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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49 추천 : 0 글자수 : 5,442 자 2025-08-26
되돌아온 사냥감
그날 밤 이후, 나는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의사는 과로와 스트레스라는 진단을 내렸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육체의 병이 아니었다. 내 영혼이 겪는 격렬한 후유증이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나는 옆방의 벽이 되어, 재혁과 지안의 모든 행위를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때로는 내가 재혁이 되어 지안의 아래에 깔려 쾌락에 몸부림쳤고, 또 다른 꿈에서는 내가 지안이 되어 이름 모를 남자의 영혼을 파괴하고 있었다. 꿈에서 깨면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심장은 통증을 느낄 만큼 세차게 뛰었다.
나는 지안의 연락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그녀의 이름이 휴대폰 액정에 뜰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밥 먹자’, ‘영화 볼까?’ 같은 시시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그 태연함이 더 무서웠다. 그녀에게 그날 밤은 그저 수많은 사냥 중 하나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세상이 뒤집히는 것과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나는 며칠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학교도 나가지 않았다. 세상과 나 사이에 두꺼운 벽을 치고, 그날 밤의 기억을 어떻게든 소화해내려 애썼다. 하지만 기억은 소화되기는커녕, 위액처럼 내 속을 쓰리게 하며 역류했다. 나는 재혁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는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역시 나처럼 끔찍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을까, 아니면 모든 것을 잊고 예전의 ‘박재혁’으로 돌아갔을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나는 그의 SNS를 찾아보았다. 그의 계정은 여전히 화려했다.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찍은 음식 사진, 친구들과 골프를 치는 영상, 새로 뽑은 스포츠카를 자랑하는 게시물.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상적으로 보였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의 성공적인 삶을 과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 그날 밤은 그저 하룻밤의 실수, 술김에 벌어진 끔찍한 악몽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나만 이렇게 고통받고 있다는 불공평함.
하지만 그의 완벽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나는 아주 미세한 균열을 발견했다. 예전에는 그의 사진 속에 항상 아름다운 여자들이 함께였지만, 최근 게시물에는 여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억지로 웃고 있는 미소 뒤에, 깊고 어두운 공허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영혼의 일부를 어딘가에 저당 잡힌 사람처럼.
그의 변화를 확인하고 나자, 지안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는 대체 한 사람의 인생에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나는 더 이상 방관자로만 머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나는 처음으로 지안의 메시지에 답장을 했다.
[할 말 있어. 네버랜드에서 보자.]
그날 밤, 네버랜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소란스러웠다. 나는 먼저 도착해 지안을 기다렸다. 그녀를 마주할 생각을 하니 심장이 다시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지안이 바 안으로 들어섰다. 그날 그녀는 평범한 청바지에 흰 티셔츠 차림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청순해 보이기까지 했다. 며칠 전, 한 남자의 영혼을 파괴하던 요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낯선 순수함에 나는 오히려 더 큰 위화감을 느꼈다.
“꼴이 말이 아니네. 어디 아팠어?”
내 앞에 앉은 지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는 그 위선적인 얼굴에 대고 쏘아붙였다.
“너 때문이잖아.”
“나 때문에?”
지안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재혁 씨… 그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사람 인생을 망가뜨려 놓고 재밌어?”
내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안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망가져? 아니. 나는 그 사람이 진짜 자기 자신을 찾게 도와준 거야. 억눌려 있던 욕망을 해방시켜 준 거지. 그는 나한테 감사해야 해.”
“그게 무슨 해방이야! 그건 파괴야! 넌 그냥 네 만족을 위해서 사람을 이용한 거라고!”
나는 언성을 높였다.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거렸다.
“이용? 하, 웃기네.”
지안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너야말로 위선자 아니야, 이민준? 그렇게 나를 비난하면서도,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미치겠지. 안 그래? 너도 내 세계가 궁금해서, 그 스릴을 맛보고 싶어서 내 옆을 떠나지 못하는 거잖아. 나한테 돌을 던지려면, 너부터 깨끗해야지.”
