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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124 추천 : 0 글자수 : 4,389 자 2025-08-19
혼돈
옆방의 정적은 폭풍전야처럼 무겁고 밀도 높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재혁의 거친 숨소리와 이따금씩 들리는 지안의 나지막한 속삭임만이 그 침묵을 간간이 깨뜨렸다. 나는 벽에 기댄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내 온몸의 신경이 벽을 뚫고 옆방의 공기와 연결된 것처럼, 그곳의 모든 감각이 나에게로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자기야, 힘 빼. 나 믿지?”
지안의 목소리는 숙련된 의사가 겁에 질린 환자를 안심시키는 것처럼 차분하고 다정했다. 하지만 그 다정함 뒤에는 상대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서늘한 의지가 숨어 있었다.
잠시 후, 희미한 지퍼 소리와 함께 무언가를 꺼내는 듯한 부스럭거림이 들렸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지안의 ‘사냥 도구’들이 담긴 작은 가방. 그녀가 완벽한 만찬을 위해 준비한 최고의 재료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시간이었다.
‘경험 없는 남자가 아플 거라고? 천만에. 난 절대 아프게 하지 않아. 첫 경험의 고통은 트라우마만 남길 뿐이니까. 나는 고통이 아니라, 쾌락으로 길들여야지.’
언젠가 그녀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파괴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창조주였다. 기존의 것을 부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존재를 빚어내는 조물주. 그리고 지금, 박재혁이라는 한 남자는 그녀의 작업대 위에 올려진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다.
“이게… 뭐야?”
재혁의 목소리에는 이제 경계심과 함께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 묻어났다. 지안은 아마도 그에게 매끄럽고 아름다운 디자인의 딜도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혐오스러운 성인용품이 아닌, 마치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이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오브제.
“선물이야, 자기를 위한. 긴장 풀고, 그냥 느껴봐.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지안의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 끈적한 액체가 짜내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윤활유일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아주 작고 낮은 기계음이 윙-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전동 딜도였다. 그 소리는 내 귓속으로 파고들어와 온몸의 털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옆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더 이상 단순한 성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한 인간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신성하고도 잔혹한 의식이었다.
“흐읏…! 자, 잠깐, 뭐 하는 거야…! 거기… 거기 안 돼… 아흑!”
재혁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그것은 본능적인 저항이었다. 남성성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하지만 그 저항은 지안의 능숙한 손길 앞에서 힘을 잃어갔다. 그녀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의 허벅지 안쪽을, 그리고 점점 더 은밀한 곳으로, 마치 춤을 추듯 부드럽게 딜도를 움직였을 것이다. 그의 몸이 쾌락에 먼저 반응하고, 그의 정신이 그 쾌락을 뒤따라오게 만드는 고도의 기술.
“싫어? 정말? 근데 왜 몸은 이렇게 뜨거워? 자긴 거짓말을 못 하네.”
지안의 속삭임은 뱀의 혀처럼 그의 이성을 파고들었다. 재혁의 신음 소리는 점점 더 길어지고, 톤은 높아졌다. 고통과 저항의 소리가 아닌, 생경한 쾌감에 대한 놀라움과 탐닉의 소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를 배신하는 혼돈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아… 아… 이상해… 느낌이… 흐으윽… 지안아… 제발…”
그는 이제 지안의 이름을 부르며 애원하고 있었다. 제발 멈춰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제발 더 해달라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모호하고 절박한 애원. 하지만 지안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재혁의 몸이 스스로 문을 열고, 그 미지의 쾌락을 갈망하게 될 때까지 집요하게 그를 몰아붙였다.
나는 벽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지만, 모든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선명했다. 침대에 무력하게 누워 있는 재혁의 모습. 땀에 젖은 그의 몸 위에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몸을 탐색하는 지안의 모습. 그녀의 손에 들린 딜도가 그의 몸 위를 미끄러지며, 그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신경들을 일깨우는 모습. 그것은 에로틱하면서도 동시에 숭고한, 기이한 광경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재혁의 신음 소리가 절정에 달했다가, 길게 이어지는 탄식과 함께 잦아들었다. 두 번째 관문이 열린 것이다. 그의 몸은 이제 지안의 어떤 행위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 갈망하고 있었다.
