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설림(雪林)의 밤, 서로의 곁에서
조회 : 97 추천 : 0 글자수 : 4,697 자 2025-09-24
소율은 눈을 감았다. 그날 밤 본 장면들이 깊이 가슴에 내려앉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그 무게는 쓸쓸함과 함께 비애가 스며들 듯 마음을 채웠다. 축축한 돌벽에서 스며 나오는 차가운 기운은 숨결을 따라 가슴속까지 스며들었고, 고요한 동굴은 기억을 울려 퍼뜨리며 더욱 선명히 각인시켰다.
“그 해골은… 생전에 화만족의 어떤 인물이었을까. 왜 오직 그만이 월익으로 변하는 순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었던 거지… 어쩌면, 그는 화만족의 강자였을지도 모르겠다.”
소율의 눈앞에는 여전히 기이한 해골이 떠올랐고,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뇌리에 깊이 남은 것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의미의 문장들이었다.
“본디 도(道)는 만(蠻)의 욕망을 타고 팔방 끝까지 뻗나니, 불과 피가 하나 되어 창공을 태우고 하늘을 연소하리라…… 불과 달이 구름을 헤치면, 광막한 천지 사이…… 그때 깊이 사유하라. 피와 불이 번갈아 타올라 아홉은 극(極)이고 하나는 법(法)이라. 만화구배(蠻火九拜)를 올리면 배화의 통(拜火之通)이 열리리라! 푸른 하늘이여, 홀로 그대만이 고독 위에 선다!”
뜻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숙여 곱씹다 문득 시선을 돌리니, 곁에서 백령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붉은 광석이 흘려내는 희미한 빛은 그녀의 옆얼굴을 어슴푸레 비추었고, 낯선 공간에 대한 경계와 긴장이 미묘하게 교차했다.
“가시죠, 백령 아가씨.” 소율이 미소를 지으며 출구를 따라 바깥으로 기어올라갔다. 백령은 이내 따라붙었는데, 이곳에 더 머무는 순간마다 온몸을 옥죄는 불편함이 깊어지고 있었다.
동굴을 벗어나자 계곡을 타고 내려온 바람이 두 사람의 몸을 스쳤다. 매서운 기운은 옷자락 틈으로 파고들며 살을 얼리고, 발밑의 돌부리는 작은 소리를 내며 끝 모를 어둠으로 흩어졌다. 백령은 얼굴이 희게 질리며 본능처럼 바위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처음 겪는 낭떠러지 길 앞에서 입술을 깨물며 버텼다. 아래로 떨어지는 돌부리의 메아리가 심장을 파고들었고, 눈앞의 길은 발을 내디딜 때마다 허공에 떠 있는 듯 아찔했다.
소율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됐어, 내가 업어줄게.” 태연히 내뱉은 말과 달리 그의 가슴은 두근거리며 자꾸만 속도를 잃었고, 손끝은 알 수 없는 떨림을 전했다.
백령은 잠시 머뭇거리다 끝 모를 어둠을 내려다보고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소율은 눈빛을 반짝이며 몸을 숙였고, 그녀의 얼굴에는 순간 붉은 기가 스쳤다. 백령은 말없이 그의 등에 몸을 맡기고, 두 팔을 목에 조심스레 걸었다.
소율은 등에 닿는 따스한 체온과 가벼운 숨결, 코끝에 스며드는 은은한 향기를 뚜렷하게 느꼈다. 그것은 산림의 흙내와 뒤섞여 묘하게 달콤했고, 그는 무심히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꽉 잡아. 떨어져도 난 책임 안 져.” 말끝이 허공에 묻혔지만, 대답은 없었다. 소율은 잠시 머뭇이다가 돌을 짚고 산 아래로 몸을 옮겼다.
소율은 산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사람 하나쯤 업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따라 그는 괜히 더 험한 길을 택했고, 몸을 던졌다가 바위나 덩굴을 움켜쥐며 버텼다. 바람결에 낙엽과 흙먼지가 흩날렸고, 그의 움직임은 짐승처럼 날렵했다.
