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혈월(血月)의 밤
조회 : 37 추천 : 0 글자수 : 7,893 자 2025-08-22
다음은 원문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어색한 묘사와 문법 오류를 다듬은 자연스러운 수정본입니다. 전체 문맥과 서사를 해치지 않도록 문장 연결과 표현만 매끄럽게 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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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색의 가죽 천막 앞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야, 그는 들어가도 좋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몸가짐을 한껏 낮추고 공손한 기색으로 천막에 들어섰고, 반 시진이 지나 밖으로 나올 때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환희가 떠올라 있었다. 다시금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뒤에야 그곳을 떠났다.
자색 천막 안에는 두 노인이 마주 앉아 있었다. 머리는 세월에 바래 희끗했으나 눈빛만큼은 맑고 날카로워, 오래 닦인 기운이 은근히 배어 나왔다. 그들 앞의 탁자에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작은 병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이미 속은 텅 비어 있었다.
흰옷을 걸친 노인이 손가락 사이에 한 알의 약석을 집어 들고 숨을 죽인 채 오랫동안 그 약석을 살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눈동자에는 놀람과 망설임이 함께 어른거렸다.
그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약석을 코끝에 대고 깊게 향을 들이마셨다. 가만히 눈을 감고 기운을 느끼다가, 한참 만에 번쩍 눈을 뜨며 낮게 말했다.
“그 자가 한 말이 허언이 아니었소. 믿기 어려운 효능이야. 내가 풍준부락(風圳部落)에서 살아온 세월이 적지 않건만, 이런 물건은 난생처음이오. 더구나 오래된 고약의 기운이 전혀 없으니 세월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네. 막 정련된 지 오래되지 않은 약석이 틀림없다… 도대체 무엇으로, 어떤 존재가 이런 약을 빚어낸 것이냐…”
잠시 침묵하던 맞은편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그 자가 떠난 지 오래다. 게다가 사만(邪蠻)은 건드려선 안 되는 족속이지. 쉽게 그 출처를 알 길이 없을 걸세.”
백의 노인이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저었다.
“경솔히 나설 때가 아니지요. 이런 보물을 내놓을 수 있는 자라면, 아마도 상당한 경지의 고수이거나… 바깥에서 들어온 가진경(假塵境)의 이방인일 수도 있네. 주 형, 이 약석은 내가 가져가 부락의 만공(蠻公)께 아뢰겠소. 그분이라면 혹 이 물건의 내력을 짚어내실지 모르지.”
그는 소중히 약석을 작은 병에 넣은 후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작은 병은 자취를 감추듯 허공에서 사라졌다.
“본디 그래야지.” 맞은편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물건은 너무나도 중요해. 내가 먼저 돌아가 결과를 확인한 뒤 다시 전해주겠네.”
백의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춘 뒤 황급히 장막을 나섰다. 발을 딛는 순간 몸이 일그러지더니 흰 안개로 흩어졌다. 이내 그 안개는 하늘로 솟구쳐,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자, 부방에서 멀리 떨어진 광활한 초원 위로 웅대한 부락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더 이상 ‘부락’이라 부르기 어려울 만큼 거대했고, 차라리 작은 성읍이라 하는 편이 더 알맞았다. 사방으로는 오산부(烏山部)와 비슷한 중·소형 부락 여섯이 이를 호위하듯 둘러서 있었고, 그 중심부에는 진흙과 돌을 켜켜이 쌓아 올린 거대한 성채가 위용을 뽐내며 버티고 있었다.
그 성채는 마치 대지를 짓누르는 거수(巨獸) 같았고, 그 앞에 선 자는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 수밖에 없는 위압감을 느꼈다. 검붉은 성벽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새겨져 있었고, 곳곳에서 뻗어 나온 짐승 형상의 돌기둥들이 원시적인 기운을 풍겼다. 성 내부의 거주민만도 족히 수천 명에 달했으니, 이는 오산부락과는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는 규모였다.
외곽을 에워싼 여섯 부락은 모두 이 거대한 중심부락에 예속된 존재였다. 어떤 부락은 무력으로 정벌당했고, 또 어떤 부락은 스스로 보호를 구하다 이 울타리 안에 편입되었다. 지금 이곳의 풍경은, 풍천부락(風圳部落)이 단순한 세력체가 아닌 이 일대의 절대 지배자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풍천부락은 중형 부락으로 분류되지만, 그 중에서도 최강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변방에 위치한 탓에 중심지의 대부락들에 비하면 세력이 약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 오산 일대만큼은 이야기가 달랐다. 변두리라는 특수한 지리 덕분에 풍천부락은 이 근방에서 절대적인 권세를 누렸으며, 사방팔방의 소부락들을 거느리고 그들로부터 공물을 받아냈다.
