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조회 : 301 추천 : 0 글자수 : 5,342 자 2025-09-08
균열
‘난 네 진짜 얼굴이 보고 싶어, 지안아.’
내가 보낸 메시지는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나는 더 이상 그녀가 만들어 놓은 무대 위에서 그녀가 정해준 역할을 연기하는 관객으로 머물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나는 그녀의 가면 뒤에 숨겨진 진실을, 그녀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맨얼굴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그것이 그녀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나는 오만하게 믿고 있었다.
지안은 그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나를 자신의 일상 속으로 더욱 깊숙이 끌어들였다. 우리는 예전처럼 네버랜드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고, 평범한 연인들처럼 영화를 보고 거리를 걷기도 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내 앞에서 포식자의 가면을 쓰지 않았다. 때로는 장난기 많은 소녀처럼 웃었고, 때로는 세상사에 지친 스물셋의 청춘처럼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들이 좋았다. 그녀가 점점 더 평범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안도했다.
하지만 그 평온함 속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그녀는 결코 자신의 가장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특히 김선우 대표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그녀는 교묘하게 화제를 돌리거나 입을 닫아버렸다. 그는 여전히 우리 관계의 가장 민감한 뇌관이자, 금기였다.
나는 조급해졌다. 그녀는 내 앞에서 한없이 부드러워졌지만, 역설적으로 그녀의 진짜 세계는 더욱 견고하게 닫혀버린 듯했다. 나는 그녀가 나에게 의지하고,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를 바랐다. 내가 그녀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 욕심이 우리 관계에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균열이 폭발한 것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 우리는 내 자취방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우리는 평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릴 적 이야기, 첫사랑, 시시콜콜한 꿈들. 지안은 그날따라 유독 감상적이었다.
“가끔은… 그냥 다 버리고 떠나고 싶을 때가 있어.”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그냥 평범하게 살아보고 싶어. 아침에 일어나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저녁에는 작은 방에서 책을 읽고. 그런 삶.”
그녀의 목소리에는 짙은 피로감과 동경이 묻어 있었다. 나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가장 약한 순간, 그녀의 벽이 허물어진 바로 이 순간.
“그렇게 살아, 지안아. 내가 도와줄게. 더 이상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아도 돼. 김선우 그 사람한테서도 벗어나고, 그 지긋지긋한 게임도 그만둬. 내가… 내가 네 옆에 있어 줄게.”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진심을 다해 말했다. 하지만 내 말은 그녀가 기대했던 위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표정이 순간 차갑게 굳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쉽게 말해?”
그녀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네가 내 인생에 대해 뭘 알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가 뭘 겪었는지, 네가 뭘 아냐고! 김 대표님이 없었다면 난 진작에 길바닥에서 죽었을지도 몰라. 넌 그냥 안전한 세상에서, 편안하게 자란 온실 속 화초일 뿐이야. 그런 네가 감히 나를 동정하고, 내 인생을 평가해?”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에는 분노와 배신감이 가득했다. 나는 당황했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을 뿐인데, 왜 그녀는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것일까.
“지안아, 난 그런 뜻이 아니라…”
“닥쳐! 넌 날 이해 못 해.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잖아. 넌 그저 네가 상상하는 ‘불쌍한 지안이’를 구원해주고 싶은 네 영웅 심리에 취해 있을 뿐이야. 내가 네 장난감이냐? 네 구원 놀이에 필요한 소품이냐고!”
그녀의 절규는 비수처럼 내 가슴에 박혔다. 영웅 심리.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구원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그녀를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내 선의는 그녀에게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자 오만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난 네 동정 따위 필요 없어. 네가 없어도 난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 거야. 착각하지 마, 이민준.”
그녀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빗속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방 안에는 싸늘한 공기와, 우리가 마시다 만 술병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려 할수록, 오히려 그녀를 더 멀리 밀어내고 있었다. 우리의 관계에 생긴 균열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며칠 동안 지안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나는 사과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읽지 않았다. 나는 자책감과 후회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다. 그녀의 상처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늦은 밤, 내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민준 씨 맞으시죠? 저 박재혁입니다.]
재혁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술에 취한 듯 혀가 꼬여 있었고,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처럼 불안정했다.
“박재혁 씨? 어떻게 제 번호를…”
[지안이… 지안이 좀 어떻게 해주세요. 제발…!]
