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조회 : 149 추천 : 0 글자수 : 6,555 자 2025-08-12
포식자의 철학
내 생일 밤, 지안이 남기고 간 입술 자국과 의미심장한 속삭임은 며칠 동안이나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흔적이 아니었다. 내 일상이라는 평온한 수면 위에 던져진 돌멩이였고, 그 파문은 멈출 줄을 몰랐다. 나는 강의에 집중할 수 없었고, 도서관의 정적 속에서도 그녀의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같은 과 후배에게서 온 메시지에는 답장할 기력조차 나지 않았다. 내 세상의 중심은 이미 지안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결국 나는 먼저 그녀에게 연락했다. ‘술이나 한잔하자’는 지극히 평범한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나는 수십 번을 망설이고 고쳐 썼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다. 지안에게서는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답장이 돌아왔다. ‘네버랜드, 8시.’ 마치 내가 연락할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여유로운 태도였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지안은 이미 와 있었다. 그날 그녀는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어깨선이 훤히 드러나는 오프숄더 디자인으로, 그녀의 곧고 흰 목선과 쇄골을 아낌없이 과시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짙은 화장, 그리고 탐스러운 입술을 강조하는 매트한 레드 립. 그녀는 오늘 밤, 무언가를 작정하고 나온 사냥꾼의 모습이었다.
“늦었네, 이민준.”
나를 발견한 지안이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차 막혀서.”
나는 뻔한 변명을 둘러대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심장이 멋대로 뛰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볼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는, 강력한 마취제 같았다.
“오늘따라 유독 예쁘네.”
나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왔다. 지안은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좀 솔직해졌네. 보기 좋다.”
그녀는 웨이터를 불러 늘 마시던 위스키를 주문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지안이었다.
“궁금한 거 있지? 물어봐. 오늘은 내가 대답해주는 날로 할게.”
마치 내 마음을 다 읽고 있다는 듯한 말투.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그렇게 살아?”
내 질문은 다소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안은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사는데, 내가?”
“아니… 그냥. 수술도 많이 한 것 같고, 항상 비싼 옷에… 네가 쓰는 돈, 다 어디서 나는 거야? 그리고… 왜 굳이 쉬멜로 사는 건지. 트랜스젠더가 되려는 것도 아니라며.”
나는 횡설수설,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들을 두서없이 쏟아냈다. 지안은 내 말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녀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사람들은 내가 트랜스젠더가 되려는 줄 알아. 멍청하긴.”
지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내가 라이터를 켜주자, 그녀는 고맙다는 눈짓을 하고는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그 모습은 흑백 영화 속 팜므파탈처럼 고혹적이었다.
“이 가슴, 엉덩이, 얼굴… 전부 미끼야. 완벽한 미끼. 낚시를 하려면 최고의 미끼가 필요한 법이잖아?”
“낚시?”
“그래, 낚시. 인간의 욕망을 낚는 낚시.”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섬뜩할 정도로 계산적이었다.
“생각해봐, 민준아. 내가 그냥 멀끔하게 잘생긴 게이면, 내 사냥감은 게이로 한정돼. 그것도 아주 좁은 시장이지. 하지만 ‘쉬멜’인 나는? 내 여성성에 반하는 너 같은 이성애자 남자, 내 몸 전체에 호기심을 느끼는 바이섹슈얼, 그리고 여자 몸에 달린 내 자지에 환장하는 레즈비언까지. 내 사냥터는 경계가 없어. 무한대로 확장되는 블루오션이라고.”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마치 하나의 비즈니스 모델처럼 설명했다. 완벽한 시장 분석과 타겟 설정. 그녀에게 성(性)과 정체성은 생존을 위한 도구이자, 타인을 지배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특히 레즈비언들이 죽고 못 살아.”
지안은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여자한테서 충족받지 못하는 부분을 나한테서 발견하거든. 자기들이 원하는 섹시한 여자의 몸을 탐하다가, 상상도 못 했던 방식으로 절정에 오를 수 있으니. 나한테 한번 빠지면, 진짜 여자들은 시시해서 못 만나. 하지만 그건 그냥 에피타이저야. 내 취향도 아니고.”
그녀의 눈이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번뜩였다.
