血月)의 밤조회 : 3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893 25.제25장 화근의 씨앗조회 : 4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184 24.제24장. 은밀한 거래조회 : 5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39 23.제23장. 첫만남조회 : 5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618 22.제22장. 변치 않으리...조회 : 6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03 21.제21장. 차가운 시선, 식지 않는 갈망조회 : 8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93 20.제20장. 서리바람 속의 재회조회 : 7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25 19.제19장. 석문 너머조회 : 8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55 18.제18장. 선만의 축복조회 : 7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835 17.제17장. 혈맥의 비밀과 할아버지의 경고조회 : 8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92 16.제16장. 귀향조회 : 10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410 15.제15장. 절망을 길들이는 자조회 : 5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82 14.제14장. 사만(邪蠻)의 그림자, 육치의 도주조회 : 6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92 13.제13장. 육혈 각성, 흑산의 추격자조회 : 8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398 12.제12장. 청진산의 효능조회 : 7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724 11.제11장. 혈산과 청진산조회 : 8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2,659 10.제10장 수산(淬散)조회 : 5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689 9.제9장 흑염봉(黑炎峰)조회 : 5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313 8.제8장. 기억의 문, 약석(藥石)의 비밀조회 : 5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2,559 7.제7장. 숨겨진 선물, 깨어나는 혈맥조회 : 6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235 6.제6장. 피로 각성한 의지, 그리고 첫 걸음조회 : 8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049 5.제5장 별을 향한 균열조회 : 7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152 4.제4장 밤의 망설임조회 : 10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2,998 3.제3장 만계(蠻啟)조회 : 16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248 2.제2장 소율 (韶律)조회 : 17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2,915 1.제1장 마서(魔序)조회 : 33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1,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