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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6 추천 : 0 글자수 : 5,378 자 2025-09-02
그림자 애인
지안의 눈물은 뜨거웠다. 그것은 내 어깨를 적시고,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 순간,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모든 벽이 허물어지는 듯했다. 포식자와 사냥감, 지배자와 피지배자, 교주와 관객이라는 역할 놀이는 끝이 났다. 우리는 그저 상처 입은 두 영혼으로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녀의 흐느낌이 잦아들었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일으켜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녀는 지친 아이처럼,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든 그녀의 얼굴은 놀라울 만큼 평온하고 순수했다. 수많은 남자들을 파멸로 이끌었던 요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내가 본 눈물은 진실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완전히 길들이기 위한, 그녀의 가장 정교하고 위험한 연기였을까? 나는 그녀를 믿고 싶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끊임없이 경고음이 울렸다. 그녀는 카멜레온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으로, 혹은 상대방이 가장 약해지는 모습으로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존재.
나는 밤새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녀가 깰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 지긋지긋한 관계의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내가 잠에서 깨었을 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침대에는 그녀의 온기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메모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어젯밤은 잊어. 우린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그 짧은 문장은 나를 다시 혼란에 빠뜨렸다. 그녀는 다시 단단한 껍질 속으로 숨어버렸다. 자신의 나약함을 보인 것을, 내 앞에서 무너진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의 관계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굴러가기 시작한 돌을 멈출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 사이에는 지워지지 않는 균열이 생겼고, 그 틈으로 새로운 감정들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후 며칠 동안, 지안은 다시 내 연락을 피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나는 더 이상 불안하거나 초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나를 완전히 밀어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그녀의 가장 깊은 비밀을 공유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예상대로 지안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 저녁, 시간 비워 놔.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녀의 메시지는 이전처럼 차갑거나 도발적이지 않았다. 어딘가 힘이 빠진, 담담한 톤이었다. 나는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알겠다는 짧은 답장을 보냈다. 그녀가 나에게 누군가를 소개해주려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관계의 커다란 변화를 의미했다. 그녀는 나를 자신의 세계에 더 깊숙이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시험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정말로 의지할 사람이 필요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약속 장소는 네버랜드가 아니었다. 청담동의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최고급 프라이빗 바였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철저히 외부인의 시선이 차단된 공간. 그곳에서 지안은 어떤 모습일까.
바 안으로 들어서자, 지안이 나를 발견하고 손짓했다. 그녀는 가장 안쪽의 독립된 룸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한 중년 남성이 앉아 있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품위 있고 중후한 인상의 남자. 비싸 보이는 맞춤 정장, 잘 관리된 피부, 그리고 여유로운 미소. 그는 재혁과는 다른 종류의 ‘성공한 남자’였다. 오랜 시간과 경험을 통해 다져진, 흔들림 없는 자신감과 깊이가 느껴졌다.
“민준아, 이쪽은 김선우 대표님. 내 오랜 후원자시지.”
지안이 나를 소개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높았고,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후원자’라는 단어 역시 의미심장했다.
“그리고 대표님, 이쪽은 이민준. 제… 제일 친한 동생이에요.”
그녀는 나를 ‘제일 친한 동생’이라고 소개했다. 그 말에 김선우라는 남자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낯선 수컷을 경계하는, 예리한 탐색의 눈빛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민준 군. 지안이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정중했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경계심이 묻어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세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지안은 왜 나를 이 자리에 부른 것일까. 그녀는 이 두 남자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김선우는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갔다. 그는 내 학교와 전공을 묻고, 미래에 대한 계획에 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어른처럼 보였다. 자상하고, 지적이고, 유머 감각까지 갖춘. 하지만 나는 그의 완벽한 매너 뒤에 숨겨진, 지안을 향한 강렬한 소유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안이 와인을 마실 때마다 잔을 채워주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자 자연스럽게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 모든 행동에는 ‘이 여자는 내 것이다’라는 무언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지안은 그 남자 앞에서,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응석받이 어린 소녀 같기도 했고, 사랑받는 연인 같기도 했다. 그녀는 재혁 앞에서 보였던 교태나, 내 앞에서 보였던 오만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김선우의 그늘 아래에서, 편안하고 안정된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의 관계가 단순한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가 아님을 직감했다. 그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깊은 유대감을 쌓아온 것처럼 보였다.
“지안이는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길 잃은 새끼 고양이 같았지.”
김선우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추억에 잠긴 듯 말했다.
