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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222 추천 : 0 글자수 : 4,304 자 2025-09-15
심판의 시간
바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김선우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네버랜드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빗소리를 배경으로 흐르던 재즈 음악도, 사람들의 나지막한 웃음소리도, 잔 부딪치는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마치 연극의 막이 바뀌는 암전처럼, 모든 것이 정지하고 오직 그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듯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굳어 있었고, 잘 다려진 실크 셔츠는 그의 거친 숨소리에 따라 미세하게 들썩였다. 그는 사냥터에 나타난 늙고 노련한 사자였고, 그의 눈은 오직 한 사람, 지안만을 향해 있었다.
“여기 있었군.”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갑게 바닥을 갈았다. 그가 내뿜는 위압감에 바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그는 우리 테이블로 망설임 없이 걸어왔다. 그의 시선은 내 손을 잡고 있는 지안의 손에, 그리고 그 옆에 앉은 나에게 차례로 머물렀다. 그의 눈빛은 경멸과 분노, 그리고 깊은 배신감으로 이글거렸다.
지안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나를 보며 피워 올렸던 작은 용기의 불씨는, 그의 등장과 함께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듯했다.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과거의 망령이, 그녀의 창조주이자 지배자가, 그녀를 다시 자신의 어두운 성으로 끌고 가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나는 그녀의 손을 더욱 굳게 잡았다. 그녀에게 나의 온기와, ‘내가 곁에 있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내 행동을 본 김선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지안아.”
김선우는 나를 완전히 무시한 채, 오직 지안에게만 말을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를 억누른 채, 뒤틀린 연민을 가장하고 있었다.
“내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이런 풋내기한테 홀려서 네 인생을 망치고 있을 줄이야.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너를 지금의 ‘지안’으로 만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쏟아부었는지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지안의 죄책감을 자극하고, 그녀를 다시 무력한 과거의 소녀로 되돌리려는 교묘한 가스라이팅이었다. 그는 지안의 가장 약한 부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안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앞에서 약자였다.
“일어나. 나랑 가자.”
김선우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려 했다. 그 순간, 내가 그의 손을 막아섰다.
“그 손 놓으시죠.”
내 목소리는 나도 놀랄 만큼 단호하고 차가웠다. 김선우의 눈이 비로소 나를 향했다. 그의 눈에는 살기마저 서려 있었다.
“네가 뭔데 나서. 이건 너 같은 애송이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비켜.”
“싫습니다. 지안 씨는 어디에도 가지 않아요. 당신한테서는 더더욱.”
우리 사이에는 스파크가 튀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바 안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 가소로운 놈.”
김선우가 코웃음을 쳤다.
“네가 지안이에 대해 뭘 알아? 내가 이 아이를 길바닥에서 주워다, 어떻게 지금의 보석으로 만들었는지 알아? 넌 그냥 이 아이의 반짝이는 겉모습에 홀린 하룻강아지에 불과해. 이 아이의 어둠을, 그 상처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지안의 과거를 무기처럼 사용했다.
“네,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나는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대표님이야말로 지안 씨를 아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있는 거 아닙니까? 아름다운 새를 새장 안에 가둬두고, 자신만이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하려는 욕심.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입니다. 당신은 지안 씨의 상처를 보듬어준 게 아니라, 그 상처를 빌미로 평생 당신의 곁에 묶어두려 한 것뿐이에요.”
내 말은 그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내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만하세요.”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지안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김선우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았다. 슬프지만, 단호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대표님 말이 맞아요. 대표님은 저를 길바닥에서 구해주셨고, 저를 지금의 ‘지안’으로 만들어주셨어요. 그 은혜,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 제 인생을 살고 싶어요. 대표님이 만들어준 ‘작품’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이수연’으로요.”
이수연. 나는 처음 듣는 그 이름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것이 그녀의 진짜 이름이었다. 화려한 ‘지안’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그녀의 본명. 그녀는 지금 자신의 진짜 이름을 부름으로써, 과거와의 결별을,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고 있었다.
김선우의 얼굴은 충격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던 작품이, 자신의 손을 벗어나 독립을 선언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수연아…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놈이 너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 차려. 네가 나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 험한 세상에서, 누가 너를 지켜주지?”
그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회유하려 했다.
“혼자서 해볼 거예요. 넘어져도 보고, 깨져도 보면서. 이제 더 이상 대표님의 새장 안에서, 대표님이 주는 모이만 받아먹고 살지는 않을래요. 저, 날고 싶어요.”
지안, 아니 수연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이제 떨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람… 민준이는 저를 동정하거나 지배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저라는 사람 자체를 봐주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제가 날 수 있도록, 옆에서 바람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이라고요.”
그녀의 말에,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는 내 진심을 알아주었다. 그녀는 스스로 일어서기로 결심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다.
김선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 대신, 깊은 허무와 체념이 서려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패배자처럼 보였다. 수십 년간 공들여 쌓아 올린 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한 사람의 얼굴.
