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조회 : 47 추천 : 0 글자수 : 4,018 자 2025-08-25
쾌락의 세례
옆방의 정적은 시체의 그것처럼 무거웠다. 폭풍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재혁의 가쁘고 불규칙한 숨소리만이 남아, 텅 빈 공간을 유령처럼 떠돌았다. 나는 귀를 막았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한 편의 잔혹극이 막을 내렸고, 이제 관객은 퇴장해야 할 시간이라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지안의 연극에서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을.
“괜찮아?”
지안의 목소리는 방금 전까지 한 남자의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든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힘든 운동을 마친 파트너의 안부를 묻는 트레이너처럼, 일상적이고 담백했다.
“…내가… 뭘 한 거지…?”
재혁의 목소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일을, 그리고 그 일에 탐닉했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이미 새로운 주인의 낙인이 찍힌 노예처럼 쾌락의 기억을 선명하게 품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일을 한 거지, 자기야.”
지안이 그의 헝클어진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길은 자비로운 여신의 그것과도 같았고, 동시에 희생양을 어루만지는 사제의 손길처럼 섬뜩했다.
“네 몸이 원하는 걸 들어준 것뿐이야. 억누르고 있던 진짜 너를 해방시켜 준 거지.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오히려 기뻐해야지. 이제야 진짜 너를 만났으니까.”
그녀의 말은 위험한 복음이었다.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재혁에게, 그녀는 ‘해방’과 ‘진정한 자아’라는 이름의 면죄부를 팔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혼란을 파고들어, 그의 가치관을, 그의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재편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말한 ‘정신의 각인’이었다. 육체적 쾌락을 넘어, 상대의 영혼을 지배하는 기술.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텅 빈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안은 단순한 포식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교주였다. 자신의 육체를 성전(聖殿)으로 삼고, 쾌락을 교리로 삼아 길 잃은 영혼들을 구원하는(혹은 타락시키는) 신흥 종교의 교주. 그리고 그녀의 신도들은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헌납하고, 그녀의 발치에 엎드려 구원을 갈망했다.
바로 그때, 옆방에서 다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른, 훨씬 더 느리고 농밀한 움직임이었다.
“잠깐… 지안아… 이제 그만…”
재혁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저항의 기색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적인 거부라기보다는, 감당할 수 없는 쾌락의 파도 앞에서 내지르는 본능적인 비명에 가까웠다.
“왜? 싫어?”
지안의 목소리는 순진한 아이처럼 물었다.
“아니… 싫은 게 아니라… 무서워… 내가… 내가 아닌 게 될까 봐 무서워…”
재혁의 고백은 처절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정체성이 붕괴되는 절벽의 끝에 서 있었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그는 다시는 이전의 ‘박재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미 넌 네가 아니야.”
지안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차갑고 단호했다.
“오늘 밤, 네가 내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예전의 박재혁은 죽었어. 지금 네 안에 있는 건, 내가 새로 빚은 너야. 나의 피와 살을 받아, 나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마. 이건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니까.”
그녀의 선언은 신의 계시처럼 장엄하고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선언 앞에서 전율했다. 그녀는 지금 한 인간의 영혼을 상대로 세례를 집전하고 있었다. 쾌락의 세례. 그것을 통해 과거의 죄(위선과 오만)를 씻어내고, 자신의 신도로 거듭나게 하는 성스러운 의식.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이제 하나의 교향곡처럼 느껴졌다. 지안의 능숙한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리듬, 재혁의 억눌린 신음과 가쁜 숨소리, 두 사람의 땀과 체액이 뒤섞이는 질척한 소리. 그 모든 것이 뒤섞여 하나의 완전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소리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소리에, 그 분위기에 나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내 의식은 옆방의 두 사람과 동기화되기 시작했다.
나는 재혁이 되어, 지안의 몸 아래에서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었다. 내 몸을 관통하는 이질적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쾌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격렬하게 반응하는 육체. 수치심과 쾌락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아찔한 현기증. 나라는 존재가 해체되고, 오직 감각만이 남는 순수한 몰입의 순간.
동시에 나는 지안이 되어, 재혁의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내 움직임 하나하나에 경련하듯 반응하는 그의 몸을 내려다보는 정복자의 희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를 들으며 느끼는 창조주의 만족감. 한 인간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그의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완전한 소유의 쾌감. 그의 영혼에 나의 이름을 새기는 그 순간의 황홀경.
나는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체험자였다.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였다. 나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들의 쾌락과 고통, 지배와 굴복을 모두 공유하고 있었다. 내 몸은 이 차가운 호텔 방에 있었지만, 내 정신은 이미 옆방의 뜨거운 침대 위를 떠돌고 있었다.
“말해봐, 자기야. 지금 기분이 어때?”
