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월익의 귀환, 그리고 구원
조회 : 0 추천 : 0 글자수 : 5,396 자 2025-09-01
날개가 휘몰아치는 소리가 허공을 찢으며 들려왔다. 고요하던 부락 유적은 한순간에 거센 바람과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긴장으로 가득 찼다. 소율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바위에 등을 기댔다. 귀청을 울리는 날갯짓과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사방을 감쌌으나, 그는 통로의 길이를 이미 헤아리고 있었다. 소리가 먼저 닿았을 뿐, 월익(月翼)들이 이곳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짧은 틈이 남아 있었다. 길지 않으나, 이곳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소율은 망설임 없이 시선을 돌려, 기묘한 백골이 기대어 있던 바위벽의 글귀를 응시했다. 굵고 거친 필세로 남겨진 첫 문구가 눈에 박혔다.
“푸른 하늘이여, 어찌 홀로 우는가.”
한 줄의 글귀만으로도 가슴이 콱 하고 저려 왔다. 뜻은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으나, 그 글씨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만과 광기 너머로 스며드는 고독과 비애가, 마치 손바닥으로 심장을 눌러오는 듯 소율의 가슴을 억눌렀다.
그는 숨을 고르고 다시 아래로 이어진 글귀를 훑었다.
“본디 도(道)는 만(蠻)의 욕망을 타고 팔방 끝까지 뻗나니, 불과 피가 하나 되어 창공을 태우고 하늘을 연소하리라…… 불과 달이 구름을 헤치면, 광막한 천지 사이…… 그때 깊이 사유하라. 피와 불이 번갈아 타올라 아홉은 극(極)이고 하나는 법(法)이라. 만화구배(蠻火九拜)를 올리면 배화의 통(拜火之通)이 열리리라! 푸른 하늘이여, 홀로 그대만이 고독 위에 선다!”
아래쪽 글들은 한 사람이 연이어 쓴 것이 분명했으나, 감상이라기보다 의식문에 가까웠다. 소율은 “만화 구배…… 배화지통……”을 되뇌었지만, 뜻은 여전히 안갯속처럼 모호했다. 그저 글씨에 배어 있는 비애와 고독이 뼈 속까지 스며드는 듯할 뿐이었다.
생각을 이어가던 찰나, 통로 입구에서 날카로운 날갯짓과 비명이 한 겹 더 짙어졌다. 소율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입구를 향해 뛰었다.
좁은 통로에 들어서는 순간, 귓속을 찢는 울음소리가 전보다도 더욱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소율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잠시 뒤를 돌아보자 붉은 안개와 황량한 기운에 잠겨 있던 부락의 폐허가, 끝내 애잔한 그림자처럼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내 그는 고개를 돌려 깊은 통로를 향해 달려 나갔다.
달리면서도 그는 귀로 소리의 세기와 간격을 재어, 어느 지점에서 몸을 숨겨야 할지 가늠했다. 수십 장(丈)을 내달렸을 무렵, 소율은 문득 걸음을 꺾어, 옆 벽의 틈새 속으로 빠르게 몸을 들이밀었다.
좁디좁은 균열은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들어갈 수 없었겠지만, 소율의 왜소한 체구는 이 순간 그에게 은밀한 은신처가 되어주었다. 몸을 바짝 웅크린 채 등과 어깨를 벽면에 붙이고, 전신의 기운을 억눌러 심장의 고동마저 최대한 가라앉혔다. 들숨조차 미약한 숨결로만 이어가며, 틈새로 내다본 그의 눈길은 잔뜩 곤두선 긴장 속에서 바깥을 주시했다.
열 호흡쯤이 지났을까. 소율의 전신에 돋아난 솜털이 일제히 곤두섰다. 곧이어 짙은 붉은 안개가 폭풍처럼 통로를 뒤덮고, 귀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수많은 붉은 그림자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월익(月翼)이었다.
이토록 가까운 곳에서, 그것도 바람결 하나하나가 살을 스쳐 지나갈 정도의 거리에서 월익을 지켜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으나, 소율의 몸은 한 점의 바위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억눌린 숨결은 몸속 깊이 가라앉아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러던 찰나, 한 마리의 월익이 틈새 가장자리에 그대로 부딪쳤다. 바위가 흔들리고 잔돌이 쏟아졌다. 그 거리는 고작 반 장 남짓. 소율은 골각을 쥔 오른손에 힘을 너무 준 나머지 손등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심장의 고동마저 느껴지지 않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 오히려 그의 머리속은 더욱 차분해졌다.
