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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205 추천 : 0 글자수 : 6,557 자 2025-08-12
경계선의 여신
스물셋의 여름, 나의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취업 준비라는 막연한 불안감, 반복되는 무기력한 일상,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 나는 그 잿빛 세상 속에서 표류하는 작은 섬과 같았다. 그런 내게 유일하게 선명한 색채를 띤 존재가 있었다. 바로 지안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희미한 오렌지색 조명이 깔린 단골 바, ‘네버랜드’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곳은 현실과 꿈의 경계에 있는 듯한 묘한 이름처럼, 세상의 모든 경계인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리고 지안은 그 모든 경계인들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경계에 서 있는, 네버랜드의 여신이었다.
“민준아.”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스모키한 위스키 향과 뒤섞여 내 고막을 나른하게 간질였다. 나는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안은… 그냥 지안이었다. 그녀를 어떤 단어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늘 부질없는 짓이었다. 여성, 남성, 혹은 그 사이의 무언가. 그 어떤 카테고리도 그녀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었다.
지안은 몸에 완벽하게 달라붙는 검은색 실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의학의 힘을 빌려 빚어낸 D컵의 가슴은 그 얇은 천 아래에서 아찔하고도 도발적인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에서부터 비현실적으로 솟아오른 엉덩이까지의 라인은,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빚어낸 대리석상처럼 완벽했다. 수술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얼굴은 굳이 비교하자면 요즘 가장 잘나가는 아이돌 그룹의 센터를 닮아 있었다. 크고 서늘한 눈매, 오똑한 콧날, 그리고 도톰한 입술. 그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한, 어떤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붉은 립스틱이 묻은 크리스털 잔을 빙글빙글 돌리는 그녀의 긴 손가락, 나른하게 반쯤 감긴 눈. 지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예술품이었고, 동시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넌 말이야, 꼭 절벽 끝에 서서 아래를 구경하는 사람 같아.”
지안이 나를 향해 몸을 살짝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녀의 짙은 향수 냄새가 훅 끼쳐왔다. 샤넬 넘버 파이브, 마릴린 먼로가 잠옷 대신 입었다는 바로 그 향수. 지안에게는 그 관능적인 향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뛰어들고는 싶은데, 무서워서 발만 동동 구르는 어린애. 안 그래?”
“구경만으로도 충분히 스릴 넘치거든. 괜히 뛰어내렸다가 뼈도 못 추릴라.”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받아쳤다.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더 잠겨 나오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지안은 그런 내 속을 이미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그 미소는 언제나 나를 무장해제시켰다. 그녀 앞에서는 어떤 허세도, 어떤 방어기제도 통하지 않았다.
“그래? 근데 네 아랫도리는 솔직하지 못하네.”
지안의 시선이 테이블 아래, 내 허벅지 사이로 향했다. 그 시선이 마치 뜨거운 인두처럼 느껴졌다. 의식하자마자 온몸의 피가 그곳으로 맹렬하게 쏠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며 시선을 피했다. 우리는 친구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지안과 나 사이에는 늘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녀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서 줄타기를 즐기는 곡예사였고, 나는 그 밑에서 조마조마하게 그녀를 올려다보는 관객이었다. 그리고 그 게임에서 나는 늘 패배자였다.
문득 1년 전 그날 밤이 떠올랐다. 술에 진탕 취해, 필름이 끊기기 직전의 상태로 둘만 모텔에 간 날이었다. 먼저 샤워를 마친 지안이 가운도 걸치지 않은 채 욕실에서 걸어 나왔을 때, 나는 거의 이성을 잃을 뻔했다. 김이 서린 욕실 조명을 등지고 선 그녀의 실루엣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여자의 몸, 물방울이 맺힌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그 아래, 너무나도 선명하게 존재하는 남자의 것.
그 부조화. 그 충격. 그것이 만들어내는 기묘하고도 강력한 에로티시즘은, 내가 그때까지 만나왔던 어떤 여자에게서도 느껴본 적 없는, 원초적이고 강력한 자극이었다. 나는 숨을 멈춘 채 얼어붙었고, 지안은 그런 나를 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왜 그렇게 놀라, 민준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그녀의 목소리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젖은 가슴으로 가져갔다. 차가운 물기와 뜨거운 피부의 감촉이 뒤섞여 내 손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어때? 감이 별로야? 역시 의젖이라 그런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심장은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광란의 춤을 추고 있었다.
