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만신의 저주, 월익의 강림
조회 : 30 추천 : 0 글자수 : 7,457 자 2025-08-23
그 소녀는 다름 아닌 백령이었다. 그녀는 사방을 뒤덮은 혈빛 하늘 아래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두려움에 숨을 고르고 있었다. 눈앞에서는 부락의 아공이 제단 위에서 장엄한 의식을 집행하고 있었고, 주변의 족인들 또한 하나같이 창백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의 눈빛에도 그녀와 다르지 않은 공포가 어려 있었다.
“삼 년에 한 번 찾아오는 혈월(血月)은… 언제나 오산의 눈이 모두 녹은 뒤였어. 그때면 제물로 바칠 짐승도 넉넉했고, 그만큼 재앙을 피할 수 있었지. 그런데 이번엔—이렇게까지 이른 시기에… 왜….”
백령은 이를 악물며 떨리는 시선을 주변으로 옮겼다. 광기에 휩싸인 듯한 달빛, 점점 더 붉게 타오르는 하늘, 그리고 잔뜩 웅크린 족인들의 모습이—그녀의 심장을 차갑게 움켜쥐었다.
그 시각, 흑염봉 깊숙한 화용동(化溶洞) 안.
소율은 온몸에 땀을 흘리며 마지막 약재를 다루고 있었다. 동굴 안은 불길의 열기로 숨이 막힐 만큼 뜨거웠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눈은 황정석로(荒鼎石爐)에 고정되어 있었고, 손끝으로는 화염의 세기를 미세하게 조절했다. 불꽃은 숨 쉬듯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고, 약향은 점점 더 짙어졌다.
“이번엔 반드시….”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내 황정석로에서 ‘쿵’ 하고 둔탁한 폭음이 터졌다. 흩날리는 청색 연기와 코를 찌르는 매운 냄새가 동굴 안을 뒤덮었다. 소율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역시… 산령산은 청진산보다 훨씬 어렵구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공에 맴도는 자욱한 연기가 눈을 시리게 했고, 그 너머로 비치는 붉은 불빛이 묘하게 불길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몸속 기혈이 요동쳤다. 심장에서 시작된 뜨거운 열기가 사지로 퍼져나가며, 혈선 하나하나가 스스로 꿈틀대는 듯한 이상한 감각이 일었다. 소율은 본능적으로 몸을 굳히고 사방을 살폈다. 그러나 동굴 안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럼에도 뼛속 깊숙이 스며드는 섬뜩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뭐지?”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착각일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약재를 손에 들었지만,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한편, 오산의 다른 방향—흑산부의 광장은 오룡부락이나 오산부락과는 전혀 다른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광장 가득 모인 족인들의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함께 섬뜩한 혈색의 흥분이 번들거렸다. 울부짖음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만사뿐 아니라 일반 족인들까지도 목이 터져라 포효했고, 그 울음은 곧 하나의 음파로 뭉쳐 소용돌이치듯 광장 위를 맴돌았다.
그 인파의 정중앙에는 무수한 붉은 돌을 촘촘히 쌓아 올린 작은 혈산(血山)이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검은 도포를 걸친 마른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의 눈빛은 차갑고, 입가에는 잔혹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하늘의 혈월을 올려다보며 쉰 목소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독백 같기도, 천지에 고하는 선포 같기도 한 음성이었다.
“태고의 세월 저편, 창망한 대지에 화만(火蠻) 일족이 있었으니, 하늘을 뒤흔드는 권능을 지녀 천지의 화(火)를 거느렸다. 그 분노는 창공을 태우고, 그 의지는 건곤을 뒤엎었다! 그 명성, 우리 만족이 아니더라도 두려움으로 떨었다—팔대부락 가운데 하나였지.”
노인의 목소리가 낮고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의 기물을 탐했고, 만신(蠻神)의 징벌을 받았다. 구천·구시·구식(九天九時九息)에 걸친 형벌 끝에, 화만의 일족 가운데 ‘만’이 아닌 자들은 모두 자화(自火)에 몸을 태워 혼백이 흩어졌다! …그럼에도 화만은 꺾이지 않았다. 일족의 ‘만’들은 살아남아, 만신을 배반하고 스스로를 만으로 다시 세우려 했다. 만신이 최상의 신통(神通)으로 그들을 말소하려 할 그 순간, 화만공(火蠻公)이 만신과 맞붙었지!”
그는 길게 숨을 들이켠 뒤, 목소리를 낮추었다.