무심코 틈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 월익(月翼)의 흉측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퍼덕이는 날개가 붉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그 순간에도, 소율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바로 그때, 어둠을 헤집는 절망의 울음이 통로를 타고 스며들었다. 소율은 균열 틈새로 시야를 더 낮춰 밖을 훑었다. 붉은 안개 속에서 몇 명의 인영이 무더기로 몰려든 월익들에게 붙들린 채, 통로 끝의 부락을 향해 끌려가고 있었다.
아홉 명—.
모두의 얼굴을 가릴 수는 없었으나, 흰 옷자락 하나가 안개 속에서 번쩍 드러났다. 생기라곤 티끌만큼도 남지 않은 표정, 속이 비어 버린 듯한 기색, 절망이 새겨진 아름다움.
“……그녀다.”
부방에서 뇌진과 함께 마주쳤던, 오룡부의 백령.
소율은 몸을 움츠린 채 숨결을 더 낮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로를 뒤흔들던 날갯짓과 비명은 차츰 멀어졌고, 붉은 안개도 절반쯤 엷어졌다. 마치 월익들이 다시 둥지로 돌아가고, 하늘 밖의 혈월이 사그라지며, 세상이 또 한 번의 잠을 청하는 듯했다.
곧 차가움을 밀어내는 열이 급격히 번졌다. 균열의 벽은 달궈져 미세하게 떨렸고, 산의 속살 어딘가에서 ‘카각’ 하는 마른 파열음이 잇따랐다. 소율이 몸을 빼내는 동안 암벽 표면에는 머리카락 같은 금이 몇 가닥 더 늘어났다.
“……이 금이 그렇게 생겨나는 거였군.”
그는 통로로 나섰다. 붉은 안개는 거의 사라졌지만, 끝에서 들이치는 열풍은 살을 바짝 말려 갈라지게 할 만큼 매서웠고 발밑 암반이 빠르게 달궈져, 발바닥으로 바늘 같은 통증이 올라왔다. 오래 버틸 수 없는 자리다—남느냐, 떠나느냐.
그때, 통로 끝 어딘가에서 찢어진 신음이 바람을 타고 스며들었다. 애절하고 처절한 울음은 순간 그의 가슴속 단단한 곳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소율은 이빨을 세게 악물었다.
“부방에서 뇌진과 함께…… 그녀를 속였지. 오늘 이 자리에서 등을 돌린다면—”
아직 소년이라 할 나이—아직 남아 있는 순박함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뜨거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스스로 다짐했다. “구할 수 있으면 구한다. 도저히 길이 없다면…… 후회는 남기지 않는다.”
골각을 움켜쥔 채, 그는 열기를 가르며 통로의 끝으로 달렸다. 가까워질수록 폐 속이 바싹 말라붙는 감각이 치밀었지만,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암벽에 어깨를 붙이고, 몸을 최대한 얇게 눌러 안쪽을 엿보았다.
그 순간, 그의 숨이 거칠어졌다.
거대한 분지 아래, 부락의 대지에서 수없이 뻗은 가시들 중 일곱에는 아직 숨이 붙은 사내들이 꿰여 있었고, 가시는 등을 꿰어 배를 뚫고 나왔다. 등에서 관통해 배로 뚫고 나온 가시는 피를 타고 끈적하게 흘러내렸고, 아직 죽지 않았지만 고통을 짜내는 울부짖음 속에서 생명은 모래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일곱 모두 사내였다. 소율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오산부의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안도와, 그래도 사람의 목숨이란 생각이 함께 솟구쳐 씁쓸한 기운이 가슴안쪽에 얹혔다.
그들을 둘러싼 다른 가시들은, 눈으로 봐도 알 만큼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가시가 무너진 자리를 타고 어둑한 붉은 용암이 강물처럼 스며들어, 부락(部落)의 대지를 넓고 두텁게 뒤덮어 갔다. 작은 시내가 모여 급류가 되듯, 흐름은 점점 더 넓어졌고 속도도 붙었다.