“근데 왜 네 똘똘이는 이렇게 풀발기 상태야? 거짓말쟁이.”
그녀의 다른 손이 내 바지 위로 내려와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부분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이성의 퓨즈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미친 듯이 그녀를 원했다. 그녀가 여자이든 남자이든,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공포가 욕망을 집어삼켰다. 이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본능적인 경고음이 머릿속을 울렸다.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밀치고 방에서 도망쳤다. 신발도 짝짝이로 신은 채였다. 뒤에서 들려오던 지안의 웃음소리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지안은 그런 나를 보며 늘 만족스럽게 웃었다. 마치 자신의 매력이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는 듯이. 그녀에게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를 구경하는 조련사와도 같았다. 언젠가는 길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여유로운 조련사.
“무슨 생각해? 또 그날 밤 생각하지, 너.”
지안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정확히 핵심을 찔렀다.
“아니거든.”
“맞는데. 얼굴에 다 쓰여 있어. ‘그날 덮쳤어야 했는데, 아쉽다’ 하고.”
“미쳤냐.”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목소리는 предательски 갈라졌다. 지안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바의 다른 손님 몇몇이 우리 쪽을 쳐다봤다. 지안은 그런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기는 듯 보였다. 그녀는 언제나 무대의 중심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정색하긴.”
지안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내 손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녀의 손톱은 피처럼 붉고 날카로웠다. 그 손길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슬쩍 손을 빼려 했지만, 지안은 내 손을 더 꽉 잡았다.
“민준아.”
다시 한번,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낮고 진지한 목소리였다.
“너는 왜 나랑 친구로 지내려고만 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우린… 친구잖아.”
“친구?”
지안이 코웃음을 쳤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어. 하물며 나랑 너 같은 사이엔 더더욱. 넌 날 여자로 보고, 또 가끔은 남자로도 보겠지. 그리고 난 널… 그냥 귀여운 숫총각으로 보고.”
“야!”
“왜, 틀린 말 했어? 넌 나를 욕망해, 이민준. 그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네 몸은 나만 보면 이렇게 정직하게 반응하는데.”
지안은 잡고 있던 내 손을 자신의 허벅지 안쪽으로 가져갔다. 얇은 실크 원피스 아래로, 스타킹의 매끄러운 감촉과 그녀의 뜨거운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녀의 허벅지는 단단하고 탄력이 넘쳤다. 내 손이 닿자, 그녀의 근육이 미세하게 수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봐. 나도 너한테 반응해.”
그녀의 눈이 짙은 안개처럼 흐려졌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깊은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손을 뿌리쳤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만해, 지안아. 사람들 보잖아.”
“보는 게 뭐 어때서. 부러워서 보겠지. 나처럼 예쁜 여자랑, 너처럼 순진하게 생긴 남자애가 아슬아슬하게 노는 걸.”
그녀의 말에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자신을 ‘예쁜 여자’라고 칭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것은 단순한 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남자들의 욕망 어린 시선과, 여자들의 질투 섞인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구축된, 견고한 자기 확신이었다.
지안은 새로운 위스키를 주문했다. 얼음이 가득 담긴 잔에 호박색 액체가 채워졌다. 그녀는 그것을 한 모금 마시고는, 전혀 다른 주제를 꺼냈다.
“요즘도 그 여자애 만나?”
그녀가 말하는 ‘그 여자애’는 내가 최근에 몇 번 만났던 같은 과 후배였다. 착하고, 귀엽고, 평범한 아이. 지안과는 정반대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어. 그냥 뭐… 가끔 밥이나 먹고.”
“재미없지?”
“…….”
“뻔하지, 뭐. 밥 먹고, 영화 보고, 카페 가고. 손 한번 잡으려면 온갖 명분을 다 만들어야 하고. 키스라도 하려면 분위기 잡느라 하루 다 보내고. 지겹지 않아, 그런 연애놀이?”
지안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내 폐부를 찔렀다. 사실이었다. 나는 그 후배와의 만남이 지루했다. 안전했지만, 어떤 설렘도, 어떤 긴장감도 없었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움직였다. 마치 잘 짜인 각본을 따르는 연극처럼.