“천지가 뒤흔들린 싸움이었다. 화만공은 끝내 쓰러졌으나, 죽기 전 만신마저 꺼리는 주술을 펼쳐 미처 죽지 않은 일족의 ‘만’을 ‘영불(永不)지사(死)’—영생에 가깝게 감쌌다.”
노인의 두 눈이 기묘한 빛을 띠었다. 마른 오른손이 들리자, 몸 곳곳에서 기름처럼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손가락마다 흉측한 귀영(鬼影)의 형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지. 만신은 만고일조(萬古一造)의 법으로 그 불멸을 저주로 바꾸었다. 사람의 형체를 앗아가 그들을 혈월의 날개, 월익(月翼)으로 만들었다! 그 원(怨)과 한(恨), 분(憤)과 애(哀)가 삼 년에 한 번 달을 물들이고, 달이 피로 변할 때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 이 대지를 배회하게 되었다!”
노인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오늘, 노부 흑산부의 만공 비투가—한 번 도와주마!”
비투는 싸늘하게 웃으며 혀끝을 깨물었다. 선혈이 입안에서 폭발하듯 솟아났고, 그는 그것을 하늘로 내뿜었다. 동시에 그의 발치에서 무수한 붉은 돌로 쌓인 혈산이 ‘쾅’ 하고 폭발했다. 돌덩이들이 촉수처럼 허공으로 치솟아, 비투의 머리 위에서 광적으로 회전했다.
비투의 몸은 서서히 떠올랐다. 양팔을 벌린 그의 눈매에는 광기와 환희가 교차했다. 회전하던 붉은 돌들은 어느 순간 하나의 거대한 도형으로 맞물렸다. 원형의 윤곽 안쪽에 초승달 문장이 새겨진 거대 인문(印紋)—온통 핏빛이었다.
“월익이여, 깨어나라! 너희의 장잠(長暝)을 앞당겨—나오너라!”
비투는 또 한 번 피를 뿜었다. 피는 허공에서 순식간에 피안개로 변해 도형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거대한 인문이 연쇄 폭발을 일으키듯 굉음을 토했다. 핏빛 안개가 사방으로 말려 나가듯 확산되었다.
그 직후, 오산 대지 전체가 마치 뒤집히는 듯 격렬하게 진동했다. 땅이 솟구쳤다가 꺼지는 듯한 파동이 전해졌고, 산맥 전체가 요동치며 들썩였다. 그 충격에 오산부락은 물론 멀리 떨어진 오룡부락까지도 동시에 술렁이며 혼란에 휩싸였다.
대지 깊숙한 곳에서 울려 나오는 진동은 점점 더 선명해졌고, 마치 거대한 괴수가 땅속에서 몸을 틀며 깨어나는 듯한 불길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산허리는 바람에 실린 듯 윙윙거리는 소리를 냈고, 나무들은 뿌리째 흔들렸다. 부락의 건축물들은 덜컹이며 뒤틀렸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서로를 붙잡았다.
용동 깊숙한 곳에 있던 소율 또한 그 충격을 느꼈다. 바닥이 요동치며 온몸으로 전해지는 진동에 숨이 턱 막혔다. 얼굴빛이 순간 창백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진동 속에서—어둠에 잠긴 동굴의 더 깊은 심연으로부터, 금속을 긁는 듯한 쇳가루 섞인 미세한 포효가 연이어 스며들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 소리는 점점 또렷해졌고, 본능적으로 심장을 죄어오는 살기를 품고 있었다.
소율은 망설일 틈도 없이 제련을 중단했다. 황급히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좁은 통로를 타고 출구로 몸을 날렸다. 그의 머리가 동굴 바깥 작은 구멍 너머로 드러나는 그 순간—핏빛으로 물든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혈월…!”
천공에 걸린 달은 피를 들이킨 듯 짙게 붉었고, 기괴하게 일렁이며 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소율의 혈색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솟구쳤다.
곧이어 흑염봉 전역에서 짙고 끈적한 혈취(血臭)가 몰려왔다. 마치 오래 썩은 피가 풍기는 듯한 그 냄새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것 같았다.
소율은 누구보다 혈월의 공포를 알고 있었고, 그 주기를 계산하며 대비해 왔다. 그러나 지금—혈월은 예상보다 훨씬 일찍 도래했다!
“말도 안 돼… 이렇게 앞당겨지다니!”