“내 진짜 메인 디시는, 바로 ‘멀쩡한 남자들’이야. 자기들이 포식자인 줄 알고 달려드는 순진한 양들. 자기 발로 도살장에 걸어 들어오는 어리석은 짐승들.”
그녀의 표현은 잔인했지만, 거기에는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자연의 섭리를 설명하는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처럼, 담담하고 사실적이었다. 사자가 가젤을 사냥하는 것에 선악을 따질 수 없듯이, 그녀에게 그것은 본능이자 생존 방식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가 말하는 ‘멀쩡한 남자들’ 중 하나가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모텔에 가서야 네가 남자란 걸 알게 되면… 다들 도망가지 않아? 중간에 실패한 적도 있을 거 아냐.”
내 순진한 질문에 지안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밤의 정적을 깨는 유리 파편처럼 날카롭고 서늘했다. 바의 모든 소음이 순간적으로 멈추고, 그녀의 웃음소리만이 공간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도망? 단 한 번도.”
그녀는 웃음을 그치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빛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나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냥에 실패한 적이 없어. 그들은 도망가는 게 아니라, 결국 내게 모든 걸 바치게 되지. 몸도, 마음도, 그리고 그들의 정체성까지도. 내가 전부… 따먹었으니까.”
그녀가 쓴 ‘따먹었다’는 표현은 단순한 성행위를 넘어선, 완전한 정복과 소유의 선언이었다. 한 인간의 영혼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창조주와도 같은 오만함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게 가능한데?”
내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펼쳐 보이는 세계에 대한 공포와 함께, 거부할 수 없는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라는 걸 알면서도,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
“그 남자들은 나를 여자로 보고 접근해. 어떻게든 나를 눕히고 박을 생각만 가득 차 있지. 자기가 박히게 될 거라는 건 0.1%도 상상하지 못해. 그 무지와 오만이 바로 내가 파고드는 틈이야. 가장 견고해 보이는 성벽의 가장 약한 부분이지.”
지안은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잔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모든 게임에는 전략이 필요해. 내 게임의 핵심은, 상대방이 자신이 게임의 플레이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거야. 하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내 게임판 위에 놓인 말에 불과하지.”
그녀의 철학은 치밀하고도 잔혹했다. 그녀는 인간의 욕망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조종하는 데 능숙했다. 그녀는 단순한 쉬멜이 아니었다. 인간의 심리를 쥐고 흔드는, 위험한 심리학자이자 아티스트였다.
“궁금해? 내 사냥법이?”
지안이 내게 몸을 더 가까이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내 뺨에 닿았다. 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녀의 게임에 깊숙이 발을 들인 플레이어처럼.
“첫째, 상대의 이성을 마비시켜야 해. 대부분의 남자들은 모텔에서 내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극도의 혼란과 배신감에 빠지지. ‘속았다’, ‘재수 없다’는 생각에 도망갈 궁리부터 해. 그 순간이 골든타임이야. 그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의 본능을 완벽하게 장악해야 해.”
그녀는 자신의 기술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편의 잘 짜인 각본이자, 수많은 실전 경험을 통해 완성된 필승의 매뉴얼이었다.
“나는 절대 당황하거나 변명하지 않아. 오히려 더 당당하고 부드럽게 그를 대하지. ‘놀랐어? 미안. 하지만 자기가 날 너무 원했잖아. 네 몸은 거짓말 안 하던데?’ 이런 식으로. 그럼 남자는 혼란스러워져. 분명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데, 내 태연한 태도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게 되는 거야.”
그 심리전에서 우위를 점한 뒤, 그녀는 곧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고 했다. 바로 ‘쾌락을 통한 세뇌’.
“쉬멜들이 자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빤다는 말이 있어. 그거, 사실이야.”
지안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는 어떤 수치심도, 어떤 부끄러움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기술에 대한 자부심만이 가득했다.
“우린 남자니까, 남자의 몸을 너무 잘 알거든. 어디를 어떻게 자극해야 미쳐버리는지. 입으로 빨아들이는 힘부터가 여자랑은 차원이 달라. 혀의 움직임, 압력 조절, 귀두를 공략하는 타이밍까지. 그놈이 평생 느껴보지 못한 쾌락의 신세계를 열어주는 거지. 부끄러워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성적 판타지까지,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해주니까. 그럼 어떻게 될 것 같아?”