“사람들은 그런 걸 안정감이라고 불러.”
내가 힘겹게 변명했다.
“안정감? 아니. 그건 권태야. 살아있다는 감각을 잊게 만드는 마약 같은 거지. 넌 아직 젊어, 민준아. 그런 시시한 놀이에 안주하기엔 너무 아깝다고.”
“그럼 뭘 해야 되는데?”
“나랑 놀아야지.”
지안이 윙크를 하며 말했다.
“나랑 놀면, 네가 살아있다는 걸 매 순간 느끼게 해줄 수 있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스릴, 온몸의 감각이 열리는 쾌락, 네가 상상도 못 했던 새로운 세상. 그런 것들.”
그녀의 말은 달콤한 독처럼 내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 독에 중독되고 싶다는 위험한 충동을 느꼈다. 잿빛 세상에 갇혀 있던 내게, 지안은 유일한 탈출구처럼 보였다. 그녀가 말하는 새로운 세상은 어떤 곳일까. 그곳에 발을 들이면, 나는 정말로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을까.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그녀의 세계는 너무나도 강렬해서, 한번 발을 들이면 두 번 다시는 예전의 나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고, 나는 그 주변을 맴도는 위태로운 행성이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산산조각 나 먼지가 되어버릴 운명.
“겁먹긴.”
지안이 내 표정을 읽고는 다시 장난스럽게 웃었다.
“안 잡아먹어. 아직은.”
그녀는 ‘아직은’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것은 유예된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언젠가는, 내가 모든 경계를 허물고 그녀에게 투항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예언.
나는 잔에 남은 위스키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뜨거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속을 태웠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지안 때문인지,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바의 스피커에서는 쳇 베이커의 ‘My Funny Valentine’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슬프면서도 관능적인 트럼펫 소리와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네버랜드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지안은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Is your figure less than Greek? Is your mouth a little weak? When you open it to speak, are you smart?”
그녀는 노래 가사처럼,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기묘한 발렌타인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술을 마셨다. 시시콜콜한 이야기, 서로의 과거, 그리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까지. 지안은 훌륭한 상담가이기도 했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다가도,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찌르며 내가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마주하게 했다.
“결국 넌 외로운 거야, 이민준. 그래서 시시한 여자애한테 기대보려고 하고, 나 같은 이상한 애 옆에서 맴돌고 있는 거고. 안 그래?”
“…….”
“외로움은 나쁜 게 아니야. 그걸 어떻게 채우느냐가 중요한 거지. 쓰레기로 배를 채울 수도 있고, 최고급 만찬을 즐길 수도 있어. 선택은 네 몫이야.”
그녀는 나를 쓰레기통 앞에 서 있는 배고픈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최고급 만찬을 차려놓고 나를 유혹하는 호스트였다.
바를 나설 때쯤, 나는 완전히 취해 있었다. 비틀거리는 나를 지안이 부축했다. 그녀의 몸은 가늘었지만, 나를 지탱하는 힘은 단단했다. 그녀의 어깨에 기대자, 익숙한 향수 냄새와 함께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나는 그 온기에 취해 잠시 눈을 감았다.
“정신 차려. 택시 잡아야지.”
지안이 내 뺨을 가볍게 쳤다. 나는 겨우 눈을 떴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훅 끼쳐왔다.
“오늘은 그냥 보내줄게. 생일 선물이랄까.”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걸 그녀는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물어볼 기력도 없었다. 지안은 택시를 잡아 나를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기사님, 주소는…”
그녀는 내 주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택시 문이 닫히기 직전, 지안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다음엔, 제대로 받을 거야.”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 뺨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는 얼어붙은 채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실루엣은,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뺨에는 아직도 그녀의 립스틱 자국과 입술의 감촉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경계선 위에 서 있었다. 한쪽은 지루하고 안전한 잿빛의 현실. 다른 한쪽은 위험하고 매혹적인, 지안의 색채로 가득한 미지의 세계.