그제야 소율은 가시의 정체를 이해했다. 이곳은 일정한 이치에 따라, 밤마다 용암이 굳어 가시로 솟았다가, 때가 되면 다시 녹아 용암으로 돌아가 분지를 메우는 곳이었다. 월익의 잠과 출몰 또한 그것과 맞물린다. 드러남과 감춤, 응고와 융해가 한밤과 새벽을 나누듯 이 땅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가시들이 전부 녹아내리는 순간, 분지는 가득 차겠지. 그때면 부락은 또다시 용암 밑으로 사라질 것이다.”
소율의 시선이 분지 한가운데로 돌렸다. 거기, 거대한 나무의 몸통처럼 보이는 붉은 줄기가 땅 위로 짧게 드러나 있었다. 줄기는 뜨거운 숨을 쉬는 생물처럼 미세하게 들먹이며 꿈틀거렸고, 그 속에서는 가느다란 선들이 얽히고설켜 흐르는 것이 보였다. 때때로 그 선 끝에서 무언가의 일부가 미끄러지듯 떠올랐다가 사라졌는데, 자세히 보면 월익(月翼)의 머리였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에서는 더 이상 흉포함이 없었다. 대신 오래 묵은 고통과 쓸쓸함, 소리를 잃은 비애가, 마치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듯한 느린 떨림으로 전해졌다. 비명은 사라졌고, 줄기 전체에 무언의 통곡만이 퍼져나가는 듯했다. 몇몇은 발톱을 들어 스스로의 손가락을 물어뜯고, 피 한 방울 비치지 않는 그 손끝으로 눈두덩을 거듭 문질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지워 없애려는 몸부림처럼.
“줄기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다니…… 도대체 무엇을 하는 거지.”
열기는 한 겹 더 치솟았다. 공기가 혀에 닿자마자 마르는 느낌이었고, 피부는 안쪽에서부터 갈라질 듯 팽팽하게 당겼다. 이대로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찾을 수가 없어…… 그만두자.”
소율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그는 할 수 있는 만큼, 아니 그 이상을 이미 해 보았다. 이제는 신속히 빠져나가야 한다고 몸을 틀려던 바로 그 찰나—
그의 시선이 분지 한가운데의 붉은 줄기에 스쳤다. 나무 속에서 부유하듯 떠오른 두 장의 얼굴—한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다른 한 사람은 분명 백령이었다.
백령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는 속이 텅 빈 것처럼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생에 대한 희망을 이미 오래전에 놓아버린 듯, 참혹하면서도 비감한 아름다움이 어른거렸다.
소율은 그 얼굴을 잠시 응시한 뒤, 아래쪽으로, 서서히 모여드는 용암을 내려다보았다. 끝없이 쏟아지던 날카로운 가시들이 녹아들며 용암 위에 두텁게 막을 이루었고, 그것이 차츰 높이를 더해 분지 안의 부락 돌가옥들 절반 높이까지 치밀어 올랐다. 지금은 겨우 지붕만이 용암 위에 떠 있는 듯 드러나 보일 뿐, 그 지붕마저 벌겋게 달아오르는 기미가 역력했다.
“월익들이 바깥으로 나도는 일은 혈월과 연관이 있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이곳의 작열한 열기 또한 무관치 않다. 녀석들은 뜨거움을 심히 두려워한다…… 그러니 이곳이 차가워졌을 때에만 먹이를 찾아 밖으로 날아 나가고…….”
“그리고 돌아오면 몽땅 저 나무줄기 속으로 파고들어, 바깥에는 한 마리도 남지 않는다. 여기까지 내가 생각한것과 맞아 떨어진다.”
소율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관찰을 이어갔다.
“구할 수 있을지도……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야 해.”
그의 시선은 붉은 나무줄기와 끓어오르는 용암을 번갈아 주시했다.
잠시 뒤, 이 일대의 열기는 또다시 가혹하게 치솟았다. 소율의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살갗은 금세라도 갈라질 듯 따갑게 저미었다. 바로 그때, 그의 눈빛이 번쩍이며 매서워졌다. 전신의 기혈이 뒤집히듯 요동쳤고, 열한 혈선의 힘이 순식간에 온몸을 휘감은 순간 한 걸음을 내디디며 몸을 내던졌다.
눈 깜짝할 사이, 그는 분지 안쪽의 한 석조 지붕 위에 내려섰다. 발이 닿자마자 치익─! 뜨거운 김이 치솟았고, 발바닥에서 흰 증기가 퍼졌다. 하지만 소율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몸을 튕겨 다른 지붕 위로 뛰어오르고, 몇 차례를 이어가자 어느새 붉은 나무줄기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백령의 얼굴 옆, 그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여인의 얼굴에서 섬뜩한 비명이 찢기듯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의 속도로 그 용모가 시들어가더니, 눈 깜짝할 새에 살과 피가 사라지고 해골만이 남아버렸다!