“…….”
“저항을 잊게 돼. 수치심과 당혹감은 순수한 쾌락의 파도에 흔적도 없이 휩쓸려가지. 그의 뇌는 이제 ‘이건 잘못됐다’가 아니라, ‘더, 더 강하게’라는 신호만 보내게 되는 거야. 그렇게 정신을 쏙 빼놓고 나면, 그 남자는 이미 내 손아귀에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지.”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말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상상력을 자극하고, 몸을 반응하게 만드는 강력한 언어의 마술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절정을 맞게 하고 나면, 남자는 완전히 무장해제 상태가 돼. 그때 속삭이는 거야.”
지안은 내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마치 실제 상황처럼 나지막이 속삭였다.
“자기야. 이제 시작인데? 오늘… 아주 색다른 경험 한번 해볼래? 네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걸 느끼게 해줄게.”
그 악마의 속삭임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짜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다음은 일사천리지. 내 가방에는 항상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거든. 관장약, 최고급 윤활유, 그리고 사이즈별로 구비된 딜도까지. 완벽한 만찬을 위한 최고의 재료들이지.”
그녀는 모든 것을 철저히 계산하고 준비했다. 우연이나 즉흥은 없었다. 모든 것은 그녀의 통제하에, 그녀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될 뿐이었다.
“경험 없는 남자가 아플 거라고? 천만에. 난 절대 아프게 하지 않아. 첫 경험의 고통은 트라우마만 남길 뿐이니까. 나는 고통이 아니라, 쾌락으로 길들여야지. 미지의 쾌락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심어주는 거야. 부드럽게, 아주 천천히. 그의 몸이 스스로 문을 열 때까지.”
그녀의 철학은 일관되었다. 힘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자극하여 스스로 굴복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지안의 방식이었다. 그녀는 상대의 몸이 아니라, 정신을 지배했다.
이야기를 마친 지안은 다시 위스키 잔을 들었다.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펼쳐 보인 세계는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치밀하고, 깊고, 그리고 위험했다. 나는 마치 거대한 거미줄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는 거미를 마주한 나비가 된 기분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 이게 내 방식이야. 욕망에 솔지한 것뿐이라고. 위선적으로 아닌 척하는 너희들보다 훨씬 더 정직한 거 아니야?”
지안의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내 가슴에 박혔다. 위선자.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욕망하면서도, 사회적인 시선과 내 안의 도덕률 때문에 그 욕망을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그녀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돈은… 그렇게 버는 거야?”
나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내 물었다. 그녀의 사냥감들이 그녀에게 돈을 지불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돈? 돈은 그냥 따라오는 거야. 부산물 같은 거지.”
지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는 돈 때문에 이 짓을 하는 게 아니야. 돈은 그냥 그들이 내게 바치는 공물, 내 가치를 증명하는 트로피 같은 거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돈이 아니야.”
“그럼… 네가 진짜로 원하는 건 뭔데?”
내 질문에, 지안은 처음으로 조금 다른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오만함이나 자신감이 아니었다. 아주 희미한, 하지만 분명한 공허함의 그림자였다.
“지배하는 거.”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들의 몸과 마음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그들의 세상에 나의 흔적을 남기는 것. 그들이 나 없이는 살 수 없게 만드는 것. 그들이 나를 신처럼 숭배하게 만드는 것. 그 순간에만,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껴.”
그녀의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그녀가 좇는 것은 쾌락이나 돈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증명이었다.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 순간, 나는 화려한 갑옷 아래 감춰진 그녀의 연약한 속살을 본 것 같았다. 그녀는 포식자인 동시에,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는 길 잃은 영혼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녀를 향한 감정은 더 이상 단순한 호기심이나 성적 끌림이 아니었다. 연민, 동정, 그리고 그녀를 이해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욱 옭아매는 늪처럼.
우리는 그날 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각자의 생각에 잠겨, 그저 술잔을 비울 뿐이었다. 네버랜드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고, 나는 지안이라는 거대한 미스터리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다. 그녀의 철학을 이해하기엔, 나는 너무나 평범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결코 가질 수 없는 용기와 솔직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가 꿈꾸는 일탈 그 자체였다.