“……후회하게 될 거다.”
그는 마지막으로 저주와도 같은 말을 남기고, 힘없이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은 한없이 초라하고 외로워 보였다. 나는 그 역시 이 게임의 또 다른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뒤틀린 방식으로 사랑하고, 결국 그 사랑에 의해 파멸한.
김선우가 사라지자, 네버랜드에는 다시 희미한 음악 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는 듯했다. 수연이는 나를 보며,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그 미소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밝고 아름다웠다.
“가자, 민준아.”
그녀가 내 손을 이끌었다.
“어디로?”
“어디든. 우리가 가고 싶은 곳으로.”
우리는 손을 잡고 네버랜드를 빠져나왔다.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상쾌했다. 우리는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그저 밤거리를 걸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내 눈에는 오직 그녀의 뒷모습만이 보였다. 가벼운 발걸음,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새로운 삶을 향한 설렘이 담긴 어깨.
한참을 걷다가, 우리는 한강 변에 멈춰 섰다. 강 건너편의 도시 불빛들이 검은 강물 위로 부서지며 아름다운 야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제 뭘 해야 할지, 사실은 잘 모르겠어.”
수연이가 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막막하고. 대표님이 주셨던 집도, 차도, 카드도 다 돌려드려야겠지. 다시 예전처럼 아르바이트하면서, 작은 월세방에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
그녀의 목소리에는 막막함이 묻어 있었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괜찮아. 내가 옆에 있잖아.”
내가 그녀를 뒤에서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녀의 몸은 가늘었지만, 따뜻했다.
“같이 아르바이트하고, 같이 작은 방에서 살아도 좋아. 너랑 함께라면, 어디든 천국일 거야.”
내 말에, 그녀가 몸을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큰 눈망울에 도시의 불빛이 담겨, 별처럼 반짝였다.
“정말?”
“응. 정말.”
그녀는 내 목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우리의 입술이 처음으로 포개졌다. 그것은 이전의 어떤 키스와도 달랐다. 욕망이나 유혹이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따뜻한 입맞춤이었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서로의 영혼을 확인하는, 성스러운 의식과도 같은 키스.
우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심판의 시간은 끝났다. 그리고 새로운 삶이, 폐허 위에 피어난 작은 빛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앞으로의 길은 험난할 것이다. 과거의 그림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현실의 벽은 높고 차가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우리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그녀의, 그리고 그녀는 나의, 유일한 구원이었다. 우리의 진짜 사랑 이야기는, 이제 막 첫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바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김선우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네버랜드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빗소리를 배경으로 흐르던 재즈 음악도, 사람들의 나지막한 웃음소리도, 잔 부딪치는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마치 연극의 막이 바뀌는 암전처럼, 모든 것이 정지하고 오직 그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듯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굳어 있었고, 잘 다려진 실크 셔츠는 그의 거친 숨소리에 따라 미세하게 들썩였다. 그는 사냥터에 나타난 늙고 노련한 사자였고, 그의 눈은 오직 한 사람, 지안만을 향해 있었다.
“여기 있었군.”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갑게 바닥을 갈았다. 그가 내뿜는 위압감에 바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그는 우리 테이블로 망설임 없이 걸어왔다. 그의 시선은 내 손을 잡고 있는 지안의 손에, 그리고 그 옆에 앉은 나에게 차례로 머물렀다. 그의 눈빛은 경멸과 분노, 그리고 깊은 배신감으로 이글거렸다.
지안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나를 보며 피워 올렸던 작은 용기의 불씨는, 그의 등장과 함께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듯했다.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과거의 망령이, 그녀의 창조주이자 지배자가, 그녀를 다시 자신의 어두운 성으로 끌고 가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나는 그녀의 손을 더욱 굳게 잡았다. 그녀에게 나의 온기와, ‘내가 곁에 있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내 행동을 본 김선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지안아.”
김선우는 나를 완전히 무시한 채, 오직 지안에게만 말을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를 억누른 채, 뒤틀린 연민을 가장하고 있었다.
“내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이런 풋내기한테 홀려서 네 인생을 망치고 있을 줄이야.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너를 지금의 ‘지안’으로 만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쏟아부었는지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지안의 죄책감을 자극하고, 그녀를 다시 무력한 과거의 소녀로 되돌리려는 교묘한 가스라이팅이었다. 그는 지안의 가장 약한 부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안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앞에서 약자였다.
“일어나. 나랑 가자.”
김선우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려 했다. 그 순간, 내가 그의 손을 막아섰다.
“그 손 놓으시죠.”
내 목소리는 나도 놀랄 만큼 단호하고 차가웠다. 김선우의 눈이 비로소 나를 향했다. 그의 눈에는 살기마저 서려 있었다.
“네가 뭔데 나서. 이건 너 같은 애송이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비켜.”
“싫습니다. 지안 씨는 어디에도 가지 않아요. 당신한테서는 더더욱.”