“지안 씨가 왜요? 무슨 일입니까?”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지안이가 지금 술에 완전히 취해서… 저한테 연락이 왔어요. 자기 좀 데리러 오라고. 그래서 갔더니, 상태가 너무 안 좋아요. 계속 울고, 소리 지르고…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발 와서 지안이 좀 데려가 주세요.]
그가 알려준 곳은 강남의 한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재혁이 지안을 위해 마련해 준 거처인 듯했다. 나는 옷을 챙겨 입고 미친 듯이 택시를 잡아탔다.
오피스텔에 도착하자, 재혁이 초췌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예전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불안과 공포에 질린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지안이는요?”
“안에… 침실에 있어요.”
나는 곧장 침실로 향했다. 침대 위에는 지안이 쓰러져 있었다. 방 안은 온통 술 냄새와 담배 연기로 자욱했고, 바닥에는 깨진 술병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지안은 얇은 슬립 차림으로, 이불을 웅크린 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화장이 뒤범벅되어 엉망이었다.
“지안아… 정신 좀 차려 봐.”
내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자,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나가… 나가! 너 같은 거 보고 싶지 않아! 다 나가!”
그녀는 베개를 집어 던지며 발악했다.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녀는 더욱 거칠게 저항했다.
“왜 나한테 이래… 왜 다들 나를 자기들 멋대로 판단하고, 동정하고, 지배하려고 해! 난 그냥… 난 그냥 나로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녀의 울부짖음은 내 심장을 후벼 팠다. 내가 그녀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었는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재혁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제가… 제가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했는데… 오히려 더 화를 내서… 저한테 나가라고 소리 지르고… 그래서 민준 씨한테 연락한 거예요. 지안이가 가끔 민준 씨 얘기를 했거든요. 유일하게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같다고…”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지안은 나를 믿고 있었다. 나에게 의지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 방식대로 그녀를 구원하려다 오히려 더 깊은 상처를 주고 만 것이다.
나는 재혁에게 잠시 나가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침대 옆에 앉아, 울부짖는 지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 후,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었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지안아.”
나는 어떤 변명도, 어떤 설득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네 마음도 모르고, 내 생각만 해서. 널 아프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정말 미안해.”
내 사과에, 지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흐느낄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곁에 앉아, 그녀의 등을 말없이 쓸어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나는 잠든 그녀를 침대에 바로 눕혀주고,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는 재혁이 초조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네. 잠들었어요.”
우리는 잠시 말없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둔 두 남자. 한 명은 그녀의 노예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그녀의 구원자가 되려다 실패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그녀에게서 상처를 받은 동병상련의 처지였다.
“민준 씨.”
재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안이… 잘 좀 부탁드립니다. 저 같은 놈은 이제 지안이 옆에 있을 자격도 없어요. 저는 그저 지안이가 부를 때 달려가서, 그 애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민준 씨는 다른 것 같아요. 지안이를… 진짜로 웃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민준 씨뿐인 것 같습니다.”
그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지안을 사랑하고 있었다. 비록 뒤틀리고 종속적인 형태일지라도, 그것은 분명 사랑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나에게 그녀를 부탁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과연 그녀를 웃게 해줄 수 있을까. 내가 그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그때, 지안의 휴대폰이 울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 액정에 뜬 이름은 ‘대표님’이었다. 김선우였다. 재혁은 그 이름을 보고, 질투와 체념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전화벨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집어 들어 통화 거부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전원을 꺼버렸다.
재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제부터 지안 씨 옆에는 아무도 없어요. 김선우도, 박재혁 씨도, 그리고… ‘구원자’ 행세를 하려던 나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안 씨한테 필요한 건 동정도, 지배도, 구원도 아니에요. 그냥… 혼자 설 수 있는 시간이에요.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 애가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멀리서 지켜봐 주는 것뿐입니다.”
내 말은 재혁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그날 밤, 나는 지안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녀가 잠에서 깨기 전에 조용히 그 집을 빠져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메시지도 남기지 않았다.
우리 관계의 균열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균열을 통해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상처투성이의 나약한 영혼들.
나는 이제 그녀를 구원하겠다는 오만한 생각을 버렸다. 대신, 그녀와 함께 걷기로 했다. 그녀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일어설 때까지, 그저 묵묵히 그녀의 곁에서, 같은 속도로 걸어가기로. 그것이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식이어야 했다. 우리의 진짜 이야기는,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폐허 위에서,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난 네 진짜 얼굴이 보고 싶어, 지안아.’