내 생일 밤, 지안이 남기고 간 입술 자국과 의미심장한 속삭임은 며칠 동안이나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흔적이 아니었다. 내 일상이라는 평온한 수면 위에 던져진 돌멩이였고, 그 파문은 멈출 줄을 몰랐다. 나는 강의에 집중할 수 없었고, 도서관의 정적 속에서도 그녀의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같은 과 후배에게서 온 메시지에는 답장할 기력조차 나지 않았다. 내 세상의 중심은 이미 지안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결국 나는 먼저 그녀에게 연락했다. ‘술이나 한잔하자’는 지극히 평범한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나는 수십 번을 망설이고 고쳐 썼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다. 지안에게서는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답장이 돌아왔다. ‘네버랜드, 8시.’ 마치 내가 연락할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여유로운 태도였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지안은 이미 와 있었다. 그날 그녀는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어깨선이 훤히 드러나는 오프숄더 디자인으로, 그녀의 곧고 흰 목선과 쇄골을 아낌없이 과시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짙은 화장, 그리고 탐스러운 입술을 강조하는 매트한 레드 립. 그녀는 오늘 밤, 무언가를 작정하고 나온 사냥꾼의 모습이었다.
“늦었네, 이민준.”
나를 발견한 지안이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차 막혀서.”
나는 뻔한 변명을 둘러대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심장이 멋대로 뛰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볼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는, 강력한 마취제 같았다.
“오늘따라 유독 예쁘네.”
나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왔다. 지안은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좀 솔직해졌네. 보기 좋다.”
그녀는 웨이터를 불러 늘 마시던 위스키를 주문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지안이었다.
“궁금한 거 있지? 물어봐. 오늘은 내가 대답해주는 날로 할게.”
마치 내 마음을 다 읽고 있다는 듯한 말투.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그렇게 살아?”
내 질문은 다소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안은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사는데, 내가?”
“아니… 그냥. 수술도 많이 한 것 같고, 항상 비싼 옷에… 네가 쓰는 돈, 다 어디서 나는 거야? 그리고… 왜 굳이 쉬멜로 사는 건지. 트랜스젠더가 되려는 것도 아니라며.”
나는 횡설수설,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들을 두서없이 쏟아냈다. 지안은 내 말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녀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사람들은 내가 트랜스젠더가 되려는 줄 알아. 멍청하긴.”
지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내가 라이터를 켜주자, 그녀는 고맙다는 눈짓을 하고는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그 모습은 흑백 영화 속 팜므파탈처럼 고혹적이었다.
“이 가슴, 엉덩이, 얼굴… 전부 미끼야. 완벽한 미끼. 낚시를 하려면 최고의 미끼가 필요한 법이잖아?”
“낚시?”
“그래, 낚시. 인간의 욕망을 낚는 낚시.”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섬뜩할 정도로 계산적이었다.
“생각해봐, 민준아. 내가 그냥 멀끔하게 잘생긴 게이면, 내 사냥감은 게이로 한정돼. 그것도 아주 좁은 시장이지. 하지만 ‘쉬멜’인 나는? 내 여성성에 반하는 너 같은 이성애자 남자, 내 몸 전체에 호기심을 느끼는 바이섹슈얼, 그리고 여자 몸에 달린 내 자지에 환장하는 레즈비언까지. 내 사냥터는 경계가 없어. 무한대로 확장되는 블루오션이라고.”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마치 하나의 비즈니스 모델처럼 설명했다. 완벽한 시장 분석과 타겟 설정. 그녀에게 성(性)과 정체성은 생존을 위한 도구이자, 타인을 지배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특히 레즈비언들이 죽고 못 살아.”
지안은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여자한테서 충족받지 못하는 부분을 나한테서 발견하거든. 자기들이 원하는 섹시한 여자의 몸을 탐하다가, 상상도 못 했던 방식으로 절정에 오를 수 있으니. 나한테 한번 빠지면, 진짜 여자들은 시시해서 못 만나. 하지만 그건 그냥 에피타이저야. 내 취향도 아니고.”
그녀의 눈이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번뜩였다.