“어때? 기분 좋지? 네 몸은 솔직하네.”
지안의 목소리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즐기는 예술가처럼 보였다.
“모르겠어…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 씨발, 이게 말이 돼?”
재혁의 목소리는 완전히 힘을 잃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반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십 년간 지켜온 남성이라는 견고한 성벽이, 불과 한두 시간 만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말이 되고 안 되고가 뭐가 중요해. 지금 네가 느끼는 게 중요한 거지. 안 그래?”
지안은 그의 철학적인 고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지극히 현실적인 쾌락의 문제로 그를 이끌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자기. 지금까지는 에피타이저였고.”
그 말과 함께, 옆방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 두 사람의 몸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질척한 마찰음. 지안이 마침내 자신의 ‘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
재혁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비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도, 놀라움도 아닌, 깊은 탄식에 가까운 소리였다.
“아프지 않아… 이게… 어떻게…?”
그의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경이로움이 담겨 있었다. 지안의 완벽한 준비 덕분에, 그는 첫 경험의 고통 대신 부드럽고 이질적인 충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저항선이었던 ‘고통’이라는 방어기제마저 무너진 순간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기분 좋게 해준다고.”
지안의 목소리는 승리자의 여유로 가득했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혁의 몸이 새로운 감각에 적응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벽 너머로 들려오는 규칙적인 침대의 삐걱거림은 마치 내 심장 박동 소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어 침대에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은 나의 상식을, 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었다. 나는 그 파괴의 현장을 엿보는 공범이었다. 쾌락과 수치심, 호기심과 죄책감이 뒤섞여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나는 재혁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느끼고 있을 미지의 쾌락을 질투하고 있었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위험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만약 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재혁이 아니라 나였다면. 나는 저항할 수 있었을까? 아니, 저항했을까? 지안의 능숙하고도 자비 없는 유혹 앞에서, 나 역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어쩌면 재혁보다 더 빨리, 더 깊이 그녀의 세계에 함락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들자, 아랫배가 다시 뜨거워졌다. 나는 나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나는 안전한 벽 뒤에 숨어서, 다른 사람의 파멸을 훔쳐보며 대리 만족을 느끼는 비겁한 관음증 환자에 불과했다.
옆방의 리듬은 점점 빨라지고, 격렬해졌다. 재혁의 신음은 이제 어떤 망설임도, 어떤 수치심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것은 순수한 쾌락의 발산이었다.
“아…! 하아… 좋아… 너무 좋아… 지안아… 아, 아!”
그는 이제 완벽하게 지안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느끼는 쾌락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지안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을 자양분 삼아, 더욱더 그를 몰아붙였다.
“더… 더 세게…! 날 망가뜨려 줘…!”
재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이제 단순한 쾌락을 넘어, 굴복과 피학의 쾌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자신감 넘치던 알파 메일 박재혁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지안의 지배 아래서 쾌락을 갈구하는 암컷만이 남아 있었다. 지안의 창조 작업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소리는 내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이 혼돈의 방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문을 박차고 나가, 이 기만적인 호텔을, 지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 도시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자석처럼 이 방에, 이 벽에 이끌리고 있었다. 이 잔혹한 연극의 결말을, 한 영혼이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태하는 그 경이로운 순간을 내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것이 내가 이 연극의 관객으로서 짊어져야 할 숙명인 것처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옆방의 격렬했던 폭풍이 잦아들고, 다시 한번 깊은 정적이 찾아왔을 때, 나는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재혁을 향한 연민의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나 자신을 향한 혐오의 눈물이었을까. 혹은, 내가 결코 가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동경의 눈물이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늘 밤을 기점으로, 나의 세계 역시 이전과는 결코 같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혼돈의 방문객이었고, 그 혼돈은 이제 내 안에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옆방의 정적은 폭풍전야처럼 무겁고 밀도 높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재혁의 거친 숨소리와 이따금씩 들리는 지안의 나지막한 속삭임만이 그 침묵을 간간이 깨뜨렸다. 나는 벽에 기댄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내 온몸의 신경이 벽을 뚫고 옆방의 공기와 연결된 것처럼, 그곳의 모든 감각이 나에게로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자기야, 힘 빼. 나 믿지?”