그녀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비난하면서도, 동시에 그녀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그녀의 잔인함, 솔직함, 그 모든 것에. 나는 그녀를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나는 깨끗하지 않았다. 내 안에도 재혁과 같은, 어쩌면 그보다 더 추악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가 할 말을 잃고 앉아 있자, 지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재혁 씨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마침 잘 됐다. 너한테 보여줄 게 있어.”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잠금 화면을 풀었다. 그리고 나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그녀와 재혁이 나눈 메시지 내용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가장 위에 있는 것은 그날 밤 이후, 재혁이 처음으로 보낸 메시지였다.
[지안 씨… 저 재혁입니다. 그날은… 죄송했습니다. 제가 술에 너무 취해서…]
그는 사과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날의 일을 자신의 실수로 덮으려는 필사적인 시도처럼 보였다. 지안의 답장은 간단했다.
[뭐가 죄송해요? 난 즐거웠는데. 재혁 씨도 솔직히 좋았잖아요.]
그녀는 퇴로를 차단했다. 재혁은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미쳤었나 봅니다. 다 잊어주세요.]
그 후로 며칠 동안 대화는 없었다. 나는 거기까지 읽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재혁이 이겨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아래로 스크롤을 내리자, 내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일주일 후, 다시 재혁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번에는 밤늦은 시간이었다.
[자요?]
지안은 답장하지 않았다. 다음 날, 또 메시지가 왔다.
[바빠요?]
지안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녀는 능숙한 조련사처럼, 그가 애가 닳아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간의 침묵 끝에, 마침내 재혁의 진심이 담긴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안 씨. 보고 싶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할게요.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날 밤…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요. 머리로는 아니라고 하는데, 몸이 당신을 원해요.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더 만나주세요. 뭐든지 다 할게요.]
그것은 완벽한 항복 선언이었다. 그는 이제 지안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되돌아온 사냥감이었다. 스스로 주인의 발치에 엎드린 충실한 개.
나는 소름이 돋았다. 지안의 말이 사실이었다.
‘열 명 중 여섯은 반드시 다시 연락이 와. 그리고 계속해서 연락이 오는 놈들은, 어느새 나한테 몸을 대주는 완벽한 ‘바텀’이 되어 있지. 내가 만든 새로운 작품들이야.’
나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때? 이제 알겠어?”
지안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현실이야, 민준아.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단순하고, 욕망에 충실한 동물이야. 그걸 억지로 누르고 아닌 척 살아가는 게 너희들의 위선이고. 나는 그냥 그 가면을 벗겨주는 것뿐이야.”
“그래서… 다시 만났어?”
“아니, 아직. 좀 더 애태워야지. 너무 쉽게 주면 재미없잖아. 가치를 알아야 소중한 줄 알지.”
그녀에게 재혁은 더 이상 한 명의 인격체가 아니었다. 길들여야 할 짐승, 혹은 완성해야 할 작품에 불과했다.
그때, 지안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발신자는 ‘박재혁’이었다. 지안은 내 앞에서 보란 듯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지안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다.
[지, 지안 씨! 전화받으셨네요! 저, 재혁이에요.]
재혁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절박했다. 예전의 그 자신감 넘치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무슨 일이죠? 저 지금 바쁜데.”
[아, 죄송합니다. 그냥… 그냥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지안 씨, 저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제발 한 번만… 네?]
“글쎄요.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재혁 씨랑 자는 거, 솔직히 별로였는데.”
지안의 말은 잔인했다. 그녀는 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짓밟고 있었다.
[아니에요! 제가… 제가 그날은 너무 긴장해서… 다음에는 정말 잘할 수 있어요! 지안 씨가 원하는 거 뭐든지 다 해드릴게요. 돈이 필요하면 돈도 드릴 수 있어요. 얼마든지!]
