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화만의 부락
조회 : 17 추천 : 0 글자수 : 5,535 자 2025-08-29
화염의 숨결이 식어 버린 듯한 용암 동굴 깊숙이, 소율은 몸을 최대한 낮춘 채 서두르지 않고 전진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발을 옮기기 전마다 반드시 시야를 먼저 펼쳐 길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몸을 움직였다. 손에는 뼈로 만든 뿔각을 쥐고 체내 기혈은 언제든 힘을 폭발시킬 수 있는 임계점에 걸어 둔 상태라, 근육과 심장은 팽팽히 현을 당긴 활처럼 미세하게 떨렸다.
몇 걸음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길 만한 그늘과 돌출부를 찾아 두었다. 뜻밖의 위험이 튀어나오거나, 월익이 갑작스레 귀환할 경우 순식간에 몸을 감출 수 있는 위치를 미리 정해 두는 셈이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그를 잡아끌었지만, 이곳의 기운이 위험을 암시할수록 신중함이 호기심을 눌렀다. 그 절제 덕분에 호흡은 얕고 길게 이어졌고, 발소리는 물속의 그림자처럼 가벼웠다.
깊이로 내려갈수록 동굴 속 냉기가 더 또렷해졌다. 갈림길이 드물어 길 찾기는 수월해졌고, 그만큼 걸음도 조금씩 빨라졌다. 사방은 끝 모를 어둠, 벽면 곳곳에는 크고 작은 균열이 어지럽게 달려 있었다. 오랜 세월 용암의 열기에 지쳐 벌어진 흔적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소율은 그 틈새 중 일부가 비교적 ‘새것’임을 알아차렸다. 노출된 단면의 빛깔이 미묘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이상하네… 이 균열들은 분명 막 나타난 것 같아. 어떤 힘이 작용해야 이렇게 단단한 벽이 새로 갈라질 수 있지?”
소율의 생각은 곧 다른 가설로 이어졌다.
“혹시 극한의 열기가 한순간에 식어버린다면, 상상도 못 할 힘이 폭발하는 걸까…”
그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긁적였다.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일단은 이 현상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었다.
얼마나 걸어 내려왔을까. 시간에 대한 감각이 점점 흐려질 즈음, 앞쪽 통로가 서서히 넓어지기 시작했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혈관이 심장으로 이어지는 동맥처럼 그 폭이 점점 더 커졌다. 소율은 주위를 빈틈없이 살피며 한 걸음, 한 걸음을 신중하게 내디뎠다. 그렇게 조금 더 나아가자, 갑작스레 눈앞에 거대한 광장이 펼쳐지듯 시야가 확 트였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치 세월에 묻힌 벽화를 감상하듯 그 앞에 펼쳐진 광경을 한참 동안 곱씹었다.
앞에는 우산부락을 통째로 옮겨 놓고도 넉넉히 남을 만큼 거대한 용암 동굴이 암흑 속에 괴물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사방의 암벽에는 바늘로 꿰뚫어 놓은 듯한 작은 구멍들이 촘촘히 뚫려 있었고, 그 수는 한눈에 세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수십,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크고 작은 통로들이 마치 태고의 거대한 벌집처럼 암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소율이 지금까지 기어 나왔던 통로 역시 이 수많은 구멍 중 하나였다.
그는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폈다. 벽면을 가득 메운 작은 동굴 입구들은 각도와 위치가 미묘하게 달랐고, 어둠 속에서는 마치 무언가 그 속에서 숨죽이고 지켜보는 듯한 기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바람이 불어와 구멍 틈새를 스칠 때마다, 낮게 울리는 휘파람 같은 소리가 골짜기처럼 깊게 메아리쳤다.