내가 보낸 메시지는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나는 더 이상 그녀가 만들어 놓은 무대 위에서 그녀가 정해준 역할을 연기하는 관객으로 머물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나는 그녀의 가면 뒤에 숨겨진 진실을, 그녀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맨얼굴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그것이 그녀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나는 오만하게 믿고 있었다.
지안은 그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나를 자신의 일상 속으로 더욱 깊숙이 끌어들였다. 우리는 예전처럼 네버랜드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고, 평범한 연인들처럼 영화를 보고 거리를 걷기도 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내 앞에서 포식자의 가면을 쓰지 않았다. 때로는 장난기 많은 소녀처럼 웃었고, 때로는 세상사에 지친 스물셋의 청춘처럼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들이 좋았다. 그녀가 점점 더 평범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안도했다.
하지만 그 평온함 속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그녀는 결코 자신의 가장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특히 김선우 대표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그녀는 교묘하게 화제를 돌리거나 입을 닫아버렸다. 그는 여전히 우리 관계의 가장 민감한 뇌관이자, 금기였다.
나는 조급해졌다. 그녀는 내 앞에서 한없이 부드러워졌지만, 역설적으로 그녀의 진짜 세계는 더욱 견고하게 닫혀버린 듯했다. 나는 그녀가 나에게 의지하고,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를 바랐다. 내가 그녀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 욕심이 우리 관계에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균열이 폭발한 것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 우리는 내 자취방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우리는 평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릴 적 이야기, 첫사랑, 시시콜콜한 꿈들. 지안은 그날따라 유독 감상적이었다.
“가끔은… 그냥 다 버리고 떠나고 싶을 때가 있어.”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그냥 평범하게 살아보고 싶어. 아침에 일어나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저녁에는 작은 방에서 책을 읽고. 그런 삶.”
그녀의 목소리에는 짙은 피로감과 동경이 묻어 있었다. 나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가장 약한 순간, 그녀의 벽이 허물어진 바로 이 순간.
“그렇게 살아, 지안아. 내가 도와줄게. 더 이상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아도 돼. 김선우 그 사람한테서도 벗어나고, 그 지긋지긋한 게임도 그만둬. 내가… 내가 네 옆에 있어 줄게.”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진심을 다해 말했다. 하지만 내 말은 그녀가 기대했던 위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표정이 순간 차갑게 굳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쉽게 말해?”
그녀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네가 내 인생에 대해 뭘 알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가 뭘 겪었는지, 네가 뭘 아냐고! 김 대표님이 없었다면 난 진작에 길바닥에서 죽었을지도 몰라. 넌 그냥 안전한 세상에서, 편안하게 자란 온실 속 화초일 뿐이야. 그런 네가 감히 나를 동정하고, 내 인생을 평가해?”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에는 분노와 배신감이 가득했다. 나는 당황했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을 뿐인데, 왜 그녀는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것일까.
“지안아, 난 그런 뜻이 아니라…”
“닥쳐! 넌 날 이해 못 해.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잖아. 넌 그저 네가 상상하는 ‘불쌍한 지안이’를 구원해주고 싶은 네 영웅 심리에 취해 있을 뿐이야. 내가 네 장난감이냐? 네 구원 놀이에 필요한 소품이냐고!”
그녀의 절규는 비수처럼 내 가슴에 박혔다. 영웅 심리.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구원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그녀를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내 선의는 그녀에게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자 오만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난 네 동정 따위 필요 없어. 네가 없어도 난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 거야. 착각하지 마, 이민준.”
그녀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빗속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방 안에는 싸늘한 공기와, 우리가 마시다 만 술병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려 할수록, 오히려 그녀를 더 멀리 밀어내고 있었다. 우리의 관계에 생긴 균열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며칠 동안 지안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나는 사과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읽지 않았다. 나는 자책감과 후회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다. 그녀의 상처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늦은 밤, 내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민준 씨 맞으시죠? 저 박재혁입니다.]
재혁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술에 취한 듯 혀가 꼬여 있었고,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처럼 불안정했다.
“박재혁 씨? 어떻게 제 번호를…”
[지안이… 지안이 좀 어떻게 해주세요. 제발…!]