등 뒤의 두 팔은 점점 더 강하게 목을 끌어안자, 소율의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 원래라면 한 시진이면 족한 길을 일부러 늦췄고, 마침내 백령이 붉은 얼굴로 그의 등에서 내릴 때, 그녀의 눈빛엔 여전히 공포가 서려 있었지만 소율의 마음에는 아쉬움이 스쳤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이 산속은 눈도 깊이 쌓이고 함정도 많아. 우룡부까지 거리가 좀 있지. 혼자 가긴 위험해. 내가 먼저 네 부락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가는 게 낫겠어.”
백령이 망설이는 것을 보자 소율은 속으로 웃음을 감추었다. “다만 이 길은 험하니까 내가 억지로라도 업어가는 게 빠를 거야. 그래야 나도 일찍 집에 가고.”
백령은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붉혔다. 아까 산을 내려올 때 그가 일부러 꾸민 듯한 행동을 눈치챘기에, 길 내내 이렇다면 하는 생각에 부끄러움과 불만이 동시에 스쳤다.
“흥, 나 네 목숨 은인인 거 알지?” 소율은 그녀의 눈빛에서 불만을 읽고 잠시 움찔했으나 이내 태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지. 여긴 짐승도 많고 함정도 수두룩해. 월익이 나타날지도 몰라. 뭐, 네가 조심한다면 혼자서도 괜찮을 거야. 그럼 난 간다.”
그가 발길을 돌리자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그럼 부탁할게. 나 길을 몰라. 같이 가줘.”
소율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겉으로는 성가신 듯 몸을 낮추었다. “얼른 올라와. 날이 더 어두워지면 여기서 또 밤을 새워야 한다.”
백령은 얼굴을 붉히며 다시 그의 등에 몸을 맡겼다. 두 팔은 단단히 그의 목을 감았고, 가슴은 빠르게 뛰어 두려움인지 다른 감정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소율은 원숭이처럼 나무 사이를 날쌔게 가르며 달렸다. 바람이 뺨을 스쳤고, 등 뒤에서 전해지는 향기는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느새 그는 길을 크게 돌아 빙빙 돌기 시작했고, 오래 침묵하던 백령이 낮게 말했다. “여기… 세 번째야.” 그녀의 시선은 앞의 말라죽은 나무에 머물러 있었다.
“뭐? 내가 길을 잘못 든 건가? 잠시만.” 소율은 진지하게 주위를 살폈다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긴 처음 오는 길이군.” 그는 당황한 기색 없이 다른 길로 몸을 틀었다.
시간은 흘러 황혼이면 닿을 거리를 절반밖에 가지 못했다. 도중에 그는 일부러 우산부락 근처까지 가 멀리서 살폈고,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발길을 돌렸다. 하늘은 점차 어두워지고 산등성이에는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며, 숲은 깊은 어둠을 품어냈다.
밤이 완전히 깔렸을 즈음, 소율은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야겠네. 밤 산은 위험하니까, 내일 아침에 가자.”
백령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처음 만났을 때의 예리함이 되살아나 있었고, 소율은 그 시선에 괜히 눌려 기침을 했다. 잠시 후 백령이 빙긋 웃었고, 야성적인 기운이 그 웃음 속에 서려 퍼져갔다.
소율도 따라 웃으며 마른 나뭇가지를 긁어모아 쉴 자리를 마련했다. 숲은 눈발에 잠겨 고요했고, 어둠 속은 불빛 하나 없었지만 가까운 숨결은 또렷이 느껴졌다.
잠시,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라 침묵이 흘렀다. “네 이름은 아직 모르네.” 오랜 침묵 끝에 백령이 입을 열었고,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별빛이 스며 그녀의 눈동자에 고요히 담겼다.
“난 소율이야. 네 이름은 백령이라는 거 알아.” 소율이 웃으며 대답했다.
“부坊에서 날 속였지? 돌아가서 곱씹어보니 영 수상하더라.” 백령은 코를 찡긋하며 눈을 깜박였다.