소율은 조심스럽게 모든 구멍을 훑어보았다. 하나하나의 입구에 바짝 다가서서 틈새의 기류와 냄새, 바닥의 긁힌 자국을 차례로 확인했다. 그러다 마침내, 단 하나의 구멍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 입구에서는 다른 어떤 구멍과도 확연히 다른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주 희미하지만 결코 착각할 수 없는 쇠비린내, 갓 흘린 피가 마르며 남긴 특유의 금속성 향이 공기를 타고 번졌다. 그 순간, 소율의 심장은 두근거리며 긴장으로 가득 찼으나, 동시에 본능적으로 여기가 바로 월익(月翼)이 드나들던 통로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이빨을 꽉 깨물고 몸을 낮추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통로는 처음엔 좁고 낮았으나 안으로 들수록 벽이 매끈해지고 발자국과 날개깃이 스친 흔적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소율은 달리다가도 문득 멈춰 서서 뿔각으로 벽을 떠내듯 깎아, 통로 폭과 비슷한 판석을 힘겹게 도려냈다. 그 돌은 곧 ‘문짝’이 되었고, 그는 각도를 맞춰 옆 벽에 기대 세워 두었다. 퇴각로를 봉쇄하거나 추격자의 시야를 속일 미끼였다. 비록 손이 많이 가고 힘든 작업이었지만, 소율은 묵묵히 같은 크기의 돌판을 몇 장씩 만들며 전진했다. 조심성은 그의 생존 본능이었고, 그 본능은 깊어질수록 더욱 단단해졌다.
한동안은 달림과 정지가 교차했다. 그러나 내려갈수록 화용동(火熔洞)이라 부르기 무색할 만큼, 열기 대신 서늘한 기운이 통로를 가득 채웠다. 곁길이 거의 없는 직선형의 동맥 같은 통로였기에, 소율의 속도는 조심스러움 속에서도 점차 붙었고, 한참을 더 들어가자 전방의 어둠이 붉은 끈으로 풀리듯 엷게 물들기 시작했다.
통로의 끝은 막다른 곳이었다. 그러나 그 막힘은 벽이 아니라, 거대한 빈 공간으로 꺾여 내려가는 낭하의 초입이었다. 소율은 튀어나온 암반 끝에 발을 붙이고 몸을 낮춘 채 아래를 굽어보았다. 그 순간, 번개에 맞은 듯 몸이 굳었고, 본능적으로 두 걸음 물러서며 날숨을 삼켰다.
아래는 하나의 분지였다. 바닥 곳곳에서 회색 석봉이 칼날처럼 솟구쳐 있었고, 그 첨두마다 식은 김 같은 냉기가 서려 나와 공기를 잔잔히 흔들었다. 화용동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느껴져야 할 열기 대신, 서늘함이 겹겹이 포개져 심장을 조여 왔다. 그러나 소율의 시선을 진정 붙잡은 것은 그 차가움이 아니라, 그 가운데 도려내어 놓은 듯 자리한 ‘부락’이었다.
석재로 쌓아 올린 큰집들이 반듯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고, 바깥 둘레에는 돌을 맞물려 세운 방책과, 돌을 층층이 눌러 올린 망루가 서 있었다. 집집마다 문설주 앞에는 불꽃 모양의 토템이 도드라져 있었고, 곳곳의 화덕 위에는 돌솥이 그 자리에 멈춘 채 식어 있었다. 한때 뜨겁게 숨 쉬던 삶의 결이, 소리만 잃고 남아 있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부락은 온전하지 않았다. 가장자리의 몇몇 집은 누군가 초대형 칼로 정밀하게 절단한 듯 정확히 반으로 잘려 있었고, 절단면은 산화 한 번 겪지 않은 신선한 암벽처럼 매끈했다. 남은 절반만 이곳에, 나머지 절반은—마치 대지의 판이 통째로 들어 올려져 다른 곳으로 옮겨진 듯—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전설이…… 아니었어.”