소율은 망설임 없이 시선을 돌려, 기묘한 백골이 기대어 있던 바위벽의 글귀를 응시했다. 굵고 거친 필세로 남겨진 첫 문구가 눈에 박혔다.
“푸른 하늘이여, 어찌 홀로 우는가.”
한 줄의 글귀만으로도 가슴이 콱 하고 저려 왔다. 뜻은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으나, 그 글씨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만과 광기 너머로 스며드는 고독과 비애가, 마치 손바닥으로 심장을 눌러오는 듯 소율의 가슴을 억눌렀다.
그는 숨을 고르고 다시 아래로 이어진 글귀를 훑었다.
“본디 도(道)는 만(蠻)의 욕망을 타고 팔방 끝까지 뻗나니, 불과 피가 하나 되어 창공을 태우고 하늘을 연소하리라…… 불과 달이 구름을 헤치면, 광막한 천지 사이…… 그때 깊이 사유하라. 피와 불이 번갈아 타올라 아홉은 극(極)이고 하나는 법(法)이라. 만화구배(蠻火九拜)를 올리면 배화의 통(拜火之通)이 열리리라! 푸른 하늘이여, 홀로 그대만이 고독 위에 선다!”
아래쪽 글들은 한 사람이 연이어 쓴 것이 분명했으나, 감상이라기보다 의식문에 가까웠다. 소율은 “만화 구배…… 배화지통……”을 되뇌었지만, 뜻은 여전히 안갯속처럼 모호했다. 그저 글씨에 배어 있는 비애와 고독이 뼈 속까지 스며드는 듯할 뿐이었다.
생각을 이어가던 찰나, 통로 입구에서 날카로운 날갯짓과 비명이 한 겹 더 짙어졌다. 소율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입구를 향해 뛰었다.
좁은 통로에 들어서는 순간, 귓속을 찢는 울음소리가 전보다도 더욱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소율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잠시 뒤를 돌아보자 붉은 안개와 황량한 기운에 잠겨 있던 부락의 폐허가, 끝내 애잔한 그림자처럼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내 그는 고개를 돌려 깊은 통로를 향해 달려 나갔다.
달리면서도 그는 귀로 소리의 세기와 간격을 재어, 어느 지점에서 몸을 숨겨야 할지 가늠했다. 수십 장(丈)을 내달렸을 무렵, 소율은 문득 걸음을 꺾어, 옆 벽의 틈새 속으로 빠르게 몸을 들이밀었다.
좁디좁은 균열은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들어갈 수 없었겠지만, 소율의 왜소한 체구는 이 순간 그에게 은밀한 은신처가 되어주었다. 몸을 바짝 웅크린 채 등과 어깨를 벽면에 붙이고, 전신의 기운을 억눌러 심장의 고동마저 최대한 가라앉혔다. 들숨조차 미약한 숨결로만 이어가며, 틈새로 내다본 그의 눈길은 잔뜩 곤두선 긴장 속에서 바깥을 주시했다.
열 호흡쯤이 지났을까. 소율의 전신에 돋아난 솜털이 일제히 곤두섰다. 곧이어 짙은 붉은 안개가 폭풍처럼 통로를 뒤덮고, 귀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수많은 붉은 그림자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월익(月翼)이었다.
이토록 가까운 곳에서, 그것도 바람결 하나하나가 살을 스쳐 지나갈 정도의 거리에서 월익을 지켜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으나, 소율의 몸은 한 점의 바위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억눌린 숨결은 몸속 깊이 가라앉아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러던 찰나, 한 마리의 월익이 틈새 가장자리에 그대로 부딪쳤다. 바위가 흔들리고 잔돌이 쏟아졌다. 그 거리는 고작 반 장 남짓. 소율은 골각을 쥔 오른손에 힘을 너무 준 나머지 손등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심장의 고동마저 느껴지지 않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 오히려 그의 머리속은 더욱 차분해졌다.
