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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0 추천 : 0 글자수 : 5,681 자 2025-09-01
정신의 각인
내가 보낸 사과의 메시지에 지안은 끝내 답장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그녀에게서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네버랜드에 가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내 세상에서 증발해버린 것처럼. 처음에는 그녀의 침묵이 불안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 침묵의 의미를 곱씹게 되었다. 그녀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내가 던진 ‘외로움’이라는 날카로운 돌멩이가 그녀의 견고한 성벽에 만들어낸 균열. 그녀는 아마 그 틈을 막아내기 위해 혼자만의 싸움을 벌이고 있을 터였다.
나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이제 게임의 주도권은 미세하게나마 나에게로 넘어왔다. 그녀가 나를 다시 찾을 때까지, 나는 내 일상을 지키며 힘을 비축해야 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늦은 밤, 내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지안이었다. 메시지는 단 한 줄이었다.
[오늘 밤, 재혁 씨를 만나. 마지막을 보고 싶으면, 지난번 그 호텔로 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나를 다시 그녀의 잔혹한 연극에 초대했다. 하지만 이번의 초대는 이전과는 그 의미가 달랐다. 그것은 단순한 과시나 유혹이 아니었다. ‘네가 말한 외로움 따위는 내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해. 나는 여전히 이 게임의 지배자야.’라는 무언의 선전포고였다. 동시에, 그녀의 가장 깊은 내면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인 나를, 그녀의 곁에 둠으로써 불안을 해소하려는 이중적인 심리가 깔려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밀어내면서도, 동시에 나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가 내게 던지는 승부수였고,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나는 그날 밤, 다시 한번 지옥의 문턱으로 향했다.
지난번과 같은 호텔, 같은 층. 나는 옆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나는 익숙하게 벽에 귀를 가져다 댔다. 옆방은 아직 조용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들을 기다렸다. 초조함보다는 기묘한 평온함이 나를 감쌌다. 이제 나는 단순한 관객이 아니었다. 나는 이 연극의 숨겨진 의미를 이해하는 유일한 해설가이자, 어쩌면 다음 막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르는 존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옆방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지안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고… 고마워요, 지안 씨. 다시 만나줘서 정말…”
재혁의 목소리는 비굴할 정도로 공손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일주일 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절박함보다 더 깊은, 영혼의 무게를 잃어버린 듯한 공허함이 그의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고맙긴. 비싼 돈 주고 사는 시간이잖아요. 재혁 씨가 오늘 나한테 얼마를 주기로 했더라?”
지안은 인정사정없이 그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녀는 이 만남이 철저한 비즈니스임을, 그가 돈으로 쾌락을 사는 한낱 고객에 불과함을 명확히 하려 했다.
“네… 뭐든지… 뭐든지 다 드릴게요. 제발… 그날처럼…”
재혁의 애원은 처량했다. 그는 이제 쾌락의 노예가 되어, 주인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 안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마도 재혁은 섣불리 지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어색하게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지안은 그런 그를 여유롭게 관찰하고 있겠지.
“옷 벗어요.”
지안의 명령은 짧고 단호했다. 옆방에서 옷 벗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혁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그녀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한때 세상을 다 가진 듯 오만했던 한 남자가, 이제는 발가벗겨진 채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심판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서 있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무릎 꿇어.”
지안의 다음 명령은 더욱 가혹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재혁이 무릎을 꿇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이제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완벽하게 그녀의 발아래에 굴복한 것이다.
“내가 왜 다시 만나준 줄 알아요, 재혁 씨?”
지안이 나지막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날 밤, 재혁 씨는 나한테 완전히 만족을 주지 못했어. 너무 서툴고, 긴장만 하고. 솔직히 말해서, 최악이었지.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거야. 오늘 밤, 나를 완벽하게 만족시키지 못하면, 다시는 재혁 씨를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 알아들었어요?”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날 밤, 재혁은 그녀에게 최고의 만족감을 주었을 것이다. 한 영혼을 파괴하고 지배하는 쾌감. 하지만 그녀는 의도적으로 그를 폄하하고, 그에게 ‘나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과제를 부여함으로써, 이 관계의 주도권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었다. 재혁은 이제 쾌락을 얻기 위해, 지안을 ‘만족시켜야만 하는’ 의무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네… 네! 잘할게요!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제발…!”
재혁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지안이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광경이었다. ‘봐라, 이민준. 이게 내가 만든 세상이다. 네가 말하는 외로움 따위가 끼어들 틈은 없어. 나는 이렇게나 완벽하게 타인을 지배하고, 그 위에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그 완벽한 지배 아래에서, 오히려 더 짙은 외로움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녀는 상대를 지배하면 할수록, 진정한 교감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성은 더 높아지고, 그녀의 고독은 더 깊어질 뿐이었다.