“그건…”
“넌 우산부의 소만이 아니지?” 그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소율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못 했다. 바로 그때 숲 위로 눈송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와, 눈이다.” 소율은 고개를 들어 하얗게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눈송이는 바람결에 흩날리며 이리저리 빙돌다 두 사람의 머리와 어깨에 소복이 내려앉았고, 고요히 잠든 숲은 은빛 장막에 덮여 마치 다른 세계처럼 변해갔다. 백령은 소리 내어 웃지는 않았지만 눈빛에 장난기가 번졌고, 흩날리는 눈 사이로 마주친 시선에 순간 머뭇거리다 그와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숲은 바람 소리조차 잦아들어 오직 눈발이 쏟아지는 소리만 가득했고, 어둠 속 나무들은 하얀 숨결을 뿜어내듯 눈을 받아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눈을 바라보다가, 자신들이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같은 풍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백령은 차갑게 스며드는 눈을 맞으며도 마음 한켠이 이상하게 따뜻해짐을 느꼈고, 소율은 그녀의 숨결이 가까이 닿아오는 것을 의식하며 어깨를 조금 더 곧게 세웠다.
시간이 흐르자 눈은 점점 굵어져 땅 위에 부드러운 하얀 융단을 깔았고, 발자국조차 금세 사라져버렸다. 둘은 그 속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도 곁에 있다는 것을 느꼈고, 말 한마디 없어도 알 수 없는 기묘한 친밀감이 싹트고 있었다.
“소율, 고마워……” 하늘은 이미 어둑했으나, 눈발 사이로 스며든 달빛이 숲을 은빛으로 덮으며 어둠을 옅게 했다.
“날 구해줘서 고마워… 네 얘기를 들려줄 수 있니? 어떻게 거기 있었던 거야?” 백령이 소율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나는 자주 산에 약초를 캐러 올라와. 그곳은 우연히 알게 된 피한처였는데, 설마 어제 혈월이 뜰 줄은 몰랐지…….” 소율은 자신의 수산(淬散)을 감추고, 다른 이야기만 덧붙였다.
시간은 흘러 눈발이 이어진 밤 속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조용히 오갔고, 대화는 바람과 눈에 흩어지듯 퍼져나갔다.
“우룡부의 아공은 내 할머니야…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에 부락을 떠나셨어. 할머니 말씀으로는 풍준보다 더 큰 부락으로 가셨다는데, 그 뒤로 돌아오시지 않았어……” 백령은 두 팔로 몸을 감싼 채, 눈 속에서 잊지 못할 과거를 낮게 풀어놓았다.
“나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군지 몰라… 아공이 주워온 아이지……” 소율은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아, 그래서 그렇구나. 네가 다른 애들보다 그렇게 마른 것도, 키가 나보다 작은 것도 다 이유가 있네. 아공이 널 잘 돌보지 않은 거지?” 백령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아공은 나한테 잘해주셔. 게다가 아공 말씀으론 몇 년만 더 크면 나도 충분히 달라질 거래. 그리고 넌 다른 부락의 여자애들처럼 몸이 그렇게 튼튼한 것도 아니잖아.” 소율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내 아공이 가르쳐준 한 가지 만술 때문이야. 들으니까 우리 엄마가 떠나실 때, 내가 크면 꼭 전해달라고 부탁하셨대.” 백령은 소율의 머리칼이 눈에 젖어 희게 변한 것을 바라보다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그 해골은… 생전에 화만족의 어떤 인물이었을까. 왜 오직 그만이 월익으로 변하는 순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었던 거지… 어쩌면, 그는 화만족의 강자였을지도 모르겠다.”
소율의 눈앞에는 여전히 기이한 해골이 떠올랐고,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뇌리에 깊이 남은 것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의미의 문장들이었다.
“본디 도(道)는 만(蠻)의 욕망을 타고 팔방 끝까지 뻗나니, 불과 피가 하나 되어 창공을 태우고 하늘을 연소하리라…… 불과 달이 구름을 헤치면, 광막한 천지 사이…… 그때 깊이 사유하라. 피와 불이 번갈아 타올라 아홉은 극(極)이고 하나는 법(法)이라. 만화구배(蠻火九拜)를 올리면 배화의 통(拜火之通)이 열리리라! 푸른 하늘이여, 홀로 그대만이 고독 위에 선다!”