무심코 틈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 월익(月翼)의 흉측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퍼덕이는 날개가 붉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그 순간에도, 소율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바로 그때, 어둠을 헤집는 절망의 울음이 통로를 타고 스며들었다. 소율은 균열 틈새로 시야를 더 낮춰 밖을 훑었다. 붉은 안개 속에서 몇 명의 인영이 무더기로 몰려든 월익들에게 붙들린 채, 통로 끝의 부락을 향해 끌려가고 있었다.
아홉 명—.
모두의 얼굴을 가릴 수는 없었으나, 흰 옷자락 하나가 안개 속에서 번쩍 드러났다. 생기라곤 티끌만큼도 남지 않은 표정, 속이 비어 버린 듯한 기색, 절망이 새겨진 아름다움.
“……그녀다.”
부방에서 뇌진과 함께 마주쳤던, 오룡부의 백령.
소율은 몸을 움츠린 채 숨결을 더 낮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로를 뒤흔들던 날갯짓과 비명은 차츰 멀어졌고, 붉은 안개도 절반쯤 엷어졌다. 마치 월익들이 다시 둥지로 돌아가고, 하늘 밖의 혈월이 사그라지며, 세상이 또 한 번의 잠을 청하는 듯했다.
곧 차가움을 밀어내는 열이 급격히 번졌다. 균열의 벽은 달궈져 미세하게 떨렸고, 산의 속살 어딘가에서 ‘카각’ 하는 마른 파열음이 잇따랐다. 소율이 몸을 빼내는 동안 암벽 표면에는 머리카락 같은 금이 몇 가닥 더 늘어났다.
“……이 금이 그렇게 생겨나는 거였군.”
그는 통로로 나섰다. 붉은 안개는 거의 사라졌지만, 끝에서 들이치는 열풍은 살을 바짝 말려 갈라지게 할 만큼 매서웠고 발밑 암반이 빠르게 달궈져, 발바닥으로 바늘 같은 통증이 올라왔다. 오래 버틸 수 없는 자리다—남느냐, 떠나느냐.
그때, 통로 끝 어딘가에서 찢어진 신음이 바람을 타고 스며들었다. 애절하고 처절한 울음은 순간 그의 가슴속 단단한 곳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소율은 이빨을 세게 악물었다.
“부방에서 뇌진과 함께…… 그녀를 속였지. 오늘 이 자리에서 등을 돌린다면—”
아직 소년이라 할 나이—아직 남아 있는 순박함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뜨거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스스로 다짐했다. “구할 수 있으면 구한다. 도저히 길이 없다면…… 후회는 남기지 않는다.”
골각을 움켜쥔 채, 그는 열기를 가르며 통로의 끝으로 달렸다. 가까워질수록 폐 속이 바싹 말라붙는 감각이 치밀었지만,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암벽에 어깨를 붙이고, 몸을 최대한 얇게 눌러 안쪽을 엿보았다.
그 순간, 그의 숨이 거칠어졌다.
거대한 분지 아래, 부락의 대지에서 수없이 뻗은 가시들 중 일곱에는 아직 숨이 붙은 사내들이 꿰여 있었고, 가시는 등을 꿰어 배를 뚫고 나왔다. 등에서 관통해 배로 뚫고 나온 가시는 피를 타고 끈적하게 흘러내렸고, 아직 죽지 않았지만 고통을 짜내는 울부짖음 속에서 생명은 모래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일곱 모두 사내였다. 소율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오산부의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안도와, 그래도 사람의 목숨이란 생각이 함께 솟구쳐 씁쓸한 기운이 가슴안쪽에 얹혔다.
그들을 둘러싼 다른 가시들은, 눈으로 봐도 알 만큼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가시가 무너진 자리를 타고 어둑한 붉은 용암이 강물처럼 스며들어, 부락(部落)의 대지를 넓고 두텁게 뒤덮어 갔다. 작은 시내가 모여 급류가 되듯, 흐름은 점점 더 넓어졌고 속도도 붙었다.
그제야 소율은 가시의 정체를 이해했다. 이곳은 일정한 이치에 따라, 밤마다 용암이 굳어 가시로 솟았다가, 때가 되면 다시 녹아 용암으로 돌아가 분지를 메우는 곳이었다. 월익의 잠과 출몰 또한 그것과 맞물린다. 드러남과 감춤, 응고와 융해가 한밤과 새벽을 나누듯 이 땅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가시들이 전부 녹아내리는 순간, 분지는 가득 차겠지. 그때면 부락은 또다시 용암 밑으로 사라질 것이다.”