소율은 이 불가사의하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부락의 중심으로 끌렸다. 거기엔 나무가—아니, 나무처럼 ‘보이는’ 것이 서 있었다. 줄기만 남은 거대한 기둥. 통째로 피처럼 붉었고, 껍질의 결 사이로 불빛 같은 광휘가 서서히 번졌다. 가지도, 잎도 없건만, 그 뿌리는 대지를 뚫고 더 아래로, 흑염봉의 심장부까지 파고든 듯했다. 줄기의 틈마다 익숙한 붉은 작은 꽃들이 달려 있었는데, 숲속의 괴이한 늪지—그가 목격한 그 붉은 꽃과 닮아 있었다.
침묵 속에서 소율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세월의 퇴적 속에 반쯤 묻혀버린 부락의 유적을 바라보자, 가슴 어딘가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비애가 조용히 솟구쳤다. 미세한 한숨이 새어 나왔고, 그는 더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몸을 낮춰 분지로 뛰어내렸다. 발끝이 돌바닥에 닿는 순간, 소율은 오래전에 멸한 시간의 그림자 한가운데—만족 팔대 부락 중 하나이자, 감히 만신과 맞서 싸웠던 화만의 부락 속으로 들어서 있었다.
“그렇다면, 저 월익들은… 전설 그대로, 옛날 만공의 만술(蠻術) 아래 죽지 못하고 남은 화만의 자손들이 변이해 생겨난 것인가… 하지만…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하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만술이 존재하지… 화만의 만공—그 자는 대체 어느 경지까지 이르렀던 거지… 책에는 응혈(凝血) 다음이 개진(開塵), 그다음이 제골(祭骨)이라 적혀 있었고, 제골 이후는 더 이상 밝히지 않았지. 그저 하나의 칭호만을 남겨 두었을 뿐… ‘만사(蠻師)’.”
소율은 속으로 낮게 중얼거리며, 이 만고의 부락 한복판을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부락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석재로 쌓은 집들과 여기저기 흩어진 살림살이 몇 가지만이 남아 있을 뿐, 소율이 찾는 흔적—어떤 생명의 잔해도, 한 줌의 백골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숨조차 삼키기 어려울 만큼 정막이었고, 그 적막 속에 소율의 심장 소리만 더욱 또렷이 들렸다.
생각이 깊어지던 찰나, 소율의 발끝이 작은 돌기가 돋아난 길 위에 올랐다. 돋아난 조약돌들이 촘촘히 박힌 길—밟는 느낌이 불편할 정도로 거칠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미세하게 발바닥을 찌르듯 감각이 올라왔다. 그는 몸을 숙여 자세히 살폈으나, 이 길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단정하기 어려웠다. 의식의 동선인가, 방호를 위한 장치인가, 혹은 생활의 습속인가. 소율은 판단을 보류한 채, 한동안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문득—발걸음이 뚝, 멈췄다. 시야의 가장자리, 어딘가 낯선 윤곽이 스치듯 걸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 잘려나간 부락의 경계 쪽, 암벽이 붙은 그늘진 가장자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거기—어둠과 돌담에 반쯤 가려져 보이지 않던 자리에서, 마침내 소율의 눈이 그것을 포착했다.
해골이었다.
집들의 잔해가 시야를 가렸던 탓에 지금껏 알아채지 못했을 뿐, 지금 이 자리에서만은 그 형상이 극명하게 들어왔다. 소율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했다. 이곳에 들어와 그가 처음으로 마주한, 단 하나의 백골—그는 거의 달리다시피 몇 걸음을 좁혀 해골 곁에 섰다. 손에 쥔 뿔각이 미세하게 떨렸고, 서늘한 기운이 손등을 스쳤다. 자세히 들여다본 순간, 소율의 온몸에 전류가 흐르듯 소름이 돋았다.