그는 이제 돈까지 거론하며 애원하고 있었다. 완벽한 추락이었다.
“음… 생각해 볼게요. 끊어요.”
지안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그 차가운 얼굴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악마였다.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영혼을 좀먹는 아름다운 악마.
“어때, 내 작품. 꽤 성공적이지?”
나는 대답 대신 물었다.
“넌… 외롭지 않아?”
내 뜬금없는 질문에, 지안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완벽한 포커페이스에 생긴 미세한 균열.
“무슨 소리야.”
“아니, 그냥. 이렇게 사람들을 장난감처럼 다루고, 지배하고. 그러고 나면 허무하지 않냐고. 진심으로 너를 아껴주고, 너와 교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내 말은 그녀의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시끄러워.”
지안은 나지막이 욕설을 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갈게. 계산은 네가 해.”
그녀는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과는 달리, 어딘가 서두르는 듯한 모습으로 바를 빠져나갔다. 나는 혼자 남아 그녀가 마시다 남긴 위스키 잔을 바라보았다. 잔에는 그녀의 붉은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오늘, 그녀의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발견했다. 그것은 ‘진심’ 혹은 ‘외로움’이라는, 그녀가 가장 경멸하고 두려워하는 감정이었다. 그녀는 타인을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행위는 그녀를 더욱 깊은 고립과 외로움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그녀를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생각을 했다. 그녀를 이 잔인한 게임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그녀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는 법을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것은 구원자의 오만함일까, 아니면 사랑의 시작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나와 지안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세계를 엿보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가장 약한 부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고, 그녀의 게임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되었다.
나는 남은 술을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술기운으로 뜨거워진 뺨을 식혀주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지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해. 내가 말이 심했어.]
답장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 메시지를 보고, 밤새 뒤척이게 될 것이다. 되돌아온 사냥감은 박재혁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 자신도 내가 던진 ‘진심’이라는 미끼를 물어버린, 또 다른 사냥감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날 밤 이후, 나는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의사는 과로와 스트레스라는 진단을 내렸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육체의 병이 아니었다. 내 영혼이 겪는 격렬한 후유증이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나는 옆방의 벽이 되어, 재혁과 지안의 모든 행위를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때로는 내가 재혁이 되어 지안의 아래에 깔려 쾌락에 몸부림쳤고, 또 다른 꿈에서는 내가 지안이 되어 이름 모를 남자의 영혼을 파괴하고 있었다. 꿈에서 깨면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심장은 통증을 느낄 만큼 세차게 뛰었다.
나는 지안의 연락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그녀의 이름이 휴대폰 액정에 뜰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밥 먹자’, ‘영화 볼까?’ 같은 시시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그 태연함이 더 무서웠다. 그녀에게 그날 밤은 그저 수많은 사냥 중 하나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세상이 뒤집히는 것과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나는 며칠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학교도 나가지 않았다. 세상과 나 사이에 두꺼운 벽을 치고, 그날 밤의 기억을 어떻게든 소화해내려 애썼다. 하지만 기억은 소화되기는커녕, 위액처럼 내 속을 쓰리게 하며 역류했다. 나는 재혁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는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역시 나처럼 끔찍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을까, 아니면 모든 것을 잊고 예전의 ‘박재혁’으로 돌아갔을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나는 그의 SNS를 찾아보았다. 그의 계정은 여전히 화려했다.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찍은 음식 사진, 친구들과 골프를 치는 영상, 새로 뽑은 스포츠카를 자랑하는 게시물.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상적으로 보였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의 성공적인 삶을 과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 그날 밤은 그저 하룻밤의 실수, 술김에 벌어진 끔찍한 악몽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나만 이렇게 고통받고 있다는 불공평함.