“내 진짜 메인 디시는, 바로 ‘멀쩡한 남자들’이야. 자기들이 포식자인 줄 알고 달려드는 순진한 양들. 자기 발로 도살장에 걸어 들어오는 어리석은 짐승들.”
그녀의 표현은 잔인했지만, 거기에는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자연의 섭리를 설명하는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처럼, 담담하고 사실적이었다. 사자가 가젤을 사냥하는 것에 선악을 따질 수 없듯이, 그녀에게 그것은 본능이자 생존 방식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가 말하는 ‘멀쩡한 남자들’ 중 하나가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모텔에 가서야 네가 남자란 걸 알게 되면… 다들 도망가지 않아? 중간에 실패한 적도 있을 거 아냐.”
내 순진한 질문에 지안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밤의 정적을 깨는 유리 파편처럼 날카롭고 서늘했다. 바의 모든 소음이 순간적으로 멈추고, 그녀의 웃음소리만이 공간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도망? 단 한 번도.”
그녀는 웃음을 그치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빛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나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냥에 실패한 적이 없어. 그들은 도망가는 게 아니라, 결국 내게 모든 걸 바치게 되지. 몸도, 마음도, 그리고 그들의 정체성까지도. 내가 전부… 따먹었으니까.”
그녀가 쓴 ‘따먹었다’는 표현은 단순한 성행위를 넘어선, 완전한 정복과 소유의 선언이었다. 한 인간의 영혼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창조주와도 같은 오만함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게 가능한데?”
내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펼쳐 보이는 세계에 대한 공포와 함께, 거부할 수 없는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라는 걸 알면서도,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
“그 남자들은 나를 여자로 보고 접근해. 어떻게든 나를 눕히고 박을 생각만 가득 차 있지. 자기가 박히게 될 거라는 건 0.1%도 상상하지 못해. 그 무지와 오만이 바로 내가 파고드는 틈이야. 가장 견고해 보이는 성벽의 가장 약한 부분이지.”
지안은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잔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모든 게임에는 전략이 필요해. 내 게임의 핵심은, 상대방이 자신이 게임의 플레이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거야. 하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내 게임판 위에 놓인 말에 불과하지.”
그녀의 철학은 치밀하고도 잔혹했다. 그녀는 인간의 욕망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조종하는 데 능숙했다. 그녀는 단순한 쉬멜이 아니었다. 인간의 심리를 쥐고 흔드는, 위험한 심리학자이자 아티스트였다.
“궁금해? 내 사냥법이?”
지안이 내게 몸을 더 가까이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내 뺨에 닿았다. 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녀의 게임에 깊숙이 발을 들인 플레이어처럼.
“첫째, 상대의 이성을 마비시켜야 해. 대부분의 남자들은 모텔에서 내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극도의 혼란과 배신감에 빠지지. ‘속았다’, ‘재수 없다’는 생각에 도망갈 궁리부터 해. 그 순간이 골든타임이야. 그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의 본능을 완벽하게 장악해야 해.”
그녀는 자신의 기술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편의 잘 짜인 각본이자, 수많은 실전 경험을 통해 완성된 필승의 매뉴얼이었다.
“나는 절대 당황하거나 변명하지 않아. 오히려 더 당당하고 부드럽게 그를 대하지. ‘놀랐어? 미안. 하지만 자기가 날 너무 원했잖아. 네 몸은 거짓말 안 하던데?’ 이런 식으로. 그럼 남자는 혼란스러워져. 분명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데, 내 태연한 태도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게 되는 거야.”
그 심리전에서 우위를 점한 뒤, 그녀는 곧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고 했다. 바로 ‘쾌락을 통한 세뇌’.
“쉬멜들이 자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빤다는 말이 있어. 그거, 사실이야.”
지안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는 어떤 수치심도, 어떤 부끄러움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기술에 대한 자부심만이 가득했다.
“우린 남자니까, 남자의 몸을 너무 잘 알거든. 어디를 어떻게 자극해야 미쳐버리는지. 입으로 빨아들이는 힘부터가 여자랑은 차원이 달라. 혀의 움직임, 압력 조절, 귀두를 공략하는 타이밍까지. 그놈이 평생 느껴보지 못한 쾌락의 신세계를 열어주는 거지. 부끄러워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성적 판타지까지,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해주니까. 그럼 어떻게 될 것 같아?”