숨을 고를 겨를도 없이 그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바깥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숨을 곳도 없고, 대비할 시간도 없었다. 소율은 얼른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골각을 꺼내 들고, 미친 듯 바위벽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동굴 저편에서 울려오던 쇳가루 섞인 포효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제 그 포효 속에는 섬뜩한 날갯짓 소리, 그리고 무언가 군집으로 몰려오는 듯한 진동음까지 겹쳐 들려왔다. 귀가 멍해지고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소율의 두 눈은 이미 실핏줄로 가득 찼다. 생존 본능 하나만으로 골각을 휘둘렀다. 돌가루가 튀고 손바닥이 찢어지는 고통도 개의치 않았다. 필사적인 노력 끝에 몸 하나 겨우 숨길 만한 구멍이 뚫렸다. 그는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고, 방금 파낸 돌조각으로 출구를 다시 막았다. 은신처 안은 뜨겁고 숨 막히는 열기로 가득했지만 그것들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가 몸을 숨긴 바로 그 순간—동굴의 심연에서 붉은 안개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폭풍 같은 압력과 함께 피비린내 나는 안개가 용동 전체를 휩쓸며 울부짖는 소리를 동반했다. 이어 소율이 빠져나온 좁은 출구를 타고, 외부로 광폭하게 분출했다.
바깥 하늘 아래, 핏빛으로 일그러진 혈월의 광휘가 오산의 다섯 봉우리를 뒤덮고 있었다. 그 순간, 봉우리들은 마치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화산이 일제히 깨어난 듯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폭발하듯 터져 올랐다. 귀를 찢는 굉음이 사방을 뒤덮었고, 대지 깊숙이 응축돼 있던 무언가가 한꺼번에 분출되었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양의 붉은 안개가 봉우리 곳곳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마치 피의 폭포처럼 하늘을 향해 쏟아져 오르며, 온 천공을 피로 물들였다. 산맥 전체가 거대한 혈색의 장막에 휘감긴 듯했고, 바람조차 핏빛으로 물들어 흐느끼는 듯한 괴성을 실어 날랐다.
오룡봉의 산체 곳곳 균열에서도 핏빛 기운이 치솟았고, 과거 소율이 오룡연을 얻었던 그 골짜기에서도 진득한 붉은 안개가 끓어올랐다. 그 광경을 보았다면, 소율은 자신이 그동안 오룡들에게 쫓기며 결코 발을 들이지 못했던 금역(禁域)들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가장 격렬하게 핏빛 안개가 분출되는 재앙의 근원지였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흑염봉의 광경은 그중에서도 가장 참혹했다. 산허리 곳곳이 붉은 균열로 갈라지고, 땅속에서 쇠붙이가 서로 갈리는 듯한 윙윙거림이 울려 퍼졌다. 그 음향 위로, 마치 수천 수만의 거대한 날갯짓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듯한 진동음이 겹쳐졌다. 그것들은 뒤엉켜 죽음을 알리는 전율의 합주가 되어 대지를 타고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핏빛 장막을 찢으며 수많은 붉은 그림자가 하늘로 솟구쳤다!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하늘을 가르고 귀를 찢었다. 그것들은 손바닥만 한 크기였으나, 등에 날개를 달고 있었고, 여섯 개의 가느다란 사지와 일그러진 인면을 가진 괴이한 존재였다. 붉게 충혈된 두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고, 벌어진 입가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번득였다.
이것들은 바로—월익(月翼). 피와 원념이 만들어낸 재앙의 화신이었다.
하늘은 순식간에 이 괴물들의 떼로 뒤덮였다. 그 수는 수만에 달해 붉은 먹구름처럼 천공을 가리고, 날갯짓과 함께 퍼져 나오는 그들의 비명은 듣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광기에 물든 월익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흑산부, 오산부락, 오룡부락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에게 이성 따위는 없었다.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원한과 피에 대한 굶주림뿐. 특히 만의 피는 그들을 더욱 흉포하게 자극했다. 그들은 짐승이나 산림을 외면한 채, 곧장 부락의 피를 찾아 하늘을 가르며 돌진했다.
핏빛으로 물든 밤하늘 아래, 재앙의 서막이 그렇게 열리고 있었다.
오산부락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방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과 절규가 터져 나왔고, 아이들의 울음과 겁에 질린 숨소리가 뒤엉켜 하늘까지 치솟았다. 평소처럼 평온하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죽음의 그림자가 뒤덮은 사냥터에 불과했다.
“진흔!”