하지만 그의 완벽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나는 아주 미세한 균열을 발견했다. 예전에는 그의 사진 속에 항상 아름다운 여자들이 함께였지만, 최근 게시물에는 여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억지로 웃고 있는 미소 뒤에, 깊고 어두운 공허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영혼의 일부를 어딘가에 저당 잡힌 사람처럼.
그의 변화를 확인하고 나자, 지안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는 대체 한 사람의 인생에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나는 더 이상 방관자로만 머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나는 처음으로 지안의 메시지에 답장을 했다.
[할 말 있어. 네버랜드에서 보자.]
그날 밤, 네버랜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소란스러웠다. 나는 먼저 도착해 지안을 기다렸다. 그녀를 마주할 생각을 하니 심장이 다시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지안이 바 안으로 들어섰다. 그날 그녀는 평범한 청바지에 흰 티셔츠 차림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청순해 보이기까지 했다. 며칠 전, 한 남자의 영혼을 파괴하던 요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낯선 순수함에 나는 오히려 더 큰 위화감을 느꼈다.
“꼴이 말이 아니네. 어디 아팠어?”
내 앞에 앉은 지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는 그 위선적인 얼굴에 대고 쏘아붙였다.
“너 때문이잖아.”
“나 때문에?”
지안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재혁 씨… 그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사람 인생을 망가뜨려 놓고 재밌어?”
내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안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망가져? 아니. 나는 그 사람이 진짜 자기 자신을 찾게 도와준 거야. 억눌려 있던 욕망을 해방시켜 준 거지. 그는 나한테 감사해야 해.”
“그게 무슨 해방이야! 그건 파괴야! 넌 그냥 네 만족을 위해서 사람을 이용한 거라고!”
나는 언성을 높였다.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거렸다.
“이용? 하, 웃기네.”
지안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너야말로 위선자 아니야, 이민준? 그렇게 나를 비난하면서도,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미치겠지. 안 그래? 너도 내 세계가 궁금해서, 그 스릴을 맛보고 싶어서 내 옆을 떠나지 못하는 거잖아. 나한테 돌을 던지려면, 너부터 깨끗해야지.”
그녀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비난하면서도, 동시에 그녀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그녀의 잔인함, 솔직함, 그 모든 것에. 나는 그녀를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나는 깨끗하지 않았다. 내 안에도 재혁과 같은, 어쩌면 그보다 더 추악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가 할 말을 잃고 앉아 있자, 지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재혁 씨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마침 잘 됐다. 너한테 보여줄 게 있어.”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잠금 화면을 풀었다. 그리고 나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그녀와 재혁이 나눈 메시지 내용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가장 위에 있는 것은 그날 밤 이후, 재혁이 처음으로 보낸 메시지였다.
[지안 씨… 저 재혁입니다. 그날은… 죄송했습니다. 제가 술에 너무 취해서…]
그는 사과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날의 일을 자신의 실수로 덮으려는 필사적인 시도처럼 보였다. 지안의 답장은 간단했다.
[뭐가 죄송해요? 난 즐거웠는데. 재혁 씨도 솔직히 좋았잖아요.]
그녀는 퇴로를 차단했다. 재혁은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미쳤었나 봅니다. 다 잊어주세요.]
그 후로 며칠 동안 대화는 없었다. 나는 거기까지 읽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재혁이 이겨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아래로 스크롤을 내리자, 내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일주일 후, 다시 재혁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번에는 밤늦은 시간이었다.
[자요?]
지안은 답장하지 않았다. 다음 날, 또 메시지가 왔다.
[바빠요?]
지안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녀는 능숙한 조련사처럼, 그가 애가 닳아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간의 침묵 끝에, 마침내 재혁의 진심이 담긴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안 씨. 보고 싶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할게요.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날 밤…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요. 머리로는 아니라고 하는데, 몸이 당신을 원해요.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더 만나주세요. 뭐든지 다 할게요.]