뿐만 아니라 이 일대에서 유일하게 상계(上階)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혈맥을 보유한 부락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풍천부락의 영향력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고, 그 권위는 누구도 감히 도전하기 어려웠다.
이때—새벽빛이 수평선 위로 간신히 고개를 내밀 즈음—한 무더기의 백무(白霧)가 순식간에 초원을 가르며 중심 성의 외곽에 이르러, 인간의 형체로 서서히 응집되었다. 그 모습은 다름 아닌 흰옷을 걸친 노인, 석해(石海)였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성으로 들어섰다. 길 위에서 마주치는 풍천부락의 족인들은 하나같이 허리를 굽혀 경례하며 그의 앞을 비켰다. 그들의 눈빛에는 경외와 두려움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석해는 곧장 중심부 한가운데 자리한 흑빛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그 제단은 오각형 형태로, 높이가 십 장(丈)에 달하는 장대한 구조물이었다. 짐승과 새를 형상화한 원시적인 토템 문양이 빽빽이 새겨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위압감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석해는 제단 아래에서 곧장 몸을 낮추고 공손히 섰다. 그가 숨을 고르는 순간, 제단 위에서 부드럽지만 위엄 있는 음성이 천천히 내려왔다.
“석해, 무슨 일인가?”
노인의 목소리에 석해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낮고 진중한 음성으로 답했다.
“만공(蠻公)께 아룁니다. 주염(咒冉)의 부방에서 전대미문의 약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약의 효능은 실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합니다……”
제단 위에서 나른하게 울리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흥미롭군. 이리 가져오거라.”
석해는 즉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 위에서 빛이 일렁이더니 허공에 작은 병 하나가 떠올랐다. 그 병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천천히 제단 위로 날아올랐다.
주위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바람만이 흑빛 제단을 스치며 울었고, 석해는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묵묵히 기다렸다.
잠시 후, 제단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는 이전과 달리 억누르기 힘든 놀라움이 묻어 있었다.
“이 약, 한 알뿐이더냐?”
“예, 한 알뿐입니다.” 석해가 단호히 대답했다.
“이런 약은 처음 본다… 내부에 내가 알지 못하는 독특한 구조가 서려 있구나. 게다가 이건 오래 묵은 약이 아니라 갓 제련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물건이다. 누가 이런 것을 부방에서 내놓았단 말이냐?”
석해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이며 낮게 답했다.
“한 사만(邪蠻)입니다.”
순간 제단 위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려 퍼졌다.
“그를 찾아라. 부락의 모든 힘을 동원해 반드시 그 사만을 찾아내라! 그에게 전해라. 풍천부락에 귀속한다면, 내가 그를 객가(客家)로 맞이하겠다!”
석해의 가슴이 크게 요동쳤다. 약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있었으나, 만공이 직접 ‘객가’라는 파격적인 지위를 내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객가란 족장이나 만공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신분으로, 부락 내에서 최고의 예우를 받는 자리였다.
이 명령은 곧 부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풍천부락은 거대한 그물을 펼치듯 사만을 찾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한편 그 시각, 오산부락의 한쪽에 자리한 자신의 초라한 집에서 소율은 홀로 깊은 결심을 내리고 있었다. 밤이 막 끝나가고 새벽의 숨결이 스며드는 찰나, 그는 주저 없이 움직였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조용히 부락을 벗어나 홀로 숲으로 몸을 던졌다. 그가 향하는 곳은 흑염봉(黑炎峰). 이미 수없이 오르내리며 익숙해진 길이었다.
응혈경(凝血境) 2층에 오른 이후, 그의 몸놀림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날렵해졌다. 나무 사이를 도약하며 내달리는 소율의 모습은 마치 숲을 누비는 야수 같았다. 그 속도는 뇌진조차 전력을 다해야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였고, 더욱이 이 숲은 소율에게 손바닥 보듯 익숙했다. 덕분에 그는 한층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해가 중천에 이르기도 전에 그는 흑염봉 아래에 도착했다. 숨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바로 바위를 타고 올랐고, 이윽고 자신만의 은신처인 수련 동굴 앞에 섰다. 등에 멘 광주리를 내려놓자, 그 안에는 오늘을 위해 정성껏 모은 갖가지 약초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소홍(小紅)은 없군. 어디 놀러 나간 모양이지.”