나는 아직 어느 쪽으로도 발을 내딛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알 수 있었다. 언젠가 나는 반드시 그 경계를 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지안이라는 여신이 지배하는 그 위험한 네버랜드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스물셋의 여름, 나의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취업 준비라는 막연한 불안감, 반복되는 무기력한 일상,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 나는 그 잿빛 세상 속에서 표류하는 작은 섬과 같았다. 그런 내게 유일하게 선명한 색채를 띤 존재가 있었다. 바로 지안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희미한 오렌지색 조명이 깔린 단골 바, ‘네버랜드’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곳은 현실과 꿈의 경계에 있는 듯한 묘한 이름처럼, 세상의 모든 경계인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리고 지안은 그 모든 경계인들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경계에 서 있는, 네버랜드의 여신이었다.
“민준아.”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스모키한 위스키 향과 뒤섞여 내 고막을 나른하게 간질였다. 나는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안은… 그냥 지안이었다. 그녀를 어떤 단어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늘 부질없는 짓이었다. 여성, 남성, 혹은 그 사이의 무언가. 그 어떤 카테고리도 그녀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었다.
지안은 몸에 완벽하게 달라붙는 검은색 실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의학의 힘을 빌려 빚어낸 D컵의 가슴은 그 얇은 천 아래에서 아찔하고도 도발적인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에서부터 비현실적으로 솟아오른 엉덩이까지의 라인은,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빚어낸 대리석상처럼 완벽했다. 수술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얼굴은 굳이 비교하자면 요즘 가장 잘나가는 아이돌 그룹의 센터를 닮아 있었다. 크고 서늘한 눈매, 오똑한 콧날, 그리고 도톰한 입술. 그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한, 어떤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붉은 립스틱이 묻은 크리스털 잔을 빙글빙글 돌리는 그녀의 긴 손가락, 나른하게 반쯤 감긴 눈. 지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예술품이었고, 동시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넌 말이야, 꼭 절벽 끝에 서서 아래를 구경하는 사람 같아.”
지안이 나를 향해 몸을 살짝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녀의 짙은 향수 냄새가 훅 끼쳐왔다. 샤넬 넘버 파이브, 마릴린 먼로가 잠옷 대신 입었다는 바로 그 향수. 지안에게는 그 관능적인 향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뛰어들고는 싶은데, 무서워서 발만 동동 구르는 어린애. 안 그래?”
“구경만으로도 충분히 스릴 넘치거든. 괜히 뛰어내렸다가 뼈도 못 추릴라.”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받아쳤다.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더 잠겨 나오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지안은 그런 내 속을 이미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그 미소는 언제나 나를 무장해제시켰다. 그녀 앞에서는 어떤 허세도, 어떤 방어기제도 통하지 않았다.
“그래? 근데 네 아랫도리는 솔직하지 못하네.”
지안의 시선이 테이블 아래, 내 허벅지 사이로 향했다. 그 시선이 마치 뜨거운 인두처럼 느껴졌다. 의식하자마자 온몸의 피가 그곳으로 맹렬하게 쏠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며 시선을 피했다. 우리는 친구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지안과 나 사이에는 늘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녀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서 줄타기를 즐기는 곡예사였고, 나는 그 밑에서 조마조마하게 그녀를 올려다보는 관객이었다. 그리고 그 게임에서 나는 늘 패배자였다.
문득 1년 전 그날 밤이 떠올랐다. 술에 진탕 취해, 필름이 끊기기 직전의 상태로 둘만 모텔에 간 날이었다. 먼저 샤워를 마친 지안이 가운도 걸치지 않은 채 욕실에서 걸어 나왔을 때, 나는 거의 이성을 잃을 뻔했다. 김이 서린 욕실 조명을 등지고 선 그녀의 실루엣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여자의 몸, 물방울이 맺힌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그 아래, 너무나도 선명하게 존재하는 남자의 것.
그 부조화. 그 충격. 그것이 만들어내는 기묘하고도 강력한 에로티시즘은, 내가 그때까지 만나왔던 어떤 여자에게서도 느껴본 적 없는, 원초적이고 강력한 자극이었다. 나는 숨을 멈춘 채 얼어붙었고, 지안은 그런 나를 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왜 그렇게 놀라, 민준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그녀의 목소리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젖은 가슴으로 가져갔다. 차가운 물기와 뜨거운 피부의 감촉이 뒤섞여 내 손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어때? 감이 별로야? 역시 의젖이라 그런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심장은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광란의 춤을 추고 있었다.