뜻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숙여 곱씹다 문득 시선을 돌리니, 곁에서 백령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붉은 광석이 흘려내는 희미한 빛은 그녀의 옆얼굴을 어슴푸레 비추었고, 낯선 공간에 대한 경계와 긴장이 미묘하게 교차했다.
“가시죠, 백령 아가씨.” 소율이 미소를 지으며 출구를 따라 바깥으로 기어올라갔다. 백령은 이내 따라붙었는데, 이곳에 더 머무는 순간마다 온몸을 옥죄는 불편함이 깊어지고 있었다.
동굴을 벗어나자 계곡을 타고 내려온 바람이 두 사람의 몸을 스쳤다. 매서운 기운은 옷자락 틈으로 파고들며 살을 얼리고, 발밑의 돌부리는 작은 소리를 내며 끝 모를 어둠으로 흩어졌다. 백령은 얼굴이 희게 질리며 본능처럼 바위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처음 겪는 낭떠러지 길 앞에서 입술을 깨물며 버텼다. 아래로 떨어지는 돌부리의 메아리가 심장을 파고들었고, 눈앞의 길은 발을 내디딜 때마다 허공에 떠 있는 듯 아찔했다.
소율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됐어, 내가 업어줄게.” 태연히 내뱉은 말과 달리 그의 가슴은 두근거리며 자꾸만 속도를 잃었고, 손끝은 알 수 없는 떨림을 전했다.
백령은 잠시 머뭇거리다 끝 모를 어둠을 내려다보고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소율은 눈빛을 반짝이며 몸을 숙였고, 그녀의 얼굴에는 순간 붉은 기가 스쳤다. 백령은 말없이 그의 등에 몸을 맡기고, 두 팔을 목에 조심스레 걸었다.
소율은 등에 닿는 따스한 체온과 가벼운 숨결, 코끝에 스며드는 은은한 향기를 뚜렷하게 느꼈다. 그것은 산림의 흙내와 뒤섞여 묘하게 달콤했고, 그는 무심히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꽉 잡아. 떨어져도 난 책임 안 져.” 말끝이 허공에 묻혔지만, 대답은 없었다. 소율은 잠시 머뭇이다가 돌을 짚고 산 아래로 몸을 옮겼다.
소율은 산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사람 하나쯤 업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따라 그는 괜히 더 험한 길을 택했고, 몸을 던졌다가 바위나 덩굴을 움켜쥐며 버텼다. 바람결에 낙엽과 흙먼지가 흩날렸고, 그의 움직임은 짐승처럼 날렵했다.
등 뒤의 두 팔은 점점 더 강하게 목을 끌어안자, 소율의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 원래라면 한 시진이면 족한 길을 일부러 늦췄고, 마침내 백령이 붉은 얼굴로 그의 등에서 내릴 때, 그녀의 눈빛엔 여전히 공포가 서려 있었지만 소율의 마음에는 아쉬움이 스쳤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이 산속은 눈도 깊이 쌓이고 함정도 많아. 우룡부까지 거리가 좀 있지. 혼자 가긴 위험해. 내가 먼저 네 부락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가는 게 낫겠어.”
백령이 망설이는 것을 보자 소율은 속으로 웃음을 감추었다. “다만 이 길은 험하니까 내가 억지로라도 업어가는 게 빠를 거야. 그래야 나도 일찍 집에 가고.”
백령은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붉혔다. 아까 산을 내려올 때 그가 일부러 꾸민 듯한 행동을 눈치챘기에, 길 내내 이렇다면 하는 생각에 부끄러움과 불만이 동시에 스쳤다.
“흥, 나 네 목숨 은인인 거 알지?” 소율은 그녀의 눈빛에서 불만을 읽고 잠시 움찔했으나 이내 태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지. 여긴 짐승도 많고 함정도 수두룩해. 월익이 나타날지도 몰라. 뭐, 네가 조심한다면 혼자서도 괜찮을 거야. 그럼 난 간다.”
그가 발길을 돌리자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그럼 부탁할게. 나 길을 몰라. 같이 가줘.”
소율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겉으로는 성가신 듯 몸을 낮추었다. “얼른 올라와. 날이 더 어두워지면 여기서 또 밤을 새워야 한다.”