“막 스무 살이 되어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혼자 아등바등 살아가던 아이. 그때 내가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면, 아마 험한 꼴 많이 당했을 거야.”
그의 말에는 지안의 구원자라는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그는 지안의 과거를 알고 있었고, 그녀의 성장을 지켜봐 온 사람이었다.
“대표님 덕분이죠, 뭐. 대표님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거예요.”
지안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지안의 과거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그녀가 지금의 완벽한 ‘작품’이 되기까지, 김선우라는 남자의 재정적, 그리고 어쩌면 정신적인 지원이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창조주 중 한 명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그들 둘만의 견고한 역사와 관계 속에서, 나는 끼어들 틈이 없는 불청객이었다. 술자리가 길어질수록, 나는 소외감을 느꼈다. 지안은 나를 이 자리에 불러놓고, 거의 김선우에게만 집중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나를 소외시키고 있었다. ‘봐라, 이민준. 이게 내 진짜 세상이다. 네가 모르는 나의 모습, 나의 관계. 너는 그저 내 삶의 작은 일부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김선우가 나를 따라나왔다. 그는 복도에서 나를 붙잡았다.
“민준 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의 얼굴에서는 아까의 부드러운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그는 차갑고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지안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
그의 질문은 단도직입적이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는 척하지 말아요. 요즘 지안이가 이상합니다. 평소와 다르게 불안해하고, 밤에 잠도 잘 못 자요. 당신을 만나고부터 그렇게 변했어요. 당신, 우리 지안이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그는 나를 지안을 망가뜨린 원흉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집요한 추궁에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친구로서 조언을 좀 했을 뿐입니다.”
“조언?”
김선우가 코웃음을 쳤다.
“당신 같은 어린애가 지안이한테 무슨 조언을 한다는 거죠? 지안이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상처가 많은 아이입니다. 섣부른 동정심이나 호기심으로 애를 흔들어놓지 말아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그의 말은 경고였다. 지안의 세계에서 손을 떼라는.
“지안이는 내가 지킬 겁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당신 같은 풋내기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김선우는 지안을 사랑하고 있었다. 단순한 소유욕이나 후원자의 책임감을 넘어선, 깊고 뒤틀린 형태의 사랑. 그는 지안을 자신의 새장 안에 가두어두고, 자신만이 그녀를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구원자인 동시에 감시자였고, 아버지인 동시에 애인이었다. 그는 지안의 그림자였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안 씨를 정말 위한다면, 새장 문을 열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스스로 날아갈 수 있도록. 대표님은 지안 씨를 지키는 게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겁니다.”
내 말에 김선우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는 내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그때, 지안이 룸에서 나왔다.
“두 사람, 뭐해요?”
지안은 우리 사이의 팽팽한 기류를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 태연하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민준 군이랑 남자들만의 대화를 좀 나눴을 뿐.”
김선우는 금세 평소의 부드러운 얼굴로 돌아왔다. 그의 감정 조절 능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날 밤, 술자리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끝이 났다. 김선우는 지안을 자신의 차로 데려다주겠다며 나섰고, 지안은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오늘, 지안의 또 다른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복잡한 관계의 한 단면을 목격했다. 그녀는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여러 개의 역할을 연기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재혁 앞에서는 여왕으로, 김선우 앞에서는 어린 연인으로, 그리고 내 앞에서는 상처 입은 소녀로. 대체 어떤 것이 그녀의 진짜 얼굴일까. 어쩌면, 그녀 자신도 자신의 진짜 얼굴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김선우의 등장은 나를 더욱 깊은 고민에 빠뜨렸다. 나는 지안을 구원할 수 있을까? 아니, 내가 그녀를 구원하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형태의 오만과 소유욕은 아닐까? 김선우가 나를 비난했던 것처럼.
나는 이제 단순한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김선우라는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으로, 나는 이 게임의 판도를 뒤흔들 수 있는 변수가 되었다. 지안은 나와 김선우를 동시에 자신의 곁에 둠으로써, 위험한 균형을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지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어제 일은 미안. 대표님은… 나한테 특별한 분이라. 네가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그녀는 사과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선을 긋고 있었다. 김선우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이해해. 하지만 그 사람이 네 진짜 모습은 아니잖아. 난 네 진짜 얼굴이 보고 싶어, 지안아.]