지안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좋아.”
재혁의 대답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지만, 그 안에는 완전한 항복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뭐가 좋은데? 자세히 말해봐. 네 입으로.”
지안은 집요했다. 그가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인정하고, 언어로 고백하게 만듦으로써, 그 쾌락의 낙인을 더욱 깊이 새기려 했다.
“모르겠어… 그냥… 네게 완전히 지배당하는 이 느낌이… 좋아… 네가 내 주인이 된 것 같아… 흐윽…!”
그의 고백과 함께, 옆방의 움직임은 다시 한번 절정으로 치달았다. 나는 더 이상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수 없었다. 내 몸 역시 재혁의 몸과 함께 경련하고 있었다. 아랫배에서부터 차오르는 뜨거운 무언가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신음 소리를 참기 위해 내 팔을 깨물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고통만이 내가 아직 이 방에 존재한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나는 완전히 탈진한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마치 세상에서 가장 격렬한 정사를 치른 사람처럼 기진맥진했다.
옆방은 완전한 침묵에 휩싸였다. 나는 그 침묵이 두려웠다. 이제 모든 의식이 끝났고, 재혁이라는 한 남자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나는 그 결과물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한참 후, 옆방에서 샤워기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또 한참 후, 방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본능적으로 현관문의 렌즈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복도에는 지안 혼자 서 있었다. 그녀는 샤워를 마친 듯, 머리카락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호텔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화장은 모두 지워졌지만, 그녀의 얼굴은 오히려 더 신비롭고 아름답게 빛났다. 마치 성스러운 의식을 마친 여사제처럼, 평온하고 고결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복도에 서서, 내가 있는 방문을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는 숨을 죽였다. 그녀는 내가 모든 것을 듣고, 모든 것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지안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듯하더니, 이내 자신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그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나를 향한 조롱일까, 아니면 동지애의 표시일까. 혹은, ‘다음은 네 차례’라는 무언의 경고일까.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늘 밤, 나는 지안의 세계를, 그녀가 집전하는 쾌락의 세례를 목격했다. 그것은 내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화인을 남겼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이민준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세계에 발을 들였고, 그 세계의 비밀을 엿보았다.
나는 이제 단순한 관객이 아니었다. 나는 공범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예비 신도일지도 모른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고, 동시에 무언가가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의 혼돈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혼돈의 중심에는, 언제나처럼 지안이 있었다. 쾌락의 세례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나의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여신.
옆방의 정적은 시체의 그것처럼 무거웠다. 폭풍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재혁의 가쁘고 불규칙한 숨소리만이 남아, 텅 빈 공간을 유령처럼 떠돌았다. 나는 귀를 막았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한 편의 잔혹극이 막을 내렸고, 이제 관객은 퇴장해야 할 시간이라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지안의 연극에서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을.
“괜찮아?”
지안의 목소리는 방금 전까지 한 남자의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든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힘든 운동을 마친 파트너의 안부를 묻는 트레이너처럼, 일상적이고 담백했다.
“…내가… 뭘 한 거지…?”
재혁의 목소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일을, 그리고 그 일에 탐닉했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이미 새로운 주인의 낙인이 찍힌 노예처럼 쾌락의 기억을 선명하게 품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일을 한 거지, 자기야.”
지안이 그의 헝클어진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길은 자비로운 여신의 그것과도 같았고, 동시에 희생양을 어루만지는 사제의 손길처럼 섬뜩했다.
“네 몸이 원하는 걸 들어준 것뿐이야. 억누르고 있던 진짜 너를 해방시켜 준 거지.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오히려 기뻐해야지. 이제야 진짜 너를 만났으니까.”
그녀의 말은 위험한 복음이었다.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재혁에게, 그녀는 ‘해방’과 ‘진정한 자아’라는 이름의 면죄부를 팔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혼란을 파고들어, 그의 가치관을, 그의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재편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말한 ‘정신의 각인’이었다. 육체적 쾌락을 넘어, 상대의 영혼을 지배하는 기술.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텅 빈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안은 단순한 포식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교주였다. 자신의 육체를 성전(聖殿)으로 삼고, 쾌락을 교리로 삼아 길 잃은 영혼들을 구원하는(혹은 타락시키는) 신흥 종교의 교주. 그리고 그녀의 신도들은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헌납하고, 그녀의 발치에 엎드려 구원을 갈망했다.
바로 그때, 옆방에서 다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른, 훨씬 더 느리고 농밀한 움직임이었다.
“잠깐… 지안아… 이제 그만…”
재혁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저항의 기색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적인 거부라기보다는, 감당할 수 없는 쾌락의 파도 앞에서 내지르는 본능적인 비명에 가까웠다.
“왜? 싫어?”
지안의 목소리는 순진한 아이처럼 물었다.