소율은 주변을 빠르게 살피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상한 낌새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는 바닥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몸 안에서는 열 줄의 혈선이 차례로 빛을 발하며 맥동했고, 그 빛은 심장의 고동과 완벽히 호응했다. 그 순간, 소율은 몸속 어딘가에서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할아버지께서 만계를 해주셨을 때, 곧 삼층에 오를 수 있다고 하셨지. 그런데 이렇게 빠른 시일에 기혈이 넘칠 줄이야… 선만지술(先蠻之術), 실로 오묘하기 그지없구나.”
그는 지난번 온몸에서 검은 찌꺼기가 스멀스멀 배어나오던 순간, 자신의 몸이 다시 태어난 듯 가벼워졌던 그 느낌을—그 모든 것이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제련은 잠시 미루자. 이 기세를 타 한 번에 돌파해야 한다!”
망설임 없이 그는 천연재인 천암초(天岩草)를 꺼내 들었다. 우선 청진산(清塵散)을 삼키고, 천암초의 잎을 하나 뜯어 씹어 삼켰다.
곧바로 뜨거운 열기가 내장 깊숙이 스며들며 몸 안에서 거센 파도가 몰아쳤다. 시간이 흐르자 그의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며 피빛 기운이 몸을 감쌌고, 혈선이 번쩍이며 확장됐다. 몇 시진이 흘렀을까. 마침내 그의 몸 안에서 낮고 둔탁한 폭음이 터졌다. 열한 번째 혈선이 응결되는 순간이었다.
소율은 눈을 번쩍 떴다. 시야가 선명하게 밝아졌고, 그 속에서 빛줄기가 일렁였다.
“응혈경… 삼층.”
흥분과 전율이 섞인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몸을 한 차례 풀어낸 그는 광주리에 담긴 약재를 꺼내 기억 속 제련법에 따라 산령산(山靈散)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몇 달 전의 서투름은 사라지고 능숙함이 배어 있었다.
동굴 속 화염의 온도를 조절하며 그는 옷을 벗어던지고 상반신을 드러낸 채 몰두했다. 약초를 맡고 손으로 부수어 황정석로에 던져 넣는 손놀림이 거침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굴 밖 세상은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산림은 숨죽인 듯 고요했고,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조차 소리를 삼킨 듯 적막했다. 평소라면 어둠 속에서 들려오던 새와 짐승의 울음소리마저 점점 사라져, 마침내 한 줄기 소음도 남지 않았다.
그날 밤, 하늘의 달빛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은빛으로 대지를 비추던 온화한 달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피를 머금은 듯 짙고 강렬한 붉은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늘 높이 걸린 달은 흡사 살아 있는 것처럼 진득한 혈색을 내뿜으며 산과 숲, 강과 계곡 모든 것을 붉게 물들였다. 멀리서 올려다보면, 마치 하늘 위에 거대한 피의 눈동자가 떠서 대지를 굽어보는 듯한 형상이었다. 그 붉음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보는 이의 심장을 죄어오는 듯한 서늘한 공포를 동반했다.
붉은 달빛이 퍼져나가자 숲속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평범하던 나무조차 기묘한 형상으로 일그러져 보였다. 바위 위를 스치는 붉은 빛은 불길한 무늬를 그려내며 마치 무언가 깨어날 것을 예고하는 듯했다. 대지는 정적에 잠겼지만, 그 적막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으스스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이날 밤의 달은 단순히 붉게 물든 것이 아니었다. 마치 천지가 뒤바뀌는 전조처럼 피를 머금은 달빛이 점점 더 짙어지며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평소라면 달빛 아래에서 노닐던 작은 짐승들도 모두 사라졌고, 숲을 지배하는 맹수들마저 은신처에서 움츠러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붉은 달빛 아래에서 숲 전체는 마치 고대 주술이 깃든 금단의 땅으로 변해갔다. 달빛은 은밀하게, 그러나 압도적으로 그곳에 있는 모든 존재의 본능을 뒤흔들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밤은 결코 평범한 밤이 아니며, 피와 광기가 뒤섞인 무언가가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붉은 달빛은 점점 더 짙어졌고, 마침내 온 오산 일대를 피빛으로 잠식해 버렸다. 숲은 불타는 듯 붉게 빛났으나, 그 안에서는 생명의 기척이 사라진 듯 고요했다. 그러나 그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주 희미했다. 낮고 쉰 울부짖음이 숲의 깊은 심연에서 새어 나왔다. 그것은 바람에 실린 착각처럼 들릴 정도로 약했지만, 듣는 이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더 뚜렷해졌다. 울음은 곧 포효로, 속삭
임은 곧 비명으로 변모했다. 땅속에서 꿈틀대는 원한의 뿌리가 하늘을 향해 몸을 뒤트는 듯, 기괴하고 괴이한 포효가 산맥에 메아리쳤다.