지안의 목소리는 숙련된 의사가 겁에 질린 환자를 안심시키는 것처럼 차분하고 다정했다. 하지만 그 다정함 뒤에는 상대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서늘한 의지가 숨어 있었다.
잠시 후, 희미한 지퍼 소리와 함께 무언가를 꺼내는 듯한 부스럭거림이 들렸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지안의 ‘사냥 도구’들이 담긴 작은 가방. 그녀가 완벽한 만찬을 위해 준비한 최고의 재료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시간이었다.
‘경험 없는 남자가 아플 거라고? 천만에. 난 절대 아프게 하지 않아. 첫 경험의 고통은 트라우마만 남길 뿐이니까. 나는 고통이 아니라, 쾌락으로 길들여야지.’
언젠가 그녀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파괴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창조주였다. 기존의 것을 부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존재를 빚어내는 조물주. 그리고 지금, 박재혁이라는 한 남자는 그녀의 작업대 위에 올려진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다.
“이게… 뭐야?”
재혁의 목소리에는 이제 경계심과 함께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 묻어났다. 지안은 아마도 그에게 매끄럽고 아름다운 디자인의 딜도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혐오스러운 성인용품이 아닌, 마치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이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오브제.
“선물이야, 자기를 위한. 긴장 풀고, 그냥 느껴봐.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지안의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 끈적한 액체가 짜내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윤활유일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아주 작고 낮은 기계음이 윙-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전동 딜도였다. 그 소리는 내 귓속으로 파고들어와 온몸의 털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옆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더 이상 단순한 성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한 인간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신성하고도 잔혹한 의식이었다.
“흐읏…! 자, 잠깐, 뭐 하는 거야…! 거기… 거기 안 돼… 아흑!”
재혁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그것은 본능적인 저항이었다. 남성성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하지만 그 저항은 지안의 능숙한 손길 앞에서 힘을 잃어갔다. 그녀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의 허벅지 안쪽을, 그리고 점점 더 은밀한 곳으로, 마치 춤을 추듯 부드럽게 딜도를 움직였을 것이다. 그의 몸이 쾌락에 먼저 반응하고, 그의 정신이 그 쾌락을 뒤따라오게 만드는 고도의 기술.
“싫어? 정말? 근데 왜 몸은 이렇게 뜨거워? 자긴 거짓말을 못 하네.”
지안의 속삭임은 뱀의 혀처럼 그의 이성을 파고들었다. 재혁의 신음 소리는 점점 더 길어지고, 톤은 높아졌다. 고통과 저항의 소리가 아닌, 생경한 쾌감에 대한 놀라움과 탐닉의 소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를 배신하는 혼돈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아… 아… 이상해… 느낌이… 흐으윽… 지안아… 제발…”
그는 이제 지안의 이름을 부르며 애원하고 있었다. 제발 멈춰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제발 더 해달라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모호하고 절박한 애원. 하지만 지안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재혁의 몸이 스스로 문을 열고, 그 미지의 쾌락을 갈망하게 될 때까지 집요하게 그를 몰아붙였다.
나는 벽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지만, 모든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선명했다. 침대에 무력하게 누워 있는 재혁의 모습. 땀에 젖은 그의 몸 위에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몸을 탐색하는 지안의 모습. 그녀의 손에 들린 딜도가 그의 몸 위를 미끄러지며, 그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신경들을 일깨우는 모습. 그것은 에로틱하면서도 동시에 숭고한, 기이한 광경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재혁의 신음 소리가 절정에 달했다가, 길게 이어지는 탄식과 함께 잦아들었다. 두 번째 관문이 열린 것이다. 그의 몸은 이제 지안의 어떤 행위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 갈망하고 있었다.
