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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148 추천 : 0 글자수 : 5,219 자 2025-08-18
사냥의 시작
지안의 고백 이후, 우리의 관계는 미묘하게 변화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내게 완벽한 포식자나 통제 불가능한 여신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화려한 갑옷 아래 숨겨진 공허의 심연을 엿보았고, 그것은 나를 더욱 그녀에게 묶어두는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하고 싶었고, 동시에 그녀에게서 나 자신을 지키고 싶었다. 그 모순된 감정의 줄다리기 속에서,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녀의 궤도 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날 밤, 지안이 내게 보낸 메시지는 단 한 줄이었다.
[오늘, 내 사냥을 직접 보여줄게. 구경하고 싶으면 네버랜드로 와.]
그것은 초대이자, 시험이었다. 내가 그녀의 세계를 감당할 수 있는지, 그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의식의 증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는 듯했다. 나는 망설였다. 머리로는 거절해야 한다고 외쳤지만, 심장은 이미 네버랜드로 향하고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고, 나는 그 안에서 튀어나올 마지막 희망, 혹은 절망을 확인해야만 했다.
네버랜드에 도착했을 때, 지안은 평소와 다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바 테이블의 가장 중앙,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곳이었다. 그날 그녀는 마치 무대에 오르는 디바처럼 차려입고 있었다. 등 부분이 깊게 파인 벨벳 드레스는 그녀의 매끄러운 등골을 고스란히 드러냈고, 걸을 때마다 드러나는 다리의 슬릿은 위험할 정도로 깊었다. 그녀는 이미 사냥을 시작한 암표범처럼, 주변을 예리하게 살피며 완벽한 먹잇감을 물색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들키지 않도록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관객이 되어야 했다. 이 연극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
얼마 지나지 않아, 지안의 레이더에 한 남자가 포착되었다. 바 건너편에서 친구들과 함께 시끄럽게 웃고 떠들고 있는 무리.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한 남자가 있었다.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누가 봐도 ‘잘나가는 남자’의 표본이었다. 손목에는 번쩍이는 명품 시계가 채워져 있었고, 몸에 딱 맞는 셔츠는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상체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자신의 외모와 능력에 대한 흔들림 없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그는 무리의 리더였고, 주변 여자들의 흘깃거리는 시선을 당연하다는 듯 즐기고 있었다.
“빙고.”
내 자리에서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지안이 나지막이 속삭이는 것을 입 모양으로 읽을 수 있었다. 완벽한 먹잇감이었다. 자의식이 강하고, 자신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는 부류의 남자. 그런 남자일수록 무너뜨렸을 때의 쾌감은 더 큰 법이다.
지안은 잔을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고도로 계산된 연기였다. 그녀는 우아한 걸음으로 바를 가로질러, 일부러 그 남자의 옆을 지나갔다. 그리고 마치 발을 헛디딘 것처럼 살짝 비틀거리며, 들고 있던 잔의 술을 그의 셔츠에 약간 쏟았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정말 칠칠치 못해서…”
지안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급히 손수건을 꺼내 그의 젖은 셔츠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남자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지안의 얼굴과 몸을 훑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처음에는 짜증이 섞여 있던 그의 표정이, 지안의 완벽한 미모와 몸매를 확인하는 순간 놀라움과 흥미로 바뀌었다. 셔츠를 닦아주기 위해 숙인 지안의 가슴골이 그의 시야에 아찔하게 들어왔을 것이다. 전형적인 수컷의 반응. 게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 괜찮습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남자는 금세 인자한 신사로 돌변했다. 그의 친구들은 휘파람을 불며 그를 짓궂게 놀려댔다.
“야, 박재혁! 계 탔네, 계 탔어!”
박재혁. 사냥감의 이름이 확인되었다. 재혁은 친구들을 향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시 지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제가 죄송해서 그런데, 이 셔츠는 세탁해서 돌려드리거나, 아니면 제가 새로 하나 사드릴게요.”
“아닙니다. 정말 괜찮아요. 대신… 괜찮으시다면 저랑 술 한잔 같이 해주시는 걸로 퉁치면 어떨까요?”