옆방의 의식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는 양상이 달랐다. 처음부터 어떤 저항도, 어떤 혼란도 없었다. 오직 지안의 일방적인 명령과, 재혁의 순종적인 복종만이 존재했다.
지안은 재혁에게 온갖 굴욕적인 자세를 요구했고, 재혁은 기꺼이 그 모든 것을 수행했다. 그는 더 이상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그 굴욕 속에서 새로운 종류의 안정감과 쾌락을 느끼는 듯했다. 모든 판단과 선택의 의무를 포기하고,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노예의 편안함.
이번에 지안은 딜도나 다른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몸과, 자신의 말로만 재혁을 길들였다. 그녀는 재혁의 몸을 탐하면서, 동시에 그의 정신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넌 이제 내 거야. 네 몸도, 네 마음도, 전부 다 내 거라고. 알겠어?”
“네… 네, 지안 님…”
재혁은 이제 그녀를 ‘지안 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내가 허락할 때만 쾌락을 느낄 수 있고, 내가 명령할 때만 숨을 쉴 수 있어. 넌 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해.”
그녀의 말은 잔혹한 주문처럼 재혁의 영혼에 새겨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정신의 각인’이었다. 상대방의 자아를 완전히 파괴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 채워 넣는, 가장 궁극적인 형태의 지배.
나는 더 이상 이 의식을 엿듣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기묘한 평온함마저 느껴졌다. 나는 이제 이 모든 상황을 한 걸음 떨어져서, 분석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지안이라는 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벌이는 처절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재혁은 그 투쟁의 희생양이자, 동시에 그녀의 존재를 완성시켜주는 필수적인 파트너였다. 그들은 서로를 파괴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기묘한 공생 관계.
옆방의 소리가 절정으로 치달을 때, 나는 내 안에서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나는 무감각해져 있었다. 너무나도 강렬한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나머지, 내 감정의 회로가 타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제 그들의 행위에서 어떤 에로티시즘도, 어떤 비극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하나의 현상으로서, 하나의 케이스 스터디로서 그것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의식이 끝나고, 옆방에서는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눌지, 혹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한참 후, 지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밤은 만족스러웠어. 재혁 씨는 이제 내 완벽한 노예가 될 자격이 있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지안 님…”
재혁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감격한 듯 떨리고 있었다.
“앞으로 내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와야 해. 내가 뭘 원하든, 군소리 없이 복종하고. 알겠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완벽한 주종관계를 확인하는 계약서와도 같았다.
잠시 후, 재혁이 먼저 방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렌즈를 통해 복도를 내다보았다. 재혁의 뒷모습은 어딘가 초라해 보였지만, 동시에 이상한 평온함이 감돌았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주인을 섬기는 삶에서 안정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재혁이 사라지고 난 후, 나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그리고 옆방의 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지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두 사람의 정사가 남긴 흔적들로 어지러웠다. 흐트러진 침대 시트,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 그리고 공기 중에 감도는 짙은 체취. 지안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 상태였다. 그녀의 완벽한 몸을 다시 마주했지만, 내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다 봤어?”
지안이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다 들었어.”
내가 대답했다.
“어땠어? 내 완벽한 승리가.”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조적인 냉소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나를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내 앞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들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글쎄. 완벽한 승리라기보단, 처절한 자위처럼 보였는데.”
내 말에, 지안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분노와 슬픔, 그리고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닥쳐.”
“왜? 네가 보여주고 싶었던 거 아니야? 네가 얼마나 대단한 지배자인지. 근데 그거 알아? 진짜 강한 사람은 타인을 지배하려 하지 않아. 그냥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뿐이지. 넌 약해, 지안아. 그래서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만 네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거야.”
나는 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들은 내 진심이었다.
지안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방 안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담배 연기만이 우리 사이를 유령처럼 떠다녔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쭈그려 앉아,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제 그만해, 지안아. 이런다고 네 외로움이 채워지는 거 아니잖아.”
내 목소리는 나도 놀랄 만큼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향한 분노도, 경멸도, 욕망도 느끼지 않았다. 오직 깊은 연민과, 그녀를 이 지옥에서 꺼내주고 싶다는 강한 충동만이 남아 있었다.
지안의 눈에서, 마침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완벽한 갑옷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포식자도, 여신도, 교주도 아니었다. 그저 상처받고 길을 잃은, 한 명의 연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녀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내 셔츠를 적셨다. 나는 그녀를 안아주며 생각했다.