그 소리는 한순간에 주변의 모든 생령을 얼어붙게 했다. 마치 오래된 봉인이 풀리며 세상에 드러나는 괴물이 첫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울부짖음 속에는 무겁게 가라앉은 살기와 억눌린 광기가 뒤엉켜 있었고, 듣는 이의 혼을 뒤흔드는 힘이 실려 있었다. 잠시라도 귀를 기울이면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고 피가 뜨거워졌다.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하는, 공포와 동시에 알 수 없는 광적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괴음이었다.
그 포효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세졌다. 울림은 숲을 가르고 산맥을 넘어 오산 밖으로까지 번져 나갔다. 온 땅에 울려 퍼지는 그 울부짖음은 밤하늘의 혈월과 어우러져 세상 전체가 피빛 광기에 휩싸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이윽고 바람이 바뀌었다. 평온했던 산림을 스치던 바람이 갑자기 무겁고 끈적한 기운을 머금었다. 차갑지만 어딘가 끓어오르는 듯한 이질적인 기운이 공기 속에 가득 퍼졌다. 소나무 가지가 부르르 떨렸고, 멀리서 나무줄기가 끼익거리는 괴음을 냈다. 마치 대지가 몸부림치는 듯 보이지 않는 압력이 온 산맥을 짓눌렀다.
그 순간 오산 주변의 모든 부락은 이미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작은 불빛들이 부락마다 하나둘 피어오르고, 불길처럼 타오르는 횃불이 어둠을 찢었다. 평민들은 조용히 집 안으로 몸을 숨겼고,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곧 사라졌다.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긴장으로 굳어버린 어른들의 얼굴뿐이었다.
부락의 모든 무사는 이미 족장을 중심으로 진형을 갖추었다. 손에 든 무기들은 불빛을 받아 번뜩였고, 긴장 속에 내쉬는 거친 숨소리는 공포를 더했다. 불길한 징조에 가슴이 쪼여들었지만 누구 하나 자리를 이탈하는 이는 없었다.
아공은 검은 골장을 단단히 쥐고 서 있었다. 불빛에 드리운 그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화염 속에서 괴이한 형상을 이루었고, 그의 두 눈은 멀리 붉게 피어오른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동자에는 깊은 근심과 경계가 뒤섞여 있었다.
“아공…”
부락 아래에서 그를 바라보던 이들이 속삭였으나, 아공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쉰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불을 밝혀라!”
명령이 떨어지자 부락민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수십 개의 횃불이 거대한 목대 아래로 던져졌고 곧 불길이 치솟았다. 타오르는 화염은 칠흑 같은 어둠을 찢어발기고 붉은 달빛과 뒤엉켜, 세상에 다시없는 기묘한 광경을 만들어냈다.
곧이어 아공의 입술에서 낮고도 기이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고대의 언어, 이 땅에 사는 자들조차 온전히 알지 못하는 금단의 주술이었다. 그의 앞에서 불꽃이 소용돌이쳤고, 공기는 마치 무언가를 삼키려는 듯 끓어올랐다.
그리고 그때 멀리 떨어진 또 다른 땅, 오룡부(烏龍部)에서도 동일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의 아공은 성별조차 알 수 없었다. 길게 풀어헤친 머리칼과 광기에 젖은 얼굴, 몸에는 넓고 무거운 흑색 도포가 휘날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외뿔이 달린 괴수의 해골이 들려 있었고, 그 해골의 눈구멍에서는 알 수 없는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어진 것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고 기괴한 비명이었다. 마치 천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 그 소리가 퍼진 순간, 부락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뼛속까지 울리는 그 소리는 마치 이 땅에 닥칠 재앙의 서막을 알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멀리 떨어진 한 자리에 소녀가 홀로 서 있었다. 그녀는 절세의 미를 지녔으나 얼굴은 창백했고, 눈동자는 붉은 달빛을 고스란히 담아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그 시선은 하늘의 혈월에 고정되어 있었고, 입술은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운명조차 거스를 수 없는 어떤 힘이 다가오고 있는 듯, 그녀의 몸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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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색의 가죽 천막 앞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야, 그는 들어가도 좋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몸가짐을 한껏 낮추고 공손한 기색으로 천막에 들어섰고, 반 시진이 지나 밖으로 나올 때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환희가 떠올라 있었다. 다시금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뒤에야 그곳을 떠났다.