“지안 씨가 왜요? 무슨 일입니까?”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지안이가 지금 술에 완전히 취해서… 저한테 연락이 왔어요. 자기 좀 데리러 오라고. 그래서 갔더니, 상태가 너무 안 좋아요. 계속 울고, 소리 지르고…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발 와서 지안이 좀 데려가 주세요.]
그가 알려준 곳은 강남의 한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재혁이 지안을 위해 마련해 준 거처인 듯했다. 나는 옷을 챙겨 입고 미친 듯이 택시를 잡아탔다.
오피스텔에 도착하자, 재혁이 초췌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예전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불안과 공포에 질린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지안이는요?”
“안에… 침실에 있어요.”
나는 곧장 침실로 향했다. 침대 위에는 지안이 쓰러져 있었다. 방 안은 온통 술 냄새와 담배 연기로 자욱했고, 바닥에는 깨진 술병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지안은 얇은 슬립 차림으로, 이불을 웅크린 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화장이 뒤범벅되어 엉망이었다.
“지안아… 정신 좀 차려 봐.”
내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자,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나가… 나가! 너 같은 거 보고 싶지 않아! 다 나가!”
그녀는 베개를 집어 던지며 발악했다.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녀는 더욱 거칠게 저항했다.
“왜 나한테 이래… 왜 다들 나를 자기들 멋대로 판단하고, 동정하고, 지배하려고 해! 난 그냥… 난 그냥 나로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녀의 울부짖음은 내 심장을 후벼 팠다. 내가 그녀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었는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재혁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제가… 제가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했는데… 오히려 더 화를 내서… 저한테 나가라고 소리 지르고… 그래서 민준 씨한테 연락한 거예요. 지안이가 가끔 민준 씨 얘기를 했거든요. 유일하게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같다고…”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지안은 나를 믿고 있었다. 나에게 의지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 방식대로 그녀를 구원하려다 오히려 더 깊은 상처를 주고 만 것이다.
나는 재혁에게 잠시 나가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침대 옆에 앉아, 울부짖는 지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 후,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었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지안아.”
나는 어떤 변명도, 어떤 설득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네 마음도 모르고, 내 생각만 해서. 널 아프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정말 미안해.”
내 사과에, 지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흐느낄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곁에 앉아, 그녀의 등을 말없이 쓸어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나는 잠든 그녀를 침대에 바로 눕혀주고,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는 재혁이 초조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네. 잠들었어요.”
우리는 잠시 말없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둔 두 남자. 한 명은 그녀의 노예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그녀의 구원자가 되려다 실패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그녀에게서 상처를 받은 동병상련의 처지였다.
“민준 씨.”
재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안이… 잘 좀 부탁드립니다. 저 같은 놈은 이제 지안이 옆에 있을 자격도 없어요. 저는 그저 지안이가 부를 때 달려가서, 그 애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민준 씨는 다른 것 같아요. 지안이를… 진짜로 웃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민준 씨뿐인 것 같습니다.”
그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지안을 사랑하고 있었다. 비록 뒤틀리고 종속적인 형태일지라도, 그것은 분명 사랑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나에게 그녀를 부탁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과연 그녀를 웃게 해줄 수 있을까. 내가 그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그때, 지안의 휴대폰이 울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 액정에 뜬 이름은 ‘대표님’이었다. 김선우였다. 재혁은 그 이름을 보고, 질투와 체념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전화벨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집어 들어 통화 거부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전원을 꺼버렸다.
재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제부터 지안 씨 옆에는 아무도 없어요. 김선우도, 박재혁 씨도, 그리고… ‘구원자’ 행세를 하려던 나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안 씨한테 필요한 건 동정도, 지배도, 구원도 아니에요. 그냥… 혼자 설 수 있는 시간이에요.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 애가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멀리서 지켜봐 주는 것뿐입니다.”
내 말은 재혁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그날 밤, 나는 지안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녀가 잠에서 깨기 전에 조용히 그 집을 빠져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메시지도 남기지 않았다.
우리 관계의 균열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균열을 통해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상처투성이의 나약한 영혼들.
나는 이제 그녀를 구원하겠다는 오만한 생각을 버렸다. 대신, 그녀와 함께 걷기로 했다. 그녀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일어설 때까지, 그저 묵묵히 그녀의 곁에서, 같은 속도로 걸어가기로. 그것이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식이어야 했다. 우리의 진짜 이야기는,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폐허 위에서,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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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끼 (The L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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