창백한 얼굴의 진흔은 본능적으로 곁에 있던 북령의 손을 움켜쥐었다. 북령의 얼굴 역시 핏기가 사라지고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 위로, 붉은 달빛을 받은 수만의 월익이 하늘을 뒤덮은 채 돌진하고 있었고, 그 날갯짓이 만들어내는 광폭한 바람이 이미 부락을 집어삼켰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는 뇌진이 분노와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가장 먼저 소율을 찾아 이리저리 달려보았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이 목을 조여 왔다. 하늘을 뒤덮은 괴물 떼를 보는 그의 눈가에 분노와 두려움이 엇갈렸다.
혼란에 빠진 부락민들은 서로를 짓밟으며 달아나려 했지만, 곧 만사들의 굵직한 고함이 공포를 잠재웠다.
“질서를 지켜라! 흩어지면 모두 죽는다!”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도 훈련된 만사들이 중심을 잡았다. 부락민들은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눈을 들어 불타는 목대 위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공이 서 있었다. 타오르는 화염 뒤로 드리운 그의 그림자는 사신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의 두 눈만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겉으로는 굳건히 서 있었지만, 불길 속에서도 그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아공은 멀리 붉은 안개 속에서 번득이는 수많은 월익을 보았다. 귀를 찢는 듯한 날갯짓 소리가 공포를 더했고, 그의 심장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어찌 이럴 수가….”
그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수십 년 동안 수차례 혈월을 겪어봤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시기가 앞당겨진 것도 모자라… 수까지… 예년엔 고작 수천에 불과했는데, 이번엔….”
그는 숨을 고르며 주저 없이 명을 내렸다.
“족인들은 전부 은신처로! 만사들은 내 명을 들어라! 키우고 있던 짐승을 모두 데려와 상처를 내 피를 흘리게 하고, 내 호령에 맞춰 준비하라!”
아공은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두려움에 질린 부락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들을 지켜내야만 했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 뒤 다시 하늘을 응시했다.
같은 시각, 오룡부락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백령은 눈앞의 참상을 믿을 수 없는 듯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월익의 그림자, 광기로 일그러진 인면, 그리고 날개짓의 굉음….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떨렸다. 아공의 호령에 따라 족인들이 부랴부랴 명령을 수행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녀의 눈동자 속 두려움은 점점 짙어졌다.
백령은 구년 전의 악몽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아직 어린아이였고, 함께 놀던 친구가 눈앞에서 수십 마리의 월익에게 낚여갔다. 피를 토하며 비명을 지르는 친구는 붉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고, 그녀의 귀에는 아직도 그 처절한 울음이 남아 있었다. 기다리는 것은 오직 느리고 잔혹한 죽음뿐이었다.
하늘의 혈월은 붉은 안개 속에서 드러났다 숨었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붉은 안개를 가르며 달려드는 수많은 붉은 그림자들은 점점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월익이 삼분되어 이 일대의 세 부락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오산부락의 아공은 검은 골장을 움켜쥐었다. 도드라지고 있는 그의 손목에 힘줄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월익의 선봉이 하늘을 가득 메우는 그 순간—그는 골장을 크게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그의 발아래에서 불타는 화해(火海)가 폭발하듯 확장되었다. 붉은 불길은 하늘을 찌를 기세로 솟구쳤지만, 신기하게도 가옥과 초목 하나 태우지 않았다. 오히려 부락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불의 장막이 되어 원형으로 마을을 감쌌다. 불길은 마치 실체 없는 환영 같았지만, 그 속에 서린 힘은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짐승을 던져라!”
아공의 쉰 듯 낮지만 단호한 호령이 터졌다. 즉시 만사들과 족인들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짐승 고기를 움켜쥐고, 공포를 누른 채 온 힘을 다해 하늘 높이 던졌다. 피비린내 나는 짐승들이 붉은 달빛을 받으며 궤적을 그리는 순간, 사방에서 날아드는 월익의 떼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핏빛 광란의 밤, 진정한 재앙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삼 년에 한 번 찾아오는 혈월(血月)은… 언제나 오산의 눈이 모두 녹은 뒤였어. 그때면 제물로 바칠 짐승도 넉넉했고, 그만큼 재앙을 피할 수 있었지. 그런데 이번엔—이렇게까지 이른 시기에… 왜….”
백령은 이를 악물며 떨리는 시선을 주변으로 옮겼다. 광기에 휩싸인 듯한 달빛, 점점 더 붉게 타오르는 하늘, 그리고 잔뜩 웅크린 족인들의 모습이—그녀의 심장을 차갑게 움켜쥐었다.
그 시각, 흑염봉 깊숙한 화용동(化溶洞) 안.