재혁의 작업은 노골적이고 거침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매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눈앞의 아름다운 여자가 당연히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안은 잠시 망설이는 척,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진한 연기에 재혁의 입꼬리는 더욱 의기양양하게 올라갔다. 그는 승리를 예감했다. 그는 지안을 자신의 테이블로 이끌었고, 친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그는 자신이 사냥에 성공한 줄 알겠지만, 실은 거대한 거미줄의 중심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나비일 뿐이라는 것을.
술 몇 잔이 오가는 동안, 지안은 완벽하게 ‘쉬운 여자’를 연기했다. 재혁의 저급한 농담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려주고, 그의 허풍 섞인 자랑에는 존경과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대기도 하고, 술잔을 건네받으며 손가락을 스치는 등, 계산된 스킨십으로 그의 애를 태웠다. 재혁은 완전히 넘어왔다. 그는 이미 지안을 자신의 전리품으로 여기고 있었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재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친구들의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인 시선을 한껏 즐기며, 당당하게 지안의 허리를 감싸 안고 바 출입구로 향했다.
“먼저 간다! 연락하지 마라!”
재혁의 목소리에는 승리자의 포효와도 같은 쾌감이 감돌았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잔에 남은 위스키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씁쓸하고 독한 액체가 목구멍을 태우고 내려갔다.
그때, 내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지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호텔 이름과 방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
[옆방 잡아놨어. 굿 나잇.]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내가 이 의식의 마지막까지 함께하기를 원했다. 나는 도망칠 수 없었다. 이미 이 연극의 유일한 관객으로 캐스팅된 이상, 막이 내릴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호텔에 도착해, 지안이 알려준 방으로 들어갔다. 깔끔하게 정돈된 평범한 객실이었다. 나는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차가운 벽에 귀를 가져다 댔다. 옆방에서는 희미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재혁의 웃음소리와 지안의 교태 섞인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분위기는 좋아 보였다. 아마도 샴페인이라도 마시고 있겠지.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10분, 20분… 시간이 흐를수록 내 심장은 점점 더 세차게 뛰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예상했던 순간이 왔다.
옆방에서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재혁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날카롭고 혼란스러운 톤이었다.
“자… 잠깐만. 이게 뭐야? 너… 너… 남자야?”
그 목소리에는 극도의 혼란과 혐오, 그리고 배신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아마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지안의 나신을 보고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자신이 상상했던 완벽한 여자의 몸이 아닌, 기만적인 현실을 마주했을 때의 그 절망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지안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마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차갑고 아름다운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고 있겠지.
“쉬이… 괜찮아, 재혁 씨.”
예상대로, 지안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하고 차분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상대의 혼란을 잠재우는 최면 같은 힘이 있었다.
“놀랐어? 미안. 하지만 재혁 씨가 날 너무 원했잖아. 바에서부터 나를 보는 눈빛이 얼마나 뜨거웠는데. 안 그래?”
그녀는 절대 변명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원인을 상대의 ‘욕망’으로 돌렸다. ‘네가 원했기 때문에 이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라는 교묘한 프레임. 재혁은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건 사기잖아! 씨발, 내가 지금 남자랑…!”
“사기? 난 한 번도 내가 여자라고 말한 적 없는데? 재혁 씨가 날 보고 여자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그리고… 남자면 어때? 우리가 하려는 건 똑같은 거 아니야? 서로 기분 좋아지려는 거.”
지안의 논리는 대담하고 이기적이었지만,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녀는 재혁의 분노와 당혹감을 ‘성별’이라는 편견의 문제로 치환시켜 버렸다. 재혁의 저항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는 이 기묘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듯했다.
그때, 벽 너머로 질척한 입술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안의 필살기가 시작된 것이다. 거부하려던 남자의 작은 신음, 그리고 이내 그것을 집어삼키는 능숙하고도 탐욕스러운 소리.
“하아… 잠깐, 읍…! 하지 마… 흐읍…!”