나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돌을 던졌다. 그녀의 가장 아픈 곳을, 그녀가 가장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건드렸다. 우리의 위험한 게임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는 김선우라는 그림자 애인까지 얽힌, 훨씬 더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는 이 게임의 끝에서 무엇을 마주하게 될까. 구원일까, 아니면 공멸일까. 나는 두려웠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지안의 눈물은 뜨거웠다. 그것은 내 어깨를 적시고,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 순간,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모든 벽이 허물어지는 듯했다. 포식자와 사냥감, 지배자와 피지배자, 교주와 관객이라는 역할 놀이는 끝이 났다. 우리는 그저 상처 입은 두 영혼으로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녀의 흐느낌이 잦아들었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일으켜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녀는 지친 아이처럼,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든 그녀의 얼굴은 놀라울 만큼 평온하고 순수했다. 수많은 남자들을 파멸로 이끌었던 요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내가 본 눈물은 진실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완전히 길들이기 위한, 그녀의 가장 정교하고 위험한 연기였을까? 나는 그녀를 믿고 싶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끊임없이 경고음이 울렸다. 그녀는 카멜레온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으로, 혹은 상대방이 가장 약해지는 모습으로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존재.
나는 밤새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녀가 깰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 지긋지긋한 관계의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내가 잠에서 깨었을 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침대에는 그녀의 온기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메모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어젯밤은 잊어. 우린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그 짧은 문장은 나를 다시 혼란에 빠뜨렸다. 그녀는 다시 단단한 껍질 속으로 숨어버렸다. 자신의 나약함을 보인 것을, 내 앞에서 무너진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의 관계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굴러가기 시작한 돌을 멈출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 사이에는 지워지지 않는 균열이 생겼고, 그 틈으로 새로운 감정들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후 며칠 동안, 지안은 다시 내 연락을 피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나는 더 이상 불안하거나 초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나를 완전히 밀어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그녀의 가장 깊은 비밀을 공유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예상대로 지안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 저녁, 시간 비워 놔.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녀의 메시지는 이전처럼 차갑거나 도발적이지 않았다. 어딘가 힘이 빠진, 담담한 톤이었다. 나는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알겠다는 짧은 답장을 보냈다. 그녀가 나에게 누군가를 소개해주려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관계의 커다란 변화를 의미했다. 그녀는 나를 자신의 세계에 더 깊숙이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시험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정말로 의지할 사람이 필요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약속 장소는 네버랜드가 아니었다. 청담동의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최고급 프라이빗 바였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철저히 외부인의 시선이 차단된 공간. 그곳에서 지안은 어떤 모습일까.
바 안으로 들어서자, 지안이 나를 발견하고 손짓했다. 그녀는 가장 안쪽의 독립된 룸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한 중년 남성이 앉아 있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품위 있고 중후한 인상의 남자. 비싸 보이는 맞춤 정장, 잘 관리된 피부, 그리고 여유로운 미소. 그는 재혁과는 다른 종류의 ‘성공한 남자’였다. 오랜 시간과 경험을 통해 다져진, 흔들림 없는 자신감과 깊이가 느껴졌다.
“민준아, 이쪽은 김선우 대표님. 내 오랜 후원자시지.”
지안이 나를 소개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높았고,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후원자’라는 단어 역시 의미심장했다.
“그리고 대표님, 이쪽은 이민준. 제… 제일 친한 동생이에요.”
그녀는 나를 ‘제일 친한 동생’이라고 소개했다. 그 말에 김선우라는 남자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낯선 수컷을 경계하는, 예리한 탐색의 눈빛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민준 군. 지안이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정중했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경계심이 묻어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세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지안은 왜 나를 이 자리에 부른 것일까. 그녀는 이 두 남자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김선우는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갔다. 그는 내 학교와 전공을 묻고, 미래에 대한 계획에 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어른처럼 보였다. 자상하고, 지적이고, 유머 감각까지 갖춘. 하지만 나는 그의 완벽한 매너 뒤에 숨겨진, 지안을 향한 강렬한 소유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안이 와인을 마실 때마다 잔을 채워주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자 자연스럽게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 모든 행동에는 ‘이 여자는 내 것이다’라는 무언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지안은 그 남자 앞에서,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응석받이 어린 소녀 같기도 했고, 사랑받는 연인 같기도 했다. 그녀는 재혁 앞에서 보였던 교태나, 내 앞에서 보였던 오만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김선우의 그늘 아래에서, 편안하고 안정된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의 관계가 단순한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가 아님을 직감했다. 그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깊은 유대감을 쌓아온 것처럼 보였다.
“지안이는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길 잃은 새끼 고양이 같았지.”
김선우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추억에 잠긴 듯 말했다.
“막 스무 살이 되어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혼자 아등바등 살아가던 아이. 그때 내가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면, 아마 험한 꼴 많이 당했을 거야.”