소율은 온몸에 땀을 흘리며 마지막 약재를 다루고 있었다. 동굴 안은 불길의 열기로 숨이 막힐 만큼 뜨거웠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눈은 황정석로(荒鼎石爐)에 고정되어 있었고, 손끝으로는 화염의 세기를 미세하게 조절했다. 불꽃은 숨 쉬듯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고, 약향은 점점 더 짙어졌다.
“이번엔 반드시….”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내 황정석로에서 ‘쿵’ 하고 둔탁한 폭음이 터졌다. 흩날리는 청색 연기와 코를 찌르는 매운 냄새가 동굴 안을 뒤덮었다. 소율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역시… 산령산은 청진산보다 훨씬 어렵구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공에 맴도는 자욱한 연기가 눈을 시리게 했고, 그 너머로 비치는 붉은 불빛이 묘하게 불길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몸속 기혈이 요동쳤다. 심장에서 시작된 뜨거운 열기가 사지로 퍼져나가며, 혈선 하나하나가 스스로 꿈틀대는 듯한 이상한 감각이 일었다. 소율은 본능적으로 몸을 굳히고 사방을 살폈다. 그러나 동굴 안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럼에도 뼛속 깊숙이 스며드는 섬뜩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뭐지?”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착각일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약재를 손에 들었지만,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한편, 오산의 다른 방향—흑산부의 광장은 오룡부락이나 오산부락과는 전혀 다른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광장 가득 모인 족인들의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함께 섬뜩한 혈색의 흥분이 번들거렸다. 울부짖음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만사뿐 아니라 일반 족인들까지도 목이 터져라 포효했고, 그 울음은 곧 하나의 음파로 뭉쳐 소용돌이치듯 광장 위를 맴돌았다.
그 인파의 정중앙에는 무수한 붉은 돌을 촘촘히 쌓아 올린 작은 혈산(血山)이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검은 도포를 걸친 마른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의 눈빛은 차갑고, 입가에는 잔혹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하늘의 혈월을 올려다보며 쉰 목소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독백 같기도, 천지에 고하는 선포 같기도 한 음성이었다.
“태고의 세월 저편, 창망한 대지에 화만(火蠻) 일족이 있었으니, 하늘을 뒤흔드는 권능을 지녀 천지의 화(火)를 거느렸다. 그 분노는 창공을 태우고, 그 의지는 건곤을 뒤엎었다! 그 명성, 우리 만족이 아니더라도 두려움으로 떨었다—팔대부락 가운데 하나였지.”
노인의 목소리가 낮고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의 기물을 탐했고, 만신(蠻神)의 징벌을 받았다. 구천·구시·구식(九天九時九息)에 걸친 형벌 끝에, 화만의 일족 가운데 ‘만’이 아닌 자들은 모두 자화(自火)에 몸을 태워 혼백이 흩어졌다! …그럼에도 화만은 꺾이지 않았다. 일족의 ‘만’들은 살아남아, 만신을 배반하고 스스로를 만으로 다시 세우려 했다. 만신이 최상의 신통(神通)으로 그들을 말소하려 할 그 순간, 화만공(火蠻公)이 만신과 맞붙었지!”
그는 길게 숨을 들이켠 뒤, 목소리를 낮추었다.
“천지가 뒤흔들린 싸움이었다. 화만공은 끝내 쓰러졌으나, 죽기 전 만신마저 꺼리는 주술을 펼쳐 미처 죽지 않은 일족의 ‘만’을 ‘영불(永不)지사(死)’—영생에 가깝게 감쌌다.”
노인의 두 눈이 기묘한 빛을 띠었다. 마른 오른손이 들리자, 몸 곳곳에서 기름처럼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손가락마다 흉측한 귀영(鬼影)의 형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지. 만신은 만고일조(萬古一造)의 법으로 그 불멸을 저주로 바꾸었다. 사람의 형체를 앗아가 그들을 혈월의 날개, 월익(月翼)으로 만들었다! 그 원(怨)과 한(恨), 분(憤)과 애(哀)가 삼 년에 한 번 달을 물들이고, 달이 피로 변할 때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 이 대지를 배회하게 되었다!”
노인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오늘, 노부 흑산부의 만공 비투가—한 번 도와주마!”
비투는 싸늘하게 웃으며 혀끝을 깨물었다. 선혈이 입안에서 폭발하듯 솟아났고, 그는 그것을 하늘로 내뿜었다. 동시에 그의 발치에서 무수한 붉은 돌로 쌓인 혈산이 ‘쾅’ 하고 폭발했다. 돌덩이들이 촉수처럼 허공으로 치솟아, 비투의 머리 위에서 광적으로 회전했다.