자색 천막 안에는 두 노인이 마주 앉아 있었다. 머리는 세월에 바래 희끗했으나 눈빛만큼은 맑고 날카로워, 오래 닦인 기운이 은근히 배어 나왔다. 그들 앞의 탁자에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작은 병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이미 속은 텅 비어 있었다.
흰옷을 걸친 노인이 손가락 사이에 한 알의 약석을 집어 들고 숨을 죽인 채 오랫동안 그 약석을 살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눈동자에는 놀람과 망설임이 함께 어른거렸다.
그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약석을 코끝에 대고 깊게 향을 들이마셨다. 가만히 눈을 감고 기운을 느끼다가, 한참 만에 번쩍 눈을 뜨며 낮게 말했다.
“그 자가 한 말이 허언이 아니었소. 믿기 어려운 효능이야. 내가 풍준부락(風圳部落)에서 살아온 세월이 적지 않건만, 이런 물건은 난생처음이오. 더구나 오래된 고약의 기운이 전혀 없으니 세월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네. 막 정련된 지 오래되지 않은 약석이 틀림없다… 도대체 무엇으로, 어떤 존재가 이런 약을 빚어낸 것이냐…”
잠시 침묵하던 맞은편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그 자가 떠난 지 오래다. 게다가 사만(邪蠻)은 건드려선 안 되는 족속이지. 쉽게 그 출처를 알 길이 없을 걸세.”
백의 노인이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저었다.
“경솔히 나설 때가 아니지요. 이런 보물을 내놓을 수 있는 자라면, 아마도 상당한 경지의 고수이거나… 바깥에서 들어온 가진경(假塵境)의 이방인일 수도 있네. 주 형, 이 약석은 내가 가져가 부락의 만공(蠻公)께 아뢰겠소. 그분이라면 혹 이 물건의 내력을 짚어내실지 모르지.”
그는 소중히 약석을 작은 병에 넣은 후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작은 병은 자취를 감추듯 허공에서 사라졌다.
“본디 그래야지.” 맞은편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물건은 너무나도 중요해. 내가 먼저 돌아가 결과를 확인한 뒤 다시 전해주겠네.”
백의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춘 뒤 황급히 장막을 나섰다. 발을 딛는 순간 몸이 일그러지더니 흰 안개로 흩어졌다. 이내 그 안개는 하늘로 솟구쳐,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자, 부방에서 멀리 떨어진 광활한 초원 위로 웅대한 부락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더 이상 ‘부락’이라 부르기 어려울 만큼 거대했고, 차라리 작은 성읍이라 하는 편이 더 알맞았다. 사방으로는 오산부(烏山部)와 비슷한 중·소형 부락 여섯이 이를 호위하듯 둘러서 있었고, 그 중심부에는 진흙과 돌을 켜켜이 쌓아 올린 거대한 성채가 위용을 뽐내며 버티고 있었다.
그 성채는 마치 대지를 짓누르는 거수(巨獸) 같았고, 그 앞에 선 자는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 수밖에 없는 위압감을 느꼈다. 검붉은 성벽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새겨져 있었고, 곳곳에서 뻗어 나온 짐승 형상의 돌기둥들이 원시적인 기운을 풍겼다. 성 내부의 거주민만도 족히 수천 명에 달했으니, 이는 오산부락과는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는 규모였다.
외곽을 에워싼 여섯 부락은 모두 이 거대한 중심부락에 예속된 존재였다. 어떤 부락은 무력으로 정벌당했고, 또 어떤 부락은 스스로 보호를 구하다 이 울타리 안에 편입되었다. 지금 이곳의 풍경은, 풍천부락(風圳部落)이 단순한 세력체가 아닌 이 일대의 절대 지배자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풍천부락은 중형 부락으로 분류되지만, 그 중에서도 최강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변방에 위치한 탓에 중심지의 대부락들에 비하면 세력이 약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 오산 일대만큼은 이야기가 달랐다. 변두리라는 특수한 지리 덕분에 풍천부락은 이 근방에서 절대적인 권세를 누렸으며, 사방팔방의 소부락들을 거느리고 그들로부터 공물을 받아냈다.