재혁의 저항은 점점 형식적인 몸부림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머리로는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몸은 이미 지안이 주는 미지의 쾌락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젠가 지안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본능을 장악해야 해.’
나는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옆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상상되었다. 혼란과 수치심에 빠진 재혁을 부드럽게 침대에 눕히고, 그의 저항하는 손을 한 손으로 제압한 채,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몸을 애무하는 지안의 모습. 그리고 그의 것을 입에 담고,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쾌락을 선사하는 그녀의 모습.
벽 너머의 소리는 점점 격렬해졌다. 재혁의 거친 숨소리와 저항의 신음은 어느새 쾌락에 찬 교성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의 이성은 완전히 마비되었고, 수치심과 당혹감은 지안이 이끄는 순수한 쾌락의 파도에 흔적도 없이 휩쓸려가고 있었다. 그는 지금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강력한 구강성교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재혁의 길고 낮은 신음과 함께, 모든 소리가 잠시 멈췄다.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옆방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재혁의 거친 숨소리만이 그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하아… 하아… 미쳤다, 진짜… 이게… 뭐야…”
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풀려 있었다. 경계심과 분노는 사라지고, 오직 경험해보지 못한 쾌락에 대한 경이로움만이 남아 있었다. 이제 지안은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이다. 가장 위험하고, 가장 결정적인 단계.
“자기야.”
지안의 목소리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하게 울렸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 시작인데? 어때, 기분 좋았어?”
“…모르겠어. 씨발,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아.”
“그게 정상이야. 이제부터 더 좋아질 거야. 오늘… 아주 색다른 경험 한번 해볼래? 네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걸 느끼게 해줄게. 네 몸의 모든 문을 열어줄게.”
나는 옆방에서 벌어질 다음 장면을 기다렸다. 그것은 잔인한 호기심이었다. 한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지를 목격하고 싶은, 관음증적인 욕망. 나는 이미 이 연극의 단순한 관객이 아니었다. 나 역시 지안이 만들어낸 이 위험한 세계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사냥은, 어쩌면 나를 길들이기 위한 거대한 연극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마저 들었다.
지안의 고백 이후, 우리의 관계는 미묘하게 변화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내게 완벽한 포식자나 통제 불가능한 여신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화려한 갑옷 아래 숨겨진 공허의 심연을 엿보았고, 그것은 나를 더욱 그녀에게 묶어두는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하고 싶었고, 동시에 그녀에게서 나 자신을 지키고 싶었다. 그 모순된 감정의 줄다리기 속에서,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녀의 궤도 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날 밤, 지안이 내게 보낸 메시지는 단 한 줄이었다.
[오늘, 내 사냥을 직접 보여줄게. 구경하고 싶으면 네버랜드로 와.]
그것은 초대이자, 시험이었다. 내가 그녀의 세계를 감당할 수 있는지, 그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의식의 증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는 듯했다. 나는 망설였다. 머리로는 거절해야 한다고 외쳤지만, 심장은 이미 네버랜드로 향하고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고, 나는 그 안에서 튀어나올 마지막 희망, 혹은 절망을 확인해야만 했다.
네버랜드에 도착했을 때, 지안은 평소와 다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바 테이블의 가장 중앙,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곳이었다. 그날 그녀는 마치 무대에 오르는 디바처럼 차려입고 있었다. 등 부분이 깊게 파인 벨벳 드레스는 그녀의 매끄러운 등골을 고스란히 드러냈고, 걸을 때마다 드러나는 다리의 슬릿은 위험할 정도로 깊었다. 그녀는 이미 사냥을 시작한 암표범처럼, 주변을 예리하게 살피며 완벽한 먹잇감을 물색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들키지 않도록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관객이 되어야 했다. 이 연극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
얼마 지나지 않아, 지안의 레이더에 한 남자가 포착되었다. 바 건너편에서 친구들과 함께 시끄럽게 웃고 떠들고 있는 무리.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한 남자가 있었다.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누가 봐도 ‘잘나가는 남자’의 표본이었다. 손목에는 번쩍이는 명품 시계가 채워져 있었고, 몸에 딱 맞는 셔츠는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상체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자신의 외모와 능력에 대한 흔들림 없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그는 무리의 리더였고, 주변 여자들의 흘깃거리는 시선을 당연하다는 듯 즐기고 있었다.