그것은 완벽한 항복 선언이었다. 그는 이제 지안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되돌아온 사냥감이었다. 스스로 주인의 발치에 엎드린 충실한 개.
나는 소름이 돋았다. 지안의 말이 사실이었다.
‘열 명 중 여섯은 반드시 다시 연락이 와. 그리고 계속해서 연락이 오는 놈들은, 어느새 나한테 몸을 대주는 완벽한 ‘바텀’이 되어 있지. 내가 만든 새로운 작품들이야.’
나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때? 이제 알겠어?”
지안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현실이야, 민준아.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단순하고, 욕망에 충실한 동물이야. 그걸 억지로 누르고 아닌 척 살아가는 게 너희들의 위선이고. 나는 그냥 그 가면을 벗겨주는 것뿐이야.”
“그래서… 다시 만났어?”
“아니, 아직. 좀 더 애태워야지. 너무 쉽게 주면 재미없잖아. 가치를 알아야 소중한 줄 알지.”
그녀에게 재혁은 더 이상 한 명의 인격체가 아니었다. 길들여야 할 짐승, 혹은 완성해야 할 작품에 불과했다.
그때, 지안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발신자는 ‘박재혁’이었다. 지안은 내 앞에서 보란 듯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지안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다.
[지, 지안 씨! 전화받으셨네요! 저, 재혁이에요.]
재혁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절박했다. 예전의 그 자신감 넘치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무슨 일이죠? 저 지금 바쁜데.”
[아, 죄송합니다. 그냥… 그냥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지안 씨, 저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제발 한 번만… 네?]
“글쎄요.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재혁 씨랑 자는 거, 솔직히 별로였는데.”
지안의 말은 잔인했다. 그녀는 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짓밟고 있었다.
[아니에요! 제가… 제가 그날은 너무 긴장해서… 다음에는 정말 잘할 수 있어요! 지안 씨가 원하는 거 뭐든지 다 해드릴게요. 돈이 필요하면 돈도 드릴 수 있어요. 얼마든지!]
그는 이제 돈까지 거론하며 애원하고 있었다. 완벽한 추락이었다.
“음… 생각해 볼게요. 끊어요.”
지안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그 차가운 얼굴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악마였다.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영혼을 좀먹는 아름다운 악마.
“어때, 내 작품. 꽤 성공적이지?”
나는 대답 대신 물었다.
“넌… 외롭지 않아?”
내 뜬금없는 질문에, 지안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완벽한 포커페이스에 생긴 미세한 균열.
“무슨 소리야.”
“아니, 그냥. 이렇게 사람들을 장난감처럼 다루고, 지배하고. 그러고 나면 허무하지 않냐고. 진심으로 너를 아껴주고, 너와 교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내 말은 그녀의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시끄러워.”
지안은 나지막이 욕설을 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갈게. 계산은 네가 해.”
그녀는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과는 달리, 어딘가 서두르는 듯한 모습으로 바를 빠져나갔다. 나는 혼자 남아 그녀가 마시다 남긴 위스키 잔을 바라보았다. 잔에는 그녀의 붉은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오늘, 그녀의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발견했다. 그것은 ‘진심’ 혹은 ‘외로움’이라는, 그녀가 가장 경멸하고 두려워하는 감정이었다. 그녀는 타인을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행위는 그녀를 더욱 깊은 고립과 외로움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그녀를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생각을 했다. 그녀를 이 잔인한 게임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그녀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는 법을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것은 구원자의 오만함일까, 아니면 사랑의 시작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나와 지안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세계를 엿보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가장 약한 부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고, 그녀의 게임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되었다.
나는 남은 술을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술기운으로 뜨거워진 뺨을 식혀주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지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해. 내가 말이 심했어.]
답장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 메시지를 보고, 밤새 뒤척이게 될 것이다. 되돌아온 사냥감은 박재혁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 자신도 내가 던진 ‘진심’이라는 미끼를 물어버린, 또 다른 사냥감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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