뿐만 아니라 이 일대에서 유일하게 상계(上階)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혈맥을 보유한 부락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풍천부락의 영향력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고, 그 권위는 누구도 감히 도전하기 어려웠다.
이때—새벽빛이 수평선 위로 간신히 고개를 내밀 즈음—한 무더기의 백무(白霧)가 순식간에 초원을 가르며 중심 성의 외곽에 이르러, 인간의 형체로 서서히 응집되었다. 그 모습은 다름 아닌 흰옷을 걸친 노인, 석해(石海)였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성으로 들어섰다. 길 위에서 마주치는 풍천부락의 족인들은 하나같이 허리를 굽혀 경례하며 그의 앞을 비켰다. 그들의 눈빛에는 경외와 두려움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석해는 곧장 중심부 한가운데 자리한 흑빛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그 제단은 오각형 형태로, 높이가 십 장(丈)에 달하는 장대한 구조물이었다. 짐승과 새를 형상화한 원시적인 토템 문양이 빽빽이 새겨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위압감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석해는 제단 아래에서 곧장 몸을 낮추고 공손히 섰다. 그가 숨을 고르는 순간, 제단 위에서 부드럽지만 위엄 있는 음성이 천천히 내려왔다.
“석해, 무슨 일인가?”
노인의 목소리에 석해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낮고 진중한 음성으로 답했다.
“만공(蠻公)께 아룁니다. 주염(咒冉)의 부방에서 전대미문의 약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약의 효능은 실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합니다……”
제단 위에서 나른하게 울리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흥미롭군. 이리 가져오거라.”
석해는 즉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 위에서 빛이 일렁이더니 허공에 작은 병 하나가 떠올랐다. 그 병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천천히 제단 위로 날아올랐다.
주위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바람만이 흑빛 제단을 스치며 울었고, 석해는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묵묵히 기다렸다.
잠시 후, 제단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는 이전과 달리 억누르기 힘든 놀라움이 묻어 있었다.
“이 약, 한 알뿐이더냐?”
“예, 한 알뿐입니다.” 석해가 단호히 대답했다.
“이런 약은 처음 본다… 내부에 내가 알지 못하는 독특한 구조가 서려 있구나. 게다가 이건 오래 묵은 약이 아니라 갓 제련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물건이다. 누가 이런 것을 부방에서 내놓았단 말이냐?”
석해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이며 낮게 답했다.
“한 사만(邪蠻)입니다.”
순간 제단 위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려 퍼졌다.
“그를 찾아라. 부락의 모든 힘을 동원해 반드시 그 사만을 찾아내라! 그에게 전해라. 풍천부락에 귀속한다면, 내가 그를 객가(客家)로 맞이하겠다!”
석해의 가슴이 크게 요동쳤다. 약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있었으나, 만공이 직접 ‘객가’라는 파격적인 지위를 내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객가란 족장이나 만공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신분으로, 부락 내에서 최고의 예우를 받는 자리였다.
이 명령은 곧 부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풍천부락은 거대한 그물을 펼치듯 사만을 찾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한편 그 시각, 오산부락의 한쪽에 자리한 자신의 초라한 집에서 소율은 홀로 깊은 결심을 내리고 있었다. 밤이 막 끝나가고 새벽의 숨결이 스며드는 찰나, 그는 주저 없이 움직였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조용히 부락을 벗어나 홀로 숲으로 몸을 던졌다. 그가 향하는 곳은 흑염봉(黑炎峰). 이미 수없이 오르내리며 익숙해진 길이었다.
응혈경(凝血境) 2층에 오른 이후, 그의 몸놀림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날렵해졌다. 나무 사이를 도약하며 내달리는 소율의 모습은 마치 숲을 누비는 야수 같았다. 그 속도는 뇌진조차 전력을 다해야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였고, 더욱이 이 숲은 소율에게 손바닥 보듯 익숙했다. 덕분에 그는 한층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해가 중천에 이르기도 전에 그는 흑염봉 아래에 도착했다. 숨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바로 바위를 타고 올랐고, 이윽고 자신만의 은신처인 수련 동굴 앞에 섰다. 등에 멘 광주리를 내려놓자, 그 안에는 오늘을 위해 정성껏 모은 갖가지 약초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소홍(小紅)은 없군. 어디 놀러 나간 모양이지.”