백령은 얼굴을 붉히며 다시 그의 등에 몸을 맡겼다. 두 팔은 단단히 그의 목을 감았고, 가슴은 빠르게 뛰어 두려움인지 다른 감정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소율은 원숭이처럼 나무 사이를 날쌔게 가르며 달렸다. 바람이 뺨을 스쳤고, 등 뒤에서 전해지는 향기는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느새 그는 길을 크게 돌아 빙빙 돌기 시작했고, 오래 침묵하던 백령이 낮게 말했다. “여기… 세 번째야.” 그녀의 시선은 앞의 말라죽은 나무에 머물러 있었다.
“뭐? 내가 길을 잘못 든 건가? 잠시만.” 소율은 진지하게 주위를 살폈다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긴 처음 오는 길이군.” 그는 당황한 기색 없이 다른 길로 몸을 틀었다.
시간은 흘러 황혼이면 닿을 거리를 절반밖에 가지 못했다. 도중에 그는 일부러 우산부락 근처까지 가 멀리서 살폈고,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발길을 돌렸다. 하늘은 점차 어두워지고 산등성이에는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며, 숲은 깊은 어둠을 품어냈다.
밤이 완전히 깔렸을 즈음, 소율은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야겠네. 밤 산은 위험하니까, 내일 아침에 가자.”
백령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처음 만났을 때의 예리함이 되살아나 있었고, 소율은 그 시선에 괜히 눌려 기침을 했다. 잠시 후 백령이 빙긋 웃었고, 야성적인 기운이 그 웃음 속에 서려 퍼져갔다.
소율도 따라 웃으며 마른 나뭇가지를 긁어모아 쉴 자리를 마련했다. 숲은 눈발에 잠겨 고요했고, 어둠 속은 불빛 하나 없었지만 가까운 숨결은 또렷이 느껴졌다.
잠시,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라 침묵이 흘렀다. “네 이름은 아직 모르네.” 오랜 침묵 끝에 백령이 입을 열었고,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별빛이 스며 그녀의 눈동자에 고요히 담겼다.
“난 소율이야. 네 이름은 백령이라는 거 알아.” 소율이 웃으며 대답했다.
“부坊에서 날 속였지? 돌아가서 곱씹어보니 영 수상하더라.” 백령은 코를 찡긋하며 눈을 깜박였다.
“그건…”
“넌 우산부의 소만이 아니지?” 그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소율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못 했다. 바로 그때 숲 위로 눈송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와, 눈이다.” 소율은 고개를 들어 하얗게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눈송이는 바람결에 흩날리며 이리저리 빙돌다 두 사람의 머리와 어깨에 소복이 내려앉았고, 고요히 잠든 숲은 은빛 장막에 덮여 마치 다른 세계처럼 변해갔다. 백령은 소리 내어 웃지는 않았지만 눈빛에 장난기가 번졌고, 흩날리는 눈 사이로 마주친 시선에 순간 머뭇거리다 그와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숲은 바람 소리조차 잦아들어 오직 눈발이 쏟아지는 소리만 가득했고, 어둠 속 나무들은 하얀 숨결을 뿜어내듯 눈을 받아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눈을 바라보다가, 자신들이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같은 풍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백령은 차갑게 스며드는 눈을 맞으며도 마음 한켠이 이상하게 따뜻해짐을 느꼈고, 소율은 그녀의 숨결이 가까이 닿아오는 것을 의식하며 어깨를 조금 더 곧게 세웠다.
시간이 흐르자 눈은 점점 굵어져 땅 위에 부드러운 하얀 융단을 깔았고, 발자국조차 금세 사라져버렸다. 둘은 그 속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도 곁에 있다는 것을 느꼈고, 말 한마디 없어도 알 수 없는 기묘한 친밀감이 싹트고 있었다.
“소율, 고마워……” 하늘은 이미 어둑했으나, 눈발 사이로 스며든 달빛이 숲을 은빛으로 덮으며 어둠을 옅게 했다.