“빙고.”
내 자리에서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지안이 나지막이 속삭이는 것을 입 모양으로 읽을 수 있었다. 완벽한 먹잇감이었다. 자의식이 강하고, 자신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는 부류의 남자. 그런 남자일수록 무너뜨렸을 때의 쾌감은 더 큰 법이다.
지안은 잔을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고도로 계산된 연기였다. 그녀는 우아한 걸음으로 바를 가로질러, 일부러 그 남자의 옆을 지나갔다. 그리고 마치 발을 헛디딘 것처럼 살짝 비틀거리며, 들고 있던 잔의 술을 그의 셔츠에 약간 쏟았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정말 칠칠치 못해서…”
지안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급히 손수건을 꺼내 그의 젖은 셔츠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남자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지안의 얼굴과 몸을 훑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처음에는 짜증이 섞여 있던 그의 표정이, 지안의 완벽한 미모와 몸매를 확인하는 순간 놀라움과 흥미로 바뀌었다. 셔츠를 닦아주기 위해 숙인 지안의 가슴골이 그의 시야에 아찔하게 들어왔을 것이다. 전형적인 수컷의 반응. 게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 괜찮습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남자는 금세 인자한 신사로 돌변했다. 그의 친구들은 휘파람을 불며 그를 짓궂게 놀려댔다.
“야, 박재혁! 계 탔네, 계 탔어!”
박재혁. 사냥감의 이름이 확인되었다. 재혁은 친구들을 향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시 지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제가 죄송해서 그런데, 이 셔츠는 세탁해서 돌려드리거나, 아니면 제가 새로 하나 사드릴게요.”
“아닙니다. 정말 괜찮아요. 대신… 괜찮으시다면 저랑 술 한잔 같이 해주시는 걸로 퉁치면 어떨까요?”
재혁의 작업은 노골적이고 거침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매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눈앞의 아름다운 여자가 당연히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안은 잠시 망설이는 척,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진한 연기에 재혁의 입꼬리는 더욱 의기양양하게 올라갔다. 그는 승리를 예감했다. 그는 지안을 자신의 테이블로 이끌었고, 친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그는 자신이 사냥에 성공한 줄 알겠지만, 실은 거대한 거미줄의 중심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나비일 뿐이라는 것을.
술 몇 잔이 오가는 동안, 지안은 완벽하게 ‘쉬운 여자’를 연기했다. 재혁의 저급한 농담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려주고, 그의 허풍 섞인 자랑에는 존경과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대기도 하고, 술잔을 건네받으며 손가락을 스치는 등, 계산된 스킨십으로 그의 애를 태웠다. 재혁은 완전히 넘어왔다. 그는 이미 지안을 자신의 전리품으로 여기고 있었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재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친구들의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인 시선을 한껏 즐기며, 당당하게 지안의 허리를 감싸 안고 바 출입구로 향했다.
“먼저 간다! 연락하지 마라!”
재혁의 목소리에는 승리자의 포효와도 같은 쾌감이 감돌았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잔에 남은 위스키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씁쓸하고 독한 액체가 목구멍을 태우고 내려갔다.
그때, 내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지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호텔 이름과 방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
[옆방 잡아놨어. 굿 나잇.]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내가 이 의식의 마지막까지 함께하기를 원했다. 나는 도망칠 수 없었다. 이미 이 연극의 유일한 관객으로 캐스팅된 이상, 막이 내릴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호텔에 도착해, 지안이 알려준 방으로 들어갔다. 깔끔하게 정돈된 평범한 객실이었다. 나는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차가운 벽에 귀를 가져다 댔다. 옆방에서는 희미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재혁의 웃음소리와 지안의 교태 섞인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분위기는 좋아 보였다. 아마도 샴페인이라도 마시고 있겠지.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10분, 20분… 시간이 흐를수록 내 심장은 점점 더 세차게 뛰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예상했던 순간이 왔다.