그 해골은 기괴했다. 위쪽 몸통은 인간의 형상을 간직한 채 마른 잎맥처럼 수축해 있었고, 아래쪽 뼈들은 마치 뜨거운 쇳물이 식다 만 듯 일그러져 있었다. 등뼈 뒤편에서는 두 가닥의 골편이 날개처럼 돋아나다 굳어 있었으니, 그 뼈의 윤곽만으로도 월익과 닮은 점이 분명했다. 마치 이 자가 죽음 직전, 뼈가 다시 쓰이는 변이를 겪고 있었고—인간에서 월익으로 넘어가는 탈태의 고통 한가운데서 시간에 박힌 듯 멈추어 선 형상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에 남은 표정은 고통이 아니었다. 미묘하게 걸린, 비웃음. 조소와 자만이 아주 가느다란 선으로 입가에 남아 있었다. 그것이 과연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부락과 산을 둘로 가른 알 수 없는 힘을 겨눈 것인지, 인간을 비틀어 월익으로 만드는 만술의 주인을 겨눈 것인지, 혹은 끝내 넘지 못한 경계 그 자체를 향한 것인지는—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해골의 오른손 검지는 곁의 암벽에 깊이 박혀 있었다. 단순한 경련의 흔적이 아닌, 마지막 한 줌의 의지를 모아 바위에 못을 박듯 생과 사의 경계를 돌벽에 못질해 남긴 흔적이었다.
소율은 그 손끝이 겨눈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암면 위에는 한 줄의 글귀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굵고 매듭진 획, 직선과 곡선의 경계를 오가는 특유의 필치가 거친 바위면에 새겨져 있었고, 오래 말라붙은 혈흔 같은 암적색이 글자의 골을 따라 얇게 스며 있었다. 글씨는 소리를 내지 않지만, 그 틈으로 스며 나오는 냉기가 손등의 솜털을 서서히 곤두세웠다.
그리고 바로 그때—소율의 시선이 그 글귀에 닿는 순간, 그가 들어왔던 입구 쪽 긴 통로에서 ‘휘익—’ 바람을 가르는 날개 소리가 한 번, 길게 울렸다. 곧이어 그 소리는 둘, 셋으로 겹치더니 광풍처럼 연속해 터져 나왔다. 날개가 공기를 베어내는 일정한 리듬 사이로, 낮고 거친 포효가 섞였고, 그 아래에는 절망의 울음 같은 짧은 비명이 교차했다. 멀리에서 시작되었으나, 이 적막은 모든 소리를 증폭시켜 금세 등 뒤까지 들이닥치게 했다.
월익이 돌아왔다!
몇 걸음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길 만한 그늘과 돌출부를 찾아 두었다. 뜻밖의 위험이 튀어나오거나, 월익이 갑작스레 귀환할 경우 순식간에 몸을 감출 수 있는 위치를 미리 정해 두는 셈이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그를 잡아끌었지만, 이곳의 기운이 위험을 암시할수록 신중함이 호기심을 눌렀다. 그 절제 덕분에 호흡은 얕고 길게 이어졌고, 발소리는 물속의 그림자처럼 가벼웠다.
깊이로 내려갈수록 동굴 속 냉기가 더 또렷해졌다. 갈림길이 드물어 길 찾기는 수월해졌고, 그만큼 걸음도 조금씩 빨라졌다. 사방은 끝 모를 어둠, 벽면 곳곳에는 크고 작은 균열이 어지럽게 달려 있었다. 오랜 세월 용암의 열기에 지쳐 벌어진 흔적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소율은 그 틈새 중 일부가 비교적 ‘새것’임을 알아차렸다. 노출된 단면의 빛깔이 미묘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이상하네… 이 균열들은 분명 막 나타난 것 같아. 어떤 힘이 작용해야 이렇게 단단한 벽이 새로 갈라질 수 있지?”
소율의 생각은 곧 다른 가설로 이어졌다.
“혹시 극한의 열기가 한순간에 식어버린다면, 상상도 못 할 힘이 폭발하는 걸까…”
그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긁적였다.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일단은 이 현상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었다.