“날 구해줘서 고마워… 네 얘기를 들려줄 수 있니? 어떻게 거기 있었던 거야?” 백령이 소율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나는 자주 산에 약초를 캐러 올라와. 그곳은 우연히 알게 된 피한처였는데, 설마 어제 혈월이 뜰 줄은 몰랐지…….” 소율은 자신의 수산(淬散)을 감추고, 다른 이야기만 덧붙였다.
시간은 흘러 눈발이 이어진 밤 속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조용히 오갔고, 대화는 바람과 눈에 흩어지듯 퍼져나갔다.
“우룡부의 아공은 내 할머니야…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에 부락을 떠나셨어. 할머니 말씀으로는 풍준보다 더 큰 부락으로 가셨다는데, 그 뒤로 돌아오시지 않았어……” 백령은 두 팔로 몸을 감싼 채, 눈 속에서 잊지 못할 과거를 낮게 풀어놓았다.
“나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군지 몰라… 아공이 주워온 아이지……” 소율은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아, 그래서 그렇구나. 네가 다른 애들보다 그렇게 마른 것도, 키가 나보다 작은 것도 다 이유가 있네. 아공이 널 잘 돌보지 않은 거지?” 백령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아공은 나한테 잘해주셔. 게다가 아공 말씀으론 몇 년만 더 크면 나도 충분히 달라질 거래. 그리고 넌 다른 부락의 여자애들처럼 몸이 그렇게 튼튼한 것도 아니잖아.” 소율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내 아공이 가르쳐준 한 가지 만술 때문이야. 들으니까 우리 엄마가 떠나실 때, 내가 크면 꼭 전해달라고 부탁하셨대.” 백령은 소율의 머리칼이 눈에 젖어 희게 변한 것을 바라보다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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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魔)의 이름으로, 세상에 군림하리
34.제34장 산령산의 완성조회 : 5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319 33.제33장 어깨에 쌓인 눈, 마음에 남은 빈자리조회 : 9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094 32.제32장 설림(雪林)의 밤, 서로의 곁에서조회 : 10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697 31.제31장 구출조회 : 12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429 30.제30장 월익의 귀환, 그리고 구원조회 : 38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415 29.제29장 화만의 부락조회 : 29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535 28.제28장. 혈월강림, 월익의 광무조회 : 36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432 27.제27장 만신의 저주, 월익의 강림조회 : 35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457 26.제26장. 혈월(血月)의 밤조회 : 36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893 25.제25장 화근의 씨앗조회 : 26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6,184 24.제24장. 은밀한 거래조회 : 31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39 23.제23장. 첫만남조회 : 31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618 22.제22장. 변치 않으리...조회 : 96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203 21.제21장. 차가운 시선, 식지 않는 갈망조회 : 10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93 20.제20장. 서리바람 속의 재회조회 : 9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925 19.제19장. 석문 너머조회 : 11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55 18.제18장. 선만의 축복조회 : 11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835 17.제17장. 혈맥의 비밀과 할아버지의 경고조회 : 107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92 16.제16장. 귀향조회 : 134 추천 : 0 댓글 : 0 글자 : 7,410 15.제15장. 절망을 길들이는 자조회 : 10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5,182 14.제14장. 사만(邪蠻)의 그림자, 육치의 도주조회 : 10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892 13.제13장. 육혈 각성, 흑산의 추격자조회 : 119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398 12.제12장. 청진산의 효능조회 : 102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724 11.제11장. 혈산과 청진산조회 : 10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2,659 10.제10장 수산(淬散)조회 : 100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689 9.제9장 흑염봉(黑炎峰)조회 : 10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313 8.제8장. 기억의 문, 약석(藥石)의 비밀조회 : 9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2,559 7.제7장. 숨겨진 선물, 깨어나는 혈맥조회 : 11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235 6.제6장. 피로 각성한 의지, 그리고 첫 걸음조회 : 121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049 5.제5장 별을 향한 균열조회 : 11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4,152 4.제4장 밤의 망설임조회 : 11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2,998 3.제3장 만계(蠻啟)조회 : 163 추천 : 0 댓글 : 0 글자 : 3,248 2.제2장 소율 (韶律)조회 : 185 추천 : 0 댓글 : 0 글자 : 2,915 1.제1장 마서(魔序)조회 : 678 추천 : 0 댓글 : 0 글자 : 1,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