“근데 왜 네 똘똘이는 이렇게 풀발기 상태야? 거짓말쟁이.”
그녀의 다른 손이 내 바지 위로 내려와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부분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이성의 퓨즈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미친 듯이 그녀를 원했다. 그녀가 여자이든 남자이든,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공포가 욕망을 집어삼켰다. 이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본능적인 경고음이 머릿속을 울렸다.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밀치고 방에서 도망쳤다. 신발도 짝짝이로 신은 채였다. 뒤에서 들려오던 지안의 웃음소리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지안은 그런 나를 보며 늘 만족스럽게 웃었다. 마치 자신의 매력이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는 듯이. 그녀에게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를 구경하는 조련사와도 같았다. 언젠가는 길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여유로운 조련사.
“무슨 생각해? 또 그날 밤 생각하지, 너.”
지안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정확히 핵심을 찔렀다.
“아니거든.”
“맞는데. 얼굴에 다 쓰여 있어. ‘그날 덮쳤어야 했는데, 아쉽다’ 하고.”
“미쳤냐.”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목소리는 предательски 갈라졌다. 지안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바의 다른 손님 몇몇이 우리 쪽을 쳐다봤다. 지안은 그런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기는 듯 보였다. 그녀는 언제나 무대의 중심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정색하긴.”
지안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내 손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녀의 손톱은 피처럼 붉고 날카로웠다. 그 손길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슬쩍 손을 빼려 했지만, 지안은 내 손을 더 꽉 잡았다.
“민준아.”
다시 한번,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낮고 진지한 목소리였다.
“너는 왜 나랑 친구로 지내려고만 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우린… 친구잖아.”
“친구?”
지안이 코웃음을 쳤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어. 하물며 나랑 너 같은 사이엔 더더욱. 넌 날 여자로 보고, 또 가끔은 남자로도 보겠지. 그리고 난 널… 그냥 귀여운 숫총각으로 보고.”
“야!”
“왜, 틀린 말 했어? 넌 나를 욕망해, 이민준. 그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네 몸은 나만 보면 이렇게 정직하게 반응하는데.”
지안은 잡고 있던 내 손을 자신의 허벅지 안쪽으로 가져갔다. 얇은 실크 원피스 아래로, 스타킹의 매끄러운 감촉과 그녀의 뜨거운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녀의 허벅지는 단단하고 탄력이 넘쳤다. 내 손이 닿자, 그녀의 근육이 미세하게 수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봐. 나도 너한테 반응해.”
그녀의 눈이 짙은 안개처럼 흐려졌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깊은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손을 뿌리쳤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만해, 지안아. 사람들 보잖아.”
“보는 게 뭐 어때서. 부러워서 보겠지. 나처럼 예쁜 여자랑, 너처럼 순진하게 생긴 남자애가 아슬아슬하게 노는 걸.”
그녀의 말에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자신을 ‘예쁜 여자’라고 칭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것은 단순한 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남자들의 욕망 어린 시선과, 여자들의 질투 섞인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구축된, 견고한 자기 확신이었다.
지안은 새로운 위스키를 주문했다. 얼음이 가득 담긴 잔에 호박색 액체가 채워졌다. 그녀는 그것을 한 모금 마시고는, 전혀 다른 주제를 꺼냈다.
“요즘도 그 여자애 만나?”
그녀가 말하는 ‘그 여자애’는 내가 최근에 몇 번 만났던 같은 과 후배였다. 착하고, 귀엽고, 평범한 아이. 지안과는 정반대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어. 그냥 뭐… 가끔 밥이나 먹고.”
“재미없지?”
“…….”
“뻔하지, 뭐. 밥 먹고, 영화 보고, 카페 가고. 손 한번 잡으려면 온갖 명분을 다 만들어야 하고. 키스라도 하려면 분위기 잡느라 하루 다 보내고. 지겹지 않아, 그런 연애놀이?”
지안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내 폐부를 찔렀다. 사실이었다. 나는 그 후배와의 만남이 지루했다. 안전했지만, 어떤 설렘도, 어떤 긴장감도 없었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움직였다. 마치 잘 짜인 각본을 따르는 연극처럼.