소율은 주변을 빠르게 살피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상한 낌새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는 바닥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몸 안에서는 열 줄의 혈선이 차례로 빛을 발하며 맥동했고, 그 빛은 심장의 고동과 완벽히 호응했다. 그 순간, 소율은 몸속 어딘가에서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할아버지께서 만계를 해주셨을 때, 곧 삼층에 오를 수 있다고 하셨지. 그런데 이렇게 빠른 시일에 기혈이 넘칠 줄이야… 선만지술(先蠻之術), 실로 오묘하기 그지없구나.”
그는 지난번 온몸에서 검은 찌꺼기가 스멀스멀 배어나오던 순간, 자신의 몸이 다시 태어난 듯 가벼워졌던 그 느낌을—그 모든 것이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제련은 잠시 미루자. 이 기세를 타 한 번에 돌파해야 한다!”
망설임 없이 그는 천연재인 천암초(天岩草)를 꺼내 들었다. 우선 청진산(清塵散)을 삼키고, 천암초의 잎을 하나 뜯어 씹어 삼켰다.
곧바로 뜨거운 열기가 내장 깊숙이 스며들며 몸 안에서 거센 파도가 몰아쳤다. 시간이 흐르자 그의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며 피빛 기운이 몸을 감쌌고, 혈선이 번쩍이며 확장됐다. 몇 시진이 흘렀을까. 마침내 그의 몸 안에서 낮고 둔탁한 폭음이 터졌다. 열한 번째 혈선이 응결되는 순간이었다.
소율은 눈을 번쩍 떴다. 시야가 선명하게 밝아졌고, 그 속에서 빛줄기가 일렁였다.
“응혈경… 삼층.”
흥분과 전율이 섞인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몸을 한 차례 풀어낸 그는 광주리에 담긴 약재를 꺼내 기억 속 제련법에 따라 산령산(山靈散)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몇 달 전의 서투름은 사라지고 능숙함이 배어 있었다.
동굴 속 화염의 온도를 조절하며 그는 옷을 벗어던지고 상반신을 드러낸 채 몰두했다. 약초를 맡고 손으로 부수어 황정석로에 던져 넣는 손놀림이 거침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굴 밖 세상은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산림은 숨죽인 듯 고요했고,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조차 소리를 삼킨 듯 적막했다. 평소라면 어둠 속에서 들려오던 새와 짐승의 울음소리마저 점점 사라져, 마침내 한 줄기 소음도 남지 않았다.
그날 밤, 하늘의 달빛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은빛으로 대지를 비추던 온화한 달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피를 머금은 듯 짙고 강렬한 붉은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늘 높이 걸린 달은 흡사 살아 있는 것처럼 진득한 혈색을 내뿜으며 산과 숲, 강과 계곡 모든 것을 붉게 물들였다. 멀리서 올려다보면, 마치 하늘 위에 거대한 피의 눈동자가 떠서 대지를 굽어보는 듯한 형상이었다. 그 붉음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보는 이의 심장을 죄어오는 듯한 서늘한 공포를 동반했다.
붉은 달빛이 퍼져나가자 숲속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평범하던 나무조차 기묘한 형상으로 일그러져 보였다. 바위 위를 스치는 붉은 빛은 불길한 무늬를 그려내며 마치 무언가 깨어날 것을 예고하는 듯했다. 대지는 정적에 잠겼지만, 그 적막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으스스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이날 밤의 달은 단순히 붉게 물든 것이 아니었다. 마치 천지가 뒤바뀌는 전조처럼 피를 머금은 달빛이 점점 더 짙어지며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평소라면 달빛 아래에서 노닐던 작은 짐승들도 모두 사라졌고, 숲을 지배하는 맹수들마저 은신처에서 움츠러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붉은 달빛 아래에서 숲 전체는 마치 고대 주술이 깃든 금단의 땅으로 변해갔다. 달빛은 은밀하게, 그러나 압도적으로 그곳에 있는 모든 존재의 본능을 뒤흔들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밤은 결코 평범한 밤이 아니며, 피와 광기가 뒤섞인 무언가가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붉은 달빛은 점점 더 짙어졌고, 마침내 온 오산 일대를 피빛으로 잠식해 버렸다. 숲은 불타는 듯 붉게 빛났으나, 그 안에서는 생명의 기척이 사라진 듯 고요했다. 그러나 그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주 희미했다. 낮고 쉰 울부짖음이 숲의 깊은 심연에서 새어 나왔다. 그것은 바람에 실린 착각처럼 들릴 정도로 약했지만, 듣는 이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더 뚜렷해졌다. 울음은 곧 포효로, 속삭
임은 곧 비명으로 변모했다. 땅속에서 꿈틀대는 원한의 뿌리가 하늘을 향해 몸을 뒤트는 듯, 기괴하고 괴이한 포효가 산맥에 메아리쳤다.