소율의 시선이 분지 한가운데로 돌렸다. 거기, 거대한 나무의 몸통처럼 보이는 붉은 줄기가 땅 위로 짧게 드러나 있었다. 줄기는 뜨거운 숨을 쉬는 생물처럼 미세하게 들먹이며 꿈틀거렸고, 그 속에서는 가느다란 선들이 얽히고설켜 흐르는 것이 보였다. 때때로 그 선 끝에서 무언가의 일부가 미끄러지듯 떠올랐다가 사라졌는데, 자세히 보면 월익(月翼)의 머리였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에서는 더 이상 흉포함이 없었다. 대신 오래 묵은 고통과 쓸쓸함, 소리를 잃은 비애가, 마치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듯한 느린 떨림으로 전해졌다. 비명은 사라졌고, 줄기 전체에 무언의 통곡만이 퍼져나가는 듯했다. 몇몇은 발톱을 들어 스스로의 손가락을 물어뜯고, 피 한 방울 비치지 않는 그 손끝으로 눈두덩을 거듭 문질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지워 없애려는 몸부림처럼.
“줄기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다니…… 도대체 무엇을 하는 거지.”
열기는 한 겹 더 치솟았다. 공기가 혀에 닿자마자 마르는 느낌이었고, 피부는 안쪽에서부터 갈라질 듯 팽팽하게 당겼다. 이대로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찾을 수가 없어…… 그만두자.”
소율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그는 할 수 있는 만큼, 아니 그 이상을 이미 해 보았다. 이제는 신속히 빠져나가야 한다고 몸을 틀려던 바로 그 찰나—
그의 시선이 분지 한가운데의 붉은 줄기에 스쳤다. 나무 속에서 부유하듯 떠오른 두 장의 얼굴—한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다른 한 사람은 분명 백령이었다.
백령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는 속이 텅 빈 것처럼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생에 대한 희망을 이미 오래전에 놓아버린 듯, 참혹하면서도 비감한 아름다움이 어른거렸다.
소율은 그 얼굴을 잠시 응시한 뒤, 아래쪽으로, 서서히 모여드는 용암을 내려다보았다. 끝없이 쏟아지던 날카로운 가시들이 녹아들며 용암 위에 두텁게 막을 이루었고, 그것이 차츰 높이를 더해 분지 안의 부락 돌가옥들 절반 높이까지 치밀어 올랐다. 지금은 겨우 지붕만이 용암 위에 떠 있는 듯 드러나 보일 뿐, 그 지붕마저 벌겋게 달아오르는 기미가 역력했다.
“월익들이 바깥으로 나도는 일은 혈월과 연관이 있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이곳의 작열한 열기 또한 무관치 않다. 녀석들은 뜨거움을 심히 두려워한다…… 그러니 이곳이 차가워졌을 때에만 먹이를 찾아 밖으로 날아 나가고…….”
“그리고 돌아오면 몽땅 저 나무줄기 속으로 파고들어, 바깥에는 한 마리도 남지 않는다. 여기까지 내가 생각한것과 맞아 떨어진다.”
소율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관찰을 이어갔다.
“구할 수 있을지도……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야 해.”
그의 시선은 붉은 나무줄기와 끓어오르는 용암을 번갈아 주시했다.
잠시 뒤, 이 일대의 열기는 또다시 가혹하게 치솟았다. 소율의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살갗은 금세라도 갈라질 듯 따갑게 저미었다. 바로 그때, 그의 눈빛이 번쩍이며 매서워졌다. 전신의 기혈이 뒤집히듯 요동쳤고, 열한 혈선의 힘이 순식간에 온몸을 휘감은 순간 한 걸음을 내디디며 몸을 내던졌다.
눈 깜짝할 사이, 그는 분지 안쪽의 한 석조 지붕 위에 내려섰다. 발이 닿자마자 치익─! 뜨거운 김이 치솟았고, 발바닥에서 흰 증기가 퍼졌다. 하지만 소율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몸을 튕겨 다른 지붕 위로 뛰어오르고, 몇 차례를 이어가자 어느새 붉은 나무줄기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백령의 얼굴 옆, 그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여인의 얼굴에서 섬뜩한 비명이 찢기듯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의 속도로 그 용모가 시들어가더니, 눈 깜짝할 새에 살과 피가 사라지고 해골만이 남아버렸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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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魔)의 이름으로, 세상에 군림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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