비투의 몸은 서서히 떠올랐다. 양팔을 벌린 그의 눈매에는 광기와 환희가 교차했다. 회전하던 붉은 돌들은 어느 순간 하나의 거대한 도형으로 맞물렸다. 원형의 윤곽 안쪽에 초승달 문장이 새겨진 거대 인문(印紋)—온통 핏빛이었다.
“월익이여, 깨어나라! 너희의 장잠(長暝)을 앞당겨—나오너라!”
비투는 또 한 번 피를 뿜었다. 피는 허공에서 순식간에 피안개로 변해 도형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거대한 인문이 연쇄 폭발을 일으키듯 굉음을 토했다. 핏빛 안개가 사방으로 말려 나가듯 확산되었다.
그 직후, 오산 대지 전체가 마치 뒤집히는 듯 격렬하게 진동했다. 땅이 솟구쳤다가 꺼지는 듯한 파동이 전해졌고, 산맥 전체가 요동치며 들썩였다. 그 충격에 오산부락은 물론 멀리 떨어진 오룡부락까지도 동시에 술렁이며 혼란에 휩싸였다.
대지 깊숙한 곳에서 울려 나오는 진동은 점점 더 선명해졌고, 마치 거대한 괴수가 땅속에서 몸을 틀며 깨어나는 듯한 불길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산허리는 바람에 실린 듯 윙윙거리는 소리를 냈고, 나무들은 뿌리째 흔들렸다. 부락의 건축물들은 덜컹이며 뒤틀렸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서로를 붙잡았다.
용동 깊숙한 곳에 있던 소율 또한 그 충격을 느꼈다. 바닥이 요동치며 온몸으로 전해지는 진동에 숨이 턱 막혔다. 얼굴빛이 순간 창백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진동 속에서—어둠에 잠긴 동굴의 더 깊은 심연으로부터, 금속을 긁는 듯한 쇳가루 섞인 미세한 포효가 연이어 스며들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 소리는 점점 또렷해졌고, 본능적으로 심장을 죄어오는 살기를 품고 있었다.
소율은 망설일 틈도 없이 제련을 중단했다. 황급히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좁은 통로를 타고 출구로 몸을 날렸다. 그의 머리가 동굴 바깥 작은 구멍 너머로 드러나는 그 순간—핏빛으로 물든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혈월…!”
천공에 걸린 달은 피를 들이킨 듯 짙게 붉었고, 기괴하게 일렁이며 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소율의 혈색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솟구쳤다.
곧이어 흑염봉 전역에서 짙고 끈적한 혈취(血臭)가 몰려왔다. 마치 오래 썩은 피가 풍기는 듯한 그 냄새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것 같았다.
소율은 누구보다 혈월의 공포를 알고 있었고, 그 주기를 계산하며 대비해 왔다. 그러나 지금—혈월은 예상보다 훨씬 일찍 도래했다!
“말도 안 돼… 이렇게 앞당겨지다니!”
숨을 고를 겨를도 없이 그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바깥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숨을 곳도 없고, 대비할 시간도 없었다. 소율은 얼른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골각을 꺼내 들고, 미친 듯 바위벽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동굴 저편에서 울려오던 쇳가루 섞인 포효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제 그 포효 속에는 섬뜩한 날갯짓 소리, 그리고 무언가 군집으로 몰려오는 듯한 진동음까지 겹쳐 들려왔다. 귀가 멍해지고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소율의 두 눈은 이미 실핏줄로 가득 찼다. 생존 본능 하나만으로 골각을 휘둘렀다. 돌가루가 튀고 손바닥이 찢어지는 고통도 개의치 않았다. 필사적인 노력 끝에 몸 하나 겨우 숨길 만한 구멍이 뚫렸다. 그는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고, 방금 파낸 돌조각으로 출구를 다시 막았다. 은신처 안은 뜨겁고 숨 막히는 열기로 가득했지만 그것들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가 몸을 숨긴 바로 그 순간—동굴의 심연에서 붉은 안개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폭풍 같은 압력과 함께 피비린내 나는 안개가 용동 전체를 휩쓸며 울부짖는 소리를 동반했다. 이어 소율이 빠져나온 좁은 출구를 타고, 외부로 광폭하게 분출했다.