그 소리는 한순간에 주변의 모든 생령을 얼어붙게 했다. 마치 오래된 봉인이 풀리며 세상에 드러나는 괴물이 첫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울부짖음 속에는 무겁게 가라앉은 살기와 억눌린 광기가 뒤엉켜 있었고, 듣는 이의 혼을 뒤흔드는 힘이 실려 있었다. 잠시라도 귀를 기울이면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고 피가 뜨거워졌다.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하는, 공포와 동시에 알 수 없는 광적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괴음이었다.
그 포효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세졌다. 울림은 숲을 가르고 산맥을 넘어 오산 밖으로까지 번져 나갔다. 온 땅에 울려 퍼지는 그 울부짖음은 밤하늘의 혈월과 어우러져 세상 전체가 피빛 광기에 휩싸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이윽고 바람이 바뀌었다. 평온했던 산림을 스치던 바람이 갑자기 무겁고 끈적한 기운을 머금었다. 차갑지만 어딘가 끓어오르는 듯한 이질적인 기운이 공기 속에 가득 퍼졌다. 소나무 가지가 부르르 떨렸고, 멀리서 나무줄기가 끼익거리는 괴음을 냈다. 마치 대지가 몸부림치는 듯 보이지 않는 압력이 온 산맥을 짓눌렀다.
그 순간 오산 주변의 모든 부락은 이미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작은 불빛들이 부락마다 하나둘 피어오르고, 불길처럼 타오르는 횃불이 어둠을 찢었다. 평민들은 조용히 집 안으로 몸을 숨겼고,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곧 사라졌다.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긴장으로 굳어버린 어른들의 얼굴뿐이었다.
부락의 모든 무사는 이미 족장을 중심으로 진형을 갖추었다. 손에 든 무기들은 불빛을 받아 번뜩였고, 긴장 속에 내쉬는 거친 숨소리는 공포를 더했다. 불길한 징조에 가슴이 쪼여들었지만 누구 하나 자리를 이탈하는 이는 없었다.
아공은 검은 골장을 단단히 쥐고 서 있었다. 불빛에 드리운 그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화염 속에서 괴이한 형상을 이루었고, 그의 두 눈은 멀리 붉게 피어오른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동자에는 깊은 근심과 경계가 뒤섞여 있었다.
“아공…”
부락 아래에서 그를 바라보던 이들이 속삭였으나, 아공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쉰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불을 밝혀라!”
명령이 떨어지자 부락민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수십 개의 횃불이 거대한 목대 아래로 던져졌고 곧 불길이 치솟았다. 타오르는 화염은 칠흑 같은 어둠을 찢어발기고 붉은 달빛과 뒤엉켜, 세상에 다시없는 기묘한 광경을 만들어냈다.
곧이어 아공의 입술에서 낮고도 기이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고대의 언어, 이 땅에 사는 자들조차 온전히 알지 못하는 금단의 주술이었다. 그의 앞에서 불꽃이 소용돌이쳤고, 공기는 마치 무언가를 삼키려는 듯 끓어올랐다.
그리고 그때 멀리 떨어진 또 다른 땅, 오룡부(烏龍部)에서도 동일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의 아공은 성별조차 알 수 없었다. 길게 풀어헤친 머리칼과 광기에 젖은 얼굴, 몸에는 넓고 무거운 흑색 도포가 휘날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외뿔이 달린 괴수의 해골이 들려 있었고, 그 해골의 눈구멍에서는 알 수 없는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어진 것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고 기괴한 비명이었다. 마치 천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 그 소리가 퍼진 순간, 부락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뼛속까지 울리는 그 소리는 마치 이 땅에 닥칠 재앙의 서막을 알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멀리 떨어진 한 자리에 소녀가 홀로 서 있었다. 그녀는 절세의 미를 지녔으나 얼굴은 창백했고, 눈동자는 붉은 달빛을 고스란히 담아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그 시선은 하늘의 혈월에 고정되어 있었고, 입술은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운명조차 거스를 수 없는 어떤 힘이 다가오고 있는 듯, 그녀의 몸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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