우리의 진짜 관계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배와 굴복, 유혹과 저항의 게임이 끝나고, 두 명의 상처 입은 영혼이 서로를 마주 보는, 진짜 사랑의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더 위험하고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시작일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의 눈물은 진실일까, 아니면 나를 완전히 함락시키기 위한 마지막 연기일까. 나는 그녀를 믿어야 할까, 아니면 경계해야 할까. 나는 그녀의 세계에서,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내가 보낸 사과의 메시지에 지안은 끝내 답장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그녀에게서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네버랜드에 가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내 세상에서 증발해버린 것처럼. 처음에는 그녀의 침묵이 불안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 침묵의 의미를 곱씹게 되었다. 그녀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내가 던진 ‘외로움’이라는 날카로운 돌멩이가 그녀의 견고한 성벽에 만들어낸 균열. 그녀는 아마 그 틈을 막아내기 위해 혼자만의 싸움을 벌이고 있을 터였다.
나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이제 게임의 주도권은 미세하게나마 나에게로 넘어왔다. 그녀가 나를 다시 찾을 때까지, 나는 내 일상을 지키며 힘을 비축해야 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늦은 밤, 내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지안이었다. 메시지는 단 한 줄이었다.
[오늘 밤, 재혁 씨를 만나. 마지막을 보고 싶으면, 지난번 그 호텔로 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나를 다시 그녀의 잔혹한 연극에 초대했다. 하지만 이번의 초대는 이전과는 그 의미가 달랐다. 그것은 단순한 과시나 유혹이 아니었다. ‘네가 말한 외로움 따위는 내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해. 나는 여전히 이 게임의 지배자야.’라는 무언의 선전포고였다. 동시에, 그녀의 가장 깊은 내면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인 나를, 그녀의 곁에 둠으로써 불안을 해소하려는 이중적인 심리가 깔려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밀어내면서도, 동시에 나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가 내게 던지는 승부수였고,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나는 그날 밤, 다시 한번 지옥의 문턱으로 향했다.
지난번과 같은 호텔, 같은 층. 나는 옆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나는 익숙하게 벽에 귀를 가져다 댔다. 옆방은 아직 조용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들을 기다렸다. 초조함보다는 기묘한 평온함이 나를 감쌌다. 이제 나는 단순한 관객이 아니었다. 나는 이 연극의 숨겨진 의미를 이해하는 유일한 해설가이자, 어쩌면 다음 막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르는 존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옆방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지안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고… 고마워요, 지안 씨. 다시 만나줘서 정말…”
재혁의 목소리는 비굴할 정도로 공손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일주일 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절박함보다 더 깊은, 영혼의 무게를 잃어버린 듯한 공허함이 그의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고맙긴. 비싼 돈 주고 사는 시간이잖아요. 재혁 씨가 오늘 나한테 얼마를 주기로 했더라?”
지안은 인정사정없이 그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녀는 이 만남이 철저한 비즈니스임을, 그가 돈으로 쾌락을 사는 한낱 고객에 불과함을 명확히 하려 했다.
“네… 뭐든지… 뭐든지 다 드릴게요. 제발… 그날처럼…”
재혁의 애원은 처량했다. 그는 이제 쾌락의 노예가 되어, 주인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 안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마도 재혁은 섣불리 지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어색하게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지안은 그런 그를 여유롭게 관찰하고 있겠지.
“옷 벗어요.”
지안의 명령은 짧고 단호했다. 옆방에서 옷 벗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혁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그녀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한때 세상을 다 가진 듯 오만했던 한 남자가, 이제는 발가벗겨진 채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심판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서 있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무릎 꿇어.”
지안의 다음 명령은 더욱 가혹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재혁이 무릎을 꿇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이제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완벽하게 그녀의 발아래에 굴복한 것이다.
“내가 왜 다시 만나준 줄 알아요, 재혁 씨?”
지안이 나지막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날 밤, 재혁 씨는 나한테 완전히 만족을 주지 못했어. 너무 서툴고, 긴장만 하고. 솔직히 말해서, 최악이었지.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거야. 오늘 밤, 나를 완벽하게 만족시키지 못하면, 다시는 재혁 씨를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 알아들었어요?”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날 밤, 재혁은 그녀에게 최고의 만족감을 주었을 것이다. 한 영혼을 파괴하고 지배하는 쾌감. 하지만 그녀는 의도적으로 그를 폄하하고, 그에게 ‘나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과제를 부여함으로써, 이 관계의 주도권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었다. 재혁은 이제 쾌락을 얻기 위해, 지안을 ‘만족시켜야만 하는’ 의무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네… 네! 잘할게요!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제발…!”
재혁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지안이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광경이었다. ‘봐라, 이민준. 이게 내가 만든 세상이다. 네가 말하는 외로움 따위가 끼어들 틈은 없어. 나는 이렇게나 완벽하게 타인을 지배하고, 그 위에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그 완벽한 지배 아래에서, 오히려 더 짙은 외로움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녀는 상대를 지배하면 할수록, 진정한 교감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성은 더 높아지고, 그녀의 고독은 더 깊어질 뿐이었다.