바깥 하늘 아래, 핏빛으로 일그러진 혈월의 광휘가 오산의 다섯 봉우리를 뒤덮고 있었다. 그 순간, 봉우리들은 마치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화산이 일제히 깨어난 듯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폭발하듯 터져 올랐다. 귀를 찢는 굉음이 사방을 뒤덮었고, 대지 깊숙이 응축돼 있던 무언가가 한꺼번에 분출되었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양의 붉은 안개가 봉우리 곳곳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마치 피의 폭포처럼 하늘을 향해 쏟아져 오르며, 온 천공을 피로 물들였다. 산맥 전체가 거대한 혈색의 장막에 휘감긴 듯했고, 바람조차 핏빛으로 물들어 흐느끼는 듯한 괴성을 실어 날랐다.
오룡봉의 산체 곳곳 균열에서도 핏빛 기운이 치솟았고, 과거 소율이 오룡연을 얻었던 그 골짜기에서도 진득한 붉은 안개가 끓어올랐다. 그 광경을 보았다면, 소율은 자신이 그동안 오룡들에게 쫓기며 결코 발을 들이지 못했던 금역(禁域)들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가장 격렬하게 핏빛 안개가 분출되는 재앙의 근원지였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흑염봉의 광경은 그중에서도 가장 참혹했다. 산허리 곳곳이 붉은 균열로 갈라지고, 땅속에서 쇠붙이가 서로 갈리는 듯한 윙윙거림이 울려 퍼졌다. 그 음향 위로, 마치 수천 수만의 거대한 날갯짓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듯한 진동음이 겹쳐졌다. 그것들은 뒤엉켜 죽음을 알리는 전율의 합주가 되어 대지를 타고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핏빛 장막을 찢으며 수많은 붉은 그림자가 하늘로 솟구쳤다!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하늘을 가르고 귀를 찢었다. 그것들은 손바닥만 한 크기였으나, 등에 날개를 달고 있었고, 여섯 개의 가느다란 사지와 일그러진 인면을 가진 괴이한 존재였다. 붉게 충혈된 두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고, 벌어진 입가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번득였다.
이것들은 바로—월익(月翼). 피와 원념이 만들어낸 재앙의 화신이었다.
하늘은 순식간에 이 괴물들의 떼로 뒤덮였다. 그 수는 수만에 달해 붉은 먹구름처럼 천공을 가리고, 날갯짓과 함께 퍼져 나오는 그들의 비명은 듣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광기에 물든 월익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흑산부, 오산부락, 오룡부락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에게 이성 따위는 없었다.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원한과 피에 대한 굶주림뿐. 특히 만의 피는 그들을 더욱 흉포하게 자극했다. 그들은 짐승이나 산림을 외면한 채, 곧장 부락의 피를 찾아 하늘을 가르며 돌진했다.
핏빛으로 물든 밤하늘 아래, 재앙의 서막이 그렇게 열리고 있었다.
오산부락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방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과 절규가 터져 나왔고, 아이들의 울음과 겁에 질린 숨소리가 뒤엉켜 하늘까지 치솟았다. 평소처럼 평온하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죽음의 그림자가 뒤덮은 사냥터에 불과했다.
“진흔!”
창백한 얼굴의 진흔은 본능적으로 곁에 있던 북령의 손을 움켜쥐었다. 북령의 얼굴 역시 핏기가 사라지고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 위로, 붉은 달빛을 받은 수만의 월익이 하늘을 뒤덮은 채 돌진하고 있었고, 그 날갯짓이 만들어내는 광폭한 바람이 이미 부락을 집어삼켰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는 뇌진이 분노와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가장 먼저 소율을 찾아 이리저리 달려보았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이 목을 조여 왔다. 하늘을 뒤덮은 괴물 떼를 보는 그의 눈가에 분노와 두려움이 엇갈렸다.
혼란에 빠진 부락민들은 서로를 짓밟으며 달아나려 했지만, 곧 만사들의 굵직한 고함이 공포를 잠재웠다.
“질서를 지켜라! 흩어지면 모두 죽는다!”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도 훈련된 만사들이 중심을 잡았다. 부락민들은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눈을 들어 불타는 목대 위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공이 서 있었다. 타오르는 화염 뒤로 드리운 그의 그림자는 사신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의 두 눈만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겉으로는 굳건히 서 있었지만, 불길 속에서도 그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아공은 멀리 붉은 안개 속에서 번득이는 수많은 월익을 보았다. 귀를 찢는 듯한 날갯짓 소리가 공포를 더했고, 그의 심장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어찌 이럴 수가….”
그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수십 년 동안 수차례 혈월을 겪어봤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시기가 앞당겨진 것도 모자라… 수까지… 예년엔 고작 수천에 불과했는데, 이번엔….”
그는 숨을 고르며 주저 없이 명을 내렸다.