얼마나 걸어 내려왔을까. 시간에 대한 감각이 점점 흐려질 즈음, 앞쪽 통로가 서서히 넓어지기 시작했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혈관이 심장으로 이어지는 동맥처럼 그 폭이 점점 더 커졌다. 소율은 주위를 빈틈없이 살피며 한 걸음, 한 걸음을 신중하게 내디뎠다. 그렇게 조금 더 나아가자, 갑작스레 눈앞에 거대한 광장이 펼쳐지듯 시야가 확 트였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치 세월에 묻힌 벽화를 감상하듯 그 앞에 펼쳐진 광경을 한참 동안 곱씹었다.
앞에는 우산부락을 통째로 옮겨 놓고도 넉넉히 남을 만큼 거대한 용암 동굴이 암흑 속에 괴물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사방의 암벽에는 바늘로 꿰뚫어 놓은 듯한 작은 구멍들이 촘촘히 뚫려 있었고, 그 수는 한눈에 세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수십,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크고 작은 통로들이 마치 태고의 거대한 벌집처럼 암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소율이 지금까지 기어 나왔던 통로 역시 이 수많은 구멍 중 하나였다.
그는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폈다. 벽면을 가득 메운 작은 동굴 입구들은 각도와 위치가 미묘하게 달랐고, 어둠 속에서는 마치 무언가 그 속에서 숨죽이고 지켜보는 듯한 기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바람이 불어와 구멍 틈새를 스칠 때마다, 낮게 울리는 휘파람 같은 소리가 골짜기처럼 깊게 메아리쳤다.
소율은 조심스럽게 모든 구멍을 훑어보았다. 하나하나의 입구에 바짝 다가서서 틈새의 기류와 냄새, 바닥의 긁힌 자국을 차례로 확인했다. 그러다 마침내, 단 하나의 구멍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 입구에서는 다른 어떤 구멍과도 확연히 다른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주 희미하지만 결코 착각할 수 없는 쇠비린내, 갓 흘린 피가 마르며 남긴 특유의 금속성 향이 공기를 타고 번졌다. 그 순간, 소율의 심장은 두근거리며 긴장으로 가득 찼으나, 동시에 본능적으로 여기가 바로 월익(月翼)이 드나들던 통로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이빨을 꽉 깨물고 몸을 낮추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통로는 처음엔 좁고 낮았으나 안으로 들수록 벽이 매끈해지고 발자국과 날개깃이 스친 흔적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소율은 달리다가도 문득 멈춰 서서 뿔각으로 벽을 떠내듯 깎아, 통로 폭과 비슷한 판석을 힘겹게 도려냈다. 그 돌은 곧 ‘문짝’이 되었고, 그는 각도를 맞춰 옆 벽에 기대 세워 두었다. 퇴각로를 봉쇄하거나 추격자의 시야를 속일 미끼였다. 비록 손이 많이 가고 힘든 작업이었지만, 소율은 묵묵히 같은 크기의 돌판을 몇 장씩 만들며 전진했다. 조심성은 그의 생존 본능이었고, 그 본능은 깊어질수록 더욱 단단해졌다.
한동안은 달림과 정지가 교차했다. 그러나 내려갈수록 화용동(火熔洞)이라 부르기 무색할 만큼, 열기 대신 서늘한 기운이 통로를 가득 채웠다. 곁길이 거의 없는 직선형의 동맥 같은 통로였기에, 소율의 속도는 조심스러움 속에서도 점차 붙었고, 한참을 더 들어가자 전방의 어둠이 붉은 끈으로 풀리듯 엷게 물들기 시작했다.
통로의 끝은 막다른 곳이었다. 그러나 그 막힘은 벽이 아니라, 거대한 빈 공간으로 꺾여 내려가는 낭하의 초입이었다. 소율은 튀어나온 암반 끝에 발을 붙이고 몸을 낮춘 채 아래를 굽어보았다. 그 순간, 번개에 맞은 듯 몸이 굳었고, 본능적으로 두 걸음 물러서며 날숨을 삼켰다.