“아니… 싫은 게 아니라… 무서워… 내가… 내가 아닌 게 될까 봐 무서워…”
재혁의 고백은 처절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정체성이 붕괴되는 절벽의 끝에 서 있었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그는 다시는 이전의 ‘박재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미 넌 네가 아니야.”
지안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차갑고 단호했다.
“오늘 밤, 네가 내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예전의 박재혁은 죽었어. 지금 네 안에 있는 건, 내가 새로 빚은 너야. 나의 피와 살을 받아, 나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마. 이건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니까.”
그녀의 선언은 신의 계시처럼 장엄하고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선언 앞에서 전율했다. 그녀는 지금 한 인간의 영혼을 상대로 세례를 집전하고 있었다. 쾌락의 세례. 그것을 통해 과거의 죄(위선과 오만)를 씻어내고, 자신의 신도로 거듭나게 하는 성스러운 의식.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이제 하나의 교향곡처럼 느껴졌다. 지안의 능숙한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리듬, 재혁의 억눌린 신음과 가쁜 숨소리, 두 사람의 땀과 체액이 뒤섞이는 질척한 소리. 그 모든 것이 뒤섞여 하나의 완전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소리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소리에, 그 분위기에 나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내 의식은 옆방의 두 사람과 동기화되기 시작했다.
나는 재혁이 되어, 지안의 몸 아래에서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었다. 내 몸을 관통하는 이질적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쾌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격렬하게 반응하는 육체. 수치심과 쾌락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아찔한 현기증. 나라는 존재가 해체되고, 오직 감각만이 남는 순수한 몰입의 순간.
동시에 나는 지안이 되어, 재혁의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내 움직임 하나하나에 경련하듯 반응하는 그의 몸을 내려다보는 정복자의 희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를 들으며 느끼는 창조주의 만족감. 한 인간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그의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완전한 소유의 쾌감. 그의 영혼에 나의 이름을 새기는 그 순간의 황홀경.
나는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체험자였다.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였다. 나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들의 쾌락과 고통, 지배와 굴복을 모두 공유하고 있었다. 내 몸은 이 차가운 호텔 방에 있었지만, 내 정신은 이미 옆방의 뜨거운 침대 위를 떠돌고 있었다.
“말해봐, 자기야. 지금 기분이 어때?”
지안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좋아.”
재혁의 대답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지만, 그 안에는 완전한 항복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뭐가 좋은데? 자세히 말해봐. 네 입으로.”
지안은 집요했다. 그가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인정하고, 언어로 고백하게 만듦으로써, 그 쾌락의 낙인을 더욱 깊이 새기려 했다.
“모르겠어… 그냥… 네게 완전히 지배당하는 이 느낌이… 좋아… 네가 내 주인이 된 것 같아… 흐윽…!”
그의 고백과 함께, 옆방의 움직임은 다시 한번 절정으로 치달았다. 나는 더 이상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수 없었다. 내 몸 역시 재혁의 몸과 함께 경련하고 있었다. 아랫배에서부터 차오르는 뜨거운 무언가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신음 소리를 참기 위해 내 팔을 깨물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고통만이 내가 아직 이 방에 존재한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나는 완전히 탈진한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마치 세상에서 가장 격렬한 정사를 치른 사람처럼 기진맥진했다.
옆방은 완전한 침묵에 휩싸였다. 나는 그 침묵이 두려웠다. 이제 모든 의식이 끝났고, 재혁이라는 한 남자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나는 그 결과물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한참 후, 옆방에서 샤워기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또 한참 후, 방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본능적으로 현관문의 렌즈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복도에는 지안 혼자 서 있었다. 그녀는 샤워를 마친 듯, 머리카락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호텔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화장은 모두 지워졌지만, 그녀의 얼굴은 오히려 더 신비롭고 아름답게 빛났다. 마치 성스러운 의식을 마친 여사제처럼, 평온하고 고결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복도에 서서, 내가 있는 방문을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는 숨을 죽였다. 그녀는 내가 모든 것을 듣고, 모든 것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지안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듯하더니, 이내 자신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그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나를 향한 조롱일까, 아니면 동지애의 표시일까. 혹은, ‘다음은 네 차례’라는 무언의 경고일까.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늘 밤, 나는 지안의 세계를, 그녀가 집전하는 쾌락의 세례를 목격했다. 그것은 내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화인을 남겼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이민준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세계에 발을 들였고, 그 세계의 비밀을 엿보았다.
나는 이제 단순한 관객이 아니었다. 나는 공범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예비 신도일지도 모른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고, 동시에 무언가가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의 혼돈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혼돈의 중심에는, 언제나처럼 지안이 있었다. 쾌락의 세례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나의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여신.
작가의 말
등록된 작가의 말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