“사람들은 그런 걸 안정감이라고 불러.”
내가 힘겹게 변명했다.
“안정감? 아니. 그건 권태야. 살아있다는 감각을 잊게 만드는 마약 같은 거지. 넌 아직 젊어, 민준아. 그런 시시한 놀이에 안주하기엔 너무 아깝다고.”
“그럼 뭘 해야 되는데?”
“나랑 놀아야지.”
지안이 윙크를 하며 말했다.
“나랑 놀면, 네가 살아있다는 걸 매 순간 느끼게 해줄 수 있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스릴, 온몸의 감각이 열리는 쾌락, 네가 상상도 못 했던 새로운 세상. 그런 것들.”
그녀의 말은 달콤한 독처럼 내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 독에 중독되고 싶다는 위험한 충동을 느꼈다. 잿빛 세상에 갇혀 있던 내게, 지안은 유일한 탈출구처럼 보였다. 그녀가 말하는 새로운 세상은 어떤 곳일까. 그곳에 발을 들이면, 나는 정말로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을까.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그녀의 세계는 너무나도 강렬해서, 한번 발을 들이면 두 번 다시는 예전의 나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고, 나는 그 주변을 맴도는 위태로운 행성이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산산조각 나 먼지가 되어버릴 운명.
“겁먹긴.”
지안이 내 표정을 읽고는 다시 장난스럽게 웃었다.
“안 잡아먹어. 아직은.”
그녀는 ‘아직은’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것은 유예된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언젠가는, 내가 모든 경계를 허물고 그녀에게 투항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예언.
나는 잔에 남은 위스키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뜨거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속을 태웠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지안 때문인지,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바의 스피커에서는 쳇 베이커의 ‘My Funny Valentine’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슬프면서도 관능적인 트럼펫 소리와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네버랜드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지안은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Is your figure less than Greek? Is your mouth a little weak? When you open it to speak, are you smart?”
그녀는 노래 가사처럼,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기묘한 발렌타인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술을 마셨다. 시시콜콜한 이야기, 서로의 과거, 그리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까지. 지안은 훌륭한 상담가이기도 했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다가도,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찌르며 내가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마주하게 했다.
“결국 넌 외로운 거야, 이민준. 그래서 시시한 여자애한테 기대보려고 하고, 나 같은 이상한 애 옆에서 맴돌고 있는 거고. 안 그래?”
“…….”
“외로움은 나쁜 게 아니야. 그걸 어떻게 채우느냐가 중요한 거지. 쓰레기로 배를 채울 수도 있고, 최고급 만찬을 즐길 수도 있어. 선택은 네 몫이야.”
그녀는 나를 쓰레기통 앞에 서 있는 배고픈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최고급 만찬을 차려놓고 나를 유혹하는 호스트였다.
바를 나설 때쯤, 나는 완전히 취해 있었다. 비틀거리는 나를 지안이 부축했다. 그녀의 몸은 가늘었지만, 나를 지탱하는 힘은 단단했다. 그녀의 어깨에 기대자, 익숙한 향수 냄새와 함께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나는 그 온기에 취해 잠시 눈을 감았다.
“정신 차려. 택시 잡아야지.”
지안이 내 뺨을 가볍게 쳤다. 나는 겨우 눈을 떴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훅 끼쳐왔다.
“오늘은 그냥 보내줄게. 생일 선물이랄까.”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걸 그녀는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물어볼 기력도 없었다. 지안은 택시를 잡아 나를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기사님, 주소는…”
그녀는 내 주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택시 문이 닫히기 직전, 지안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다음엔, 제대로 받을 거야.”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 뺨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는 얼어붙은 채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실루엣은,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뺨에는 아직도 그녀의 립스틱 자국과 입술의 감촉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경계선 위에 서 있었다. 한쪽은 지루하고 안전한 잿빛의 현실. 다른 한쪽은 위험하고 매혹적인, 지안의 색채로 가득한 미지의 세계.
나는 아직 어느 쪽으로도 발을 내딛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알 수 있었다. 언젠가 나는 반드시 그 경계를 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지안이라는 여신이 지배하는 그 위험한 네버랜드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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