“…….”
“저항을 잊게 돼. 수치심과 당혹감은 순수한 쾌락의 파도에 흔적도 없이 휩쓸려가지. 그의 뇌는 이제 ‘이건 잘못됐다’가 아니라, ‘더, 더 강하게’라는 신호만 보내게 되는 거야. 그렇게 정신을 쏙 빼놓고 나면, 그 남자는 이미 내 손아귀에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지.”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말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상상력을 자극하고, 몸을 반응하게 만드는 강력한 언어의 마술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절정을 맞게 하고 나면, 남자는 완전히 무장해제 상태가 돼. 그때 속삭이는 거야.”
지안은 내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마치 실제 상황처럼 나지막이 속삭였다.
“자기야. 이제 시작인데? 오늘… 아주 색다른 경험 한번 해볼래? 네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걸 느끼게 해줄게.”
그 악마의 속삭임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짜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다음은 일사천리지. 내 가방에는 항상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거든. 관장약, 최고급 윤활유, 그리고 사이즈별로 구비된 딜도까지. 완벽한 만찬을 위한 최고의 재료들이지.”
그녀는 모든 것을 철저히 계산하고 준비했다. 우연이나 즉흥은 없었다. 모든 것은 그녀의 통제하에, 그녀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될 뿐이었다.
“경험 없는 남자가 아플 거라고? 천만에. 난 절대 아프게 하지 않아. 첫 경험의 고통은 트라우마만 남길 뿐이니까. 나는 고통이 아니라, 쾌락으로 길들여야지. 미지의 쾌락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심어주는 거야. 부드럽게, 아주 천천히. 그의 몸이 스스로 문을 열 때까지.”
그녀의 철학은 일관되었다. 힘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자극하여 스스로 굴복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지안의 방식이었다. 그녀는 상대의 몸이 아니라, 정신을 지배했다.
이야기를 마친 지안은 다시 위스키 잔을 들었다.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펼쳐 보인 세계는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치밀하고, 깊고, 그리고 위험했다. 나는 마치 거대한 거미줄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는 거미를 마주한 나비가 된 기분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 이게 내 방식이야. 욕망에 솔지한 것뿐이라고. 위선적으로 아닌 척하는 너희들보다 훨씬 더 정직한 거 아니야?”
지안의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내 가슴에 박혔다. 위선자.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욕망하면서도, 사회적인 시선과 내 안의 도덕률 때문에 그 욕망을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그녀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돈은… 그렇게 버는 거야?”
나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내 물었다. 그녀의 사냥감들이 그녀에게 돈을 지불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돈? 돈은 그냥 따라오는 거야. 부산물 같은 거지.”
지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는 돈 때문에 이 짓을 하는 게 아니야. 돈은 그냥 그들이 내게 바치는 공물, 내 가치를 증명하는 트로피 같은 거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돈이 아니야.”
“그럼… 네가 진짜로 원하는 건 뭔데?”
내 질문에, 지안은 처음으로 조금 다른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오만함이나 자신감이 아니었다. 아주 희미한, 하지만 분명한 공허함의 그림자였다.
“지배하는 거.”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들의 몸과 마음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그들의 세상에 나의 흔적을 남기는 것. 그들이 나 없이는 살 수 없게 만드는 것. 그들이 나를 신처럼 숭배하게 만드는 것. 그 순간에만,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껴.”
그녀의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그녀가 좇는 것은 쾌락이나 돈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증명이었다.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 순간, 나는 화려한 갑옷 아래 감춰진 그녀의 연약한 속살을 본 것 같았다. 그녀는 포식자인 동시에,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는 길 잃은 영혼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녀를 향한 감정은 더 이상 단순한 호기심이나 성적 끌림이 아니었다. 연민, 동정, 그리고 그녀를 이해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욱 옭아매는 늪처럼.
우리는 그날 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각자의 생각에 잠겨, 그저 술잔을 비울 뿐이었다. 네버랜드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고, 나는 지안이라는 거대한 미스터리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다. 그녀의 철학을 이해하기엔, 나는 너무나 평범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결코 가질 수 없는 용기와 솔직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가 꿈꾸는 일탈 그 자체였다.
작가의 말
등록된 작가의 말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