“족인들은 전부 은신처로! 만사들은 내 명을 들어라! 키우고 있던 짐승을 모두 데려와 상처를 내 피를 흘리게 하고, 내 호령에 맞춰 준비하라!”
아공은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두려움에 질린 부락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들을 지켜내야만 했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 뒤 다시 하늘을 응시했다.
같은 시각, 오룡부락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백령은 눈앞의 참상을 믿을 수 없는 듯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월익의 그림자, 광기로 일그러진 인면, 그리고 날개짓의 굉음….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떨렸다. 아공의 호령에 따라 족인들이 부랴부랴 명령을 수행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녀의 눈동자 속 두려움은 점점 짙어졌다.
백령은 구년 전의 악몽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아직 어린아이였고, 함께 놀던 친구가 눈앞에서 수십 마리의 월익에게 낚여갔다. 피를 토하며 비명을 지르는 친구는 붉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고, 그녀의 귀에는 아직도 그 처절한 울음이 남아 있었다. 기다리는 것은 오직 느리고 잔혹한 죽음뿐이었다.
하늘의 혈월은 붉은 안개 속에서 드러났다 숨었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붉은 안개를 가르며 달려드는 수많은 붉은 그림자들은 점점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월익이 삼분되어 이 일대의 세 부락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오산부락의 아공은 검은 골장을 움켜쥐었다. 도드라지고 있는 그의 손목에 힘줄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월익의 선봉이 하늘을 가득 메우는 그 순간—그는 골장을 크게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그의 발아래에서 불타는 화해(火海)가 폭발하듯 확장되었다. 붉은 불길은 하늘을 찌를 기세로 솟구쳤지만, 신기하게도 가옥과 초목 하나 태우지 않았다. 오히려 부락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불의 장막이 되어 원형으로 마을을 감쌌다. 불길은 마치 실체 없는 환영 같았지만, 그 속에 서린 힘은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짐승을 던져라!”
아공의 쉰 듯 낮지만 단호한 호령이 터졌다. 즉시 만사들과 족인들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짐승 고기를 움켜쥐고, 공포를 누른 채 온 힘을 다해 하늘 높이 던졌다. 피비린내 나는 짐승들이 붉은 달빛을 받으며 궤적을 그리는 순간, 사방에서 날아드는 월익의 떼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핏빛 광란의 밤, 진정한 재앙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작가의 말
등록된 작가의 말이 없습니다.
닫기![]()
마(魔)의 이름으로, 세상에 군림하리
30.제30장 월익의 귀환, 그리고 구원조회 : 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396 29.제29장 화만의 부락조회 : 2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35 28.제28장. 혈월강림, 월익의 광무조회 : 1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432 27.제27장 만신의 저주, 월익의 강림조회 : 3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457 26.제26장. 혈월(血月)의 밤조회 : 3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893 25.제25장 화근의 씨앗조회 : 4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184 24.제24장. 은밀한 거래조회 : 5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39 23.제23장. 첫만남조회 : 5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618 22.제22장. 변치 않으리...조회 : 6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03 21.제21장. 차가운 시선, 식지 않는 갈망조회 : 8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93 20.제20장. 서리바람 속의 재회조회 : 7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25 19.제19장. 석문 너머조회 : 8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55 18.제18장. 선만의 축복조회 : 7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835 17.제17장. 혈맥의 비밀과 할아버지의 경고조회 : 8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92 16.제16장. 귀향조회 : 10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410 15.제15장. 절망을 길들이는 자조회 : 5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82 14.제14장. 사만(邪蠻)의 그림자, 육치의 도주조회 : 6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92 13.제13장. 육혈 각성, 흑산의 추격자조회 : 8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398 12.제12장. 청진산의 효능조회 : 7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724 11.제11장. 혈산과 청진산조회 : 8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2,659 10.제10장 수산(淬散)조회 : 5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689 9.제9장 흑염봉(黑炎峰)조회 : 5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313 8.제8장. 기억의 문, 약석(藥石)의 비밀조회 : 5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2,559 7.제7장. 숨겨진 선물, 깨어나는 혈맥조회 : 6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235 6.제6장. 피로 각성한 의지, 그리고 첫 걸음조회 : 8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049 5.제5장 별을 향한 균열조회 : 7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152 4.제4장 밤의 망설임조회 : 10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2,998 3.제3장 만계(蠻啟)조회 : 16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248 2.제2장 소율 (韶律)조회 : 17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2,915 1.제1장 마서(魔序)조회 : 33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1,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