아래는 하나의 분지였다. 바닥 곳곳에서 회색 석봉이 칼날처럼 솟구쳐 있었고, 그 첨두마다 식은 김 같은 냉기가 서려 나와 공기를 잔잔히 흔들었다. 화용동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느껴져야 할 열기 대신, 서늘함이 겹겹이 포개져 심장을 조여 왔다. 그러나 소율의 시선을 진정 붙잡은 것은 그 차가움이 아니라, 그 가운데 도려내어 놓은 듯 자리한 ‘부락’이었다.
석재로 쌓아 올린 큰집들이 반듯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고, 바깥 둘레에는 돌을 맞물려 세운 방책과, 돌을 층층이 눌러 올린 망루가 서 있었다. 집집마다 문설주 앞에는 불꽃 모양의 토템이 도드라져 있었고, 곳곳의 화덕 위에는 돌솥이 그 자리에 멈춘 채 식어 있었다. 한때 뜨겁게 숨 쉬던 삶의 결이, 소리만 잃고 남아 있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부락은 온전하지 않았다. 가장자리의 몇몇 집은 누군가 초대형 칼로 정밀하게 절단한 듯 정확히 반으로 잘려 있었고, 절단면은 산화 한 번 겪지 않은 신선한 암벽처럼 매끈했다. 남은 절반만 이곳에, 나머지 절반은—마치 대지의 판이 통째로 들어 올려져 다른 곳으로 옮겨진 듯—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전설이…… 아니었어.”
소율은 이 불가사의하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부락의 중심으로 끌렸다. 거기엔 나무가—아니, 나무처럼 ‘보이는’ 것이 서 있었다. 줄기만 남은 거대한 기둥. 통째로 피처럼 붉었고, 껍질의 결 사이로 불빛 같은 광휘가 서서히 번졌다. 가지도, 잎도 없건만, 그 뿌리는 대지를 뚫고 더 아래로, 흑염봉의 심장부까지 파고든 듯했다. 줄기의 틈마다 익숙한 붉은 작은 꽃들이 달려 있었는데, 숲속의 괴이한 늪지—그가 목격한 그 붉은 꽃과 닮아 있었다.
침묵 속에서 소율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세월의 퇴적 속에 반쯤 묻혀버린 부락의 유적을 바라보자, 가슴 어딘가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비애가 조용히 솟구쳤다. 미세한 한숨이 새어 나왔고, 그는 더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몸을 낮춰 분지로 뛰어내렸다. 발끝이 돌바닥에 닿는 순간, 소율은 오래전에 멸한 시간의 그림자 한가운데—만족 팔대 부락 중 하나이자, 감히 만신과 맞서 싸웠던 화만의 부락 속으로 들어서 있었다.
“그렇다면, 저 월익들은… 전설 그대로, 옛날 만공의 만술(蠻術) 아래 죽지 못하고 남은 화만의 자손들이 변이해 생겨난 것인가… 하지만…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하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만술이 존재하지… 화만의 만공—그 자는 대체 어느 경지까지 이르렀던 거지… 책에는 응혈(凝血) 다음이 개진(開塵), 그다음이 제골(祭骨)이라 적혀 있었고, 제골 이후는 더 이상 밝히지 않았지. 그저 하나의 칭호만을 남겨 두었을 뿐… ‘만사(蠻師)’.”
소율은 속으로 낮게 중얼거리며, 이 만고의 부락 한복판을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부락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석재로 쌓은 집들과 여기저기 흩어진 살림살이 몇 가지만이 남아 있을 뿐, 소율이 찾는 흔적—어떤 생명의 잔해도, 한 줌의 백골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숨조차 삼키기 어려울 만큼 정막이었고, 그 적막 속에 소율의 심장 소리만 더욱 또렷이 들렸다.