그의 말에는 지안의 구원자라는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그는 지안의 과거를 알고 있었고, 그녀의 성장을 지켜봐 온 사람이었다.
“대표님 덕분이죠, 뭐. 대표님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거예요.”
지안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지안의 과거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그녀가 지금의 완벽한 ‘작품’이 되기까지, 김선우라는 남자의 재정적, 그리고 어쩌면 정신적인 지원이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창조주 중 한 명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그들 둘만의 견고한 역사와 관계 속에서, 나는 끼어들 틈이 없는 불청객이었다. 술자리가 길어질수록, 나는 소외감을 느꼈다. 지안은 나를 이 자리에 불러놓고, 거의 김선우에게만 집중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나를 소외시키고 있었다. ‘봐라, 이민준. 이게 내 진짜 세상이다. 네가 모르는 나의 모습, 나의 관계. 너는 그저 내 삶의 작은 일부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김선우가 나를 따라나왔다. 그는 복도에서 나를 붙잡았다.
“민준 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의 얼굴에서는 아까의 부드러운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그는 차갑고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지안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
그의 질문은 단도직입적이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는 척하지 말아요. 요즘 지안이가 이상합니다. 평소와 다르게 불안해하고, 밤에 잠도 잘 못 자요. 당신을 만나고부터 그렇게 변했어요. 당신, 우리 지안이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그는 나를 지안을 망가뜨린 원흉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집요한 추궁에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친구로서 조언을 좀 했을 뿐입니다.”
“조언?”
김선우가 코웃음을 쳤다.
“당신 같은 어린애가 지안이한테 무슨 조언을 한다는 거죠? 지안이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상처가 많은 아이입니다. 섣부른 동정심이나 호기심으로 애를 흔들어놓지 말아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그의 말은 경고였다. 지안의 세계에서 손을 떼라는.
“지안이는 내가 지킬 겁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당신 같은 풋내기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김선우는 지안을 사랑하고 있었다. 단순한 소유욕이나 후원자의 책임감을 넘어선, 깊고 뒤틀린 형태의 사랑. 그는 지안을 자신의 새장 안에 가두어두고, 자신만이 그녀를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구원자인 동시에 감시자였고, 아버지인 동시에 애인이었다. 그는 지안의 그림자였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안 씨를 정말 위한다면, 새장 문을 열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스스로 날아갈 수 있도록. 대표님은 지안 씨를 지키는 게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겁니다.”
내 말에 김선우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는 내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그때, 지안이 룸에서 나왔다.
“두 사람, 뭐해요?”
지안은 우리 사이의 팽팽한 기류를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 태연하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민준 군이랑 남자들만의 대화를 좀 나눴을 뿐.”
김선우는 금세 평소의 부드러운 얼굴로 돌아왔다. 그의 감정 조절 능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날 밤, 술자리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끝이 났다. 김선우는 지안을 자신의 차로 데려다주겠다며 나섰고, 지안은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오늘, 지안의 또 다른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복잡한 관계의 한 단면을 목격했다. 그녀는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여러 개의 역할을 연기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재혁 앞에서는 여왕으로, 김선우 앞에서는 어린 연인으로, 그리고 내 앞에서는 상처 입은 소녀로. 대체 어떤 것이 그녀의 진짜 얼굴일까. 어쩌면, 그녀 자신도 자신의 진짜 얼굴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김선우의 등장은 나를 더욱 깊은 고민에 빠뜨렸다. 나는 지안을 구원할 수 있을까? 아니, 내가 그녀를 구원하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형태의 오만과 소유욕은 아닐까? 김선우가 나를 비난했던 것처럼.
나는 이제 단순한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김선우라는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으로, 나는 이 게임의 판도를 뒤흔들 수 있는 변수가 되었다. 지안은 나와 김선우를 동시에 자신의 곁에 둠으로써, 위험한 균형을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지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어제 일은 미안. 대표님은… 나한테 특별한 분이라. 네가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그녀는 사과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선을 긋고 있었다. 김선우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이해해. 하지만 그 사람이 네 진짜 모습은 아니잖아. 난 네 진짜 얼굴이 보고 싶어, 지안아.]
나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돌을 던졌다. 그녀의 가장 아픈 곳을, 그녀가 가장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건드렸다. 우리의 위험한 게임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는 김선우라는 그림자 애인까지 얽힌, 훨씬 더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는 이 게임의 끝에서 무엇을 마주하게 될까. 구원일까, 아니면 공멸일까. 나는 두려웠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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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끼 (The L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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