옆방의 의식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는 양상이 달랐다. 처음부터 어떤 저항도, 어떤 혼란도 없었다. 오직 지안의 일방적인 명령과, 재혁의 순종적인 복종만이 존재했다.
지안은 재혁에게 온갖 굴욕적인 자세를 요구했고, 재혁은 기꺼이 그 모든 것을 수행했다. 그는 더 이상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그 굴욕 속에서 새로운 종류의 안정감과 쾌락을 느끼는 듯했다. 모든 판단과 선택의 의무를 포기하고,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노예의 편안함.
이번에 지안은 딜도나 다른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몸과, 자신의 말로만 재혁을 길들였다. 그녀는 재혁의 몸을 탐하면서, 동시에 그의 정신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넌 이제 내 거야. 네 몸도, 네 마음도, 전부 다 내 거라고. 알겠어?”
“네… 네, 지안 님…”
재혁은 이제 그녀를 ‘지안 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내가 허락할 때만 쾌락을 느낄 수 있고, 내가 명령할 때만 숨을 쉴 수 있어. 넌 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해.”
그녀의 말은 잔혹한 주문처럼 재혁의 영혼에 새겨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정신의 각인’이었다. 상대방의 자아를 완전히 파괴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 채워 넣는, 가장 궁극적인 형태의 지배.
나는 더 이상 이 의식을 엿듣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기묘한 평온함마저 느껴졌다. 나는 이제 이 모든 상황을 한 걸음 떨어져서, 분석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지안이라는 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벌이는 처절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재혁은 그 투쟁의 희생양이자, 동시에 그녀의 존재를 완성시켜주는 필수적인 파트너였다. 그들은 서로를 파괴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기묘한 공생 관계.
옆방의 소리가 절정으로 치달을 때, 나는 내 안에서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나는 무감각해져 있었다. 너무나도 강렬한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나머지, 내 감정의 회로가 타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제 그들의 행위에서 어떤 에로티시즘도, 어떤 비극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하나의 현상으로서, 하나의 케이스 스터디로서 그것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의식이 끝나고, 옆방에서는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눌지, 혹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한참 후, 지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밤은 만족스러웠어. 재혁 씨는 이제 내 완벽한 노예가 될 자격이 있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지안 님…”
재혁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감격한 듯 떨리고 있었다.
“앞으로 내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와야 해. 내가 뭘 원하든, 군소리 없이 복종하고. 알겠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완벽한 주종관계를 확인하는 계약서와도 같았다.
잠시 후, 재혁이 먼저 방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렌즈를 통해 복도를 내다보았다. 재혁의 뒷모습은 어딘가 초라해 보였지만, 동시에 이상한 평온함이 감돌았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주인을 섬기는 삶에서 안정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재혁이 사라지고 난 후, 나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그리고 옆방의 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지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두 사람의 정사가 남긴 흔적들로 어지러웠다. 흐트러진 침대 시트,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 그리고 공기 중에 감도는 짙은 체취. 지안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 상태였다. 그녀의 완벽한 몸을 다시 마주했지만, 내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다 봤어?”
지안이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다 들었어.”
내가 대답했다.
“어땠어? 내 완벽한 승리가.”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조적인 냉소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나를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내 앞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들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글쎄. 완벽한 승리라기보단, 처절한 자위처럼 보였는데.”
내 말에, 지안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분노와 슬픔, 그리고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닥쳐.”
“왜? 네가 보여주고 싶었던 거 아니야? 네가 얼마나 대단한 지배자인지. 근데 그거 알아? 진짜 강한 사람은 타인을 지배하려 하지 않아. 그냥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뿐이지. 넌 약해, 지안아. 그래서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만 네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거야.”
나는 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들은 내 진심이었다.
지안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방 안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담배 연기만이 우리 사이를 유령처럼 떠다녔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쭈그려 앉아,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제 그만해, 지안아. 이런다고 네 외로움이 채워지는 거 아니잖아.”
내 목소리는 나도 놀랄 만큼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향한 분노도, 경멸도, 욕망도 느끼지 않았다. 오직 깊은 연민과, 그녀를 이 지옥에서 꺼내주고 싶다는 강한 충동만이 남아 있었다.
지안의 눈에서, 마침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완벽한 갑옷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포식자도, 여신도, 교주도 아니었다. 그저 상처받고 길을 잃은, 한 명의 연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녀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내 셔츠를 적셨다. 나는 그녀를 안아주며 생각했다.
우리의 진짜 관계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배와 굴복, 유혹과 저항의 게임이 끝나고, 두 명의 상처 입은 영혼이 서로를 마주 보는, 진짜 사랑의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더 위험하고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시작일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의 눈물은 진실일까, 아니면 나를 완전히 함락시키기 위한 마지막 연기일까. 나는 그녀를 믿어야 할까, 아니면 경계해야 할까. 나는 그녀의 세계에서,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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