생각이 깊어지던 찰나, 소율의 발끝이 작은 돌기가 돋아난 길 위에 올랐다. 돋아난 조약돌들이 촘촘히 박힌 길—밟는 느낌이 불편할 정도로 거칠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미세하게 발바닥을 찌르듯 감각이 올라왔다. 그는 몸을 숙여 자세히 살폈으나, 이 길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단정하기 어려웠다. 의식의 동선인가, 방호를 위한 장치인가, 혹은 생활의 습속인가. 소율은 판단을 보류한 채, 한동안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문득—발걸음이 뚝, 멈췄다. 시야의 가장자리, 어딘가 낯선 윤곽이 스치듯 걸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 잘려나간 부락의 경계 쪽, 암벽이 붙은 그늘진 가장자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거기—어둠과 돌담에 반쯤 가려져 보이지 않던 자리에서, 마침내 소율의 눈이 그것을 포착했다.
해골이었다.
집들의 잔해가 시야를 가렸던 탓에 지금껏 알아채지 못했을 뿐, 지금 이 자리에서만은 그 형상이 극명하게 들어왔다. 소율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했다. 이곳에 들어와 그가 처음으로 마주한, 단 하나의 백골—그는 거의 달리다시피 몇 걸음을 좁혀 해골 곁에 섰다. 손에 쥔 뿔각이 미세하게 떨렸고, 서늘한 기운이 손등을 스쳤다. 자세히 들여다본 순간, 소율의 온몸에 전류가 흐르듯 소름이 돋았다.
그 해골은 기괴했다. 위쪽 몸통은 인간의 형상을 간직한 채 마른 잎맥처럼 수축해 있었고, 아래쪽 뼈들은 마치 뜨거운 쇳물이 식다 만 듯 일그러져 있었다. 등뼈 뒤편에서는 두 가닥의 골편이 날개처럼 돋아나다 굳어 있었으니, 그 뼈의 윤곽만으로도 월익과 닮은 점이 분명했다. 마치 이 자가 죽음 직전, 뼈가 다시 쓰이는 변이를 겪고 있었고—인간에서 월익으로 넘어가는 탈태의 고통 한가운데서 시간에 박힌 듯 멈추어 선 형상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에 남은 표정은 고통이 아니었다. 미묘하게 걸린, 비웃음. 조소와 자만이 아주 가느다란 선으로 입가에 남아 있었다. 그것이 과연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부락과 산을 둘로 가른 알 수 없는 힘을 겨눈 것인지, 인간을 비틀어 월익으로 만드는 만술의 주인을 겨눈 것인지, 혹은 끝내 넘지 못한 경계 그 자체를 향한 것인지는—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해골의 오른손 검지는 곁의 암벽에 깊이 박혀 있었다. 단순한 경련의 흔적이 아닌, 마지막 한 줌의 의지를 모아 바위에 못을 박듯 생과 사의 경계를 돌벽에 못질해 남긴 흔적이었다.
소율은 그 손끝이 겨눈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암면 위에는 한 줄의 글귀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굵고 매듭진 획, 직선과 곡선의 경계를 오가는 특유의 필치가 거친 바위면에 새겨져 있었고, 오래 말라붙은 혈흔 같은 암적색이 글자의 골을 따라 얇게 스며 있었다. 글씨는 소리를 내지 않지만, 그 틈으로 스며 나오는 냉기가 손등의 솜털을 서서히 곤두세웠다.
그리고 바로 그때—소율의 시선이 그 글귀에 닿는 순간, 그가 들어왔던 입구 쪽 긴 통로에서 ‘휘익—’ 바람을 가르는 날개 소리가 한 번, 길게 울렸다. 곧이어 그 소리는 둘, 셋으로 겹치더니 광풍처럼 연속해 터져 나왔다. 날개가 공기를 베어내는 일정한 리듬 사이로, 낮고 거친 포효가 섞였고, 그 아래에는 절망의 울음 같은 짧은 비명이 교차했다. 멀리에서 시작되었으나, 이 적막은 모든 소리를 증폭시켜 금세 등 뒤까지 들이닥치게 했다.
월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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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魔)의 이름으로, 세상에 군림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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