옆방에서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재혁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날카롭고 혼란스러운 톤이었다.
“자… 잠깐만. 이게 뭐야? 너… 너… 남자야?”
그 목소리에는 극도의 혼란과 혐오, 그리고 배신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아마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지안의 나신을 보고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자신이 상상했던 완벽한 여자의 몸이 아닌, 기만적인 현실을 마주했을 때의 그 절망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지안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마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차갑고 아름다운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고 있겠지.
“쉬이… 괜찮아, 재혁 씨.”
예상대로, 지안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하고 차분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상대의 혼란을 잠재우는 최면 같은 힘이 있었다.
“놀랐어? 미안. 하지만 재혁 씨가 날 너무 원했잖아. 바에서부터 나를 보는 눈빛이 얼마나 뜨거웠는데. 안 그래?”
그녀는 절대 변명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원인을 상대의 ‘욕망’으로 돌렸다. ‘네가 원했기 때문에 이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라는 교묘한 프레임. 재혁은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건 사기잖아! 씨발, 내가 지금 남자랑…!”
“사기? 난 한 번도 내가 여자라고 말한 적 없는데? 재혁 씨가 날 보고 여자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그리고… 남자면 어때? 우리가 하려는 건 똑같은 거 아니야? 서로 기분 좋아지려는 거.”
지안의 논리는 대담하고 이기적이었지만,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녀는 재혁의 분노와 당혹감을 ‘성별’이라는 편견의 문제로 치환시켜 버렸다. 재혁의 저항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는 이 기묘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듯했다.
그때, 벽 너머로 질척한 입술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안의 필살기가 시작된 것이다. 거부하려던 남자의 작은 신음, 그리고 이내 그것을 집어삼키는 능숙하고도 탐욕스러운 소리.
“하아… 잠깐, 읍…! 하지 마… 흐읍…!”
재혁의 저항은 점점 형식적인 몸부림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머리로는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몸은 이미 지안이 주는 미지의 쾌락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젠가 지안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본능을 장악해야 해.’
나는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옆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상상되었다. 혼란과 수치심에 빠진 재혁을 부드럽게 침대에 눕히고, 그의 저항하는 손을 한 손으로 제압한 채,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몸을 애무하는 지안의 모습. 그리고 그의 것을 입에 담고,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쾌락을 선사하는 그녀의 모습.
벽 너머의 소리는 점점 격렬해졌다. 재혁의 거친 숨소리와 저항의 신음은 어느새 쾌락에 찬 교성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의 이성은 완전히 마비되었고, 수치심과 당혹감은 지안이 이끄는 순수한 쾌락의 파도에 흔적도 없이 휩쓸려가고 있었다. 그는 지금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강력한 구강성교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재혁의 길고 낮은 신음과 함께, 모든 소리가 잠시 멈췄다.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옆방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재혁의 거친 숨소리만이 그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하아… 하아… 미쳤다, 진짜… 이게… 뭐야…”
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풀려 있었다. 경계심과 분노는 사라지고, 오직 경험해보지 못한 쾌락에 대한 경이로움만이 남아 있었다. 이제 지안은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이다. 가장 위험하고, 가장 결정적인 단계.
“자기야.”
지안의 목소리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하게 울렸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 시작인데? 어때, 기분 좋았어?”
“…모르겠어. 씨발,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아.”
“그게 정상이야. 이제부터 더 좋아질 거야. 오늘… 아주 색다른 경험 한번 해볼래? 네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걸 느끼게 해줄게. 네 몸의 모든 문을 열어줄게.”
나는 옆방에서 벌어질 다음 장면을 기다렸다. 그것은 잔인한 호기심이었다. 한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지를 목격하고 싶은, 관음증적인 욕망. 나는 이미 이 연극의 단순한 관객이 아니었다. 나 역시 지안이 만들어낸 이 위험한 세계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사냥은, 어쩌면 나를 길들이기 위한 거대한 연극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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