“어때? 기분 좋지? 네 몸은 솔직하네.”
지안의 목소리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즐기는 예술가처럼 보였다.
“모르겠어…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 씨발, 이게 말이 돼?”
재혁의 목소리는 완전히 힘을 잃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반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십 년간 지켜온 남성이라는 견고한 성벽이, 불과 한두 시간 만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말이 되고 안 되고가 뭐가 중요해. 지금 네가 느끼는 게 중요한 거지. 안 그래?”
지안은 그의 철학적인 고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지극히 현실적인 쾌락의 문제로 그를 이끌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자기. 지금까지는 에피타이저였고.”
그 말과 함께, 옆방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 두 사람의 몸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질척한 마찰음. 지안이 마침내 자신의 ‘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
재혁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비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도, 놀라움도 아닌, 깊은 탄식에 가까운 소리였다.
“아프지 않아… 이게… 어떻게…?”
그의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경이로움이 담겨 있었다. 지안의 완벽한 준비 덕분에, 그는 첫 경험의 고통 대신 부드럽고 이질적인 충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저항선이었던 ‘고통’이라는 방어기제마저 무너진 순간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기분 좋게 해준다고.”
지안의 목소리는 승리자의 여유로 가득했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혁의 몸이 새로운 감각에 적응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벽 너머로 들려오는 규칙적인 침대의 삐걱거림은 마치 내 심장 박동 소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어 침대에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은 나의 상식을, 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었다. 나는 그 파괴의 현장을 엿보는 공범이었다. 쾌락과 수치심, 호기심과 죄책감이 뒤섞여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나는 재혁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느끼고 있을 미지의 쾌락을 질투하고 있었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위험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만약 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재혁이 아니라 나였다면. 나는 저항할 수 있었을까? 아니, 저항했을까? 지안의 능숙하고도 자비 없는 유혹 앞에서, 나 역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어쩌면 재혁보다 더 빨리, 더 깊이 그녀의 세계에 함락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들자, 아랫배가 다시 뜨거워졌다. 나는 나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나는 안전한 벽 뒤에 숨어서, 다른 사람의 파멸을 훔쳐보며 대리 만족을 느끼는 비겁한 관음증 환자에 불과했다.
옆방의 리듬은 점점 빨라지고, 격렬해졌다. 재혁의 신음은 이제 어떤 망설임도, 어떤 수치심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것은 순수한 쾌락의 발산이었다.
“아…! 하아… 좋아… 너무 좋아… 지안아… 아, 아!”
그는 이제 완벽하게 지안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느끼는 쾌락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지안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을 자양분 삼아, 더욱더 그를 몰아붙였다.
“더… 더 세게…! 날 망가뜨려 줘…!”
재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이제 단순한 쾌락을 넘어, 굴복과 피학의 쾌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자신감 넘치던 알파 메일 박재혁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지안의 지배 아래서 쾌락을 갈구하는 암컷만이 남아 있었다. 지안의 창조 작업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소리는 내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이 혼돈의 방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문을 박차고 나가, 이 기만적인 호텔을, 지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 도시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자석처럼 이 방에, 이 벽에 이끌리고 있었다. 이 잔혹한 연극의 결말을, 한 영혼이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태하는 그 경이로운 순간을 내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것이 내가 이 연극의 관객으로서 짊어져야 할 숙명인 것처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옆방의 격렬했던 폭풍이 잦아들고, 다시 한번 깊은 정적이 찾아왔을 때, 나는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재혁을 향한 연민의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나 자신을 향한 혐오의 눈물이었을까. 혹은, 내가 결코 가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동경의 눈물이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늘 밤을 기점으로, 나의 세계 역시 이전과는 결코 같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혼돈의 방문객이었고, 그 혼돈은 이제 내 안에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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