우리 사이에는 스파크가 튀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바 안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 가소로운 놈.”
김선우가 코웃음을 쳤다.
“네가 지안이에 대해 뭘 알아? 내가 이 아이를 길바닥에서 주워다, 어떻게 지금의 보석으로 만들었는지 알아? 넌 그냥 이 아이의 반짝이는 겉모습에 홀린 하룻강아지에 불과해. 이 아이의 어둠을, 그 상처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지안의 과거를 무기처럼 사용했다.
“네,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나는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대표님이야말로 지안 씨를 아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있는 거 아닙니까? 아름다운 새를 새장 안에 가둬두고, 자신만이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하려는 욕심.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입니다. 당신은 지안 씨의 상처를 보듬어준 게 아니라, 그 상처를 빌미로 평생 당신의 곁에 묶어두려 한 것뿐이에요.”
내 말은 그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내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만하세요.”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지안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김선우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았다. 슬프지만, 단호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대표님 말이 맞아요. 대표님은 저를 길바닥에서 구해주셨고, 저를 지금의 ‘지안’으로 만들어주셨어요. 그 은혜,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 제 인생을 살고 싶어요. 대표님이 만들어준 ‘작품’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이수연’으로요.”
이수연. 나는 처음 듣는 그 이름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것이 그녀의 진짜 이름이었다. 화려한 ‘지안’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그녀의 본명. 그녀는 지금 자신의 진짜 이름을 부름으로써, 과거와의 결별을,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고 있었다.
김선우의 얼굴은 충격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던 작품이, 자신의 손을 벗어나 독립을 선언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수연아…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놈이 너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 차려. 네가 나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 험한 세상에서, 누가 너를 지켜주지?”
그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회유하려 했다.
“혼자서 해볼 거예요. 넘어져도 보고, 깨져도 보면서. 이제 더 이상 대표님의 새장 안에서, 대표님이 주는 모이만 받아먹고 살지는 않을래요. 저, 날고 싶어요.”
지안, 아니 수연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이제 떨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람… 민준이는 저를 동정하거나 지배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저라는 사람 자체를 봐주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제가 날 수 있도록, 옆에서 바람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이라고요.”
그녀의 말에,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는 내 진심을 알아주었다. 그녀는 스스로 일어서기로 결심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다.
김선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 대신, 깊은 허무와 체념이 서려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패배자처럼 보였다. 수십 년간 공들여 쌓아 올린 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한 사람의 얼굴.
“……후회하게 될 거다.”
그는 마지막으로 저주와도 같은 말을 남기고, 힘없이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은 한없이 초라하고 외로워 보였다. 나는 그 역시 이 게임의 또 다른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뒤틀린 방식으로 사랑하고, 결국 그 사랑에 의해 파멸한.
김선우가 사라지자, 네버랜드에는 다시 희미한 음악 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는 듯했다. 수연이는 나를 보며,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그 미소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밝고 아름다웠다.
“가자, 민준아.”
그녀가 내 손을 이끌었다.
“어디로?”
“어디든. 우리가 가고 싶은 곳으로.”
우리는 손을 잡고 네버랜드를 빠져나왔다.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상쾌했다. 우리는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그저 밤거리를 걸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내 눈에는 오직 그녀의 뒷모습만이 보였다. 가벼운 발걸음,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새로운 삶을 향한 설렘이 담긴 어깨.
한참을 걷다가, 우리는 한강 변에 멈춰 섰다. 강 건너편의 도시 불빛들이 검은 강물 위로 부서지며 아름다운 야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제 뭘 해야 할지, 사실은 잘 모르겠어.”
수연이가 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막막하고. 대표님이 주셨던 집도, 차도, 카드도 다 돌려드려야겠지. 다시 예전처럼 아르바이트하면서, 작은 월세방에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
그녀의 목소리에는 막막함이 묻어 있었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괜찮아. 내가 옆에 있잖아.”
내가 그녀를 뒤에서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녀의 몸은 가늘었지만, 따뜻했다.
“같이 아르바이트하고, 같이 작은 방에서 살아도 좋아. 너랑 함께라면, 어디든 천국일 거야.”
내 말에, 그녀가 몸을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큰 눈망울에 도시의 불빛이 담겨, 별처럼 반짝였다.
“정말?”
“응. 정말.”
그녀는 내 목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우리의 입술이 처음으로 포개졌다. 그것은 이전의 어떤 키스와도 달랐다. 욕망이나 유혹이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따뜻한 입맞춤이었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서로의 영혼을 확인하는, 성스러운 의식과도 같은 키스.
우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심판의 시간은 끝났다. 그리고 새로운 삶이, 폐허 위에 피어난 작은 빛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앞으로의 길은 험난할 것이다. 과거의 그림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현실의 벽은 높고 차가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우리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그녀의, 그리고 그녀는 나의, 유일한 구원이었다. 우리의 진짜 사랑 이야기는, 이제 막 첫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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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끼 (The L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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